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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사상가 이건희 별세 3年, 김인 前 삼성SDS 사장 증언 ㊤ [+영상]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㊴] “내게 스승이자 멘토였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09-30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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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는 ‘종합 예술가’, 역할은 ‘원대한 비전 제시’

    • 연설 원고 직접 고치고 또 고쳐 경영 철학 담아

    • 1993년 ‘신경영 선언’은 ‘피를 토하는 절규’

    • “‘복합화’ 제대로 하면 삼성정신 만들어진다”

    • “무한히 뻗어간 ‘복합화’ 상상력”

    [+영상] 김인 전 삼성SDS 사장 "이건희 회장은 내게 스승이자 멘토였다"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리더는 종합예술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섯 가지 덕목을 제시했다. 알아야 하고(知), 행동해야 하며(行), 시킬 줄 알아야 하고(用), 가르칠 수 있어야 하며(訓), 사람과 일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評)는 것이다. 이른바 ‘지행용훈평’이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리더는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은 뭘까.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5%의 사람은 리더가 하는 말만 들어도 믿는다. 그러나 95%의 사람은 실제 행동을 봐야 믿는다. 리더가 솔선수범해야 조직원이 따르고 그 조직에 생기가 돈다.”



    김인 전 삼성SDS 사장. [지호영 기자]

    김인 전 삼성SDS 사장. [지호영 기자]

    비전과 통찰의 리더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 포천, 타임 등 세계 유수 언론은 삼성의 성공 비결을 다룰 때 하나같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을 꼽았다.

    선대 이병철 회장이 관리 중심의 경영 시스템을 구축해 운영했다면 이건희 회장은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인재와 기술을 중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계 1등’ ‘위기’ ‘기회 선점’ ‘핵심 인재’ ‘기술 중시’ ‘소프트 경쟁력’ 등이 그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던 단어다.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건희 경영학, Samsung Way(이하 ‘삼성 웨이’)라는 책에서 이건희 리더십을 한마디로 ‘비전과 통찰의 리더십’이라고 정의했다. 구성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되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위기감을 끊임없이 공유하면서 업의 본질과 시대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들이 주목한 건 ‘원대한 꿈’이었다. ‘삼성 웨이’에 나오는 대목이다.

    “삼성의 변신에서 이 회장이 담당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원대한 비전 제시였다. 그는 한국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중 최초로 ‘세계 초일류 기업’ ‘조 단위 이익’ 등 매우 높은 비전과 도전적인 목표를 제시한 인물이다. 취임 이후 계속해서 ‘No.1 또는 Only 1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조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다. 이 회장은 반도체, 휴대폰, TV, 노트북 컴퓨터, 프린터 등 삼성이 진출해 있는 거의 모든 전자 관련 제품 영역에서 세계 1등을 하도록 끈질기게 요구했다.

    사업을 갓 시작해 실력이 턱없이 부족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휴대폰 사업을 시작할 때는 모토로라, 노키아, 애플 등 강자들이 계속 나타났지만 삼성의 목표는 일관되게 세계 1등이었다.’

    이건희 회장 비전 리더십의 또 다른 측면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며 끊임없는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다시 ‘삼성 웨이’를 인용한다.

    “이 회장은 삼성이 창업 이후 최대 이익을 내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는 날에도 ‘5년 후, 10년 후에 삼성이 무엇으로 먹고살지를 생각만 하면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5년 후, 10년 후 삼성의 1등 제품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삼성그룹이 창사 이래 최대 이익을 내던 2006년에도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잘나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변화와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저자들의 말대로 이건희 회장은 늘 삼성이 서 있는 자리를 객관적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2007년 1월 신년사에서는 “삼성은 오랫동안 선진 기업들을 뒤쫓아 왔지만 지금은 쫓기는 입장에 서 있다. 앞선 자를 뒤따르던 쉬운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두에서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월급쟁이 입장에서 이런 리더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이 회장과 함께 일했던 전직 CEO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회장이 늘 위기, 위기라고 말했기 때문에 일할 때는 아, 우리가 1등이구나, 세계를 재패했구나 같은 안도감을 느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반도체 전쟁을 이끈 총사령관 격이던 이윤우 전 부회장을 만났을 때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회장께서 취임한 이듬해인 1988년 1M(1메가) D램값이 폭등하면서 그전까지 쌓여 있던 누적 적자를 모두 해소하고도 수천억 원 이익을 냈는데 전혀 만족하지 않으셨다고요.

    “만족하지 않았다기보다 더 앞을 내다보셨죠. 1994년도에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1988년과 1989년에 반도체에서 몇천억 원 이익이 나서 다들 기뻐할 때 당신께서는 ‘앞으로 1조 원 이익을 내라’ 고 했더니 임원들이 다들 놀라서 ‘1조 원은 매출 내기도 어렵습니다’ 했다는 거죠.

    1988년은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감을 뚫고 처음으로 흑자를 낸 해였는데 회장님은 오히려 실현 불가능한 목표치를 제시한 겁니다.

