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단순 기능인 양산 치중, 광복 직후 조선인 학사는 31명뿐

  • 조명제 한국산업기술사연구회 고문

    입력2006-02-16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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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강점기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과학기술 교육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조선인 의사, 변호사는 있었지만 과학기술자는 없었다. 그들은 단순 기능인을 길러내는 데 관심을 가졌을 뿐 고급 과학기술인 배출은 극도로 꺼렸다. 각종 자료를 통해 본 일제하 이공계 교육 소사(小史).
    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일제 강점기 실업학교 학생들의 이발 실습. 조선 최초의 직업인 양성소인 보습학교를 흡수한 경성공립직업학교는 이발과와 함께 시계과 자동차과 등을 두었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1904년 일제가 통감부를 개설하면서 대한제국의 교육정책은 커다란 굴곡을 겪는다. 일제에 있어 이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당연한 ‘변화’였지만 대한제국으로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문맹정책과 사립학교 통제를 근간으로 한 일제 교육정책은 우민화(愚民化)와 점진적인 동화(同化)정책을 목표로 삼았다. 일제는 그 일환으로 관공립 보통학교를 확장, 강화했고 일본어 보급에 앞장섰다.

    통감부는 대한제국이 1895년 공포한 6년제 ‘소학교령’을 폐지하고 1906년 ‘보통학교령’을 공포해 수업연한을 4년으로 단축했다. 그후 일제는 관공립 보통학교 확장에 나섰는데,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동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조선의 아동들을 그들의 식민정책에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이었다. 1910년 3월경 보성학교가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제가 그 인가를 방해한 것도 그런 사례다.

    한일강제합방(1910) 다음해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으로 유학 가는 조선인을 조사·감독하는 이른바 ‘유학생 규정’을 공포하고 자격과 선발기준을 강화했다. 이렇듯 일제는 통감부시대부터 우리 민족교육에 깊숙이 개입해 식민정책을 노골화했다.

    1904년 일제는 대한제국이 설립한 관립 상공학교를 일종의 기능인 양성소인 공업전습소로 격하했다. 일제가 대한제국 황제가 만든 농상공학교를 직업인 양성소로 탈바꿈시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일제는 “당국의 지도하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공산품을 골라 한국 사람에게 그 제조법을 전수하고 또 공업상 필수적인 학술 및 응용의 초보를 가르쳐…”라고 밝혔듯, 한일강제합방을 앞두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부릴 수 있는 직공 양산이 절실했다. 일제 기관 또는 기업체의 하급직 기능공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기능인 양성 위한 공업전습소

    공업전습소에 설치된 학과는 염직·도기·금공·목공·응용화학·토목 등인데, 수학(修學) 연한은 2년이며 선발대상은 ‘공업을 경영하는 조선인의 자제’와 ‘장래 공업에 종사하려는 뜻이 뚜렷한 자’였다. 1907년 ‘제1회 학생모집 공고’ 신문광고를 보고 몰려든 응시생이 1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공업전습소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공업전습소 학생들은 학비 면제는 물론, 실습비로 수당까지 받았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발시험에서는 산술 점수 비중이 가장 높았고, 다음은 일본어, 한문의 순서였으므로 관립 소학교 또는 관립 고등소학교 출신의 친일파 집안 아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유리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회원 10여 명이 합격해 입학정원 50명을 초과하는 변칙적인 입학사건이 벌어지면서 학생 모집의 공정성도 사라졌다. 공업전습소가 철저히 우민정책을 기초로 해 세워졌으므로 친일분자를 우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공업전습소는 일본이 1800년대 중기 서양식 기술을 들어오면서 ‘전습생’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제도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일제는 우리에게 이를 ‘유일의 고등공업교육기관’이라고 선전했다. 공업전습소는 한일강제합방 후인 191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설립되면서 그 산하 부설 공업전습소로 바뀌었다가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개교할 때 그 부속 공업전습소가 됐다. 이때 수업연한이 2년에서 3년으로 늘었다. 그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편될 때 경성공업학교로 독립했다.

    공업전습소가 경성공업학교로 이어졌지만 일제 통제하의 공업교육은 일정한 기술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다. 전습교육은 철저히 실습 위주로 진행됐는데, 완성된 공산품 실물을 보여주고 이들의 제조에 필요한 간단한 기계조작법을 가르친 다음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훈련을 하는 방식이었기에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후 전습소 제도는 공장제 수공업의 발달과 함께 직인도제제(職人徒弟制)가 등장하면서 거의 없어졌다.

