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미군의 세계전략 변화와 ‘작전계획 5029’

‘저강도 분쟁’ 초점 맞춰 사자에서 치타로

  • 글: 이정훈 동아일보 주간동아 차장 hoon@donga.com

    입력2005-06-27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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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한반도 윈-윈’ 전략이 ‘중동·한반도 윈-윈’으로
    • 한국, 개전 초 한국군 희생 우려해 ‘윈-홀드’ 전략 반대
    • “여덟 개 전쟁에 대비하라”, 이라크전 승리와 ‘1·4·2·1’전략
    • ‘윈-홀드’ 폐기, 사그라진 ‘우발계획 5028’ 논의
    • 5028과 유사한 5026이 연합작계로 발전한 까닭은?
    • 저강도 분쟁에 대한 군사대응(MOOTW), 개념계획 5029
    • 북한 급변사태시 한국은 혼자서 중국 개입 막을 수 있나
    미군의 세계전략 변화와 ‘작전계획 5029’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1년 7월 코소보의 수도 프리슈티나 인근의 미군 캠프를 방문해 병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주한미군의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놓고 한미간에 적잖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 개념계획 5029를 놓고 한국과 미국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전략적 유연성은 무엇이기에, 그리고 개념계획 5029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말이 오가는 것일까.

    한국이 이해하는 전략적 유연성은, 중국과 대만 사이의 갈등이 높아졌을 때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주한미군)이 대만을 돕기 위해 출동하는 것을 말한다. “주한미군은 오로지 한반도 위기에만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한국의 주장인데, 미국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한반도 안전만을 위해서 주한미군을 활용하느냐. 한반도 이외 지역에서 위기 상황이 생기면 주한미군을 그 지역으로 출동시켜야 한다”며 전략적 유연성을 들고 나왔다.

    기자는 ‘신동아’ 2003년 9월호를 통해 개념계획 5029를 비롯한 미군의 작전계획 대강을 설명하고 미군의 대(對) 한반도 전략이 크게 바뀌었다고 밝혔다(194쪽 ‘미, 대북군사전략 바꿨다’ 참조). 이어 ‘신동아’ 2005년 4월호는 한국과 미국이 개념계획 5029에 대해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보도함으로써 개념계획 5029를 둘러싼 지금의 갈등을 수면으로 끌어올렸다(218쪽 ‘한미연합사, 북한 유사시 대비 작전계획 5029-05 추진’ 참조).

    미군은 전세계를 책임구역으로 삼는 ‘세계 유일’의 세계군이다. 미국은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세계전략을 구사하는데, 한반도는 사실상 미국의 세계전략 위에 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미국의 세계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금 한반도가 처한 위기를 이해할 수 없다. 개념계획 5029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둘러싼 한미 갈등이 빚어진 지금 한국이 국익을 취하는 선택을 하려면, 미국이 구사하는 세계전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냉전의 유산 ‘윈-윈’ 전략



    미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미국 본토 방위다.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국이 저렇듯 야단스럽게 전 공항과 항구의 검색을 강화한 것은, 비록 테러의 형태이지만 본토 방위가 뚫렸기 때문이다. 미군에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전략지역의 방어다. 미국은 본토와 전략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계전략을 구사한다.

    미국이 전략지역 방어를 위해 채택한 방법은 ‘전진배치’다. 냉전(冷戰) 시절 미군은 동쪽으로는 대서양 건너 서유럽의 최동쪽(동·서독 분단선)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서유럽 국가들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군을 구성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지나 한반도의 중허리에서부터 미국의 국익을 지켰다. 이를 위해 미국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체제를 유지했다.

    미군의 세계전략 변화와 ‘작전계획 5029’

    3월14일 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RSOI)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항에 도착한 미 항공모함 키티호크호. 키티호크호에는 미 해군 5200여 명이 탑승해 있고 60여 대의 최신예 항공기가 실려 있다.

    이 시기 미국은 확실한 ‘윈-윈(win-win)’ 전략을 채택했다. 윈-윈 전략은 한반도와 독일(유럽)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두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유럽에 30만, 동북아(한국과 일본)에 10여만 병력을 배치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역사가 있는데, 이를 본떠 냉전시기 윈-윈 전략을 구사했다.