    그런데 불과 6년 만인 1994년에 조 단위 이익을 냅니다. 회장님은 그러면서 계속 공격 경영을 밀어붙이시죠. (수첩을 꺼내 들며) 제 기록에 따르면 1994년 4월 29일 새로운 반도체 단지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천안이나 대전에 200만 평 정도를 확보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회장님은 이렇게 사업이 잘될 때도 계속 다음 단계, 다음 단계를 제시하고 주문하셨어요.”(필자 책 ‘이건희 반도체 전쟁’ 중에서)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 본사 정문에 출근하기 위한 사원들의 차량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뉴시스]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 본사 정문에 출근하기 위한 사원들의 차량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뉴시스]

    李 회장이 직접 말한 리더의 덕목

    혁신이라는 게 말이 쉽지 직원들에게 강요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과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리더십 키워드를 앞서 말한 ‘지행용훈평’ 다섯 가지로 개념화한 것도 리더로서의 덕목을 곰곰이 생각한 그만의 독특한 상상력에서 기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리더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솔선수범”이라고 했는데 생전의 그의 글에도 이런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리더의 덕목’이란 제목의 글에서 언급한 ‘지행용훈평’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이렇다.

    “지도자의 덕목을 논할 때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기준을 세웠다. 나 역시 경영 현장에서 30년을 보내는 동안 리더는 종합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행용훈평 다섯 가지를 덕목으로 세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는 데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남을 움직여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현장 곳곳을 뛰어다니며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게 해야 방향을 잡고 목표를 설정할 능력이 생기며 제대로 시키고, 가르치고, 평가도 할 수 있다. 리더가 책상에 앉아 도장만 찍어서는 조직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근래 우리나라는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면에서 어려운 형편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는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 솔선수범하는 사람이 절실히 요구된다.

    역사를 보면 난국에 처할수록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빛난다. 삼국지 후반부에 위나라 장군 등애(鄧艾)가 촉나라를 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촉을 공격하려면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검각(劍閣)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검각이란 말 그대로 칼끝 같은 봉우리와 바닥이 안 보이는 골짜기로 이루어진 험한 계곡이다. 이곳을 넘어가야 하는 병사들은 기가 막힌 나머지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한숨만 쉬고 있었다.

    이때 등애가 앞으로 나서서 담요 한 장을 몸에 두르고 ‘내가 먼저 가겠다’는 외침과 함께 절벽 아래로 굴렀다. 대장이 이러니 부하들도 다 같이 담요를 몸에 두르고 일제히 굴러내려 기어코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검각을 건넜고, 결국 촉을 멸망시켰다.

    등애라고 낭떠러지가 무섭지 않았을까? 리더의 몸은 그 자신만의 몸이 아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등애는 자신이 주저하면 전체가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앞장서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러면서 거울론을 펼친다.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의 거울이며, 그 조직의 정신이요 기백이다. 지금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행동하기보다 주위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주위에서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지도자는 대개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 이런 사람이 조직의 목표를 도외시하고 시류에 편승하여 좋은 평판만 받으려고 한다면 그 조직은 방향성이 없는, 죽은 조직이나 다름없다.”

    “지도자는 조직의 기백이요 정신이며 거울”이라는 이 회장의 말은 전 사회적으로 리더의 부재가 느껴지는 시대여서 그런지 요즘에도 절실히 다가온다.

    훌륭한 기업인은 제자를 길러낸다

    지속 가능한 기업, 혁신하는 기업은 기업가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훌륭한 기업가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와 제자를 많이 길러낸다고 한다. 그 사람들의 헌신에 의해서 조직 내 혁신이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회장을 추억하는 전직 삼성 CEO들을 만날 때마다 기자는 마치 ‘이건희 제자’들을 만난 듯 그들이 진심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건희 회장 별세 3주기를 맞아 신경영 선언 때 그를 가까이에서 본 김인 전 사장과 나눈 대화에서도 그것이 읽혀졌다.

    김 전 사장은 1974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창업 회장인 호암 이병철 회장 시절 비서실 인사팀에서 근무하다 프랑크푸르트 법인 주재원으로 일한다.

    김인 전 삼성SDS 사장. [지호영 기자]

    김인 전 삼성SDS 사장. [지호영 기자]

    이건희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한 뒤인 1989년 귀국해 비서실 종합연수원 교육총괄, 비서실 인사팀장을 거쳐 삼성SDI 독일법인장 영업본부장, 서울신라호텔 총지배인, 삼성SDS 사장, 삼성라이온즈 사장을 지냈다. 삼성라이온즈 사장 시절 정규 시리즈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합친 통합 우승을 4년 연속 이끌어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가 삼성에 입사했을 당시 삼성의 주력 사업은 무역업이었다.

    “전자산업이 막 시작되는 단계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무역입국을 내걸던 시절이었고 삼성물산이 해외 수출을 담당하고 있었죠. 해외 주재원이 최고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저 역시 일찌감치 무역 전사가 되겠다고 생각해 대학 다닐 때부터 여러 자격증을 취득하며 준비를 많이 했지요.

    물산에 입사한 뒤 맡은 일은 섬유 수출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산업에서 섬유가 최고이던 시절이었지요. 입사 3년째 되던 해 주재원 선발 시험에 합격해 스톡홀름 주재원으로 내정돼 있었는데 갑자기 비서실 인사팀 발령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멘붕’이 왔지요.”

    속된 말로 물을 먹은 건가요.

    “웬걸요, 당시는 해외 출장 자체가 큰 특혜로 여겨지던 시절이어서 주재원도 선망하는 일이었지만 그룹 비서실에 가는 건 누가 뭐래도 ‘발탁’이었습니다. 정식으로 승진 코스를 밟는다는 인식이 많았죠. 하지만 저는 해외 수출을 통해 무역 전사가 되고 싶다는 게 오랜 꿈이어서 갑자기 인생행로가 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죠.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비서실 근무는 호암의 일처리 방식을 직접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1977년도로 기억합니다. 당시 비서실 인사팀은 인사와 교육 업무를 다 맡고 있었는데 송용로 사장이라는 분이 인사팀 차석, 팀장은 이해규 사장님으로 재무팀장을 겸하고 있었지요.