    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1926년 세워진 경성제국대학 전경. 경성제국대학은 1941년이 되어서야 이공학부를 신설한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직인도제제는 주로 소규모 개인 철공업소에서 주인(職匠)으로부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정기간 무보수 또는 침식제공 정도의 대우를 받으면서 숙련공(직공)이 될 때까지 봉사하는 제도로 경성공업학교 설립 무렵에 등장했다.

    이와 관련, 1923년 2월11일 ‘조선일보’는 ‘공업전습소 축소안에 대하여’라는 기사를 통해 “일제가 예산긴축의 일환으로 인원을 감축할 작정이어서 실업교육이 위축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인기 폭발! 보습학교, 직업학교

    한편 공업전습소와 함께 기능인 양성의 한 축이던 실업보습학교가 1910년 서울의 수하동, 미동, 어의동 등지의 3개 보통학교 부설로 설립됐다. 이후 보습학교는 일제의 빈번했던 교육 개정령 변경에 따라 학교명칭의 변경과 통폐합이 계속됐다(실업보습학교-간이학교-간이공업학교-공업보습학교-직업학교).

    실업교육에 있어 공업교육보다 농업기술교육에만 관심을 집중했던 조선총독부가 보습학교를 없앤 후 이를 간이공업학교로 바꾸고 성장을 거듭하도록 방치한 사실은 당시 공업교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열의가 그만큼 높았음을 시사한다. 20여 년간 변화무쌍한 과정을 거쳐 공업계 실업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한 보습학교는 한때 졸업생의 취직률이 높고 월급도 꽤 많아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보습학교는 변화의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일화도 많이 남겼다. 어의동 간이공업학교는 학생들의 전람회를 열었는데, 신선로, 주전자, 은잔, 화병, 화로, 농기구 등 1000점 이상이 전시돼 장안의 화제가 됐다. 한때 보습학교의 졸업생 가운데는 80원에 이르는 고액의 월급을 받은 이가 많았다. 80원이면 1930년 공공기관의 서기급이 받는 급료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미국 대공황 여파로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도 수업료 미납으로 중도 퇴학자가 속출하던 시절임을 상기하면 보습학교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어의동 간이공업학교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교육성과가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어의동 간이공업학교는 3·1운동으로 졸업생이 줄어든 후 학생 수 감소로 1921년 폐교했다. 일반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타 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3·1운동 이후 기층민중의 체계적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문화정책’을 표방하는 등 유화정책을 편 영향이 크다. 결국 모든 보습학교는 1931년 신설된 경성공립직업학교로 학제가 이관되면서 숱한 애환을 남긴 채 폐교되고 말았다.

    1930년 세계 대공황의 내습은 보습학교의 체제개편이 불가피할 정도로 일제뿐 아니라 국내 경제에도 깊은 주름살을 만들어놓았다. 그러나 공업전습소가 공업학교로 변경되고, 보습학교가 직업학교로 규모가 바뀌었지만 교육수준은 ‘기능공 양성소’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졸업하면 누구든 밥벌이 넉넉…”

    보습학교를 흡수한 경성공립직업학교는 1931년 5월 지금의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서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직업학교의 시작이었다. 이 학교는 도시에 사는 보통학교 졸업생에게 직업기술을 가르칠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기존 어의동 간이공업학교에서 가르치던 목공, 철공 등의 전문기술 이외에 전차 운전수, 백화점 점원, 관청급사, 전차차장, 철도국원 등 여러 방면의 요구에 따라 특과를 설치해 해당 기관의 종업원을 양성했다. 1931년 4월14일자 ‘매일신문’은 이 학교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경성공립직업학교는 독일의 유명한 직업학교 조직을 본떠 각종 과목을 두었다. 건축·가구·기계·전공·토목·철도 및 상업의 7개 과정이 있는데, 이 과정을 졸업하면 누구든지 자기의 밥벌이를 넉넉히 할 만한 전문기술인이 된다….”

