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풍경에 찍은 마음의 무늬 ‘자전거 여행 1’ ‘자전거 여행 2’

  •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입력2005-05-26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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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에 찍은 마음의 무늬 ‘자전거 여행 1’ ‘자전거 여행 2’

    ‘자전거 여행 1’ ‘자전거 여행 2’ 김훈 지음/ 생각의 나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매우 아름다운 산문집이자 여행기다. 자전거라는 아날로그적 도구에 의지해 이 땅의 산하를 누비며 보고 듣고 맛본 것과 떠오른 생각을 걸러내 글로 빚어낸 책이다. 김훈은 “산다는 일의 상처는 개별성의 훼손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 훼손의 흔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음이 풍경의 아름다움이나 인공구조물의 이념적 지향성, 몸의 고됨에 대해 말할 때도 존재의 공허, 부재의 흔적을 더듬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여행기라 할 수는 없다. ‘그리운 것들 쪽으로’에서 펼치는 선암사 화장실과 배설에 대한 담론이나 ‘그곳에 가면 퇴계의 마음 빛이 있다’에서 들려주는 안동 하회마을 도산서원에 대한 건축문화적 담론은 쉬우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다. 그 사당은 한옥의 건축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浮華)를 용납지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써 온화하다. …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주고 있다.”

    이런 문장에서 김훈의 두루 넓고 깊은 인문학적 소양이 드러나는데, 그리하여 ‘자전거 여행’을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인문학적 지리지로 읽히게 만든다.

    김훈은 첫머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고 썼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몸이지만 그 몸을 끌고 나아가는 것은 길이다. 그때 흘러가는 길 위에서 지각되는 것은 언제나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시간 속에는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는 시간의 세 차원이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을 채우고 과거와 미래는 시간 속에 있는 현재에 대해 상대적인 두 차원”이라고 말한다.



    김훈은 풍경 속에서 존재함의 현재들을 포착한다. 풍경으로 거기 있는 ‘존재함의 현재들’은 빛과 소리, 혹은 냄새로 몸과 감각기관에 달려와 그 실감을 비비댄다. “지금, 5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올리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더욱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라고 쓸 때, 봄 산에 진동하는 수목의 비린내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자의 몸으로 들어와서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몸과 풍경을 이어주는 것은 현재다. 그것은 흘러가 사라지기 때문에 덧없지만, 외부의 풍경을 관조하는 자의 몸에서 명멸하게 하는 조건이다.

    풍경으로 남은 ‘존재함의 현재들’

    봄들에서 뜯은 냉이를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냉이된장국을 떠먹으며 “냄비 속에서 끓여지는 동안, 냉이는 된장의 흡인력의 자장 안으로 끌려들어가면서 또 거기에 저항했던 모양이다. 냉이의 저항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 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 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고 쓸 때, 혹은 재첩국을 두고 “그 국물의 빛깔은 봄날의 아침 안개와 같고, 그 맛은 동물성 먹이 피라미드에서 맨 밑바닥의 맛이다”라고 쓸 때, 김훈은 세계의 복잡한 현존을 감각적인 명증으로 간단하게 뒤바꿔놓는다.

    감각은 익명적 현상이다. 감각은 ‘감각들’로 이루어지며 궁극적으로 경험과 인식이 조화를 이룬 전체로 귀착한다. 그래서 메를로 퐁티는 인간을 ‘감각의 총 중추’라 규정하고 “지각된 신체의 주위에는 나의 세계가 유인되고 빨려드는 와동(渦動)이 팬다”고 썼을 것이다. 몸과 감각은 앎과 지각의 기반이다.

    김훈은 눈 쌓인 소백·노령·차령산맥과 재를 넘어 이미 봄이 당도한 남쪽 해안선으로 나아간다.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재를 넘어가는 그의 몸은 푸르고 강성하나, 몸속에 있는 또 하나의 몸은 춘수(春瘦)를 앓는다. 춘수는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다. 담양 들판에 흩어진 식영정, 소쇄원, 면양정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은 범상한 관찰을 끌어낸다.

    “정자의 내부 구조와 원림(園林) 내의 공간 배치는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지도 않고,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지도 않는다. 정자들은 저 밖의 세계와 격절한 조선 선비들이 마음에 드리운 불우의 그림자들을 달래기 위해 지은 낙원이다. 불우한 자들이 끝끝내 낙원을 만드는 것은 지옥을 견디기 위함이다.”

