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아이다운 몸 만들면 일은 곧 즐거움

  • 김광화 농부 flowingsky@naver.com

    입력2005-05-25 17: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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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션업체 ‘데코’의 이원평 회장은 창의적인 발상을 갈구하는 직원들에게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생각하라”고 주문한다. 옷 만드는 회사의 경영자다운 말이다. 그런데 몸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 김광화씨가 보내온 글을 읽어보니 과연 몸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생하게 다가온다.
    • 그는 창의력의 원천인 호기심을 가지려면 몸부터 아이처럼 부드럽게 가꿔야 한다고 말한다.
    • 몸이 부드러워지면 뇌까지 말랑말랑해지는 것일까.
    아이다운 몸 만들면 일은 곧 즐거움
    나이가 들수록 몸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다. 몸을 많이 쓰는 산골 생활을 하다 보니 더 그렇다. 농사일도 되도록 기계를 덜 쓰면서 몸으로 때우려 한다. 그러다 보니 색다른 체험도 자주 한다. 우선 자세가 잘못될 경우 골병들기 쉽다. 가장 좋은 보기가 김매기가 아닐까. 쪼그리고 앉아 어정쩡한 자세로 김매다 보면 허리가 아프다. 참고 계속하면 다리에 피가 안 통해 무릎이 저려온다. 잠깐 쉬었다 다시 하면 금방 또 아파온다.

    한번은 김을 매다가 허리가 너무 아파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살 것 같았다. 그 자세로 손에 닿는 풀을 뽑는데, 이번에는 마음이 쓰였다. 누구 보는 사람이 없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둘레를 살폈다. 멀리서 차 엔진 소리만 들려도 얼른 자세를 고쳐 쪼그리고 앉는다. 차가 지나가면 다시 무릎을 꿇는다. 앉은 자리의 풀을 뽑고는 앞으로 나아갈 때는 기어간다. 두 손으로는 땅을 짚고 개미처럼 긴다. 가끔 작은 돌멩이라도 바닥에 있으면 무릎이 아프지만 허리에는 좋은 자세다.

    몇 해를 그렇게 하다 보니 바지의 무릎 자리가 자주 해어졌다. 그럼, 잘 됐다 싶어 재봉틀로 바지 무릎에 천을 덧댄다. 여러 겹으로. 그야말로 누더기다. 그러고 나서 땅바닥을 기어다니니 거지는 저리 가라다. 바지는 푸른색인데 광목으로 덧댄 곳은 누런색이다. 김매다 보면 무릎이 닿은 자리만 흙빛이 된다. 그래도 허리가 든든한 게 어딘가.

    무릎 꿇고 김맨 지가 어느덧 세 해째인데 아직도 지나가는 사람이 볼까 마음이 쓰인다. 무릎을 꿇는 게 몸은 편한데 마음은 왜 불편한가. 남에게 피해 주는 일도 아닌데 왜 자꾸 눈치를 보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 날의 경험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까마득한 초등학교 시절. 아마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교실에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동무들 몇 명이랑 선생님 앞으로 불려나가 무릎을 꿇어야 했다. 물론 두 손도 들고 벌을 섰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선생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들을 발가벗겨 운동장을 돌게 했다. 그때 모멸감이 내 뼛골 깊이 배었나 보다.

    또 다른 기억 속에서 무릎을 꿇는 건 패배나 항복이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가끔 보았다. 대학 시절의 운동가요인 ‘훌라송’도 단단히 한몫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내 의식 깊숙한 곳에서 몸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무릎 꿇고 일한다는 건 내게 혁명에 가까운 사건이다. 억눌린 잠재의식을 치유하는 혁명이요, 몸이 보내는 신호에 마음이 열리는 또 다른 혁명의 시작이기도 하다. 농사 내내 풀 뽑을 일이 있으면 무릎을 꿇는다. 이제는 쪼그리고 김매는 건 5분도 못 견딘다.

    한번은 한 방송작가가 취재차 와서,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있다.

    “김맬 때 힘들지 않으세요?”

    “무릎 꿇고 하니까 할 만합니다.”