    이를 증명하듯 이 학교의 학생모집 요강이 발표되자 지원자가 쇄도해 입학 경쟁률이 평균 11대 1에 달했으며 이런 높은 경쟁률은 한동안 계속됐다. 대공황의 여파로 학교마다 중퇴자가 속출하고 실업학교조차 지원율이 떨어져 추가모집을 하던 상황에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경성직업학교 개교가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한 총독부는 이를 계기로 직업학교를 전국으로 확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경기 지방의 직업학교는 일제의 식민지교육 ‘홍보무대’ 구실을 충실히 했다. 해마다 입시철이면 경성직업학교 학생모집 요강이 신문에 실렸다. 이후 경성직업학교는 이발·시계·자동차과를 증설하고, 1935년엔 본과 야간부에 기계·건축·토목과를 신설하는 등 발전을 거듭했다. 1939년에는 기계과와 광산과가 신설됐다.

    광산과의 신설은 수노동에 의존하던 채굴·운반·유지·보수 등의 부문에서 숙련공과 기술자의 수요가 급증했음을 증명한다. 일본인에게는 이 학교가 말 그대로 ‘직업학교’에 불과했지만, 우리에게는 당시 공업기술의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었던 셈이다.

    경성직업학교가 매년 가을 여는 작품전람회는 신문에 대서특필되곤 했다. 이 전람회를 통해 경성 시민은 염가로 제품을 살 수 있었다. 시계과 학생들은 좌판을 펴놓고 행인들의 시계를 바로잡아주기도 했다. 매년 3월에 거행되는 졸업식 행사도 신문지상에 소개됐으며, 거기에는 우등생 명단과 그들의 사진도 실렸다. 1940년 신문에 이 학교의 본과 졸업생이 149명, 전수과(專修科) 졸업생이 244명으로 보도된 것을 보면 학교의 규모가 꽤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학교가 이처럼 인기가 있었던 것은 최고 80%에 달하는 높은 취업률 덕분이다. 당시로선 이 학교가 취직의 등용문이었던 셈이다. 1937년 졸업생의 경우 기계과 35명 중 철도국에 17명, 회사에 5명, 상업에 7명이 취직하고 나머지는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한 일간신문은 이 학교를 “종합기술 분야의 학생이자 직장(職匠)!”이라고 격찬했다.

    경성공전, 일본인 전용 학교로 변질

    이 무렵 일제는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軍需)산업을 꾸준히 확충했으며, 일본인만으로는 도저히 군수산업에 투입할 기술인력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그들은 조선인 인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 이전부터 군수공장의 인력 부족분을 보강하기 위해 조선인 인력을 양성해오던 터였다. 그 무렵 직업학교는 각 지방 여러 곳에 세워졌다.

    한일강제합방 이후 일제의 식민지 과학기술 교육정책의 목표는 조선인에게서 과학기술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고급 과학기술 인력은 전적으로 본국에서만 공급받았다. 한동안 조선인에겐 대학 설립의 기회조차 봉쇄됐고,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 유학을 통한 이공계 대학의 졸업도 차단됐다. 1915년에 이르러서야 총독부는 조선인의 누적된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경성공업전문학교 설립을 결정했다. 그나마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다니는 학교였다.

    하지만 이미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선 국제 수준급 대학 설립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반일사상은 더욱 고조됐으며, 당시 조선인의 민족의식은 정치적 독립뿐 아니라 문화, 교육 등 각 방면에 걸쳐서 열화와 같이 표면화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민족의 실력배양을 위한 교육 진흥, 그중에서도 과학기술 진흥의 필요성은 개화기 이후 일반대중 속에 깊숙이 각인됐고, 독립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런 전국적 교육열풍은 고등교육기관 설립운동으로 확산됐고, 선교사와 민간 유지들에 의해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 그리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됐다. 그 즈음 선각유지들은 조선교육회를 조직하고 1923년에는 민립대학기성회를 만든 후 5개 학부(문리·공·상·농·의)의 민족종합대학 설립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민족종합대학 설립운동은 전국적인 모금운동으로 발전해 유지들을 주축으로 커다란 호응을 받았지만 일제의 방해로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3·1운동 후 소위 문화정치로 조선인을 다독거리려 했던 일본 총독은 이런 움직임에 압박을 받고 총독부가 주체가 된 고급 기술인력 양성기관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1926년 4월에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이다. 문제는 새로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에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 있었지 이공학부가 없었다는 점이다. 고급 기술인력의 양성을 표방했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과학기술 교육의 책임은 여전히 일제가 1916년 설립한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지게 됐다. 관립 공업전습소 후속으로 만들어진 이 학교는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칭됐다가 1944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다시 바뀌어 광복을 맞이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 전용학교로 변질됐다. 일제는 당초 일본인보다 조선인을 더 많이 뽑는다고 약속했지만, 조선인을 입학시킨 뒤 중도에 상당수를 탈락시킴으로써 사실상 일본인을 더 많이 배출하는 학교로 바뀌었던 것.