    김훈의 문장에서 만경강 일대의 갯벌, 안면도, 화개의 쌍계사, 부석사, 영일만, 안동의 하회마을, 섬진강 상류의 아름다움은 새롭게 피어난다. 이 땅의 변화 많은 사계 속에 표표하게 저만의 아름다움으로 깊어지는 산천초목, 강과 산의 경계, 소리와 색, 빛과 그늘, 다채로운 기상 조건들이 마음에 들어와 만드는 무늬들에 대한 매혹과 찬탄을 되새긴다. 그러나 국토 풍경을 새롭게 발견한 자의 감격과 찬탄은 문면(文面)으로 밀고 나오지 못한 채 문장의 이면에 억제된다. 이를 억제하는 것은 “말을 걸 수 없는 자연을 향해 기어이 말을 걸어야 하는 인간의 슬픔”에서 나오는 힘이다.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

    2000년에 나온 ‘자전거 여행 1’은 자연과 그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로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 순결하다. 작가의 시선은 한결같이 그 순결성의 안쪽으로 향한다. 또 숲과 산에 대한 찬탄은 여러 번 되풀이된다. 나무들은 저마다 “개별적 존재의 존엄”이며 그 나무들이 밀생(密生)을 이루는 입지가 곧 숲이다. 저마다의 존엄으로 당당한 나무들은 소멸과 신생의 모둠살이를 반복하지만, “숲의 시간은 언제나 갓 태어난 풋것의 시간”이다. 숲이 사람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기 위해서는 사람 가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숲이 정서적 위안을 주는 존재로 남기 위해서는 사람 손길을 덜 타야 한다. 그것이 숲의 숙명이다. 수목의 신생으로 울울창창한 5월의 지리산 숲이나 온통 가을빛으로 타오르는 태백산맥 미천골의 단풍든 숲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이미 몸의 안쪽에 포섭된 아름다움이다.

    4년 뒤에 나온 ‘자전거 여행 2’는 김포평야, 일산 신도시, 중부전선, 경기만의 등대들, 남한산성, 광주 얼굴박물관, 모란시장, 수원 화성, 안성 돌미륵과 같은 인공구조물을 찾아가는 여로가 주를 이룬다. 이들은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연을 끌어들여 스스로 그 입지를 자연화한다. 세월은 인공구조물의 태생적 본질인 인공의 흔적을 지우며 자연의 풍경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럼에도 ‘자전거 여행 1’과 ‘자전거 여행 2’의 어조에는 작은 차이가 드러난다. ‘자전거 여행 1’에서 풍경의 안쪽으로 스미며 풍경과 하나가 되려는 열망으로 뜨겁던 눈길은 ‘자전거 여행 2’에 와서는 풍경의 바깥에서 미끄러진다. 필자의 개인적 소회를 말하자면 ‘자전거 여행 1’을 읽는 게 전문적 인문 지리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자전거 여행 2’를 읽을 때보다 확실히 더 즐겁다.

    비애와 허무가 꿈틀거리는 문장

    김훈의 문장은 감각의 명증성에서 매우 선명한 생동감을, 직관에 의지한 명석한 인문학적 분석에서 깊이를 함께 얻는다. 또 김훈의 견결(堅決)하고 밀도 높은 한글 문장에는 언제나 몸 된 자의 비애와 허무가 하나의 본능으로 꿈틀거린다. 때로 그 비애와 허무는 오래 숙성된 젓갈과 같이 곰삭아서 질적 전환을 이루기도 하는데, 비애와 허무가 하나로 뭉뚱그려져서 ‘불우하다’는 계통이 불분명한 형용사를 낳는다.



    김훈이 자신의 몸과 정신을 옥죄는 추상적인 불우함을 강조할 때 그의 문장은 대개 도저한 탐미주의로 경사된다. 탐미주의는 김훈에게 일정 부분 체질이 된 영역이다. 김훈은 형상의 강성함과 꿋꿋함으로 우뚝 선 것들의 양명함보다 바스러지는 것, 사라지는 것, 죽는 것에 드리운 그늘에 더 마음을 빼앗긴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최소한도의 도덕적 분별이나 가치의 위계를 세우지 못하고 한없는 관용으로 끌어안는 것도 앎다운 것들에 내장된 불우한 운명을 향한 측은지심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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