    그랬더니 그 작가는 당장 생각을 앞질러 내가 땅을 공경하는 걸로 받아들였다. 나는 허리 편하자고 하는 자세일 뿐인데. 그런데 하다 보니 땅에서 느끼는 것이 많기는 많다. 우선 곡식이나 풀 그리고 벌레를 더 잘 알게 된다. 자세가 잘못되어 일이 힘들 때는 얼른 일을 끝내는 게 목표다. 김매는 풀이 무슨 풀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풀은 그 종류를 떠나 ‘처치해야 할 일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무릎을 꿇어 허리가 든든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똑같은 눈이지만 보이는 게 다르다. 풀도 알고 보니 풀마다 참 다르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새로 이름을 아는 풀이 부쩍 늘어난다. 먹을 수 있는 풀을 먼저 알게 된다. 영하 20℃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겨울을 푸르게 나는 풀을 볼 때는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곡식도 그렇다. 거두기만 하면 되지, 곡식의 꽃이 언제 어떻게 피는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콩꽃을 처음으로 보았다. 우거진 콩잎 사이 조그마한 보랏빛 꽃. 네가 콩꽃이구나! 모양이 자그마한 나비 같아 귀엽고 앙증맞다. 엎드린 바로 코앞에 꽃이 피어 있다. 그 꽃이 지고 꼬투리가 생기고 자라나는 과정이 동영상처럼 내 뇌리에 또렷이 박힌다.

    아이다운 몸 만들면 일은 곧 즐거움

    식구가 함께 산에서 산나물을 뜯고 있다. 저마다 자기 길을 간다.

    홍화꽃이 핀 밭고랑을 기어갈 때는 황홀하다. 노랑, 주황, 빨강이 어우러진 홍화꽃이 내 눈을 잡아끈다. 여름에는 곡식이 무성하게 자라 밭고랑에 엎드리면 그늘도 더 짙다. 뜨거운 햇볕이 싫어 한 고랑 일이 끝나면 일어서지도 않고 얼른 다른 고랑으로 몸을 숨긴다. 그야말로 곡식 숲에 들어온 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렇게 일하다 보면 가끔 네 발 짐승이 가진 본성이 살아나는 걸 느낀다. 네 발로 밭고랑을 기다가 풀이 적은 곳에서는 엉덩이를 들고 네 발로 달려본다. 얼마 못가 주저앉는다. 사람이 수만년 동안 직립보행을 하니 사람 허리가 땅이랑 수평이 안 되어 있다. 팔목은 단련이 안돼 몸무게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무릎 꿇고 일하기는 팔목이랑 팔뚝 힘을 강하게 한다. 하체보다 상체가 약한 내게 알맞은 운동인지도 모르겠다.

    무릎 꿇는 데 맛을 들이자 나중에는 아예 생활 속에서 이를 두루 응용하고 싶어졌다. 산골에 살다 보니 자연의 본성이 살아 있는 이들이 좋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어린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 우리집에 오는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을 때면 무릎을 꿇는다. 아이들 눈높이에 내 눈이 있을 때 아이들은 쉽게 마음을 연다. 갓난아기를 볼 때는 좀 더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는다. 아기의 맑은 영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인 셈이다.

    몸 버릇 고치기

    몸이 보내는 신호에 마음이 열리자 몸과 마음은 서로 관심을 갖는다. 혁명이 시작되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게 영구 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몸 혁명은 영구 혁명이 아닐까.

    한번은 아침을 먹는데 잇몸이 시큰시큰 했다. 아니, 이럴 수가! 무엇이 잘못된 걸까. 당장 내 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탈이 난 곳은 왼쪽 어금니 쪽이었다. 밥을 먹으며 찬찬히 내 몸짓을 있는 그대로 살폈다. 밥이 입에 들어가자마자 왼쪽 어금니로 간다. 밥뿐만 아니다. 김치도 왼쪽으로, 딱딱한 멸치 반찬도 왼쪽으로. 멸치처럼 딱딱한 것일수록 왼쪽 어금니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나만 그런가.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아이들은 오른쪽, 왼쪽 골고루 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씹는 버릇이 한쪽으로 굳어진 것이다. 게다가 양치를 하는데 무의식적으로 칫솔이 왼쪽보다 오른쪽으로 먼저 가는 게 아닌가. 힘든 일은 왼쪽 잇몸이 다 하고, 보살핌은 오른쪽 잇몸이 먼저니 탈이 날 수밖에.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무리하던 왼쪽 잇몸이 아픔을 호소하기 시작한 셈이다.