    이처럼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주로 일본인 교육을 담당했으므로 조선인에 대한 문호는 극히 좁을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선발기준이 매우 엄격했다. 이 학교의 수업 연한은 3년. 염직과, 응용화학과, 요업과, 토목과, 건축과 등 5개과가 있었으며 입학자격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자로 한정됐다. 초대 학교장은 중앙공업시험소장이 겸임했다. 1917년에 광산과가 증설되고 1918년에는 제1회 졸업생 18명이 배출됐으며, 1922년 경성공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전에 흡수통합됐던 공업전습소가 경성공업학교로 독립했다.

    조선인 중심의 연희전문 수리과

    1938년 4월에는 기계공학과와 전기공학과를 증설하고, 기존의 토목·건축과를 토목공학과·건축공학과로 개편하면서 현대식 전문 학과목이 처음으로 교과과정에 반영됐다. 기계공학과를 예로 들면 응용역학, 기구학, 기계공작법, 기계설계, 난방 및 냉동, 열역학, 증기원동기, 수력학·수력기계, 실험실습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일제시대 학생들이 목공 실습을 하고 있다. 1904년 최초로 세워진 공업전습소에는 염직, 도기학과와 함께 목공과가 있었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1944년 칙령에 의해 경성고등공업학교(약칭 ‘고공’)는 이름이 경성공업전문학교로 환원되는데, 당시 학과조직과 교과과정도 대폭 개편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수업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6년 개교 이래 1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중 조선인은 412명에 불과했고 기계공학과의 경우는 졸업생이 겨우 20명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일제 치하 시련 속에서 우리나라 전체 고급기술인력 중 인원수로는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고, 광복 이후 공업건설에 크게 공헌했다. 본교에 재직했던 교수로는 안동혁·이균상·나익영·최윤식·박동길·김원택이 있는데, 이중 박동길 박사는 고공 졸업 후 다시 일본 동북제국대학을 나왔으며 일제 말 북한 흥남 군수공장에서 지질전문가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1917년에 신설된 연희전문학교는 수리과(수학 및 물리과)의 루퍼스, 벡커, 응용화학과 학과장에 임명된 밀러 등 ‘비교적’ 충실한 교수진 덕분에 4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북장로교에서 학비를 지원받은 이원철은 미국 미시간대에서 천문학을 공부한 후 1926년 마침내 조선인 최초의 이학박사가 됐다. 연희전문 수리과(후에 ‘수물과’라고도 했다)는 학생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고, 일제의 방해 공작에도 25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해 훗날 우리나라 과학 발전의 밑거름 노릇을 하게 된다.

    일본 유학파에서도 성과는 나왔다. 우리에겐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이 바로 그런 경우. 1919년 동경제국대 실과를 졸업한 그는 줄곧 농사기술에 몰두해 1936년 같은 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0년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귀국해 원예시험에 종사하면서 1952년 중앙원예기술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중일전쟁 발발(1938) 이후 총독부는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조선인에게 공업학교 설립허가를 내주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몇몇 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됐다. 광업가 이종만이 각계의 조선인 후원을 바탕으로 해 1938년 평양에 설립한 대동공업전문학교가 그 대표적인 예로, 전시의 혼란에도 300여 명의 조선인 채광, 야금학 전공자를 배출했다.

    한편 일제는 1939년 일본인 광업가의 기부금으로 관립 형태인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중일전쟁으로 팽창한 일본의 군수산업은 광물·석탄 자원을 확보해야 했고, 이를 담당할 조선인 광산기술자 양성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 이공학부 탄생

    대륙 침략이 본격화화면서 과학기술인력 공급이 다급해진 일제는 1941년에 와서야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를 신설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에는 물리학·화학·토목공학·기계공학·전기공학·응용화학·채광야금의 7개 학과가 설치됐고 재직 교수·조교수는 모두 일본인만으로 구성됐는데, 한국인 강사로는 최호영·김종원·이재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업연한 3년의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같은 해 4월에 신입생 37명(그중 13명이 조선인)을 맞아 수업을 시작했다. 기계공학과의 교과과목은 무척 다양해, 앞에서 기술한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없던 과목이 많았다. 유체역학, 내연기관 특론, 자동차공학, 항공기일반, 철도차량, 기중기, 압축기 및 송풍기, 방적기계, 냉동기 및 냉동법이 그것.