    NATO의 동진(東進)

    1990년 초 냉전의 붕괴는 유럽전선의 소멸을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NATO군과 대치하던 WTO군(바르샤바조약군)과 WTO군을 창설한 근거가 된 바르샤바조약이 사라진 것을 뜻한다. 적(敵)이 없어졌으니 NATO는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옛 WTO 멤버인 동유럽 국가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게 됐는데, 이를 ‘NATO의 동진(東進)’이라고 한다.

    1999년 NATO는 WTO 회원국이던 폴란드와 체코, 헝가리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2004년에는 WTO 구성국이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와 냉전시절 소련의 일부이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수용했다. 소련에 속해 있다가 독립한 나라까지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NATO의 세력이 커졌으니 러시아는 NATO를 이끄는 미국에 대해 감히 라이벌 선언을 하지 못했다.

    이러한 NATO의 위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1999년 발발한 코소보전쟁이다. 코소보는 원래 유고연방의 일원이었는데, 유고가 여러 나라로 쪼개질 때 코소보도 떨어져 나왔다. 유고는 공산당이 이끄는 나라였지만 NATO는 물론 WTO에도 가입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그런데 코소보에서 소요가 일자 NATO군은 즉각 개입했다. NATO군이 비회원국 분쟁에 개입한 것은 NATO가 유럽 지역에서 미군을 대신해 경찰군 구실을 하게 맡게 됐음을 의미한다.

    NATO군의 무대가 넓어지자 미군은 이 지역의 안보를 NATO에 맡기고 과감한 군비 축소에 들어갔다. 18개이던 육군사단을 10개로 줄이고 14척이던 항공모함을 12척으로 줄인 것이다. 다음으로 위험지역인 중동으로 눈을 돌렸다. 미군은 중동과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는 전쟁보다 규모가 클 것으로 보고, 두 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주요전구전쟁(主要戰區戰爭·Main Theater War, 약칭 MTW)’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미군의 고민은 ‘두 개의 주요전구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느냐’로 축소되었다.

    일각에서는 ‘미국은 두 개 전구에 모두 참전해 이길 수 있는 전력(戰力)을 보유해야 한다’며 윈-윈 전략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또 다른 전문가들은 “윈-윈 전략을 고수하면 국방비가 너무 많이 든다. 한 개 전구에서 확실히 이기는 동안 다른 전구에서는 지지 않고 버티기만 한다. 그리고 한 개 전구에서 승리하면 바로 전력을 빼내 비기고 있는 전구에 투입해 그곳에서도 승리한다. 이 전략이 더 적은 돈으로 미국의 이익을 지키는 방안”이라며 ‘윈-홀드(hold·버티기)’ 전략을 내놓았다.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TPFDD)의 등장

    미국에서 윈-홀드 전략이 거론될 때마다 한국의 안보 책임자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한국이 ‘홀드’의 대상이 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동에는 석유가 무진장 묻혀 있으나 한국에는 이렇다 할 자원이 없다. 미국은 중동에 동맹국이 없어 군대를 주둔시키지 못하지만, 한국에는 주한미군뿐 아니라 70만에 이르는 한국군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동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은 병력이 없는 중동에 우선 파병해 그곳에서 먼저 ‘윈’을 도모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홀드’ 지역이 되는데, 홀드 지역에서는 반격전을 펴지 않으므로 한국군과 북한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해 상당수의 한국군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군은 미국의 ‘윈-홀드’ 전략에 반대한 것이다.

    윈-윈 전략이냐 윈-홀드 전략이냐. 미국은 이 논쟁에 대해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TPFDD)을 내놓음으로써 마침표를 찍었다.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이란 과학적으로 위기 정도를 분석한 후 실제 나타나는 위기의 정도에 따라 증원(파병)하는 미군부대와 규모를 정리한 목록이다. 이 제원에 따르면 미군은 두 개 전구에 최대 69만 병력을 투입한다.

    평시 미군의 총 병력은 138만명 가량. 그런데 중동과 한반도에서 동시에 전면전이 일어나면 두 곳에 무려 138만명을 보내야 하니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동원한다 해도 미국 본토 방위가 힘들어진다. 138만명을 파병하는 것은 미군이 세계군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스윙(swing·그네)전략’이다.