    어느 날 저녁 6시쯤 퇴근 무렵인데 송 사장님이 제게 오시더니 “삼성그룹이 창업한 이후 임원으로 있다가 떠나신 퇴임 임원들 현황을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합니다.

    요즘은 MZ세대 직원들이 지시를 받으면 “왜요?” 묻는다고 하던데(웃음) 그때만 해도 감히 되물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죠. 서둘러 명단을 만들려고 창고에 갔더니 일일이 손으로 쓴 인사 기록 카드 묶음이 있었어요. 한 300페이지 정도 됐습니다. 삼성전자는 창업한 게 1969년이었으니 신생 회사여서 퇴임 임원이 없었고, 모두 제일제당·제일모직·삼성물산에서 임원을 지낸 분들의 명단이었죠.

    저희들은 명단에 적힌 댁 주소로 일일이 전화를 해서 주소를 확인하고 근황을 알아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한곳에서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이사들을 많이 다녀 주소 확인이 어려웠어요. 돌아가신 분도 계셨고 말이죠.

    얼추 만들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회장님이 지시를 하신 목적이 뭘까, 퇴직하신 분들을 다시 영입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일까, 이름순서도 가나다순으로 할지, 퇴임 순서로 할지, 회사 순서로 할지, 연령 순서로 할지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우선은 회사별로 만드는 게 제일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퇴임 때 직위가 뭐였고, 무슨 일을 맡고 있었고,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계신지 회사별로 죽 적어 넣은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은 빼고 아프신 분들은 요양 중이라는 표시도 넣고 말이죠.

    ‘이쯤 되면 완벽하다’고 생각해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잘못됐다’며 수정 지시가 떨어졌어요. 막막했던 것이 뭐가 잘못됐는지 구체적인 지적이 없었어요. 주소가 잘못됐다는 건지, 직함이 잘못됐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엑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부 다 수작업인데 말이죠.

    다시 한분 한분 확인 작업을 했는데 대부분 이상이 없었어요. 그러다 문득 ‘보고서가 다시 내려오는 데 걸린 2주 동안 뭔가 신상의 변화가 있었던 분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 이름 옆에 ‘몇월 며칠 작고’라고 써서 다시 올렸더니 아무 말이 없으셨어요.

    그리고 며칠 뒤 30여 명 이름에 동그라미가 쳐져서 내려왔어요. 이 의미는 도대체 뭘까, 얼마 지나 알게 됐는데 곧 있을 창업 회장님 생신에 초청할 퇴임 임원들이었지요.”

    아무리 오너 지시라고 해도 너무 설명이 없었네요.

    “저는 그런 일을 통해서 ‘아, 이분이 우리에게 일을 가르치려 하시는구나’하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기자는 그의 답을 들으며 ‘역시 출세(?)하는 직장인들은 상사의 지시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저희는 이전까지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던 퇴임 임원들 인사 카드를 정리할 수 있었고 현직뿐 아니라 퇴직하신 분들도 항상 데이터를 업데이트하며 챙겨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됐으니까요.

    또 회장님 지시는 다 사내에 소문이 나지 않습니까. 나가신 분들 명단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아, 역시 우리 회장님은 퇴직한 분들까지 챙기는구나’라는 소문이 돌 터이고, 그러면 조직 내 로열티(충성도)가 강해질 테니까요. 물론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지시하신 건 아니겠지만 말이죠.”

    김 전 사장 말이 이어졌다.

    “호암 회장님은 보고서를 굉장히 세심하게 읽으셨어요. 저희들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치밀하게 일할 수밖에 없었죠. 힘은 들었지만 일하는 방법이라든지, 생각하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배웠습니다.

    저 같은 새카만 신출내기 직원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거짓 보고를 한다거나 자료가 부실하면 안 된다’는 걸 뇌에 각인한 귀한 기회였죠. 이후 회사 생활에서 보고서를 만들거나 검토할 때 몇 번이나 다시 읽는 습관을 갖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삼성에 대해 ‘돌다리를 두드리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나서야 건너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호암의 치밀하고 빈틈없는 일처리 방식이 사내 문화로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는 건데 이걸 직접 체험한 일화였습니다.”

    경기 수원시 삼성전자 사업장 내부에는 삼성의 첫 가전공장인 별동공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일반 사무실로 쓰고 있다. [허문명 기자]

    경기 수원시 삼성전자 사업장 내부에는 삼성의 첫 가전공장인 별동공장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은 일반 사무실로 쓰고 있다. [허문명 기자]

    일찍부터 불었던 ‘신경영’ 바람

    또 다른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인사팀이다 보니 직원 평가가 주업(主業) 아닙니까, 지금은 대부분 대기업에서 일반화된 ‘다면평가’라는 걸 아마 호암이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억이 있습니다.

    1979년 어느 날 호암께서 비서실장(소병해)을 통해 ‘임원 평가가 지금까지는 윗사람의 일방적인 평가였다. 그룹이 점점 커지고 있으니 더 제대로 평가할 때가 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면평가’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상사는 물론 부하 직원들 의견까지 들어보라는 거였죠. 그룹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어서 워낙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저희는 본격적으로 승진 대상 임원은 물론 현직 임원들에 대한 다면평가를 시작했습니다. 현 상사는 물론 4, 5년 전 까지 거슬러 올라가 과거 같이 일했던 사람들 의견을 들었습니다. 물론 매우 은밀하게 말이죠.

