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대통령이 9월 7일 오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서 대구시정 업무보고를 받기 전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영남에선 ‘새누리당 공천=당선’이란 등식이 성립된다. 그만큼 공천 경쟁이 치열해 물갈이 폭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회창-이명박-박근혜로 새누리당(한나라당)의 사령탑이 바뀌면서 각자가 텃밭에서 객토(客土) 작업을 한 탓이기도 하다. 18대 때 친이계가 단행한 ‘친박 학살’, 19대 때 친박계가 주도한 ‘보복 공천’이 대표적이다. 새누리당은 19대 총선 당시 ‘교체지수’ 등을 토대로 현역 의원 하위 25%를 공천에서 원천 배제했다. 영남을 중심으로 ‘물갈이 바람’이 일었다.
市 “알아서 판단해달라”
내년 4월 13일 실시되는 20대 총선은 어떨까. 영남권에서 ‘대대적 물갈이 수요’가 생긴 건 분명해 보인다. 18·19대 때와 다른 점은 선거를 7개월이나 남겨놓은 이른 시점에 그런 조짐이 구체적으로 감지된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유승민 파동’의 여파 탓일 것이다.
박 대통령은 9월 7일 정치적 고향인 대구를 방문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에서 권영진 대구시장으로부터 시정 업무보고를 받고 현지 인사들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다. 오후엔 박 대통령이 의원 시절부터 난관에 처할 때마다 기(氣)를 받는다는 대구 서문시장을 찾았다. 이어 경북 경주로 이동해 월성 신라왕궁 복원 현장에서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이 자리에 대구와 경북의 현역 국회의원은 한 사람도 초대받지 못했다. DGIST가 있는 달성군의 이종진 의원, 서문시장이 있는 중구의 김희국 의원, 신라왕궁 복원 현장이 있는 경주의 정수성 의원도 마찬가지다. 권 시장은 박 대통령 방문 전날 대구 국회의원 12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이번 행사는 지역경제 활성화와 청년 일자리 창출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니 참석하지 말아달라”고 ‘단속’까지 했다.
그러자 “청와대로부터 ‘국회의원들의 참석을 막아달라’는 메시지가 권 시장에게 전해진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권 시장과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은 18대 국회 시절 여당 개혁소장파 모임인 ‘민본 21’에서 함께 활동해 절친한 사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업무보고의 형태와 참석 범위는 행사를 주최하는 시와 긴밀한 협조 속에서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청와대가 의원들의 참석을 막았다는 건지, 안 막았다는 건지 알기 힘든 애매한 설명이다.
“확인사살 하는 듯”
권 시장이 혼자만의 결정으로 중진급을 포함한 모든 의원의 참석을 막았다는 건 설득력이 낮다. 업무보고는 그렇다 치더라도 오찬간담회와 재래시장 방문 참석을 원천봉쇄한 전례가 없다. 대구시 고위 관계자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일단 겉으로는 시장 독단으로 그렇게 조치한 것으로 돼 있다. (청와대 메시지 같은) 다른 배경은 알아서 판단해달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원래 8월 21일 대구와 경주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서부전선 포격도발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연기했다. 그때도 권 시장은 대구 의원 모두에게 전화를 걸어 행사 불참을 요청했다. 당시 일부 의원은 권 시장에게 “민생을 논의하는 자리에 우리가 안 가는 게 말이 되냐”며 강하게 항의했다고 한다.
의원들은 이런 불만이 묵살되고 다시 짜인 일정에서도 배제되자 애써 의미를 축소하며 자위하는 분위기다. 대구 출신 A의원은 “권 시장이 회의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기 위해 참석 인원을 최소화했을 것”이라며 “정기국회가 열리는 만큼 의정활동에 전념하라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고 좋게 해석했다. 이 지역 B의원은 “대구에서 새누리당 공천 경쟁이 심하니 다른 출마 희망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현역을 초청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한다”고 했다.
하지만 9월 9일 박 대통령의 인천 행사에는 여야 의원 12명 전원이 초청됐다. 이를 두고 대구 정치권 관계자 C씨는 “박 대통령의 불신임 메시지를 대구 의원들이 못 알아들을까봐 확인사살을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박 대통령은 대구 의원들에게 불만이 큰 것 같다.
박 대통령이 대구 의원들을 배척하는 배경은 유승민 전 원내대표 사퇴 파동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대구의 초선 국회의원 7명은 ‘버티기’를 시도하던 유승민 의원에게 동조했다. 김희국 의원(중-남구)은 의원총회 등에서 ‘소신 발언’을 이어갔고 김무성 대표가 7월 8일 의총의 사퇴 권고 결의를 유 의원에게 전달하는 자리에도 배석했다.
박 대통령은 유 의원이 사퇴하면서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며 소신을 강조하자 진노했다고 한다. 이후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현역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청와대 측은 유 의원이 소속된 국회 국방위원들의 좌석을 헤드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얼굴조차 마주치기 싫다는 뜻’으로 읽혔다. 여권 관계자는 “유 의원을 도운 초선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