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노태우부터 노무현까지, 代 이은 러시아 연해주 프로젝트 전모

‘광개토 사업’에서 ‘흥개호 계획’ 거쳐 ‘발해복권 플랜’ 지나 유전개발 사업으로

  • 글: 이정훈 동아일보 주간동아 차장 hoon@donga.com

    입력2005-05-23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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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전개발, 청와대는 몰랐다”는 게 어불성설인 까닭
    • 이광재·김태년·서갑원·한병도의 ‘에너지 정책 4개 프로젝트’
    • 고르바초프, 다르네고브스키 지역 개발권 제의
    • 남한 경지면적 6배, 포그라니치니 사업의 비운
    • 전두환의 사과상자 속 61억은 흥개호 주변지역 개발자금
    • 연해주 근거로 북한에 벼 수천t 보낸 DJ
    • 노무현 정부가 對러 차관 6억6000만달러 삭감한 이유는?
    • 농업개발과 유전개발의 차이는 ‘시행착오’ 여부
    노태우부터 노무현까지, 代 이은 러시아 연해주 프로젝트 전모
    ‘권력형 비리’ 여부를 둘러싸고 언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철도공사의 러시아 유전개발 의혹사건.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주객(主客)이 전도’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철도공사가 러시아 유전개발에 참여하려다 계약금을 떼이며 철수하긴 했지만, 러시아 유전개발 붐을 조성한 기관은 아니기 때문이다. 철도공사는 다른 기관이 일으킨 붐에 객(客)으로 불려갔다가 코가 업자들의 농간에 꿰여 ‘독박’을 쓴 형국이다.

    사실 러시아와의 에너지 협력을 추진한 것은 동북아시대위원회와 산업자원부다. 노무현 정부 들어 설치된 동북아시대위원회는 한국을 동북아 중심국가로 만드는 방안을 연구하는 곳인데, 이 위원회 관계자들은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끌어오면 한반도가 동북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동북아시대위원회는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남북 철도 및 도로 연결사업에도 천착했다. 그리하여 남북한 간에 철도를 이으면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다고 판단해 러시아 유전개발 붐을 유도했다. 동북아시대위원회에서는 산자부에서 파견된 정모씨가 이러한 역할을 주로 맡았다.

    동북아시대위원회는 아이디어를 내는 곳이지 정책을 집행하는 곳은 아니다. 그 틈을 뚫고 에너지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인 산자부가 이 사업에 적극 관여하고 나섰다. 산자부는 산하 연구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을 동원해 러시아 유전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했고, 관련 세미나가 열리면 장관이 참석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는 P박사가 중심이 된 동북아에너지연구센터가 이 분야의 연구를 주도했다.

    2004년 9월21∼24일, 노무현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동북아시대위원회와 산자부는 경쟁적으로 러시아 유전개발 붐을 일으켰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러시아 유전개발과 관련된 보고서는 청와대에 파견된 산자부 공무원에게 제공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청와대가 러시아 유전개발을 몰랐다고 한다면 이는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다.



    두 기관의 유전개발 붐 조성을 측면에서 지원한 것이 국회 산업자원위 소속이던 열린우리당의 이광재, 김태년, 서갑원, 한병도 의원이다. 지난해 10월3일 네 의원은 ‘한국도 영국의 BP처럼 초대형 석유개발사를 세워야 한다’ ‘러시아 이르쿠츠크 유전개발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에너지 정책 4개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이에 대해 산자부 고위관료는 한국석유공사와 가스공사를 통합해 초대형 석유개발회사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몇몇 검증되지 않은 석유 사업가들이 재빨리 뛰어다녔고, 철도공사는 성급히 계약까지 했다가 홀로 ‘독박’을 쓴 처지가 된 것이다. 왜 이처럼 많은 러시아 유전개발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유령처럼 떠도는 ‘對러시아 차관’

    돌이켜보면 러시아 유전개발은 새로운 사업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때 무너진 한보그룹과 김대중 정부 때 사세가 꺾인 현대그룹은 오래 전부터 이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성사시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왜 러시아 석유사업을 추진하는 이들은 이렇듯 불운에 봉착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안보에서 찾는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 중의 하나가 석유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석유는 강대국들이 사활을 걸고 덤비는 주제인지라 때로는 석유를 놓고 동맹이 재편될 수도 있다. 한국이 러시아 유전개발을 매개로 러시아와 가까워지면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미국이 긴장한다.