    본래 스윙전략은 윈-홀드 전략을 위해 나온 것이다. 즉 중동지역에서 승기를 잡으면 이 지역에서 불필요한 부대를 재빨리 한반도로 보낸다는 것이 스윙전략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스윙전략은 윈-홀드 전략과 분명히 다르다.

    미군은 중동에 이렇다 할 교두보(주둔지)가 없으므로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제1격을 가할 공군력을 해군 항공모함에 탑재된 항공력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미 7공군은 물론이고 한국 공군기지도 이용할 수 있으므로, 미 공군은 즉시 한반도로 전투비행단을 파병한다. 따라서 한반도와 중동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군은 해군 항공력은 중동으로, 공군 항공력은 한반도로 우선 배치할 수 있다.

    그러다 사태가 변하면 미군은 중동에 있던 해군 항공력을 한반도로 보내고 반대로 한국에 보낸 공군 항공력은 중동으로 보낸다. 이것도 스윙전략에 속한다. 스윙전략은 반드시 비기는 것(홀드)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미군이 가진 전력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스윙전략이다. 스윙전략이 등장하면서 미군에서는 부대와 장비를 신속히 이동시키는 수송사령부의 임무가 매우 중요해졌다.

    신속배치군 증강

    중동과 한반도라는 두 개의 주요 전구 전쟁을 염두에 두고 편성된 미군 체제는 2003년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또다시 큰 변화를 맞았다. 미군은 불과 한 달 남짓한 전쟁을 통해 이라크 전역을 장악했는데, 이 승리로 인해 미국은 합법적으로 중동에 미군이 주둔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현재 미국은 이라크에 친미(親美) 정부를 세우는 데 몰두하고 있다. 친미 정부가 출범하면 미국은 이 정부와 군사조약을 맺고 이라크군과 이라크 주둔 미군을 하나로 묶는 연합군을 만들 것이다(지금 한국에 있는 한미연합군과 흡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라크를 발판 삼아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이란이나, 왕족은 친미적이지만 국민은 매우 반미(反美)적인 사우디아라비아 견제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점령을 통해 미군은 한 개의 주요 전구를 없앴으므로 두 개의 주요 전구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구상한 미군의 세계전략은 변할 수밖에 없다. 위험요소가 줄었으므로 미군은 바로 군비(軍費) 축소에 들어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군의 기계화 사단을 신속배치가 가능한 여단으로 축소하는 것. 바로 SBCT(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의 창설이다.

    미국은 얼마만큼 군대를 축소할 것인가. 결론은 ‘뛰면서 생각하자’는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 사태와 이란 사태, 북한 핵 사태를 상대해 가면서 군비 축소 규모를 정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대강은 예측할 수 있다. 이라크가 안정된 후 미국이 새로 취할 세계전략은 ‘1·4·2·1전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맨 앞에 있는 1은 미국 본토를 뜻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본토 방위이므로 미군은 그 누구도 미국 본토를 침략하지 못하게 방어할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 두 번째의 4는 한국 등 네 개 중요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는 전력을 뜻한다. 세 번째의 2는 이 네 개 지역에서 미군이 동맹군과 함께 전쟁을 억제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두 개의 위기를 말한다. 미군은 이러한 위기도 억제할 수 있는 전력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의 1은 불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소규모 분쟁을 뜻한다.

    미군의 세계전략 변화와 ‘작전계획 5029’

    미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가 2005년 1월 태평양사령부 임무수행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를 향하고 있다(좌). 2003년 4월 이라크 북부 티크리트의 후세인궁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미 해병대(우).

    이렇듯 크고 작은 여덟 개의 전쟁을 동시에 억제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기 위해 지금 미국은 급격하게 군사력을 개편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기능’ 분야의 강조다. 1·4·2·1전략이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은 지역 위주로 부대를 배치했다. 미국이 지켜야 하는 지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전력을 옮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중(重)부대는 그 지역에 사전 배치해놓았다. 냉전시대 유럽(독일)에 30만, 동북아(한국 일본)에 10만을 배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냉전 종식 후 이라크전이 진행되는 순간까지 지역 위주의 부대배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라크전을 계기로 미군의 ‘신속배치’ 능력이 비약적으로 신장하면서 미군은 지역 위주에서 기능 위주로 부대를 배치하려 한다. ‘기능’이란 신속한 배치를 뜻하는데, 이 부분이 강화되면 미국은 굳이 위험지역에 많은 병력을 사전 배치할 필요가 없다.

