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한나라당, 대선 ‘北風’ 차단 평양밀사 파견설 전모

“‘대북라인’ 가동중이었던 것으로 안다”

  • 글: 엄상현 gangpen@donga.com

    입력2003-02-24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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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新) 북풍’ 막기 위해 2002년 9월 이후 한나라당 밀사 두 차례 방북
    • 정통한 北 소식통 “밀사, 한나라당 집권하면 DJ보다 더 화끈하게 밀어주겠다 제안”
    • 밀사로 지목된 인사 “방북했지만 결코 그런 적 없다” 펄쩍
    • 2002년 대선 전 북한 침묵은 ‘기상이변?’
    • 한나라당 관계자, 2002년 9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 ‘北風’ 차단 평양밀사 파견설 전모
    대선 때마다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북풍(北風)’이다. 북한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돕기 위해 한반도에 위기를 조성하거나 대형사건을 터뜨렸다.

    1987년 KAL 858기 폭파사건에 이어, 1992년 안기부가 발표한 남파간첩 이선실의 남조선노동당 사건, 그리고 1996년 4·11 총선 전 판문점 북한군 무력시위 및 군사분계선 월경으로 인한 전쟁위기감 고조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 결과는 보수세력의 결집과 진보적 후보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져 선거판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다.

    지난 1997년 15대 대선 때도 이른바 ‘총풍(銃風)’ 공작설로 시끄러웠다. 그 실체는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북한은 어김없이 대선의 주요 변수로 등장했었다.

    두 번째 밀사는 첫 번째와 다른 사람

    이처럼 선거 때마다 정국을 휘몰아쳤던 ‘북풍’은 그러나 지난 2002년 대선 때는 나타나지도 시도되지도 않았다. “북한은 유례없이 조용했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철마다 불던 바람이 사라진 ‘기상이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의 ‘침묵’은 남한의 대선이 공정하게 치러지기를 바라는 순수한 목적에서 결정한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미국과의 핵 협상에 전념하다보니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일까. 대북 전문가들조차 지난 대선 전 북한의 ‘침묵’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분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북한정보에 정통한 한 남한 소식통이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비화’ 한 토막을 전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 밀사가 2002년 9월 이후 평양을 두 차례 방문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첫 번째 밀사가 평양에 다녀간 것은 지난 해 9월 일본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부친 이홍규(李弘圭)씨가 황해도 해주지법 검찰서기로 근무할 때의 전력을 폭로한 직후”라며 “그 밀사는 조선신보의 추가보도를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했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북한측에서는 ‘조총련 언론은 우리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는 게 이 소식통의 설명이다.

    소식통은 “믿을 만한 분명한 정보원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라며 당시 밀사가 북한측 관계자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한나라당측 밀사는 그동안 북한의 심기에 거슬리는 이회창 후보의 대북 발언에 대해 “이회창 후보 주변을 보수적인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를 구한 뒤 “한나라당에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나 같은 사람이 노력해서 우리 당의 정책을 ‘절대적 상호주의’에서 ‘전략적 상호주의’로 바꿔놓았다. 때문에 이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북과 계속 적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이다. 이후보가 틀림없이 대통령이 된다. (앞으로) 5년 동안 남북교류협력을 중단할 거냐. DJ는 국회에서 소수파라 북쪽을 마음대로 지원할 수 없었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국회도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DJ보다 더 화끈하게 도와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북한측에서는 “지켜보겠다”는 원칙적인 입장만 표명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또 “그 이후 두 번째 밀사가 북한측 인사와 접촉한 것으로 안다”며 “첫 번째 밀사와는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 이외에 북한측 인사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첫 번째 밀사보다 더 깊은 대화가 오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에 다녀온 국내 한 인사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북측의 한 관계자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며 이 소식통의 말에 힘을 실었다.

    결국 이들의 발언을 지난 대선 전 상황에 대입해보면 한나라당측 밀사의 평양 방문과 북한의 ‘침묵’에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시 말해 북한의 ‘침묵’은 한나라당측 밀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회창 후보에 대한 북한의 태도 변화에서도 그 가능성과 관련된 정황을 찾을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9월 이전까지만 해도 ‘극악한 반통일 분열주의자’ ‘부정뇌물 사건에 연루된 협잡꾼’ 등 이후보에 대한 비난공세를 지속적으로 퍼부었다. 가장 극에 달했던 시기가 지난 해 5∼6월경이다.