    일본과 중국도 한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게 된다. 에너지 문제를 잘 다루면 한국은 노무현 정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동북아 중심국가 혹은 동북아의 균형을 잡는 나라가 될 수 있지만, 까딱 잘못하면 주요 강대국으로부터 집중견제를 받는 피곤한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실세는 왜 러시아 유전을 두드리게 됐는가. 그 배경에는 역대 정권을 관류해온,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한·러 관계사가 깔려 있다. 그 핵심은 노태우 정부 때 제공한 14억7000만달러의 대(對)러시아 차관이다. 잠시 비밀의 커튼에 가려진 한·러 관계사를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과 관계를 맺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을 때 한국인들은 미국 선수단보다 소련 선수단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낼 만큼 소련을 환대했는데, 그것이 한소 관계를 진전시키는 큰 힘이 되었다. 1990년 2월22일 한국이 모스크바에 주소(駐蘇) 한국영사처를, 3월19일에는 소련이 서울에 주한 소련영사처를 개설함으로써 한소 양국은 45년간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적인 외교관계로 진입했다. 그해 6월1일 미국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귀국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최초의 한소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1990년 7월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는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바르샤바조약군이라는 이름으로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 37만명을 1994년까지 철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때 서독은 동독에서 철수하는 소련군의 이동 비용은 물론이고 이들을 위해 소련이나 기타지역에 새로 기지를 건설하는 데 드는 비용까지 전부 부담하기로 했다.

    독소 간의 이러한 합의는 한소관계를 개선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 소련에 어떤 형태로든 경제지원을 하는 것이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이 한국에서 형성된 것이다. 더구나 이 무렵 한국경제는 서울올림픽 이후 호경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므로 주머니 사정도 넉넉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해 12월14일 노태우 대통령이 한국의 국가원수로는 최초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

    이때 노 대통령은 한소 수교의 대가로 30억달러의 차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경제가 아무리 잘 나가고 있다 해도 하루아침에 30억달러를 조달할 수는 없는 법. 당시 한국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신용이 좋았으므로 비교적 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소련에 제공하기로 한 차관의 이자율은 이보다 높았으므로 한국은 홍콩의 금융회사를 통해 차관 자금을 마련했다.

    이렇게 마련된 돈이 절반 정도 소련에 흘러든 1991년 12월25일, 소련이 거대한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내렸다. 그러자 한국에서는 소련에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문제가 됐다. 소련의 붕괴는 소련 영토에 속해 있던 작은 공화국들이 연이어 독립을 선포하는 식으로 진행됐는데, 1992년 1월1일에는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가 소련에서 독립한다고 선언했다.

    러시아가 독립을 선포하기 직전 한국측은 러시아에 대해 그때까지 한국이 소련 정부에 지급한 14억7000만달러의 차관을 승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측은 “한국이 준 14억7000만달러 중에서 러시아에서 사용된 것은 70% 정도이고 나머지 30%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벨로루시 지역에서 집행됐다”며 난색을 표했다. 논란 끝에 양국은 ‘14억7000만달러의 차관은 러시아가 심의해서 갚기로 노력한다’는 문구를 담은 문서에 서명했다(1991년 12월27일).

    이로써 차관 문제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이 차관이 유령처럼 배회하며 14년이 지난 지금 ‘유전 게이트’를 일으킨 원인 요소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제부터 그 맥락을 따라가보자.