    전체 평가 대상자가 300명 가까이 됐는데 한 사람당 최소 네 명 정도는 들어야 해서 결과적으로 무려 1200명 심층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 소병해 비서실장, 송용로 인사팀장, 저 세 사람이 꼬박 두 달여 가까이 한 것 같아요. 삼성은 그때부터 임원 인사를 위한 다양한 평가가 기록돼 축적됐습니다.”

    호암 회장 계실 때 이건희 회장을 본 적은 없습니까.

    “멀리서나마 뵌 적은 있습니다. 1978년 8월에 삼성물산 부회장 겸 해외사업추진위원장을 거쳐 6개월 후인 1979년 2월에 그룹 부회장이 되시는데 저희 같은 말단 사원이 느끼기에도 비서실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으려 애쓰셨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기획실이라는 게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기존 비서실 안에는 인사팀·비서팀·감사팀·재무팀이 있었는데, 기획실은 조사·기획·신규 사업 쪽 일을 맡았지요. 부회장님과 직접적으로 일을 하고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눈 곳이었습니다.

    저는 사원 입장이라 윗분들 역할을 일일이 알지는 못했으나 분위기로 추정해 보면 소 비서실장이 주로 관리쪽, 즉 그룹의 살림 쪽을 맡아 움직였고 이건희 부회장께서는 기획실을 중심으로 ‘글로벌 삼성으로 가야 한다’는 드라이브를 많이 걸려고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해외 인재 영입이었습니다. 초대 기획실장이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세계은행에서 일한 박윤식 박사였고, 이 밖에도 장유상 박사, 안영옥 박사라는 분도 기획실에 오셨죠. 장 박사는 나중에 카이스트 교수로 가시고, 안 박사는 그때부터 정보통신(IT), 전산 작업을 맡았어요. 1993년 신경영의 단초가 되는 일을 그때부터 하신 거라고 저는 봅니다.”

    미국에서 인재를 영입한 것은 이건희 부회장이 직접 한 건가요.

    “누구를 통해서 영입하신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존 비서실 내에도 기획팀 조사팀이 다 있었는데 어느 시점인가 기획실을 별도로 떼어 이원화했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저항이 없었나요.

    “기획실장을 비서실장 밑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 오갔으니 저항도 있었다고 봅니다. 결국 수평 조직으로 갔습니다.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니냐’ 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관리 체질이 워낙 공고해 변화가 쉽지는 않았죠.

    당시만 해도 삼성물산이 겨우 3억 달러 수출탑을 받을 때였으니 정말 작은 규모였죠. 국내 시장도 아직 1등이 아닌데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에 안주하면 안 된다’ 하시는 말씀이 와닿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기존 체제에 익숙했던 부장 이상 임원들은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웠을 겁니다. 회장님은 ‘직원들이 말귀를 다 못 알아들어 안타깝다’는 말씀도 하셨죠. 하지만 젊은 사원들은 ‘구구절절 맞는 말씀하신다’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젊은 직원들은 왜 변화의 필요를 느꼈을까요.

    “외부 환경이 변하고 있었으니까요. 작은 회사이던 대우가 갑자기 뜨고, 현대가 중화학공업에서 무섭게 부상하면서 특히 해외 사업에서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었어요. 전자는 금성사(현 LG전자)가 1등이었고요.

    삼성도 물산이 수출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그룹 전체가 제조업 중심으로 모직·제당·합섬 이런 쪽이었고, 중화학 쪽이나 전자는 굉장히 열악하고 작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삼성은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점에 이건희 부회장님이 분위기를 바꾸는, 촉매라고 하면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변화의 물꼬를 크게 트는 전환점을 만들어주셨던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물론 팀장이나 실장한테 주로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에 사원인 저는 그냥 분위기로 느끼고 있었지만 말이죠.”

    작은 일을 잘해야 큰일도 성공한다

    비서실 인사팀에서 2년 3개월을 일한 김 전 사장은 다시 삼성물산으로 가서 의류 수출 일을 하다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해외주재원 발령을 받는다.

    “그 당시 삼성은 5월과 11월 1년에 두 번씩 자기 관찰표라는 걸 적어냈습니다. 지금 부서가 적성에 맞는지, 맞지 않다면 이유는 뭔지, 옮기고 싶은 부서가 있다면 어디인지를 적어내는 거죠. 저는 두 번 다 옮기고 싶다고 적었습니다. 인사팀 안에서는 야단을 맞았지만 말이죠. 그러다 제 상사였던 송세창 비서실장이 삼성물산 사장으로 옮기면서 섬유사업본부장 추천으로 과장으로 승진해 의류수출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98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주재원으로 발령받게 되지요.”

    그곳에서 그는 이건희 회장을 직접 만났다고 한다. 그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87년 말 회장 취임하시고 이듬해 1988년 6월 18일부터 7월 12일까지 유럽 출장을 오셨어요. 그때 잠시 프랑크푸르트에 들르셨습니다. 공항에서 깜짝 놀란 게 사원급 젊은 수행비서 한 사람만 데리고 오신 거예요. 저는 법인장 바로 다음인 차석 신분으로 법인장과 함께 회장님을 모시고 다녔는데 정말 소탈하셨고 권위적인 요소라고는 전혀 없었어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전해주시죠.

    “서울에서 전경련 하계 세미나(7월 23일) 연설이 예정돼 있었나 봐요. 비서실 기획팀장을 통해 사전 원고가 팩스로 왔습니다. 이후 수정본이 오고 가고 하는데 그 수발을 제가 했습니다.”

