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호

날래고도 끈기 있는 ‘사천(四千)정신’ 본고장

浙 - 루쉰과 마윈의 고향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5-04-21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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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첩하면 끈기가 없고, 끈기가 있으면 둔하기 쉬운데 저장성 사람들은 이 둘을 다 갖췄다. 춘추전국시대 때 ‘오랑캐 중의 오랑캐’로 취급받던 저장성은 수양제 대운하 건설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다. 현재 중국에서 민영기업이 가장 발달한 곳도 저장성이다.
    날래고도 끈기 있는 ‘사천(四千)정신’ 본고장
    중국에서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곳,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의 서호(西湖)를 찾았다. 중국 관광지가 으레 그렇듯 입구에서 실제 목적지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다. 서호 입구에서 한 어르신에게 서호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시계를 보더니 냅다 외쳤다. “뛰어!”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 달렸다. 너무 빨리 뛰어서 숨이 턱에 닿았다. 왜소한 어르신이 하도 잘 뛰니 힘들다 할 수도 없었다. 평소의 게으름과 운동 부족을 원망할밖에.

    한참 달리다가 너무 힘들어 쫓아가기를 포기하려 할 때, 눈앞에 탁 트인 호수가 펼쳐졌다. 태양이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뇌봉탑(雷峰塔) 저편에 내려앉고 있었다. 서호십경(西湖十景) 중 하나인 뇌봉석조(雷峰夕照)였다.

    때는 10월 중순의 오후 5시. 어르신은 해가 지는 때를 알고 있었다. 그냥 어슬렁어슬렁 걷다가는 서호의 노을을 놓치기 십상이라 몸소 뛰어서 서호까지 나를 데려다준 것이다. ‘아름다운 쑤저우(蘇州) 아내를 얻고, 인심 좋은 항저우에서 사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던가. 이날 함께 여행한 베이징 친구는 항저우에 반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거리는 깨끗하며, 여자들은 예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절(浙)’은 ‘강 이름 절(浙)’자다. 절강(浙江)은 항저우의 젖줄, 전당강(錢塘江)의 옛 명칭이다. 또한 ‘절(浙)’은 강물[水]이 급하게 꺾여[折] 흐른다는 뜻도 있다. 전당강은 황산(黃山)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다 북동쪽으로 꺾이고 다시 동남쪽으로 꺾이며 바다로 들어간다. ‘갈 지(之)’자로 굽이치는 강은 긴 세월 동안 크나큰 격변을 겪은 저장성의 역사와 닮았다.



    피 튀긴 吳越爭패

    춘추전국시대에 장쑤(江蘇)성은 오나라였고, 저장성은 월나라였다. 상하이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30분만 가면 장쑤성 쑤저우, 남쪽으로 1시간 반을 달리면 저장성 사오싱(紹興)이다. 오와 월, 두 나라의 수도가 이토록 가까웠다.

    그러나 친해지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이었다. 오나라의 명신 오자서는 오월이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우리 오나라와 저들 월나라는 서로 원수로 싸울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삼강(三江)이 둘러싸고 있어 백성들은 싸움을 피해 옮길 곳이 없습니다. 하여 오나라가 살면 월나라가 죽을 것이요, 월나라가 살면 오나라는 죽게 되어 있으니 장차 이런 형세는 바꿀 수가 없습니다.”

    월나라의 재상 범려도 이 점에 동의했다.

    “우리와 삼강오호(三江五湖)의 이익을 다투던 자, 바로 오나라가 아닙니까.”

    오나라와 월나라가 패권을 놓고 극렬하게 다투니(吳越爭패), 다툼은 미움을 낳고 전쟁은 원한을 낳았다. 땅을 두고 다툰 싸움이 복수를 위한 전쟁으로 변하면서 마침내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었다.

    오왕 합려는 월왕 구천의 기습을 받고 죽었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원수를 갚기 위해 딱딱한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실력을 키운 끝에 월왕 구천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구천은 쓰디쓴 치욕을 잊지 않겠다며 쓸개를 핥은 지 10여 년 만에 오왕 부차에게 설욕하고 오나라의 뒤를 이어 5번째 패자(覇者)가 되었다. ‘부차는 장작나무 위에서 잠을 자고, 구천은 쓸개를 핥은 끝에 복수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다.