    노태우 정부의 ‘광개토 프로젝트’

    한국이 대소련 차관을 대러시아 차관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고민을 거듭하자, 이 차관을 끌어왔다가 나라를 잃음으로써 갚지 못하게 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한국에 대해 ‘인간적으로 미안함’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고르바초프는 1992년 10월 중국에서 노태우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노재봉씨를 만나 “14억7000만달러의 상환은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영향력을 발휘해 경상북도 크기만한 연해주 다르네고브스키 지역(약 54만ha)의 개발권을 한국에 주도록 하겠다”고 제의했다.

    고르바초프가 이런 제의를 하기 직전인 9월17일 남북한은 총리급 회담을 열고 상호 불가침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한 상태였으므로 어느 때보다 남북관계가 좋았다. 때문에 다르네고브스키 지역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고 여기서 생산한 농산물을 식량난이 심각한 북한에 보낸다면 남한이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박철언씨 등을 중심으로 한 노태우 정부의 실세는 이 발상을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라 이름짓고 비밀리에 두 명의 농업관계자를 다르네고브스키 지역에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러나 검토 결과 이 지역은 논농사에 부적당하다는 결론이 났다. 이것이 실수였다. 다르네고브스키 지역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비롯해 각종 지하자원이 많은 곳인데 한국은 농업에만 초점을 두고 조사한 것이다.

    농업에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지자 노태우 정부는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를 중지시켰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다르네고브스키 지역이 지하자원의 보고이며, 러시아가 이 지역 개발권을 준다고 한 것은 농업뿐 아니라 지하자원 개발권까지 준다는 뜻이었음을 알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노태우부터 노무현까지, 代 이은 러시아 연해주 프로젝트 전모
    1993년 2월말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광개토대왕 프로젝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장덕진 회장이 이끄는 대륙개발이 중국 삼강평원 개발을 추진, 1994년에 첫삽을 뜨게 됐다. 그리고 장치혁 회장이 이끄는 고합그룹이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4년 6월2일 모스크바에서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김영삼 대통령이 귀국 길에 전용기를 타고 연해주의 고합농장을 둘러보았다. 김 대통령이 연해주의 농토를 둘러봤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광개토대왕 프로젝트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들이 연해주 농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과상자 비자금’의 정체

    이렇게 연해주 농사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 중 하나가 6공 시절 백담사에 유배됐다가 돌아온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두환씨는 “한 나라에 전직 대통령이 세 명(최규하·전두환·노태우)이나 머무르니 나라가 시끄러워진다”며 “대(對)러 차관과 무관하게 내 돈으로 고려인을 끌어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장차 이곳에 고려인 자치구역을 만들어보겠다”며 광개토대왕 프로젝트에 관여하던 A씨에게 방안마련을 의뢰했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한자로는 ‘흥개호(興凱湖)’로 적고 중국어로는 ‘싱카이호’, 러시아어로는 ‘항카호’라고 부르는 호수가 있다. 제주도 세 배만한 크기의 이 거대한 호수의 서남쪽에는 러시아군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지가 있는 포그라니치니 지역이 자리잡고 있다.

    1995년 11월7일 A씨는 연해주 농업아카데미 총장이자 극동러시아 국영농장의 총감독인 알렉세이 데민을 만나 대륙간탄도미사일 기지 지역을 제외한 포그라니치니 지역을 빌려 농사를 짓는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때 전씨측이 빌리기로 한 농경지는 225만ha. 전씨측이 지불하기로 한 돈은 63억원(587만달러)이었다. 당시 남한의 총 농지면적이 36만ha였으니 이곳은 남한 경지면적의 6배에 이르는 넓이다.

    서명 직후 전씨측은 A씨를 통해 러시아에 2억원(17만달러)을 지불하고 나머지 61억원(570만 달러)은 한 달 후에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전씨측은 이 사업을 ‘흥개호 프로젝트’로 불렀다. 전씨측에서는 새마을운동본부에 관여하던 전경환씨가 이 사업을 맡았다. 그런데 이 직후 한국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19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의 폭로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터진 데 이어 12월13일에는 전두환씨도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 압송된 것이다. 압송되기 전날 전씨는 연희동 자택에서 골목성명을 발표하며 항의한 후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는데, 다음날 새벽 검찰 수사진이 합천에 들이닥쳐 전씨를 서울로 압송했다. 그리고 12월19일 국회에서 5·18특별법이 통과됐다.