    그때 김 전 사장은 이건희 회장의 꼼꼼한 업무 스타일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원고가 한 7~8번 왔다 갔다 하는데 이렇게 디테일하신 분인가 깜짝 놀랐습니다. 고치고, 또 고치고, 요 부분은 뒤로 빼라, 요 부분은 앞으로 올려라 등등 문장과 문단 순서까지 세세하게 지시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리고’ 같은 접속사도 지웠다가 옮기고 정말 그 꼼꼼함에 두 손 다 들었습니다(웃음).

    그로부터 5개월 뒤인 11월 다시 프랑크푸르트에 오셨을 때에는 이듬해 신년사 원고 수발이 있었어요. 그때도 기획팀장이 보내온 원고를 읽고, 또 읽고 하시면서 고치고 지우고 보태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전까지만 해도 회장님 연설문이라는 게 형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근데 실제로 회장님이 고치고 또 고치는 걸 보면서 얼마나 메시지에 철학과 혼을 담으려 하시는지 실감했습니다.

    이후 저는 매년 회장님 신년사를 노트에 적어놓고 읽어보고 또 읽어보곤 했습니다. 남의 말이 아니라 정말 직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고 단어 하나하나에 영혼이 스며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김 전 사장에게 각인된 또 다른 일화는 ‘약속’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 프랑크푸르트에 오셨을 때 고객사와 저녁 약속이 있었어요. 6시 반 약속이었는데 6시쯤 호텔에서 출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충분히 여유 있게 가려면 좀 더 일찍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살짝 있었는데 법인장이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웠던지 여하튼 저녁 6시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5분인가 10분 정도 늦게 도착한 거예요. 그날 아주 야단이 났습니다. 미팅이 끝난 뒤 ‘어떻게 고객을 기다리게 만드느냐. 시간이 얼마 걸리니 언제쯤 출발해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 것 아니냐’며 법인장이 아주 혼쭐이 났습니다.

    저희는 ‘아무리 고객사를 만난다고 해도 회장님이 5분, 10분 정도 늦는 건 있을 수 있다’고 봤는데 말이죠. 그날 늦은 것도 한 7분쯤 됐을 겁니다. 하여튼 그것 때문에 굉장히 야단을 맞으셨습니다.”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였나요.

    “점잖게 타이르는 스타일이셨죠. 어쨌든 회장님처럼 크고 높으신(?) 분들은 작은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배웠습니다. 회장님도 저렇게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우리도 그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시간 약속이든, 다른 약속이든 무슨 일이든 작은 일부터 정성이 들어가야 큰일을 잘하는 것이라는 걸 절감했지요.”

    그는 이어 “회장께서 무슨 일이든 철저하게, 깊이 연구하는 모습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질문을 해도 워낙 깊이 있게 들어가시기 때문에 허투루 그냥 답변하면 택도 없었어요. ‘Why를 5번 이상 해야 된다’는 말씀도 많이 하셨는데 실제로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거래선인 철강회사 크루프(Krupp·1999년에 경쟁사인 티센 사와 합병해 티센크루프 사가 됨) 창업자가 만든 박물관에 모시고 갔었습니다. 회사 역사는 물론 창업자가 썼던 의자, 책상까지 그대로 갖다 놓아 집무실을 꾸며놓았는데 얼마나 깊이 디테일하고 꼼꼼하게 물으시는지 안내하던 사람이 아주 진땀을 흘렸습니다.

    그날 저녁 호텔에서 해외 법인장 회의가 있었습니다. 법인장들이 얼마나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회장님 질문에 답들을 다 못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부분까지 파고드시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죠.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제게는 큰 수업이었습니다. 워낙 꼼꼼하게 물으시니 회장님 오신다고 하면 뭐 하나를 준비하고 공부해도 더 깊이 파고들고 그럴수록 더 많이 배우고 그렇게 됐습니다.

    앞서 겪은 호암 회장님 때도 그랬지만 이건희 회장님으로부터 소위 말하는 경영이란 것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경영의 깊이나 폭도 배웠고 지식의 수준도 많이 넓어지고 또 깊어졌습니다. ‘신의 한 수’라고 할까, 이런 걸 배웠다고 느낄 때가 많았어요.”

    원점에서 시작하니 모든 게 달라졌다

    프랑크푸르트에 7년을 계시지요?

    “보통은 임기가 3년인데 좀 오래 있었습니다.”

    그는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뜻밖에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귀국 한 달여 전에 삼성물산 이필곤 사장님이 프랑크푸르트에 오신 어느 날, 호텔에 내려드리고 돌아서려는데 ‘잠깐 좀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셔서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앞으로 러시아 시장이 굉장히 커질 테니까 물산 기획실로 와서 러시아, 동유럽 시장 쪽을 좀 맡아줘야겠다’고 하셨어요.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외교를 활발하게 펼칠 때였거든요.

    저는 ‘과분한 제안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한국에 들어와 기획실로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출근 3일 뒤인가 갑자기 비서실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인사팀 차석이던 조영철 선배가 ‘귀국했다고 들었다, 좀 다른 일을 해줘야 되겠다’ 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었죠.

    “제2연수원을 짓는 데 TF팀장을 맡으라는 겁니다. 이건희 회장님이 취임하시고 처음으로 짓는 그룹 시설인데 ‘해외 경험이 많으니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혁신적인 건물을 짓고 이참에 교육총괄까지 맡으라’는 거였습니다.

    삼성에는 호암 회장 때 지은 제1연수원이 하나 있었는데 이건희 회장님 취임 후 모든 게 변화하는 상황이니 제2연수원을 지으면서 건물도 교육 내용도 모두 바꾸라는 거였죠. 회장님 취임하시고 처음 짓는 그룹 시설이라는 게 저한테는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정말 제대로 잘 지어봐야겠다는 다짐이 들었죠.”

