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7년 부산 출생<br>▼ 서울대 작곡과 졸업, 독일 베를린예술대 지휘과 수료, 카라얀 국제콩쿠르 입상<br>▼ 국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수원시향·독일 체임버오케스트라 지휘자<br>▼ 現 경희대 음대 교수, 유라시안 필하모닉 지휘자
제1 바이올린들이 힘든 목소리를 냈다.
“맞아 맞아. 이제는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여섯 달 동안이나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해요.”
제2 바이올린들이 맞장구를 쳤다. 첼로는 웅얼거리고, 호른은 점잖게 동조했다.
230년 전 하이든이 작곡한 교향곡 제45번 ‘고별’. 귀로 들려오는 그 선율이 내게 한 편의 동화처럼 펼쳐졌다. ‘금난새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에서 내게 일어난 일이다. 공연이라 해봐야 뮤지컬 몇 편 본 것이 전부인 내가 클래식 음악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금난새의 해설 덕분이었다. 폭소를 자아내는 그의 해설에 나 같은 사람도 뒤따라 나오는 악기 소리들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가 재미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호들갑이려니 했다. 그러나 내 눈과 귀에 들어오는 연주회는 그 이상이었다. 해설은 톡톡 튀게 재미와 위트가 넘쳤고, 그 때문에 연주는 동화책장을 넘기듯이 스토리와 의미를 갖고 살아났다.
2부는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무슨 단조 어쩌고 하는 곡이었다. 지금은 작품명조차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감동은 더 크고 깊었다. 1부의 하이든이 동화라면 2부의 브람스는 기승전결이 분명한 역사소설 같았다. 10여 대의 현이 뽑아내는 섬세하면서도 굵직한 소리들, 관악기와 타악기의 강렬한 두드림.
이런 것들이 나의 모든 감각기관을 압도했다.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진동은 객석에 앉은 내 눈과 귀를 자극하는 것으로 모자라, 피부를 뚫고 들어와 뼛속을 울릴 정도였다. 온몸의 근육들이 움찔거리는 느낌. 다른 청중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장소였다면 아마 나도 모르게 일어서서 금난새를 따라 팔과 다리를 흔들어댔을 것이다. ‘아~이래서 금난새구나’, 싶었다. 그 음악회에서 나는 금난새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클래식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됐다.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둘째아들
사실 금난새씨를 대화에 초청한 것은 그의 생활태도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자세가 자유인의 철학에 맞다. 그는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수원시향을 택했다. 수원시향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후 그는 더 큰 도전에 나선다.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순수 민간오케스트라를 만든 것이다. 스스로 음악감독이자 CEO가 됐다. 그가 자랑스럽게 말하듯이 정부 돈은 한 푼도 받지 않는다. 고상한 음악가가 다른 사업가들과 마찬가지로 고객을 감동시켜야만 생존이 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연간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하고 있으니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그런 사실들에 마음이 끌려 금난새씨를 ‘자유인과의 대화’에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회에 가본 후 나는 그의 철학과 생활사보다는 그가 만들어내는 음악과 음악 이야기에 더 매료되고 말았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스케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밤 시간의 짬을 얻어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건너편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밤 공기가 제법 쌀쌀하던 날이었다.
김정호 한때 ‘내 탓이오’ 운동이 있었는데요. 금 선생께선 그런 원칙에 충실한 분이어서 모셨습니다. 우리나라 고전음악의 낙후를 청중의 무지 탓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청중에게 기쁨을 줘서 예술을 사랑하는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태도 말입니다. 안정된 지원금을 마다하고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독립적인 음악기업을 만들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시킨 것도 남다르고요. 어떤 계기로 그런 자세를 갖게 됐습니까.
금난새 성장환경 때문일 겁니다. 제가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대개 첫째에게 모범생 기질이 있다면 둘째는 반항적이고 창의적인 기질을 타고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께서 “학교 가서 좋은 친구 만나라”고 하시잖아요. 그럼 그래야지라고 수긍하기보다는 ‘내가 좋은 친구가 돼야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