월호

고희 맞은 韓美동맹은 대한민국 ‘신의 한 수’ [+영상]

[백승주 칼럼]

  •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前 국회의원

    입력2023-09-26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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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이 주도하고, 박정희가 활용하고

    • 동맹 해체? “北·中 이로운 일”

    • 향후 70년 이어갈 생존·지속가능 번영 열쇠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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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맹도 모든 유기체와 같이 생로병사가 있다. 미국 국방연구원 고문을 지낸 동맹이론 전문가 스티븐 월트(Stephen M. Walt)는 동맹이 국가 간 모든 관계처럼 형성·유지·강화·소멸된다고 진단한 바 있다. 고희를 맞은 한미동맹도 예외가 아니다. 결과적으론 유지됐지만 파국 위기도 있었다.

    필자는 7월 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된 학술행사 ‘한미동맹 70주년 그리고 미래: 동맹의 북핵대응과 자유통일전략’에 토론자로 초대받았다. 한 중년 여성이 필자에게 “한미동맹을 오늘 시점에서 어떻게 총평하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학계 인물은 아닌 듯 보였고, 자녀가 있다면 혼사를 준비할 나이쯤 된 듯했다. 그래서 필자는 결혼이라는 인생사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3년 한국과 미국이 결혼을 결심했다. 누가 봐도 양가 각각의 사회적 위치를 비교하면 결혼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세계 최고 신흥 명문 재벌가 ‘USA(United States of America)’ 가문과 당시로선 초라하기 그지없던 ‘ROK(Republic of Korea)’ 가문의 결합이었다. 결혼생활 상당 기간을 ROK 가문은 USA 가문 덕으로 살아야 했다. 1950년대 미국은 매년 약 3억 달러를 한국에 국방비로 지원했다. 한국 국방 예산의 90% 수준이었다. 신세를 많이 지다 보니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있었지만 잘 참으며 70년 결혼생활을 이끌어왔고, 이제 삶의 수준이 비슷한 양가가 됐다.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엔 ‘한국 기업이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액수가 1000억 달러에 이르며, 한국은 미국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투자하는 나라’라고 쓰여 있다. 상호방위협정 체결 70주년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박수 받을 만한 결혼이다. 특히 한국엔 신의 한 수가 됐다.”

    객석에서 동의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박수야말로 보통 한국인이 70년 한미동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됐다.

    동맹은 왜 강해지거나 약해지는가

    한미동맹을 깊이 살펴보기 위해 앞서 언급한 월트의 동맹 이론을 상술하고자 한다. 월트는 동맹이 약화·소멸되는 배경을 몇 가지 제시했다. 첫째, 대외적 위협 인식 변화다. 동맹국 가운데 어느 일방이 대외 위협에 대한 인식 변화가 생기는 경우다. 1996년 해체된 북·러동맹이 대표 사례다. 러시아가 한국을 더는 위협세력으로 인식하지 않자 동맹 폐기 규정에 의해 파기됐다. 둘째, 동맹국 간 군사적 신뢰 상실이다. 셋째, 동맹국 가운데 일방이 자국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안보 태세를 다른 수단을 통해 얻은 경우다. 넷째, 동맹국에 대한 정치적 신뢰 상실이다. 다섯째, 국내 정치적 요인이다. 국내 정치세력이 새 동맹을 추구하거나 체제 자체가 변동을 겪는 경우를 뜻한다.



    월트는 이와 반대로 동맹이 강화·유지되는 배경도 5가지 제시했다. 첫째, 동맹국 가운데 강대한 국가가 힘의 논리를 활용해 동맹을 유지하는 경우(Hegemonic Leadership)다. 이 경우엔 강대국이 여러 가지 정치 자원을 이용해 상대국의 동맹 이탈을 막는다. 둘째, 동맹 자체에 대한 신뢰 유지(Preserving Credibility)다. 셋째, 동맹국 지도자에 대한 국내 정치적 위상을 강화해 동맹을 유지하는 방법(Domestic Politics and Elite Manipulation)이다. 이스라엘이 세계 유대인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 지도자를 지원함으로써 미국-이스라엘 간 동맹을 유지·강화하는 것이 좋은 사례다. 넷째, 동맹의 제도화(The Impact of Institutionalization)다.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공동 군사·안보 조직을 제도화해 동맹 이탈을 어렵게 하는 동시에 동맹이 행정·기술적으로 지속 발전하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다섯째, 동맹 국가 간 이데올로기적 연대를 강화하는 방법(Ideology Solidarity and Security Communities)이다. 체제 간 정치·사회적 유대를 강화해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다. 월트의 이론을 기준으로 70년간 이어진 한미동맹의 변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동맹 체결 이끈 이승만 투쟁