    그는 연수원 이름 짓는 일부터 고민이었다고 한다.

    “공모는 하지 않았고, 여러 사람 의견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기업 이념이 호암이 만드신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니까 ‘합리추구관’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님이 늘 ‘앞선 생각’ ‘10년 후 20년 후를 내다보는 생각’을 강조하셨으니까 ‘창조’라는 단어를 넣자는 의견들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원(院)’을 붙이느냐, ‘관(館)’을 붙이느냐는 것도 애를 먹었어요. ‘원’에 비해 관은 조금 작아 보이잖아요. 급이 낮아지는 느낌도 있고 말이죠.

    결국 ‘창조관’으로 결정됐어요. 마침 인력개발원이라는 조직도 그때 만들어졌는데 ‘원’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제가 설득했죠. 1연수원 이름도 호암관으로 바꾸고요. 이건희 회장님도 호가 있었다면 호를 썼을 겁니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제2창업 정신을 건물 설계와 교육 내용에 담는 게 중요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는 사내 교육이라고 하면 군대식 교육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창의성을 독려하기보다 정신 무장을 강조하다 보니 아침에 집단적으로 함께 일어나 체조하고 저녁에 같은 시간에 취침하는 그런 꽉 짜인 틀 속에서 움직이는 군대식 교육이죠. 다들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고요.

    전 유럽에서 7년 생활하면서 우리 사회가 너무 획일적이라는 걸 많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틀에 박힌 상상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걸 원점에서 다시 생각했습니다. 그게 회장님의 뜻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으니 정말 신이 났지요.”

    그는 우선 숙소 설계부터 다시 했다고 한다. 흔히 건물을 짓는다고 하면 건물 자체에 주목했을 텐데 교육받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니 모든 게 다시 보였다고 한다.

    “1연수원이었던 호암관 방들은 8인1실, 4인1실, 2인1실이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애초에 창조관도 이런 식으로 돼 있었어요. 심지어 2층 침대 방도 있고요. 독일에서는 남자 둘이 같은 방에서 자는 걸 이상하게 여겨요(웃음). 한국에서 직원들이 출장 오면 무조건 호텔 1인1실에 재웠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모두 1인1실로 가야 한다고 했지요. 방이라는 공간은 저녁 시간에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TV·노트북도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절반만 반영이 됐습니다.”

    어떻게요?

    “전부 2인1실로만 가되 화장실과 세면실은 분리한 겁니다. 두 사람이 한방을 쓰는데 한 공간에 화장실 세면실이 같이 있으면 한 사람이 쓰는 동안 다른 사람이 못 쓰잖아요. 1인1실을 양보하되 화장실만이라도 분리하는 것으로 간 거죠. 이 역시 기존 설계를 다 바꾸는 것이라 비용이 많이 들어 반대가 많았습니다.

    식당도 마찬가지였죠. 당시만 해도 교육은 ‘훈련’이라는 측면에서 극기, 자기희생 이런 걸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음식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음식은 당연히 좋아야 하고 식당 공간도 넓고 쾌적해야 된다’고 해서 관철했습니다. ‘연수원을 짓겠다는 거냐, 호텔을 짓겠다는 거냐’ 다소 비아냥거리는 소리도 들었지만 밀어붙였습니다.”

    당시 그의 내면에서 힘을 주는 동력은 이건희 회장이 추구하는 변화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었다고 한다.

    “저는 회장님께서 부회장 시절부터 ‘변화’와 ‘글로벌’ 이야기를 많이 하신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앞선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 아닙니까.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밑바닥에는 ‘회장님이 나를 지지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짓는 연수원 TF팀장을 독일에서 7년 살다 온 저한테 맡긴 것 자체가 그런 혁신을 하라는 주문 아니겠는가 하는 믿음 말이죠.”

    회장께서 직접 지시한 건 없었나요.

    “다 맡겨주셨습니다. 과감하게 고급화를 하려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일체 말씀이 없으셨어요. 정말 소신껏 일할 수 있었습니다.”

    제2창업 정신으로 모든 걸 다 바꿔라

    김 전 사장은 1991년 연수원 건립을 마치고 이듬해 다시 비서실 인사팀 임원으로 발령받아 일하게 되는데 제2창업 분위기로 들썩들썩했다고 한다.

    “당시 인사팀장이 조영철 선배였는데 제2창업 분위기를 어떻게 현장에서 구현해 나갈 것이냐 고민도 이야기도 많이 나눴지요. 그때 만든 것이 참 많아요. 선대 회장 시대를 정리하고 새 회장을 중심으로 새 시대를 열어 나가기 위해서는 경영철학, 경영이념이 뒷받침돼야 한다, 제2창업이 선언된 이상 거기에 걸맞은 경영 이념, 삼성인의 정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휴렛팩커드(HP)나 IBM의 성공 사례도 많이 공부하는 등 분위기를 잡아나갔습니다.

    우선 경영 이념 문구부터 바꿨습니다. 호암 창업 회장이 만든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는 창업 이념이라고 하고, 이건희 회장 때에는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사회에 공헌한다’로 바꿔 풀어 쓰기로 했습니다.

    사가(社歌)도 바꿨습니다. 이전에 불렀던 ‘삼성찬가’라는 제목이 올드(old)한 이미지가 있어서 ‘삼성인의 노래’로 바꾸고 가사도 응모했습니다. 호텔신라 제주 직원 응모작이 당선됐는데 가사를 조금 다듬어 KBS교향악단에서 일한 분에게 작곡을 의뢰해 만들었지요.”