    중국사는 ‘오랑캐’를 중원에 포섭해가는 역사다. 일찍이 문화의 꽃을 피운 중원은 남방의 신흥 강국 초나라를 오랑캐로 보았다. 그러나 초나라에는 사나운 오나라가 오랑캐였고, 중원의 법도를 아는 오나라엔 개념 없는 월나라가 진짜 오랑캐였다.

    오의 수도 쑤저우성이 월에 포위된 지 2년째, 더 이상 싸울 기력도 의지도 없는 오나라는 월나라에 화친을 청했다. 사실 굶어죽을 지경이니 한 번만 봐달라는 통사정이었다. 춘추시대는 아직 인간미가 있던 시절이라 서로 좋게 전쟁을 끝내는 것이 도리였다. 그러나 월나라의 범려는 화친을 매몰차게 거절하며 말한다.

    “우리가 지금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사실은 금수나 마찬가지요. 우리가 어찌 중원의 그런 교묘한 말씀을 알아듣겠소?”

    날래고도 끈기 있는 ‘사천(四千)정신’ 본고장

    항저우 서호의 뇌봉탑에 노을이 지는 뇌봉석조(雷峰夕照). 서호십경(西湖十景) 중 하나다.



    ‘중국의 유대인’

    이처럼 월나라는 거칠고 사나운 야만인이었다. 중원의 도리 따위는 몰라도 당당한, 오랑캐 중의 오랑캐였다. 그러나 전당강이 물길을 바꾸듯 저장성은 야만적인 변방에서 문화의 중심으로 변했다. 수양제의 대운하가 열리자 저장성 경제는 크게 발전한다. 북방의 유목민족에게 중원을 잃은 송나라는 항저우를 수도로 삼아 남송 임안(南宋 臨安) 시대를 열었다.

    당시 항저우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저잣거리에는 온갖 진귀한 보석이 즐비하고 집집마다 화려한 비단이 넘쳐’났다. ‘후저우(湖州)의 곡식이 여물면 천하를 배부르게 할 수 있고, 만 가구에서 베틀의 북 소리가 울리니, 금화(金華)의 옷이 천하를 덮는다’는 말은 저장성의 경제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려준다. ‘장쑤성과 저장성이 없다면 나라가 무너진다’고 할 정도로, 저장성은 줄곧 중국을 지탱해왔다.

    저장인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민첩하고 날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동의 날랜 병사들은 저장성을 삼오(三吳)의 근거지로 만든 힘이었다. 간장·막야 전설과 검의 대명사 용천검(龍泉劍)에서 알 수 있듯 오월은 명검으로 유명했다. 날랜 병사가 날카로운 칼로 승부를 벌이는 단병접전 전술은 오월의 장기였다. 오월 지역을 기반으로 삼은 초패왕 항우, 소패왕 손책 모두 속전속결로 단기간에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저장성 펑화(奉化)현이 배출한 명장 장제스는 천하를 거의 다 얻었다가 호적수에게 뺏긴 점에서도 항우의 후배답다.

    저장성 문인 역시 민활하다. 대문호 루쉰(魯迅)과 ‘문림(文林)의 고수’ 위화(余華), 모두 촌철살인의 재치가 번뜩인다. 중국 최고의 명필 왕희지, 양명학을 창시한 왕양명, 혁명가이자 작가인 추진(秋瑾) 역시 저장성이 낳은 인재들이다.

    저장인은 상업에서도 빛을 발한다. ‘중국의 유대인’ 저장상방은 민첩하게 움직이고 끈기 있게 노력한다. 민첩한 사람은 끈기가 없고 끈기 있는 사람은 둔하기 마련인데, 두 미덕을 겸비한 저장 상인들은 ‘빠른 물고기 이론(快魚論)’과 ‘사천정신(四千精神)’을 낳았다.

    빠른 물고기 이론이란 ‘빠른 자가 살아남는다’는 주장이다. 즉, 크고 강한 물고기가 작고 약한 물고기를 잡아먹지만, 빠른 물고기가 느린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저장 상인들은 시장 조사·제품 개발·생산·판매·유통 등 사업 전 과정을 빠르고 유연하게 수행한다. 그래서 첫날 정보를 알아내고 바로 다음 날 주문을 내는가 하면, 사흘 안에 샘플을 만들고 일주일 안에 대량생산을 한다.

