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 실업학교 학생들의 이발 실습. 조선 최초의 직업인 양성소인 보습학교를 흡수한 경성공립직업학교는 이발과와 함께 시계과 자동차과 등을 두었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통감부는 대한제국이 1895년 공포한 6년제 ‘소학교령’을 폐지하고 1906년 ‘보통학교령’을 공포해 수업연한을 4년으로 단축했다. 그후 일제는 관공립 보통학교 확장에 나섰는데, 이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동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조선의 아동들을 그들의 식민정책에 무조건 복종하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이었다. 1910년 3월경 보성학교가 민립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제가 그 인가를 방해한 것도 그런 사례다.
한일강제합방(1910) 다음해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으로 유학 가는 조선인을 조사·감독하는 이른바 ‘유학생 규정’을 공포하고 자격과 선발기준을 강화했다. 이렇듯 일제는 통감부시대부터 우리 민족교육에 깊숙이 개입해 식민정책을 노골화했다.
1904년 일제는 대한제국이 설립한 관립 상공학교를 일종의 기능인 양성소인 공업전습소로 격하했다. 일제가 대한제국 황제가 만든 농상공학교를 직업인 양성소로 탈바꿈시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당시 일제는 “당국의 지도하에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공산품을 골라 한국 사람에게 그 제조법을 전수하고 또 공업상 필수적인 학술 및 응용의 초보를 가르쳐…”라고 밝혔듯, 한일강제합방을 앞두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부릴 수 있는 직공 양산이 절실했다. 일제 기관 또는 기업체의 하급직 기능공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
기능인 양성 위한 공업전습소
공업전습소에 설치된 학과는 염직·도기·금공·목공·응용화학·토목 등인데, 수학(修學) 연한은 2년이며 선발대상은 ‘공업을 경영하는 조선인의 자제’와 ‘장래 공업에 종사하려는 뜻이 뚜렷한 자’였다. 1907년 ‘제1회 학생모집 공고’ 신문광고를 보고 몰려든 응시생이 1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공업전습소에 대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공업전습소 학생들은 학비 면제는 물론, 실습비로 수당까지 받았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발시험에서는 산술 점수 비중이 가장 높았고, 다음은 일본어, 한문의 순서였으므로 관립 소학교 또는 관립 고등소학교 출신의 친일파 집안 아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유리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난데없이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회원 10여 명이 합격해 입학정원 50명을 초과하는 변칙적인 입학사건이 벌어지면서 학생 모집의 공정성도 사라졌다. 공업전습소가 철저히 우민정책을 기초로 해 세워졌으므로 친일분자를 우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래 공업전습소는 일본이 1800년대 중기 서양식 기술을 들어오면서 ‘전습생’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제도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일제는 우리에게 이를 ‘유일의 고등공업교육기관’이라고 선전했다. 공업전습소는 한일강제합방 후인 191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설립되면서 그 산하 부설 공업전습소로 바뀌었다가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개교할 때 그 부속 공업전습소가 됐다. 이때 수업연한이 2년에서 3년으로 늘었다. 그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1922년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편될 때 경성공업학교로 독립했다.
공업전습소가 경성공업학교로 이어졌지만 일제 통제하의 공업교육은 일정한 기술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다. 전습교육은 철저히 실습 위주로 진행됐는데, 완성된 공산품 실물을 보여주고 이들의 제조에 필요한 간단한 기계조작법을 가르친 다음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훈련을 하는 방식이었기에 그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그후 전습소 제도는 공장제 수공업의 발달과 함께 직인도제제(職人徒弟制)가 등장하면서 거의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