    동맹은 대개 강대국 주도하에 체결된다. 미국의 주도 아래 결성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나 옛 소련이 중심이 돼 구성한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대표 사례다. 그런데 한미동맹은 약소국 한국이, 그리고 이 약소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강대국 미국의 반대를 뚫고 맺은 동맹이다. 가히 이승만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얻어낸 결과다.

    1951년 5월 미국 트루먼 정부가 ‘NSC 48/5(미국의 아시아정책 목표와 정책 및 행동지침)’을 통해 일본,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과는 개별적으로 양자 간 동맹조약을 체결할 방침을 세웠지만 6·25전쟁 당사국인 한국은 배제됐다.

    이승만은 1952년 초부터 휴전협정 체결에 반대했지만 사실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휴전협정에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것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동맹 체결을 얻어내길 꾀했다. 한미동맹을 이뤄내야 한국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해리 트루먼에게 서신을 보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만이 한국인들에게 휴전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만약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 통일에 나서겠다”고 엄포를 놨지만 트루먼은 동맹 체결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1953년 출범한 아이젠하워 정부를 상대로도 끈질기게 한미동맹 체결을 요구했다. 온건한 외교적 요구를 할 뿐 아니라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휴전 협상 진행을 막기 위한 강수도 뒀다. 결국 이승만의 실력 행사에 충격을 받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한국의 휴전협정 동의를 조건으로 한미동맹을 수용하게 된다.

    같은 해 6월 미국의 특사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의사를 이승만에게 전달한다.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8월 8일 가조인, 10월 1일 조인, 1954년 1월 15일 한국 국회 인준, 1월 26일 미국 상원 인준, 1954년 7월 한미 정상회담을 거쳐 11월 18일 정식으로 발효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 12월 25일 발행된 기념우표. [동아DB]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 12월 25일 발행된 기념우표. [동아DB]

    이승만은 로버트슨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물에 빠진 사람에게 내민 손과 같다. 부디 우리가 물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라고 말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타국 차관보에게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과 같다”고 말하며 삼켜야 했던 눈물을 알아야 동맹 결성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약소국 지도자가 강대국을 협박해 얻어낸 한미동맹은 월트의 이론으로 규정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것이다.

    박정희, 동맹 활용해 韓 미래 플랫폼 구축

    박정희 정부는 1964년 9월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네 차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박정희 정부는 파병을 결정하면서 “공산 침략을 경험한 국가로서 아시아 지역 안보와 자유를 지킨다”고 했다. 월트의 이론에 따르면 이는 한국과 미국이 이데올로기 연대를 강화해 동맹을 굳건히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965년 10월 22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월남으로 파병되는 맹호부대가 행진하고 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월남 파병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안보 지원을 얻어냈다. [동아DB]

    1965년 10월 22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월남으로 파병되는 맹호부대가 행진하고 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월남 파병을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안보 지원을 얻어냈다. [동아DB]

    박정희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이를 국가 발전 플랫폼으로 구축·활용했다.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을 결정해 놓고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 외교협상을 통해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플랫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국회 차원 파병 반대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이를 이용해 미국과 외교적 협상에서 실익을 얻어낸 것이다. ‘브라운 각서’가 플랫폼의 표상이다.