    잇몸을 고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밥 한술 입에 넣을 때부터 씹어 삼킬 동안 씹는 데 집중해야 했다. 잠깐 딴 생각을 하거나 식구 사이 대화에 끼여들다 보면 금방 입안에 음식이 왼쪽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럼, 아픈 잇몸이 신호를 보낸다.

    이참에 잇몸을 제대로 고치고 싶다. 틈틈이 잇몸 운동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입을 다물고, 어금니끼리 서로 부딪혀 침이 고이면 삼킨다. 혓바닥을 죽 뻗어 잇몸을 부드럽게 문질러준다.

    웬만큼 잇몸에 힘이 붙자 잇몸 운동을 생활화했다. 날마다 의식적으로 잇몸 운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딱딱한 음식을 밥상머리에 두고 밥 먹기 전에 조금씩 씹었다. 생쌀을 조금씩 천천히 씹으며 잇몸과 대화했다. 이제는 말린 밤을 후식으로 한두 개씩 씹을 정도로 잇몸이 거의 정상을 회복했다. 얼추 6개월쯤 걸린 것 같다. 거실 한구석에 말린 밤, 해바라기씨 그리고 호박씨가 들어 있는 항아리 세 개가 있다. 호박씨와 해바라기씨를 먹으려면 딱딱한 껍데기를 앞니로 까야 한다. 씨앗은 앞니 잇몸 운동에 안성맞춤이다. 말린 밤은 어금니 쪽 잇몸 운동에 그만이다.

    내 버릇을 알고 또 이를 고쳐가면서 점점 내 몸이 궁금해졌다. 지금 당장은 아픔으로 나타나지 않더라도 몸의 불균형이 또 있지 않을까. 내 몸놀림을 찬찬히 살펴보니 불균형이 뜻밖에도 심각한 수준이다. 단적인 게 오른손잡이. 삽질, 괭이질, 도끼질. 그 모두 오른손 중심이다. 그러니 어깨부터 삐딱하다. 어깨 관절을 돌려보면 오른쪽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 왼손은 운동신경이 둔하다. 오른손이 무리를 계속 해왔다면 왼손은 오른손을 주로 ‘보좌’해왔기에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이를 한꺼번에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힘쓰는 일이나 속도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으니까 시간을 갖고 고쳐가야 하리라. 우선, 내 몸이 불균형하다는 자각을 생활화할 필요가 있겠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왼손으로 밥 먹기다. 반찬은 오른손으로. 밥 먹는 일이야말로 천천히 할수록 좋지 않은가. 왼손으로 밥을 뜨니 조심스럽고 느리다. 양손으로 밥 먹는 모습은 내가 봐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습관을 깨는 데는 그만큼의 재미랄까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양손 식사는 아주 그만이다. 차츰 익숙해지면서 가끔 젓가락질도 왼손으로 해본다. 손놀림이 아주 서투르다. 젓가락질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마냥 호기심이 생긴다. 뼈마디마디 관절 운동이 재미있고 신기하다. 그러다가도 무의식적으로 오른손 중심으로 젓가락질이 빨라지면 자신을 돌아본다. ‘무엇이 그리 급한가.’ 말하자면 젓가락 명상이다.

    몸에 대해 아이 같은 호기심이 생기자 몸 이야기라면 귀가 열린다. 이웃을 만나도 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먹을거리는 물론 자연 분만과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 일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며 서로를 북돋우곤 한다.

