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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처첩들은 귀해지고 자식들은 살이 찐다

‘절대권력’의 위험한 유혹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처첩들은 귀해지고 자식들은 살이 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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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첩들은 귀해지고 자식들은 살이 찐다
왕조체제에서 제왕의 수중에 있는 최종결정권, 최고권력은 그것이 주는 유혹의 힘이 너무 컸다. 왕궁 밖에서는 야심가들이 제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고, 왕궁 안에서는 소인배들이 제왕 주변을 맴돌며 호시탐탐 권력을 탐했다. 다른 점이라면 야심가들의 쟁탈 방식은 목숨을 건 적나라한 싸움이고, 궁중 소인배들의 쟁탈 방식은 음모와 간계를 동반한 암투라는 것이다.

야심가들의 목표는 제왕 자리고, 궁중 소인배들의 목표는 제왕의 실권 즉, ‘최종결정권’이다. 그러니 소인배는 제왕이, 제왕은 소인배가 필요했다. 어떤 때는 소인배가 제왕을 우롱했고, 어떤 때는 제왕이 소인배들을 우롱했다. 하지만 정작 우롱당한 것은 수많은 백성이다.

일각에서는 지금 우리의 권력체제를 ‘제왕적 권력체제’라고 일컫기도 한다. 부끄러운 말이다. 우리 정치가 아직 제왕적 권력체제를 청산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엄연히 국민이 직접 자기 손으로 최고권력자를 뽑는 민주제도 아래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권력자를 정점으로 하는 그 내부의 행태 또한 왕조체제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는 점이다. 권력자가 집권 후기로 접어들어 레임덕이 심하게 오거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까지는 이 체제를 견제할 마땅한 수단과 방법이 없다. 권력자가 지닌 바로 그 최종결정권에 빌붙어 최후의 순간까지 맹목적으로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소인배들이 권력자를 극력 옹호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 권력자를 따라다니며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나라에 패거리 정치문화가 뿌리 깊게 내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9족을 다 죽여도 못해?”



물론 옛 절대왕조 체제의 권력자 주변에 소인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정한 권력에 맞서 분연히 목숨을 내던진 이도 적지 않다. 명나라 3대 황제 주체,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는 흔히 조선시대 수양대군(세조)과 비교되는 제왕이다. 그도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내몰고 황제 자리를 찬탈했다.

그의 찬탈에 방효유(方孝孺)라는 학자가 극렬하게 저항하다 무려 ‘9족’이 죽는 끔찍한 보복을 당했다. 당시 도성이 파괴될 때 궁중에 큰불이 났다. 황제 건문제(建文帝)가 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방효유는 상복을 입고 통곡하면서 대전으로 들어갔다. 방효유는 주체에게 왜 쿠데타를 일으켰냐고 물었다.

주체 : 주공(周公)을 본받아 성왕(成王, 건문제를 주나라 성왕에 비유)을 보좌하려 했다.

방효유 : 그 성왕은 어디 계시오?

주체 : 안타깝게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죽었지.

방효유 : 그럼 왜 성왕의 아들을 세우지 않는 거요?

주체 : 나라는 연장자에게 의지해야지.

방효유 : 그럼 성왕의 동생은 뒀다 뭐 하려고요?

방효유의 마지막 추궁에 주체는 더는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주체는 보좌에서 내려와 “이건 우리 주씨 집안일이니 선생이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아니잖소?”라며 달래보려 했다. 그러고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한 다음 “천하에 알리는 조서는 선생이 쓰지 않으면 안 되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붓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주체를 향해 “목이 떨어져도 조서는 쓸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 말에 주체는 안색이 변하면서 “9족을 다 죽여도?”라고 위협했다. 방효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10족을 다 죽인다 해도 할 수 없소이다”라고 응수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주체는 방효유의 9족을 몰살했을 뿐 아니라 그의 문생들과 친구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 일에 연루돼 죽은 사람만 873명에 달하고, 군대로 끌려간 사람은 1000명이 넘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주공에 자신을 비유하고 나선 주체의 이런 논리를 조선의 세조가 그대로 베꼈고, 사육신이 이를 비난했다.

방효유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분연히 나섰다가 당당히 죽음을 맞았으나 주체는 결코 승리자가 아니었다. 주체는 방효유의 명성을 빌려 자신의 의도를 분칠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결국 ‘역신 찬탈’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영원히 남기게 됐다.

왕조체제에도 이런 지성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지도자란 말인가. 아니면 그 지도자를 뽑는 백성들이 문제란 말인가. 또 한 사람의 ‘위기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1613~1682)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한 나라의 흥망은 백성들 책임이다.

신동아 201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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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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