    2002년 5월11일 북한 로동신문은 ‘극악한 친미친일 매국역적의 정체를 발가본다’는 제목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친일을 했다는 장문의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아침마다 애비와 함께 일어나 동쪽 하늘을 향해 궁성요배를 하는 것을 제도화·습성화한 것도 이회창 역도이고, 기모노를 입고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는 장면을 사진 찍어둔 것을 자랑한 것도 다름아닌 이회창이다”라는 것이 당시 보도내용의 주요 골자다.

    또 5월24일 북한 관영 중앙방송은 ‘시사논단 논평’에서 “이총재가 6·15 공동선언에서 제시된 나라의 통일 방향과 구체적인 방안을 반대하는 것은 사실상 6·15 공동선언 자체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민족의 통일 의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틀 전인 22일 관훈토론회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9월13일에는 일본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인터넷판에서 ‘역적의 아들이 대통령후보란 말입니까’라는 제목으로 “이후보 부친 이홍규씨의 황해도 해주법원 서흥재판소 검사서기시절 친일행적을 폭로 규탄한다”는 비난기사를 보도하기에 이른다.

    문제의 기사는 서흥지역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평양지국발 기사로 보도됐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는 이홍규씨의 과거를 둘러싸고 한바탕 뜨거운 정치공방이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당시 보도가 북한 정부차원에서 꾸며진 일이라고 보고 향후 대책에 부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신보의 기사가 단발성이 아닌 기획성 기사이며 후속보도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특히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연말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북한의 ‘이회창 흠집내기’가 더욱 심화되는 한편 북한 정부와 여당이 서로 짜고 ‘신(新)북풍’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후보에 대한 비판과는 별도로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 등 ‘깜짝 카드’를 북한측에서 내놓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후보에 대한 북한의 비난공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줄었고, 한나라당에서 우려하던 ‘깜짝 카드’도 결국 나오지 않았다.

    밀사는 ‘전략적 상호주의’ 대북전략가

    그렇다면 실제로 한나라당측에서 어떤 식으로든 북측에 ‘밀사’를 보내 ‘이회창 흠집내기’와 ‘신(新) 북풍’을 사전에 차단했던 것일까. 진위 여부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채 정황상 가능성만 있는 상황에서 추론에 불과하지만,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북밀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대북밀사’는 특성상 여러 가지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 북한 사정에 정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북한 고위층까지 선을 댈 수 있는 ‘대북라인’ 가동능력이 있어야 한다.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는 만큼 입이 무거워야 함은 물론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일반적으로 밀사는 최측근에 해당하는 인물들 중에서 선별하는 게 상식이다.

    여기에 앞서 소식통이 전한 대화내용을 참조하면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이 ‘절대적 상호주의’에서 ‘전략적 상호주의’로 수정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 당내·외 인사들 가운데 이런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많아야 5∼6명 안팎이라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 가운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지목된 인사는 당내에 ‘전략적 상호주의’ 개념을 정립한 송영대(宋榮大) 전 통일부차관과 이후보의 핵심 브레인으로 꼽히는 서울대 백진현(白珍鉉) 교수 등이다.

    대선 때 이후보의 통일특보를 맡았던 송 전 차관은 1994년 ‘서울 불바다 발언’ 파문이 일었던 판문점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남북실무대표 접촉 당시 남측대표단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백교수는 당 외곽에 포진해 있는 이후보의 통일외교분야 핵심 브레인으로 지난 대선 TV합동토론회 때 이후보의 원고를 직접 손 볼 정도로 이후보로부터 절대적 신뢰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백교수의 통일안보정책의 지론 또한 ‘전략적 상호주의’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대북밀사’ 가능성에 대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반응을 보이며 전면 부인하고 있다. 송 전 차관은 “조선신보 보도가 나오기 전부터 우리는 북한이 이홍규씨의 과거사실을 조작해 공세를 취할 것으로 예상했었다”면서 “이후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본 결과 ‘전혀 사실무근이니 만큼 정당하게 대응하라’고 해서 그에 따른 준비만 하고 있었을 뿐 별도로 대책을 세우거나 북한측과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송 전 차관은 이어 “1997년 대선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베이징에 가서 말썽이 났던 경험이 있었던 만큼 지난해에는 ‘대북라인’을 일절 만들지 않았다”고 밝히고 “나 또한 북한은 물론 중국이고 일본이고 해외 어느 곳도 다녀온 적이 없다”고 ‘대북밀사’ 역할 가능성에 대해 일축했다.