    명절 때 친지들이 모였을 때도 그랬다. 지난해 추석 때였다. 추석 하루 전날, 친지들이 다 모여서 송편을 함께 빚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대구에 사는 우리 조카 명선(8)이가 요가를 잘 한단다. 이게 웬 떡이냐 싶다. 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명선이에게 요가 동작을 보여달라 했다. 누워서 아치 자세를 취하는데 정말이지 몸이 공처럼 휜다. 식구 모두,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나오고 주문이 이어졌다. 몸을 자유자재로 휘고, 구부리고, 돌린다. 한마디로 경이롭다. 둘러앉은 김에 식구 모두 명선이를 따라 요가를 해보았다.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어머니도 함께 했다.

    명선이 따라 요가를 함께 하며 절실히 깨달은 건 내 몸이 떠나 너무 굳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몸이 부드럽다고는 하지만 여러 식구 가운데 내가 가장 몸이 뻣뻣하다. 양 다리를 벌리면 명선이는 거의 180。에 가깝다. 나도 150。 되지 않을까 싶어 따라 해보니 어림도 없다. 잘 봐줘서 90。 정도다. 조금 더 가랑이를 벌리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오면서 중심이 휘청, 뒤로 털썩 주저앉는다. 또 허리 굽혀 팔을 뻗으면 손가락 끝이 겨우 발가락에 닿는다. 아직도 농사일을 하시는 어머니도 일흔이 넘었지만 나보다 허리가 부드럽다.

    명선이처럼 아치 자세를 흉내내어 보니 한마디로 가관이다. 얼굴은 피가 몰려 벌개지기만 하고 머리는 방바닥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자꾸 낑낑대봤자다. 몸치도 지독한 몸치다. 나이 50이 다 된 남자가 애처럼 누워서 낑낑대니 친지들은 즐거워한다. 명절날 친지들에게 웃음보따리를 선사한 걸로 나를 위로해야 했다.

    걸레질 요가

    그날 명선이와 어머니의 몸짓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몸이란 나이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나도 부드럽고 싶다. 몸이 뻣뻣하다고 후회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가 아닌가. 청춘을 되찾기는 어렵겠지만 내 몸뚱이는 내 뜻대로 하고 싶다.

    당장에 요가 책을 샀다. 요가 기본자세가 실려 있는 종이를 냉장고 문에 붙여 놓고 틈나는 대로 했다. 몸에 관심이 본격적으로 생기자 무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전통 무예인 수벽치기를 배웠다. 그리고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태극권을 틈틈이 익히고 있다.

    이제는 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일이 운동이고, 운동이 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시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운동하기는 정말 어렵다. 귀찮기도 하고 시간에 쫓길 때는 까마득히 잊기도 했다. 운동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는 없을까.

    우선 몸을 알아야 했다. 몸을 많이 쓴다고 몸을 잘 아는 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몸을 잘 모르면서 몸을 많이 쓰는 건 몸이 굳어지는 지름길이지 싶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시간이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몸을 아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책을 통해 공부할 수도 있고, 몸을 찬찬히 관찰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몸치에서 벗어나는 걸 목표로 삼으니 이론보다 몸으로 직접 해야 한다. 몸으로 익혀야 몸에 배지 않겠나. 몸을 제대로 배우고 익히고 깨닫기만 한다면 몸을 많이 쓰는 만큼 이 몸도 달라질 것이다

    아이다운 몸 만들면 일은 곧 즐거움

    공처럼 휘어지는 조카 명선이의 요가 자세. 다시 봐도 부럽다. 쩝!

    요가를 익히면서 그 동작 하나하나를 일에 응용해보고 있다. 걸레질부터 요가 식으로 해본다. 걸레질 과정에서 온갖 몸짓이 나온다. 나만의 요가라고나 할까. 우선 걸레를 두 손으로 잡고 편안하게 앉는다. 두 발을 넓게 벌리고 바닥을 걸레로 천천히 밀고 당긴다. 보통 때는 멈추었을 지점에서 숨을 멈추고 몸을 조금만 더 앞으로 숙인다. 그러면 허리뿐만 아니라 허벅지와 배는 물론 온몸 근육이 팽팽해진다. 힘줄이랑 인대에도 느낌이 온다. 호흡도 깊어진다.