    지역별로 부대를 배치할 때 미군이 사용한 작전계획의 대표가 5027이다. 5027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위기가 고조되면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에 따라 먼저 1군단이 들어온다. 그래도 위기가 사라지지 않고 전면전이 일어날 것 같으면 ‘미국의 망치(America’s Hammer)’라는 별명을 가진 강력한 중(重) 기계화 부대인 3군단이 들어온다.

    반면 중동지역 전면전을 대비해 만든 작전계획 1002는 중동에서 전운(戰雲)이 짙어지면 유럽에 있던 5군단이 옮겨가고, 그래도 위험이 사라지지 않으면 미 본토에 있던 18공정군단이 달려가는 것으로 짜여 있다. 그래서 1, 3군단은 동북아용, 5, 18공정군단은 중동용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각각의 부대는 유사시 출동지역을 염두에 두고 훈련을 한다.

    윈-윈 전략의 한계

    그러나 지역별 부대 설정은 낭비를 초래한다.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졌는데 중동에선 전면전 직전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가정해보자. 3군단은 한반도로 출동하지만, 18공정군단은 중동으로 출동하지 못하고 대기해야 한다. 이러한 대기는 전력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신속배치 능력이 매우 강화된다고 가정해보자. 미국은 3군단을 한반도에 파병해 급한 불을 끈 후 그 사이 전운이 더욱 짙어진 중동으로 3군단을 보낸다. 이렇게 되면 18공정군단은 필요가 없거나 그 규모를 크게 줄여도 된다. 미국으로선 병력을 크게 절감하면서도 국익은 그대로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전에 전략지역에 배치한 병력도 크게 삭감할 수 있다.

    이라크전쟁은 미국이 이러한 기능을 시험해본 ‘무대’였다. 이미 미군은 신속배치만을 염두에 두고 SBCT를 만들어놓았다. 미군은 한국에 있는 2사단 등 세계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는 부대를 골고루 이라크전에 투입하며 신속배치가 가능한지 검토했다. 몇 가지 준비가 미흡한 점이 발견됐지만 결과는 대체로 만족스럽다는 평가다.

    신속배치군을 재빨리 투입한다면 미국은 전쟁의 열도(熱度)가 높아지기 전에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전면전이라는 고강도 분쟁보다 저강도 분쟁에 대응할 부대가 더 많이 필요하다. 이라크전을 계기로 미국은 앞으로의 갈등은 고강도 분쟁보다 저강도 분쟁으로 나타날 것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작계 5027과 1002는 고강도 분쟁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고강도 분쟁은 수십 년 혹은 수백년을 건너뛰어 발생하지만 한번 일어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작계 5027과 1002를 운용할 때 미국의 고민은 한반도와 중동에서 동시에 전면전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에 집약된다.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을 내놓으면서 윈-윈 전략을 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 윈-윈 성과를 거둘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 검토한 것이 우발계획(Contingency Plan) 5028이다. 우발계획 5028은 중동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사정으로 미군이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에 따른 세력을 한반도에 전개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유사시 미 본토에서 오는 증원군 없이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한국군을 동원해 홀드 작전을 펼쳐야 하는데, 이에 대비한 작전계획이 바로 5028이다.

    그러나 5028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국이 윈-윈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발계획 5028은 미군이 윈-홀드 전략을 택한다고 했을 때 잠시 거론되다가, 결국 미군이 윈-윈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사라졌다(당초 이 우발계획은 휴전선에서 일어난 소규모 분쟁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는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다. 휴전선에서 일어난 분쟁은 한미연합사가 관리하는 작전계획 5027로 대응한다).