    송 전 차관은 “지난 가을 이후 이후보에 대한 북한의 비방모략이 극심해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경우에 따라 ‘위해 가능성’까지 제기됐었다”며 “이같은 우려를 미국측에 전달해 북한의 위해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고 밝혔다. 그에 따라 “미국측은 당시 핵문제와 관련 북한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후보를 위해하지 말라는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고, 나중에 일부 외신에 ‘if he dies, you die’(이회창)그가 죽으면 (김정일)당신도 죽는다는 메시지가 북측에 전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는 게 송 전 차관의 부연 설명이다.

    송 전 차관의 주장대로라면 대선 전 우려되는 북한의 ‘신(新) 북풍’을 대북 비선을 통해 차단하기보다는 미국을 통한 대(對)북한 압박작전을 썼다는 이야기다.

    백진현 교수는 자신이 정치적인 사건에 언급되는 것 자체에 대해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내가 전략적 상호주의 개념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회창 후보도 내 생각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전략적 상호주의는 이후보도 이미 오래 전부터 언급했던 것이다. 나는 이후보가 통일외교안보 분야에 대해 자문을 구할 때 만나서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의 역할만 했을 뿐 한나라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당의 공식 직함도 없다.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다. 외교안보 전문가이자 학자일 뿐이다. 그래서 정당이 주최하는 세미나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일로 북한 사람들을 만날 일도 없고 중국 등에 다녀온 사실도 없다.”

    KBS방북단과 밀사 방북시기 일치

    한편 일각에서는 2002년 9월16일 KBS교향악단 평양방문단의 고문 자격으로 방북했던 박재규(朴在圭) 전 통일부장관을 지목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에서 통일부장관을 지냈고 정권 초기부터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불렸던 그이기에 다소 의아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KBS교향악단 평양방문단의 방북시기와 소식통이 전한 한나라당 밀사방북 시점(조선신보 보도-9월13일-직후)이 거의 일치한다. 또 박 전 장관이 방북기간 중 1∼2일 가량 방북단 일행과는 별도의 일정으로 움직였던 게 의심을 받게 된 배경으로 보인다.

    당시 KBS 교향악단은 9월16일부터 22일까지 1주일 일정으로 방북했고, 방북단에는 국회대표와 경제·사회·문화 및 학계 등 각계 인사 100여 명이 포함됐다.

    국회방북단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던 김태식(金台植) 부의장은 “박 전 장관은 북한을 여러 차례 다니면서 이미 돌아본 곳이 많아서인지 이틀 정도 방북단과는 따로 움직였다”면서 “어떤 일정으로 누구를 만나고 다녔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 부의장은 그러나 “박 전 장관과 이야기를 나눠보면서 개인적으로 매우 솔직하고 진실된 사람으로 봤다”며 “그 사람이 어떤 ‘비밀스런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박 전 장관의 입장은 무엇일까. 박 전 장관은 여러 차례에 걸친 기자의 확인 인터뷰 요청에 직접 응하지 않고 비서실장을 통해 서면으로 답변을 보내왔다. 다음은 박 전 장관의 답변 내용이다.

    ― 평양 체류기간 중 하루이틀 정도 방북단 일행과 떨어져 별도의 일정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 기간에 접촉한 북한 고위층 인사는 누구인가.

    “당시 방북단의 참관지는 이전에 모두 가 보았던 곳이었다. (별도의 일정을 잡은 것은)북한의 소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에 의한 변화상을 직접 목도하기 위해서였다. 평양시내를 비롯한 대동강변과 보통강변 등에서 시민들의 생활상을 관찰했고 평양시내 가판대(포장마차 등)와 백화점 진열대 품목이 무엇인지 살펴봤다. 그리고 판매점원들과 대화를 하면서 이들의 경쟁적인 판매 모습을 지켜봤다.

    그 때 만난 북측 고위 인사는 지난 1998년 경남대 총장시절 그리고 정상회담과 남북장관급회담시 평양을 방문해 서로 안면이 있는 인사들이다. 김용순 비서와 전금진(전금철로도 불림) 내각책임참사, 리종혁 아태부위원장,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 홍서헌 김책공대 총장 등이 그들이다.”

    ― 그들과 나눈 주요 대화내용은 무엇인가.