    브라운 각서란 1966년 3월 7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주한 미국대사 윈스럽 브라운이 각국을 대표해 체결한 각서다. 베트남 파병의 조건으로 박정희 정부가 제시한 한국 안보·경제 발전에 대한 16개 항이 쓰여 있다. 박정희 정부가 제시한 조건은 크게 △(미국의) 한국군 현대화 지원 △북한의 (한국) 침공 시 미국의 자동개입 조항을 반영한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 △한국에 베트남에서 사용되는 군수품에 대한 공급권리 부여 △한국의 베트남 시장 진출 보장 등이다. 이 가운데 미국의 자동개입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조항은 반영됐다. 특히 베트남전에서 사용되는 군수품 공급에 대한 권리는 이후 한국 경제 발전의 실질적 플랫폼이 됐다.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베트남 주둔 한국군에 소요되는 보급물자 용역 및 장비를 실행할 수 있는 한도까지 한국에서 구매·발주해 베트남 주둔 미군과 (남)베트남군에 공급한다.

    ② 미국 국제개발처(AID)가 베트남에서 실행하는 사업에 이용할 목적으로 구매하는 물자를 최대한 한국에서 구매한다.

    ③ 베트남에서 한국인 민간 기술자 고용을 포함해 기타 용역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확대한다.

    이 세 가지 사항을 중심으로 한 브라운 각서의 내용은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경공업국가로 전환하는 데 징검다리가 됐다. 한국이 해외로 인력·용역을 수출하는 통로이자 기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정리하면 박정희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맹을 발전시키는 대의명분으로 활용함과 동시에 한미방위조약을 통해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동맹 해체는 한미 모두 손해”

    1990년대 초 구소련이 해체되고 자리 잡은 미국 중심 단극적 군사 질서는 한미동맹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수차례에 걸쳐 ‘동아시아 전략구상(East Asian Strategy Report)’을 발표한다. 동아시아 전략구상의 핵심은 아시아 지역에 전진 배치된 미군을 감축하고, 양자 동맹관계를 발전시키면서 다자적 안보협력을 추진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 역시 북방정책을 통해 중국·러시아 등과 수교하면서 한미동맹에 의존한 안보 태세에서 주변국과 새로운 신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안보정책을 조정한다. 동맹 결성의 일차적 요인인 대외 인식 변화가 한미 모두에 발생한 것이다.

    탈(脫)냉전기 상황에 한미동맹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 미국국방연구원(IDA)과 미국전략연구소(INSS)가 정책연구그룹(Policy Research Group)을 만들어 네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나리오1 동맹 해체(Alliace Termination)는 양국 모두에 큰 손실

    노무현 정부 시기 한미동맹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있긴 했지만 한국인은 대체로 한미동맹을 강력히 지지해 왔다. 한국인은 한미동맹의 군사적 가치보다 외국인 투자 확대 등 경제적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미국 역시 주한미군이 동아시아에서 지위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기고 있다. 주한미군은 동북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유용하다. 한국인이 전반적으로 미군 주둔에 우호적 태도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동맹 해체는 단기적으로 북한에 유리할 것이고, 장기적으로 중국에 전략적 이익이 될 것이다. 현재, 통일 이후 한반도에서 중국의 이익은 미국의 그것보다 더 적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동맹 해체는 한국도 손해, 미국도 손해(lose-lose)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나리오2 주둔군 없는 동맹(Alliance without Presence)

    소규모 연락부대를 제외한 미군 대부분이 철수한 형태의 동맹이다. 실질적 합동훈련을 할 수 없기에 연합작전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임박한 군사적 침략 위협이 없는 국가에 만족스러울 동맹이다. 한반도는 미군 주둔이 억제를 통한 힘의 균형에 필수 요소다. 미군이 철수하면 지역에 안보 공백이 발생할 것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효과적으로 전개되기 전 북한의 침략이 진행될 수 있다. 피해야 할 동맹 상태다.