    점차 몸 컨디션이나 방바닥 상태에 따라 온갖 변형 동작이 나온다. 허리가 많이 굳어 있다 싶으면 허리 비틀기나 굽혀 닦기를 많이 한다. 그러다가 새로운 동작도 해본다.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옮기지 않고 얼마나 넓게 닦을 수 있는지 실험도 해보았다. 우리집 거실은 작다. 네 평 정도다. 네 번만 엉덩이를 옮기면 온갖 요가 자세로 다 닦을 수 있다.

    걸레질이 요가가 되고 요가를 걸레질로 하니 하루에 한두 번은 하게 된다. 또 운동하면서 청소하니까 시간 배분이 경제적이다. 점점 삶이 바빠지는 추세에 잘 어울리는 운동이지 싶다. 걸레질이 끝나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집안 분위기도 덩달아 좋아진다.

    걸레로 닦는 순간순간을 ‘몸 느낌’으로 받아들이다 보면 이따금 색다른 청소도 하게 된다. 좀처럼 닦지 않던 책상 아래 좁은 틈 사이에도 손이 간다. 걸레를 천천히 밀다가 책상 아래에서 몸을 한 호흡 더 앞으로 뻗다 보니 작은 틈새로도 자연스럽게 손이 간다. 고개가 뻣뻣하다 싶은 날은 갑자기 위를 올려다보면서 청소가 하고 싶다. 까치발 딛고 두 팔을 잔뜩 뻗고 고개는 한껏 뒤로 제쳐 냉장고 위나 창문 위를 닦기도 한다.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가끔 시간에 쫓길 때는 걸레질이 요가가 아니라 일로 바뀌어 동작이 빨라진다. 그럴 때는 자신에게 자꾸 말을 건다. ‘이건 일이 아니고 요가야, 요가! 요가를 그렇게 빨리 하는 법이 어디 있니.’

    낮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논밭에서 보내니 ‘농사 요가’야말로 다채롭다. 농사와 요가는 천천히 한다는 점에서 코드가 잘 맞는 것 같다. 삽질이든 고무래질이든 빨리 하면 쉽게 지쳐 일 자체가 안 된다. 고무래질이란 모내기 하려고 써레질한 논을 고무래로 반반하게 고르는 일이다. 논흙이 곤죽이 되면 논에서 몸 움직임이 쉽지가 않다. 일이 서투를 때는 고무래질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 끙끙 앓아야 했다. 이제는 천천히 고무래를 밀고 당긴다. 요가에서 배운 대로 깊은 호흡과 다양한 자세로 밀고 당긴다. 그래도 일은 예전보다 결코 늦지 않다.

    밭에서는 땅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으니 논보다 더 다양한 자세가 나온다. 김매기도 요가 운동이 되지만 빽빽하게 심은 당근을 솎아주거나 토마토 곁순을 따주는 동작도 변형해서 할 수 있다. 어떨 때는 몸을 비트는 맛이 좋아 요가 동작으로 몇 시간씩 밭일을 할 때도 있다.

    ‘삶의 요가’는 걸레질, 농사일만이 아니라 삶 곳곳에서 한다. 신문을 보면서도 한다. 가슴 펴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읽다가 숨을 내쉬며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읽는다. 자세히 읽고 싶은 기사는 골반을 여는 자세로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읽는다. 천천히 하니까 글자 읽기에는 무리가 없다. 손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동안에도 몸을 가볍게 움직여준다. 몸이 굳어 있으면 상대방 말을 건성으로 듣게 된다. 허리든 고개든 풀어주면서 들으면 훨씬 잘 들린다.

    하나만 더 보기를 들자면 달리는 차 안에서도 가능한 동작이 있다. 차가 커브를 돌 때 원심력이 생긴다. 그럼, 몸이 구심력을 느낀다. 이 느낌을 살리는 것이다. 커브가 보이면 우선 운전대를 부드럽게 잡는다. 그럼, 내가 운전을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바로 온다. 안전 운전에 대한 의식이 확 깨어난다. 시야도 넓어지고, 속도도 저절로 줄어든다. 몸이 쏠리는 구심력을 느끼며 천천히 허리를 옆으로 굽힌다. 차와 한몸이 되는 기분이다.