    이로써 전씨는 비자금 문제와 함께 5·18 문제로 조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전씨의 비자금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1996년 1월20일 쌍용그룹 빌딩 안 쌍용양회 경리부 창고에서 사과상자 25개에 담긴 현금 61억원을 찾아냈다. 검찰은 이 돈을 전씨의 비자금이라고 주장했으나, 사실 이 돈은 전씨측이 흥개호 사업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이라는 게 관련자들의 후일담이다. 전씨가 구속되고 61억원도 압수됨으로써 흥개호 사업은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다.

    최덕근 영사의 죽음

    그러나 권력자들이 개입한 북방사업은 곧 되살아났다. 1994년 내내 1차 북핵위기를 이어가던 북한은 그해 10월 미국과 제네바합의를 체결하고 원하던 양자회담을 이끌어냈다. 반면 한때 남북 정상회담 직전 단계까지 접근했던 김영삼 정부는 북한과 거의 접촉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갖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북한에 개입할 수 있는 지렛대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권영해씨가 이끄는 안기부가 흥개호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안기부측은 앞서 설명한 A씨를 만나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은 후, 1996년 8월 전직 농림부 장관 H씨와 몇 명의 안기부 분석관을 연해주로 보냈다.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그 농산물을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 보내는 방법을 검토하기 위해서다. 이때 이들은 해당 사업을 ‘발해 복권(復權)’ 사업으로 부르다가 노태우 대통령 때의 이름인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로 고쳐 불렀다.

    그러나 이 사업 역시 돌연한 사고로 말미암아 중단됐다. 북한이 ‘슈퍼 노트’라고 하는 100달러짜리 위조지폐를 만들어 세계에 유통시키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정일이 사용하는 슈퍼 노트는 ‘원빛인쇄공장’에서, 인민군이 뿌리는 위조 달러는 ‘평성상표공장’에서 제작하는데, 북한인들은 원빛인쇄공장에서 생산된 위조달러를 ‘원표’로 부른다.

    노태우부터 노무현까지, 代 이은 러시아 연해주 프로젝트 전모

    1996년 1월 서울 쌍용양회 지하창고에 쌓여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현금 사과상자.

    권영해 안기부장이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를 리바이벌하고 있을 때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영사관에 근무하던 안기부 소속 최덕근 영사는 의지를 갖고 ‘원표’의 유통 경로 추적에 나섰다. 최 영사는 탈북자들을 통해 원표의 유통과정을 추적했는데, 60만의 인구가 사는 ‘손바닥만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 영사의 움직임은 인근 나홋카의 북한영사관에 나와 있는 북한보위부의 정보망에 금방 걸렸다.

    북한이 최 영사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증거가 안기부 정보망에 속속 포착됐다. 그러나 최 영사는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그 무렵인 1996년 10월1일 밤 귀가하던 최 영사가 자신의 아파트 통로에서 괴한에게 습격당해 절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 사건의 범인은 현재까지 잡히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안기부의 광개토대왕 프로젝트도 전부 중단됐다.

    1996년 12월에는 고합그룹이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세운 ‘프람코’라는 현지 회사에서 러시아인들이 사보타주를 일으켜 사장인 한국인 K씨가 사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1996년은 되는 일이 없는 해였다. 이 일을 계기로 고합은 사실상 연해주에서 농업을 접었다.

    북한에 차관 대신 석유를 공급한다?

    이후 이른바 북풍(北風)사건을 거쳐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 교류를 확대한다는 확실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운명의 여신이 도왔는지 때마침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1997년 7월 포고령 64호 등을 통해 ‘연해주로 돌아오는 고려인에게 러시아 군대가 빠져나간 지역을 무상으로 영구 임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로 인해 연해주에 고려인 자치구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던 적잖은 고려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연해주에서 농사를 짓는 한국인이나 한국 기업이 꽤 늘었다. 풀무원 같은 식품기업은 물론이고 대순진리회, 소망교회 같은 종교기관도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햇볕정책의 주창자인 김대중 대통령은 연해주에 농장을 구해 그 농장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북한에 보내는 방법 대신, 러시아의 여러 농장에서 생산된 농작물을 구입해 북한에 보내는 방법을 선택했다.