    #시나리오3 동맹 최적화(Alliance Modification)

    동맹을 현실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용산 미군기지 이전, 주한미군 규모 축소 등을 말한다. 이미 안보정책 구상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이는 다소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미동맹이 제대로 작동되게 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시나리오4 동맹 변환(Alliance Transformation)

    한국인의 열망을 반영해 미국과 한국의 역할을 변환하는 시나리오다. 미국은 주도적 역할에서 보조적 역할이 된다. 한국군은 북한 재래식 전력의 위협에 충분히 대처하도록 하고, 한미동맹 전력은 한반도의 억지력 및 동북아에서 안정성을 강화하는 동맹관계로 변환한다. 전시작전권 전환 이후 한국 합동참모본부와 주한미군사령부 사이에 새로운 협조기구(한미군사협조본부)를 만들어 연합사령부를 대체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8월 28일 강원 양양군 해상침투전술훈련장에서 육군특수전사령부, 주한미특수작전사령부 장병들이 연합 해상침투 훈련을 마치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뉴스1]

    8월 28일 강원 양양군 해상침투전술훈련장에서 육군특수전사령부, 주한미특수작전사령부 장병들이 연합 해상침투 훈련을 마치고 기념 촬영하고 있다. [뉴스1]

    韓美동맹 = 생존 환경

    탈냉전 이후 일부 시민단체가 한미동맹 폐기를 추구했지만 공식적으로 한미동맹 폐기를 추진한 정부는 없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가 한미동맹 폐기 가능성을 거론한 것 자체는 눈여겨봐야 한다. 두 번째 시나리오 ‘주둔군 없는 동맹’은 1970년대 중반 카터 행정부가 추진했지만 미국 군부의 반대로 중단된 정책이다.

    2000년대 이후 한미 양국은 동맹 최적화 및 변환에 무게중심을 두고 동맹을 발전시켜 왔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먼저 ‘주둔군 없는 동맹’ 환경을 만들고 궁극적으로 동맹 폐기를 조장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둘 것으로 사료된다.

    4월 한미 정상은 회담을 통해 ‘워싱턴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통해 ‘핵 기반의 새로운 한미동맹 시대’를 열었다고 자평했다. 지난해 북한은 이미 실질적 핵무기 체계를 완성해 놓고 필요할 때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글로벌 차원에선 서로 총을 들진 않았지만 미국과 중국이 온 힘을 기울여 외교·경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유럽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가치가 급등하고 있다. 러시아와 북한은 1996년 군사동맹 해체 이후 새로운 동맹으로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다.

    4월 2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후 악수하고 있다. [뉴스1]

    4월 26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후 악수하고 있다. [뉴스1]

    9월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뉴스1]

    9월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뉴스1]

    이러한 상황에서 한미동맹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발전시켜야 할까. 우선 필요할 때 작동하는 동맹이어야 한다. 필요할 때 작동하지 않는 동맹은 이미 동맹이 아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3조는 일방이 군사적으로 침략을 받을 때 각자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고 돼 있다.

    미국 현행법상 지체 없이 동맹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대통령의 결심이 중요하다. 대통령은 의회 동의 없이 3개월간 미국 군사력 일체를 대외정책에 사용할 수 있다. 사실상 전쟁을 할 수 있는 셈이다.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인식이 없다면 동맹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동맹 작동을 위해선 양국 지도자의 정치·군사적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에 손을 대는 순간 북한 체제의 심장을 멎게 할 수 있는 수단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미연합훈련 시 이러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전략무기자산 전개 연습이 필요하다.

    또 미국의 전략 변화 방침에 닿아 있어야 한다. 2000년대에 진입한 이후 미국의 동맹정책은 동맹그물망(Net of Alliance)으로 압축할 수 있다. 양자동맹관계를 종횡으로 그물처럼 엮어서 적은 비용으로 동맹 전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미국이 종용하는 한미일 안보협력도 이러한 정책의 핵심 요소다. 한국 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 등으로 안보적 지평을 넓히는 것도 궁극적으론 제대로 작동하는 한미동맹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후 70년 뒤 이 땅에 살고 있을 후손들은 한미동맹을 어떻게 평가할까. 아마 양국의 국가 역량과 국민 삶의 질이 나아졌는지 혹은 후퇴했는지를 따질 것이다. 향후 70년 동안에도 한미동맹은 강화, 약화라는 양 지점을 사이에 두고 오가며 꿈틀거릴 것이다. 한미동맹에 대해선 경제적 요소를 고려하기보다 ‘생존 환경’과 직결된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는 한국의 지속 가능한 번영이 달린 문제다. 70년이 지난 후에도 한미동맹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후세를 기대한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前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前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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