    이후 1993년 신경영 선언이 나오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럼요. 전 임원들에게 ‘당장 프랑크푸르트로 오라’고 하시는데 그때는 임원들 자리 뜨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때였습니다. 게다가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것만도 큰일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라니…. 비행기표 끊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현장에서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잠도 안 주무시고 갖고 있는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저런 방대한 말씀을 하실까 그 열정에, 지혜에, 설득력에 놀라움의 연속이었죠. 대부분 다 처음 들어보는 내용들이잖아요.”

    신경영 선언 현장이 켐핀스키 호텔이었는데 프랑크푸르트에 오래 근무했으니 그곳을 잘 알겠네요. 왜 하필 거기였나요.

    “유럽 중에서도 독일을 좋아하셨어요. 거래선도 많았고 기술 선진국이었잖아요.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으셨고요. 앞으로 대한민국은 기술로 승부를 내야 한다고 그때부터 강조하셨어요. 독일, 일본이 당시 기술 선진국이었으니까 프랑크푸르트와 오사카에서 신경영 선언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죠.

    켐핀스키 호텔은 포시즌처럼 고급 호텔 체인인데 유럽에 한 150여 곳이 있을 겁니다. 정식 명칭은 ‘켐핀스키 그라벤브루흐(Kempinski Hotel Gravenbruch Frankfurt)’예요. 그라벤브루흐는 지명인데 프랑크푸르트 살짝 외곽입니다. 분당이나 일산 정도 되는 거리죠. 호텔 뒤로 숲이 좍 우거져 있는 아주 고급스럽고 운치가 있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죠. 도심에 유명 호텔도 많았는데 회장님이 이곳을 참 좋아하셨어요.”

    신경영 선언 때 비서실에서 어떤 일을 하신 건가요.

    “비서실 각 팀에서 차출된 정예 인력들로 구성된 TF팀이 만들어졌습니다. 임원들을 독일로 보내는 실무를 포함해서 회장님 말씀이 담긴 녹화 테이프가 오면 편집해서 계열사에 배포하는 ‘신경영 선언 알리기’ 역할을 한 거죠.

    전부 손으로 쓰인 회장님 말씀이 정리 안 된 채로 그대로 팩스로 오면 서울에서 정리했습니다. 지금처럼 온라인이 아니니 모든 게 다 오프라인에서 움직여야 하잖아요. 그날그날 강의가 녹화 테이프에도 모두 담겨 왔는데 밖으로 공개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지 않겠습니까? 따로 편집이 필요했는데 작업이 쉽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별도로 ‘신경영팀’이 만들어져 거기서 했습니다.

    독일이 낮 12시면 서울은 저녁 8시입니다. 회장님께서 하루 종일 강의가 끝나면 저녁 6시나 7시쯤이 돼요. 서울은 새벽 2시나 3시가 되는 거죠. 모든 걸 다 일일이 손으로 쓰던 시절이니 자료가 오면 아침마다 그걸 요약해 다시 만들어 관계사에 뿌리고 사내 아침 방송 통해서 내보내고 또 시간을 정해서 각 사별로 녹화 테이프를 경청하는 시간도 가졌어요.

    선언 내용이 임팩트가 워낙 크다 보니 조직도 술렁술렁했고, MBC 방송에까지 나가니 외부에서도 난리가 나고 정말 정신없이 바빴죠. 다들 집에 거의 못 들어가서 와이프들이 와이셔츠를 회사로 보내줄 정도였습니다.

    저는 또 일이 주어지면 완전히 몰두하는 성격이라 체중이 한꺼번에 5kg이 빠지더라고요. 또 7·4제를 바로 했잖아요. 새벽 5시경 일이 끝나면 눈 좀 비비고 세수하고 아침 7시에 바로 팀원들이 다 모여 회장님 말씀을 또 들었습니다. 틈만 나면 졸음이 쏟아지는데 아이고 참.”

    어떻든 신경영 선언 내용을 제일 잘 아는 사람 중 한 분이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고맙지요.”

    신경영 선언을 접할 때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회장님 말씀은 ‘피를 토하는 절규’로 느껴졌습니다. 원고가 아예 없었잖아요. 무엇보다 다 처음 듣는 개념이라 이해하기가 힘들었어요.”

    제일 생소한 것이 뭐였을까요.

    “‘업의 개념’이란 화두였습니다. ‘개념’이란 말 자체가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지 않는 낯설고 어려운 단어잖아요.

    거기다 업을 보시는 관점 자체가 달랐지 않았습니까. ‘호텔신라 업의 개념이 뭐냐. 서비스업? 아니다. 부동산 개발업이다’ 라고 하는데 놀라버리는 거죠. 업을 그렇게 다각적으로 보니 상상력이 마구 넓어집디다.

    또 ‘인프라’ ‘인프라’ 하시는데 아마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인프라’라는 말을 제일 먼저 많이 쓰신 분이 회장님 아닌가 싶어요.

    학교에서는 도로, 항만, 철도 같은 사회간접자본 즉 인프라스트럭처라고 해서 배우긴 배웠지만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인프라’라는 건 그런 하드웨어 개념이 아니라 종합 시스템, 물류 개념이 들어간 거였어요. 이 역시 굉장히 낯설었습니다.

    실제로 신경영 선언 이후 직원들 해외 출장도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거래선 만나면 일 다 끝나는 거고 쉬는 날에는 쇼핑이나 다니고 했는데 현지 사람들 생활이 어떤지도 돌아보고, 문화가 어떤지도 돌아보고 하는 게 다 교육이다, 오히려 그게 출장 목적이 돼야 된다 하셔서 그렇게 진행이 됐어요. 이후 현장에서는 거래선 상담할 때 대화 내용이 달라진다는 피드백이 오더라고요.