    1943년 제1회 이공학부 졸업생 중 조선인은 13명으로 1941년 입학생이 모두 졸업했다. 국내 최초의 공학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중에는 현재 대한요업총협회장인 남기동(응용화학과 졸업) 박사도 포함돼 있다. 같은 해 물리학과를 졸업한 정근은 광복 후 북한으로 넘어간 경성제국대 이공계 출신 6명 중 한 사람으로, 북측의 원자로공학 총책으로 알려진 인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4월, 이공학부에 총 83명이 입학했는데 그중 한국인 학생은 17명이었으며 광복 후인 그해 9월에 조선인 12명이 졸업했다. 1941년 설립 후 1945년 서울대학교로 바뀌기 전까지 경성제국대학 이공계의 졸업생은 3회에 걸쳐 총 110명이었고, 이중 조선인은 31명뿐이었다. 8·15 광복 당시 한국인 재학생은 61명이었다. 이는 당시의 해외 유학 출신자에 견주어도 매우 적은 인원이었다. 광복 이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합쳐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됐다.

    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조선 최초의 이학박사인 이원철 선생. 1919년 연희전문 수리과를 졸업한 그는 초대 국립관상대 대장과 인하공대 초대 학장, 연세대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인 최초로 새로운별을 발견해 ‘원철 스타’라고 명명했다. 그의 논문이 실린 1931년 ‘신동아’ 창간호와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 옥상에 그가 설치했던 임시 천문대.(연세대학교 천문대 제공)

    이처럼 일제는 강점기 동안 과학기술인력의 양성을 철저히 외면하고, 저들의 필요에 따라 그 수를 조금씩 불려 나갔다. 그렇다면 광복 직후 한국의 과학기술인은 얼마나 됐고, 그후 이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

    아쉽게도 과학기술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필자가 분산된 자료를 모아 계산해본 결과 이공계 716명과 서울의 광산계통 출신 298명 정도가 전부였다. 연희전문 273명, 고공 412명, 대동광전 300여 명, 경성광전 298명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31명 등 광복 직후 한국의 과학기술인은 총 1314명뿐이었다. 해외유학파는 몇 명인지 알려진 바 없으나 귀국한 사람은 단 몇 사람에 불과하다.

    한국 과학의 代父들

    광복 후 연희전문 출신의 이원철 박사는 기상·천문학자로 기상대장과 인하대학 초대학장을 지냈다. 이태규 박사는 경성제국대 이공학부장과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으로서 교육정책 수립에 노력했다. 특히 1946년 그는 안동혁, 이승기와 함께 한국화학회를 창설하고 학문연구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후 다시 도미해 유타대학 교수로 지내다 1973년 귀국해 한국과학원(지금의 KAIST)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70이 넘은 나이에도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후학의 학위연구를 지도했다.

    일제하 이공계 교육 실상
    趙明濟
    ● 1931년 서울 출생
    ● 부산대 공과대 졸업,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공대 박사과정 수료(원자력공학)
    ● 기계기술사
    ● 現 한국산업기술사 연구회 고문
    ● 저서 : ‘굴러라 바퀴야’ ‘한국의 에너지 동력 발달사’ ‘山 넘어 江 건너’ 등


    한국의 산업기술과 공업의 기초를 다진 화학공학자 안동혁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사의 산증인으로 손꼽힌다. 안 박사는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일본 규슈제국대학에서 응용화학을 전공한 뒤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연구원과 모교인 경성고등공업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식민지 시기 고급 산업기술자로 성장한 인물. 광복 직후 과학기술자들을 조직해 대한화학회, 대한요업총협회와 같은 과학단체를 설립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중앙시험소와 경성공업전문학교 등 식민지 시기 과학기술 기관의 유산을 접수, 재편하는 데 공헌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상공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전력과 비료, 판유리, 시멘트 등 주요 기간산업의 건설을 추진했다.

    광복 직후 국내에서 전문학교와 대학 정규과정을 이수한 이공계 출신 기술인력 중 상당수는 교원이 부족하던 당시 안 박사처럼 각급 학교에서 후배들을 길러냈으며, 과학 대국 한국의 전통은 그들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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