    “정상회담 이후 서로의 추억담과 회고 그리고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교환했다. 구체적으로 밝히면 당시 KBS와 북측간에 사전 합의한 사항들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일례로 합동연주회의 서울-평양 동시중계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대해 북측 관계자와 협의해 해결했다. 또 당시 남북이 각각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동시 착공식 행사를 열기로 했는데, KBS를 통한 북측 착공식 행사지역 현지실황 중계방송 건 등을 논의했다.

    이와 함께 남북 국회간 교류차원에서 당시 남측 국회의원 참가단과 북측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간의 만남 건과 문화예술인 교류 및 학술교류 활성화 건, 김대중정부 임기까지 경의선 연결 및 육로관광 이행 건 등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마지막으로 남측은 대선정국이므로 과거 북풍(北風)과 같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남북관계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북측은 ‘북남교류협력을 하자는데 요즘 남측 정치권에서 북풍, 신(新)북풍으로 부르면서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 음모가 아닌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 (대화 과정에서)이회창 후보 부친 이홍규씨와 관련된 비난보도에 대해 자제를 요청하지는 않았는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박 전 장관의 비서실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박 전 장관이 당시 북한측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느꼈던 점이라며 추가로 답변을 전해왔다.

    “(박 전 장관이 느끼기에) 북한측 관계자들은 남한 대선 후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회창 후보가 중국에서 대북정책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매우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측면도 보였다. 심지어 한 북측 인사는 이후보의 정책대로만 된다면 사업이나 교류협력 등을 계속할 것이라는 의사를 내보이기도 했다. 북측에서는 남측의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화해와 협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국회방북단에 한나라당만 빠져 의문

    그렇다면 한나라당 이후보측의 ‘대북밀사’는 실재하지도 않고 박 전 장관이 전하는 당시 북한 분위기로 봐서 필요도 없었던 것일까.

    KBS교향악단 평양방문단에 포함된 국회대표단에는 당초 민주당과 자민련뿐만 아니라 박원홍(朴源弘), 고흥길(高興吉) 두 명의 한나라당 의원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당 소속 두 의원만 방북 직전 북한 방문을 포기했다.

    김태식 부의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교류와 평화공존의 틀을 만드는데 국회가 나서야겠다는 취지에서 방북을 결정했고 각 당에서도 모두 참여하기로 했었다. 한나라당 두 의원도 마지막까지 같이 준비했었는데 막판에 빠져서 좀 의아했다”며 “서청원 대표와 이회창 후보까지 직접 만나서 함께 갈 수 있도록 설득했는데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피력했다. 결국 국회대표단은 국회 부의장단과 민주당·자민련 의원들로만 구성됐다.

    그 이유에 대해 고흥길 의원은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가고 싶었지만 당 지도부의 의견도 부정적이었고 당시 국정감사 때여서 문광위 야당간사로서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고의원의 설명은 다소 군색한 측면이 있다.

    분단 이래 57년 만에 처음으로 남한의 국회대표단이 북한땅을 밟는 의미 있는 방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광위 위원장과 민주당 간사, 자민련 의원까지 방북길에 오른 마당에 야당간사로서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 포기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조총련 조선신보는 ‘묵묵부답’

    박원홍 의원측도 처음에는 비슷한 이유를 댔다. “국감기간에는 국감에 충실해야 한다는 당론에 따르기 위해 방북을 포기했다”는 것. 그러나 박의원측 한 관계자는 “솔직히 당 대표까지 승낙해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나중에 뒤집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이회창 후보측에서 반대했던 것 같다”면서 “국회차원의 방북은 국감보다 훨씬 의미있는 일이었다”고 아쉬워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당시 (한나라당 내에는)대북라인이 가동중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아마도 대북라인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당시 방북단 내에 한나라당측 대북밀사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만 답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에서도 당시 한나라당측에서는 어떤 경로로든지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상 이홍규씨에 대한 추가 보도 등 ‘신(新) 북풍’을 차단하기 위한 움직임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비밀업무를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과연 성공했는지 여부는 당분간 쉽게 밝혀지기 어려울 전망이다.

    한편 ‘신동아’는 일본 조선신보측에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부친 이홍규씨에 대한 기사를 보도한 배경과 추가 기획된 기사가 있었는지, 만일 있었다면 왜 보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의서를 이메일을 통해 보냈지만, 조선신보측은 아무런 답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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