    사천정신(四千精神)이란 온갖 고생을 감당하며 우직하게 일을 추진하는 마음자세를 말한다. 천산만수(千山萬水)를 다 가고, 천언만어(千言萬語)를 다하며, 천방백계(千方百計)를 다 짜고, 천신만고(千辛萬苦)를 다 겪는다.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면 성공은 다가오기 마련이다.

    ‘천하와 통하는 항구’

    날래고도 끈기 있는 ‘사천(四千)정신’ 본고장

    운하마을 시탕(西塘). 영화 ‘미션 임파서블3’ 촬영지로도 유명하다(위). 신장 위구르 자치구 출신인 듯한 여자 상인(왼쪽)이 관광객을 응대하고 있다(아래).

    저장성은 민영경제가 가장 발달한 곳이다. 2014년 중국 500대 민영기업 중 51개가 항저우에 있다. 공동 2위인 상하이, 톈진은 각각 15개에 그친다. 저장성은 중국에서 인터넷 쇼핑몰이 가장 많은 곳인데 그중 절반 이상이 항저우가 근거지다. 대표주자는 단연 마윈의 알리바바. 국내총생산(GDP) 대비 특허 출원 건수가 중국 내 2위로서 과학기술 혁신 잠재력이 강한 곳으로도 손꼽힌다.

    2012년 억만장자가 많은 도시 순위에서 항저우는 베이징, 상하이, 선전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홍콩 제외). 부유층이 많은 만큼 명품 소비가 많고, 유명한 관광지답게 외지인들의 지출도 크다. 항저우다샤(杭州大厦) 백화점은 2010년 중국 최초로 연매출 50억 위안(약 8800억 원)을 돌파했고, 랑콤은 2012년 항저우 내 단 한 개 매장에서 전 중국 최고 매출인 1700만 위안(30억 원)을 달성했다.

    닝보(寧波)는 안으로는 강남, 밖으로는 한국, 일본, 동남아 등 환황해권에 갈 수 있어 일찍이 ‘천하와 통하는 항구’라고 불렸다. ‘온 세계를 두루 다니는 것보다는 영파의 강변을 거니는 것이 낫다’고 할 만큼 해외교역이 발달했다. 지난해 닝보는 부산을 누르고 물동량 기준 세계 5위의 항구로 등극했다. 동해함대가 주둔한 핵심 군항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18일에는 저장성 이우(義烏)에서 화물열차가 출발해 12월 9일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후, 올해 2월 22일 이우로 귀환했다. 중국과 유럽 사이 1300km를 잇는 ‘이신어우(義新歐)’ 철도가 21세기 실크로드를 연 셈이다. 저장성은 신(新)실크로드 시대를 맞아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영화 ‘쉬즈더원’에서 벼락부자 진분은 중국을 두루 유람한다. 저장성 시시(西溪)의 가이드는 진분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송 고종은 금나라 군사에게 쫓기던 중 시시의 아름다움에 반해 행궁을 차리고 싶었다. 그러나 피난 가는 처지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송 고종은 “시시여, 잠시 기다리시게”라는 시를 지어 아쉬움을 애써 달랬다. 이 이야기를 듣자 진분은 말한다.

    “송 고종 늙은이야 돈이 없어 그딴 말밖에 할 수 없지만, 나는 가진 게 돈뿐이니 시시가 맘에 든다면 기다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 남은 인생밖에 없네.”

    그러자 가이드는 진분을 호숫가에 지어진 호화주택에 데려가 집 사기를 권한다. “앞에 보이는 호수가 선생님 개인 소유가 되는 겁니다.”

    이 대목은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중국의 벼락부자는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이 황제보다 낫다며 자고자대(自高自大)한다. 급속한 경제성장은 큰 부를 낳았고, 부유함은 자신감을 낳았다. 돈과 자신감은 부동산 버블을 한껏 부풀렸다.

    자력갱생형 투기?

    둘째, 저장성은 부동산 투기의 온상이다. 2012년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중국에서 퇴직 후 노후를 보내기 가장 좋은 도시, 자연환경과 가장 잘 어우러진 도시로 항저우를 꼽았다. 삶의 질이 높은 저장성은 많은 중국인이 살고 싶어 하는 만큼 투기열이 대단하다.