    ‘구매의 예술화’라는 말도 무슨 말인지 얼른 다가오지 않았어요. 구매란 것이 싸게 사는 게 최고잖아요. 회장님은 그렇게 보지 않았죠. ‘전자제품은 부품 하나가 잘못 되면 제품 자체를 버리게 된다. 구매라고 하는 것은 100원짜리를 90원에 사는 게 잘하는 게 아니라 부품의 질이 중요하고 적기에 공급받는 것은 물론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을 창고에 쌓아두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협력업체를 잘 관리해야 한다’ 이런 걸 예술이라고 하셨어요. 과학적 용어인 ‘구매’라는 단어에 ‘예술’이란 단어를 붙이니 일의 범위가 확 넓어지고 입체적이 되었습니다. ‘복합화’라는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업의 개념’ ‘구매의 예술화’

    김 전 사장이 말하는 ‘업의 개념’이나 ‘구매의 예술화’ 같은 개념은 필자의 책 ‘경제사상가 이건희’에도 자세히 소개돼 있다. 여기서 부연하고 싶은 것은 ‘복합화’라는 개념이다.

    김 전 사장 말처럼 ‘복합화’라는 말도 이 회장의 독특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단어다. 이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무작정 시장개척만 할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을 새롭게 결합한 형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제품을 제대로 빨리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부서 간 협업이 가장 중요한데 공장이나 사무실이 흩어져 있으면 낭비와 비효율이 심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뭘까, 여기서 비롯된 것이 바로 ‘복합화’ 개념이다. 생전 이 회장의 육성이다.

    “100층이나 80층 되는 건물 51층 정도에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이 있다고 치자. 이 빌딩에 기획, 디자인, 설계, 판매 등 각 조직 담당자들이 모두 입주해 있다면 필요할 경우 40초면 다 모일 수 있다.

    경기 수원시 삼성전자 사업장 내부. [허문명 기자]

    경기 수원시 삼성전자 사업장 내부. [허문명 기자]

    수원 삼성전자를 보자. 서울 강북에서 1000명, 강남에서 1000명, 수원 근교에서 몇만, 몇천 명이 아침에 한 시간 반 버스로 통근한다. 한 공장에서 다른 공장에 한번 가려고 해도 10분 내지 15분이 소모된다. 하루에 공장 몇 군데 돌면 몇 시간이 훅 지나가니 실제 일하는 시간은 서너 시간에 불과하다. 이런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는가? 공장을 전부 하나로 합쳐 짓는 복합화를 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기자는 얼마 전 삼성 수원 사업장을 둘러보면서 30년 전 이건희 회장이 말했던 ‘복합화’라는 걸 공간적으로 체험할 기회가 있었다.

    1969년 삼성전자 가전 공장이 출발한 수원 사업장은 지금은 반도체, 가전, 휴대폰을 만드는 연구개발센터가 모여 있는 곳이 됐는데 단지 자체가 거대한 ‘도시’를 방불케 했다.

    기자가 직접 둘러본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은 단지 안에 병원, 마켓, 식당이 다 들어 있는 거대한 ‘도시’였다. [허문명 기자]

    기자가 직접 둘러본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 사업장은 단지 안에 병원, 마켓, 식당이 다 들어 있는 거대한 ‘도시’였다. [허문명 기자]

    특히 사업장 한쪽 귀퉁이 붉은색 벽돌 건물은 ‘VIP센터’라고 해서 TV나 휴대폰 생산을 할 때 전 부서 팀장이 한데 모여 부서 간 벽을 없애고 토의하고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일했던 ‘복합화’ 개념이 녹아든 협업의 현장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말한 복합화 상상력은 이처럼 빌딩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말한 복합화에 관한 육성을 옮겨본다.

    “여기 독일 도시를 봐라. 주거지역·상업지역·공업지역·교육지역이 다 한 도시 안에 있다. 프랑크푸르트·뒤셀도르프·뮌헨·함부르크를 만들어 고속도로로 연결하니 이 나라 국민들은 어디든 두 시간 만에 다닌다. 서울은 다 흩어져 있다. 커피 한 잔 마시려면 20분, 학교 가려면 1시간, 회사 가려면 1시간 30분이 걸리니 이렇게 헝클어진 도시가 무슨 도시인가. 완전히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살아 있는 시(市)’로 만들어야 한다. 공장도 고급, 첨단 공장을 다 들어오게 하고 연구소도 다 모아야 한다. 그리고 이걸 유기적으로 컴퓨터로 연결하고 관리하라.”

    “슈퍼마켓을 지을 때는 생산과 소비를 이어라. 농민들이 직접 가져와서 바로 소비자한테 파는 대형 슈퍼에 주차장을 아주 크고 편리하게 지어라. 슈퍼 직원들도 단지 안에 살게 하라. 그렇게 하면 하나의 타운이 된다. 여기에 학교, 호텔, 빌딩, 레저시설, 어린이 동산, 백화점을 넣자. 복합화 제대로 하면 삼성정신, 삼성 노하우가 만들어질 거다. 이것만 해도 일자리가 천지에 깔려 있다. 100% 자신하고 약속한다. 나는 약속을 생명보다 중시하는 사람이다. 대한민국 4000만 명은 자신 못 하지만 삼성맨 5000명은 (책임 질) 자신 있다.”

    * 신동아 11월호 ‘김인 전 삼성SDS 사장의 증언 下’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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