    운동에는 느린 동작이 있듯이 빠른 동작도 필요하리라. 빠른 운동이라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게 달리기다. 그런데 건강만을 마음에 둔다면 달리기는 솔직히 재미가 적다. 그러나 몸이 원하는 달리기는 다른 것 같다.

    아이다운 몸 만들면 일은 곧 즐거움

    진호랑 아이들이 놀이삼아 벽돌을 옮기고 있다. 아이들 몸놀림에서 배우는 게 많다.

    내가 달리기를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추위 때문이다. 봄 가을에도 이른 아침에는 춥다. 나는 ‘새벽형’ 인간이라 이른 아침에 농사일을 많이 한다. 추우니까 밭까지 뛰어간다. 추위를 잊는다. 어떨 때는 지게를 지고도 뛴다. 등허리에 빈 지게를 지고 뛸 때는 웃음이 나온다. 지게가 몸이랑 따로 노니까 덜렁덜렁. 어떨 때는 지게에 짐을 20kg쯤 지고 운동삼아 뛰기도 한다.

    일을 호기심으로 하면…

    추위와 상관없이 몸이 원하는 달리기를 일상에서도 꾸준히 할 수는 없을까. 얼마 전 우리집에 도시 아이 몇 명이 왔다. 아이 가운데 일곱 살 진호가 내게 영감을 하나 줬다. 아래채 지으려고 마당에 부려둔 벽돌을 집터로 옮기던 중이었다. 아이들이 재미있겠다고 해보겠단다. 하고 싶은 만큼 하되 천천히 하라고 허락을 했다. 그러자 진호는 뛰면서 한다. 빈 수레를 끌면서 뛴다. 벽돌 몇 장을 수레에 싣고 집터로 다시 달린다. 집터에다 벽돌을 반듯하게 쌓고는 다시 마당으로 달려온다.

    아이들이 워낙 재미나게 하기에 장갑을 끼고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장갑을 가지러 창고로 가면서 진호는 또 뛰는 게 아닌가. 장갑을 끼고 집터로 돌아오면서도 또 뛴다. 얼추 30분 가까이를 거의 뛰다시피 일했다. 참을 먹으면서 진호에게 물어보았다.

    “뛰다가 다칠지도 모르는데 왜 자꾸 뛰니?”

    그러자 쑥스럽게 웃으며,

    “재미있어요.”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는 아이들. 게다가 도시에서는 좀처럼 해보기 어려운 일이라 신기했나 보다. 사실 벽돌 쌓기는 아이들 놀이로 치면 레고 쌓기랑 비슷한 점이 있다. 다른 점이라면 레고와 달리 자신이 놓은 벽돌이 정말로 집이 된다는 설렘이 있으리라. 진호가 내게 준 영감은 바로 일에 대한 호기심이다.

    일을 호기심으로 하면 달릴 수 있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못자리에 모가 얼마나 자랐을까. 궁금하면 달린다. 봄비에 고사리가 얼마나 올라왔을까. 어서 가보고 싶어 걸음이 빨라진다. 이른 아침 산허리에 구름이 허리띠를 두르듯 걸쳐 있는 걸 보고는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러 집 안으로 쏜살같이 들어간다. 행여나 잠깐 사이 구름이 사라질까 달린다. 처음 한동안은 아내가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리저리 달려 보니 달리기도 기준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는 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이 바빠 달린다면 스트레스다. 달리다가 다칠 위험도 높다. 반면에 운동삼아 달린다면 자기 호흡 조절이 가능하다. 달리다 숨이 가빠지면 걷게 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호기심으로 달린다면 달리면서도 기분이 좋다.