    김 대통령은 이 돈을 국고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에서 마련했다. 주로 해외동포들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러시아산 농산물을 구입한 김 대통령은 1997년 12월 말 83t을 처음 북한 적십자사로 보냈다. 그리고 이후 급격히 그 양을 늘려 1998년 겨울부터 1999년 1월 사이 182t, 1999년 겨울부터 2000년 3월 사이 240t, 2001년 겨울부터 2002년 5월 사이 2520t, 2002년 겨울부터 2003년 2월 사이 3080t을 보냈다.

    김 대통령이 보낸 곡물은 쌀이 아니라 도정하지 않은 벼였다. 김 대통령은 고려인 ○씨에게 이 일을 위탁했는데, ○씨는 1t당 100달러를 약간 웃도는 가격으로 농산물을 구입해 모두 28차례 북한에 제공했다. 2000년 6월13일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데는 김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북한을 지원한 것도 한몫을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2002년 12월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자 북한에 벼를 제공하는 일에 관여한 사람들이 노무현 당선자를 만나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는 사업을 계속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노 당선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기 직전인 그해 10월 북한은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밝혀 이른바 2차 북핵위기가 시작된 바 있다.

    이 무렵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어겼다며 연간 50만t씩 제공하던 중유 공급을 중단했다. 당시 북한이 수입하던 석유류는 연간 70만t 정도인데 거의 70%인 50만t이 삭감된 것. 이때부터 북한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은 석유이지 식량이 아니라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을 중심으로 한 실세들이,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대러시아 차관을 이용해 러시아산 원유를 북한에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는 대(對)러 차관을 현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2003년 9월18일 김진표 재정경제부 장관이 러시아 재무장관을 만나 당시 원리금 합계액이 22억4000만달러에 이르던 대러 차관 중에서 무려 6억6000만달러를 삭감해 15억8000만달러로 탕감한다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의혹을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유는 북한이 러시아에 갚아야 할 38억달러의 빚 때문이다. 대러 차관을 탕감할 때 일부에서는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이 진 빚은 우리가 갚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대러 차관을 탕감해주는 대신 북한이 러시아에 진 빚도 그만큼 삭감하기로 하자”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 유전개발을 적극 검토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러시아 또한 한국 자본을 끌어들여 유전을 개발한다는 아이디어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동북아시대위원회와 산업자원부가 경쟁적으로 러시아 유전개발을 검토하게 됐고, 에너지 협력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철도공사마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급히 러시아 유전개발 계약을 체결했다가 ‘독박’을 쓰게 됐다.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니…

    물론 이제까지 밝혀진 정황으로 보자면, 이전 정부의 연해주 프로젝트와 이번 사건은 성격이 사뭇 다르다. 이전의 프로젝트가 말 그대로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정책사업이었다면, 이번 경우는 몇몇 노회한 사업가에게 정부기관이 농락당한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 시절 성급히 러시아에 차관을 주지 않았어도 러시아 유전개발에 이렇게 쉽사리 말려들었을까하는 의구심은 지우기 어렵다. 또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유전개발보다 소규모 투자로 시도할 수 있는 러시아 농업개발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시행착오를 반복해 노하우를 마련한 농업을 버리고 유전이라는 대박을 좇다가 뒤늦게 한미동맹이라는 안보문제와 경제성의 한계 같은 문제를 발견하고 급브레이크를 밟은 형국이다. 다른 이들은 그래도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던 까닭에 몸이 크게 쏠렸다 돌아오는 정도에 그쳤지만, 김세호 전 건설교통부 차관을 비롯한 철도공사 관계자 등은 안전벨트를 안 매고 있다가 그대로 튕겨나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어디까지 튕겨나갈지, 누구까지 튕겨나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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