    전쟁 이외의 군사작전, MOOTW

    1차 북핵위기가 고조되던 1993년, 미군은 태평양사령부 주도로 북핵 시설을 정밀 공습하는 작전계획 5026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5026을 제대로 풀이한 것이 아니다. 5026은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에 따른 증원군이 한반도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군과 동북아의 미군이 자체 전력만으로 북한의 핵시설 등을 정밀폭격하는 전략으로 풀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5026은 윈-홀드 전략이 거론되던 시절 논의된 5028과 흡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5028이 조용히 사라진 데 반해 5026은 한미연합사가 관리하는 연합작계로 발전했다. 5028은 윈-홀드 전략에 입각한 것이나 5026은 홀드 전략과 무관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긴 차이다. 이러한 5026으로 한국군이 개입하지 못하는 미군 작계를 한국군이 개입할 수 있는 연합작계로 만듦으로써 한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미국 못지않은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은 이라크전을 감행했고, 지금까지의 무거운 기계화부대에 가벼운 신속배치군을 전면 배치하는 군사혁신을 단행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혁신에 깔려 있는 대전제는 ‘앞으로 미군이 신경 써야 할 것은 고강도 분쟁이 아니라 저강도 분쟁이다. 고강도 분쟁은 충분히 대비책이 마련돼 있으나 저강도 분쟁은 대책이 적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미국이 한반도를 위해 내놓은 것이 요즘 문제가 된 개념계획 5029다. 5029는 북한에서 소요가 일어나 치안이 크게 위태로워지는 저강도 분쟁을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이다. 저강도 분쟁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군사용어로는 ‘전쟁 이외 군사작전(Military Operation Other Than War, MOOTW로 약칭)’라고 한다.

    과거 한국에서 계엄령이나 위수령이 발동되면 군대가 출동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표적인 전쟁 이외 군사작전이다. 한국의 계엄령은 국내 치안을 지키기 위해 발동한 것이지만, 개념계획 5029는 한국이 아닌 북한을 무대로 발동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미묘한 문제가 있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직후 미국과 합의해 주한미군 부대를 평택-오산 지구와 대구 지역으로 모으는 연합토지계획(LPP)을 승인하고 이를 행동에 옮겼다. 이와 함께 서울 용산 미군부대가 평택으로 옮겨가는 등 곳곳에 흩어져 있던 주한미군 부대가 한곳으로 모이게 됐다. 또 주한미군 1여단이 이라크로 출동하는 것을 승인했다.

    미국은 이를 한국이 한반도 이외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주한미군이 출동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올해 3월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주한미군이 한반도 이외의 동북아 지역 사태에 출동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방침을 강력히 시사했다. 이런 가운데 5029를 놓고 한국과 미국은 또 다른 갈등에 빠져들었다.

    한국군에 대한 전시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주도권을 쥔 한미연합사에 있으나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국 합참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계엄령은 평시에 발동된다. 따라서 계엄령이 발동되면 한국군은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고 단독으로 계엄 작전을 수행한다. 미국은 한미 연합군이 공동으로 북한을 무대로 개념계획 5029를 발동하자며, 5029를 한미연합군의 작계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냉정히 주판알을 튕겨보면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이는 평시작전에 해당하기 때문에 5029를 연합작계로 만들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로써 전략적 유연성과 개념계획 5029는 한미 군사 당국 사이에 갈등의 핵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나면 먼저 중국이 개입하려 할 텐데 과연 한국군이 단독으로 중국군의 북한 개입을 억제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이 등장했다.

    여기서 한국은 냉정히 주판알을 튕겨봐야 한다. 주한미군이 중국-대만(兩岸) 갈등 때 출동한다고 해서 과연 중국이 한국을 공격하거나 적대시할 것인가. 그리고 근본적인 의문이지만 중국은 미국과 싸우려 할 것인가.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전쟁에 말려들고 만다.

    오히려 한반도가 동북아로 출동할 미군 기지가 된다면 미국은 한반도 방어에 더 신경을 쓸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5029를 한미연합군의 연합작계로 발전시킨다면, 한국은 북한 급변시 미군을 적절히 억제하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 한반도 통일 문제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중국에 대한 과도한 염려와 주권침해에 대한 과도한 피해의식이 전략적 유연성과 5029를 연합작계로 발전시키지 못하게 하는 아킬레스건은 아닐까. 미국의 세계전략은 변하고 있는데 한국은 이러한 변화를 막을 힘이 없다. 그렇다면 그 변화가 우리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도록 편승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 노무현 정부가 자주국방도, 동맹도 원활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정부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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