    그렇다면 호기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전에 따르면 호기심이란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 설명이 충분하지가 않다. 호기심이 왜 또는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내게 호기심이 일어날 때를 유심히 관찰해보았다. 마음이 호기심을 느끼자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게 순서가 아닌가. 뭔가를 보거나 냄새 맡거나 소리를 들음으로써 시작된다. 오감이 살아 있을수록, 호기심이 많은 셈이다. 눈빛이 맑을수록 코나 혀가 예민할수록, 그리고 귀가 밝을수록 호기심도 많은 것 같다. 피부도 군살보다 속살처럼 부드러워야 느낌이 잘 살아난다.

    몸이 달라지는 맛

    이 모두를 한마디로 아우르자면 아이다운 몸이 아닌가. 어린아이들은 호기심 덩어리다. 같은 환경이라면 몸이 아이처럼 부드럽고 맑을수록 호기심도 많으리라. 그렇지만 다시 아이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바로 몸에 대한 관심이다. 몸이 깨어날수록 호기심도 많이 생기지 싶다. 일상에서 호기심으로 깨어 ‘정신을 차리며’ 달리고 싶다.

    일하면서 요가처럼 몸을 비틀고, 아이들처럼 달리니 어떤 날은 코피가 나거나 저녁이면 꼬꾸라지기도 한다. 운동이 아무리 좋다한들 지나치면 무리가 있다. 좀더 자연스러운 운동을 찾게 된다.

    4월 하순, 못자리를 끝내고 봄비가 촉촉이 내리면 고사리 꺾으러 산에 간다. 고사리는 보통 산중턱 양지 바른 곳에 자란다. 어둑어둑 새벽, 비닐주머니 챙겨 집을 나선다. 온갖 새소리가 활기차다. 꿩, 멧비둘기, 검은등뻐꾸기, 벙어리뻐꾸기, 청딱따구리, 호랑지빠귀….

    산중턱에 다다르면 둘레가 좀더 환하다. 여기저기 고사리가 눈에 띈다. 이제부터 꺾자고 크게 숨 한번 몰아쉰다. 하나 둘 꺾으며 산 위로 오른다. 어떤 곳은 고사리가 드문드문 또 어떤 곳은 옹기종기 몰려 있다. 마른 칡 잎과 검불에 가려 살그머니 올라오는 고사리는 보물찾기 놀이 같다. 다 꺾고 돌아보면 또 있다.

    그리고 고사리가 자라는 모양새는 농사짓는 곡식이랑 많이 다르다. 농사는 한꺼번에 씨를 뿌리고 한꺼번에 거둔다. 반복된 몸놀림이 많다. 그러나 고사리는 4월초부터 5월까지 계속 난다. 형편에 따라 꺾을 수 있다. 몸놀림에 무리가 적다. 또 고사리는 크기도 굵기도 제각각이라 꺾는 동작에도 차이가 있다. 팔뚝 길이만큼 위로 죽 올라온 녀석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꺾는 자세에 힘이 들어간다. 가녀린 녀석은 꺾기가 안쓰럽다. 이제 막 땅으로 솟아나는 녀석들은 목운동만 하고 그냥 스쳐지나간다. 적게 나면 조금만 꺾고, 많이 올라올 때는 넉넉히 꺾는다. 자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한참을 꺾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따리가 무거워진다. 오른손 왼손으로 보따리를 바꾸어가며 꺾는다. 허리 펴다가 눈앞에 솔꽃이 있으면 갑자기 입맛이 돈다. 솔꽃 한 송이 따다가 입에 넣는다. 아삭아삭 쌉쌀하다. 갑자기 신선이라도 된 기분. 멀리 산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등바등 삶에 대한 집착을 조금이나마 산에다 내려놓는다.



    산을 내려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농사를 줄여야 산에 자주 오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논밭에서 자꾸 맴돌게 된다. 밭둑에 오디가 검게 익어가도 제대로 쳐다 보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그래서 해마다 농사 규모를 줄이자고 다짐해보지만 막상 농사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논밭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내 몸이 달라지는 맛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지금 바로, 양 다리를 쭉 벌려보니 130。쯤 벌어진다. 그 사이 많이 부드러워졌구나. 일과 생활 속에서 부드러워지기 위한 내 몸놀림, 멈출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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