    저장 상인들이 부동산 투기에 지나치게 관심이 높은 것도 문제다. 저장성에는 ‘사기꾼은 있어도 거지는 없다’는 말이 있다. 저장인은 구걸하느니 스스로 돈을 벌지만, 돈 버는 수단을 가리지도 않는다. 이익에 밝은 저장상방은 옛날부터 금융, 부동산을 중요시했다.

    부동산은 중국 GDP의 13%를 차지하고, 광의의 부동산은 고정 자산 투자의 3분의 1에 달한다. 부동산 침체가 당장 위기를 초래하지 않는다 해도 당분간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다. 2010년 중국 최고의 집값을 자랑하던 항저우는 7위로 떨어졌다. 원저우(溫州)는 3년 연속 부동산 값이 하락해 집값이 반 토막 났고 1인당 GDP는 4만3632위안(약 770만 원)이 되었다. 항저우, 닝보에 이어 저장성 3위였던 도시가 순식간에 꼴찌로 추락했다.

    그러나 원저우에 대한 중국인의 시선은 차갑다. ‘사방으로 출격하고 팔방에서 뿌리내리자’며 천하를 누빈 원저우 상인이 부동산 값을 한껏 올려놨기 때문이다. 황웨이핑 인민대 교수 역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원저우의 자금난은 투기꾼의 자금난이다.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원저우 기업인을 정부 자금으로 구제하는 것은 국민의 혈세로 투기꾼의 밑천을 마련해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본업보다 돈놀이에 맛 들린 기업들이 위탁대출에 나섰다. 저장성 내에서 위탁대출에 종사하는 기업이 25개로 중국에서 가장 많다. 2012년 말 기준으로 본업과 무관한 부동산업체에 위탁대출을 제공한 전국의 상장기업이 25개인데, 그중 저장성 기업이 9개로 독보적 1위였다.

    원저우 상인은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원저우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개발했다. 개혁개방 후 유일한 사례라 ‘원저우 모델’로 불렸다. 그러나 자력갱생의 길은 힘들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기업은 첨단산업에 뛰어들어 고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은행은 규모도 크고 안정성도 높은 국유기업 위주로 대출해줬다. 그러나 원저우의 중소 민영기업들은 대부분 노동집약적인 분야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투자자금을 마련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원저우 상인이 사채, 부동산 투기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호의 아름다움은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백거이와 소동파는 항저우로 좌천당했지만, 곧 항저우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다. 피난 온 송 조정은 옛 수도 카이펑(開封)을 다시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항저우에 빠져들었다. 항저우를 화려하게 만든답시고 10년치 세금을 한꺼번에 거두자 백성들은 “서호가 서시 같다”고 원망했다. 절세미녀 서시에 홀린 오왕 부차가 월왕 구천에게 멸망했듯, 서호에 홀린 송 조정도 사치향락을 일삼다 원나라에 의해 멸망했기 때문이다.

    날래고도 끈기 있는 ‘사천(四千)정신’ 본고장

    운하마을 시탕의 가옥에 그려진 그림, 뱃사공, 노을진 풍경, 항저우 시장에 있는 포대화상(布袋和尙) 불상, 저장성 출신으로 풍만한 배를 드러내며 웃는 이 고승의 불상은 매우 인기 있는 사진 촬영 포인트다(왼쪽부터).

    서호에 서린 원망

    맹자의 말처럼 위정자가 돈과 여자를 좋아하더라도 백성과 함께 즐기면 괜찮다.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혼자 독차지할 때 문제가 된다. 서호의 땅, 저장성에서 태어나 중국의 병폐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한 루쉰은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 못지않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다. 위화는 “루쉰은 더 이상 한 작가의 이름이 아니라 모든 중국인이 다 아는 단어, 정치와 혁명의 의미를 내포한 중요한 단어였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친구와 말다툼할 때 “루쉰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야!”라고 말하면 친구가 곧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루쉰의 작품은 교과서에서 퇴출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차단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인민이 루쉰의 비판의식을 접하기를 원치 않는다. 쉬둥보(徐東波) 사오싱 루쉰기념관 부관장은 말한다.

    “감히 쓰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면 학생들과 국가에 미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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