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호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무소유적 인간 태종, 욕망적 인간 세조

  • 이상곤│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입력2014-05-20 18: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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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2008년 5월 16일 열린 ‘태종대왕 전통 문화행사’에서 어연 행렬 참석자들이 태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입구로 들어서는 광경.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다.

    조선 건국을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고, 건국 이후에도 왕권 중심의 권력 재편을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조선 제3대 왕 태종(太宗·1367~ 1422, 재위 1400∼1418)은 어떤 체질이었을까.

    TV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을 맡았던 탤런트 유동근의 후덕한 인상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다르다.

    태조 3년 6월 1일, 정안군 이방원은 조선에 대한 명나라 황제의 의구심을 풀려고 사신으로 떠난다. 태조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한다.“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격변의 건국 현장을 누비면서 정몽주와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살육한 태종은 의외로 파리하고 허약한 체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격은 강명(剛明)했다. ‘강’은 성격이 칼처럼 날카롭다는 것이고, ‘명’은 머리가 명철했다는 이야기다. 태종이 현직에서 물러난 세종 2년 10월 28일의 기록에 강명하다는 말이 나온다.

    “일찍이 의원 원학(元鶴)이 상왕전(上王殿)에 시종하였으므로, 상왕이 종하가 의술에 매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또 양홍달(楊弘達)이란 의원이 너무 늙었으므로, 종하로 하여금 원학과 더불어 번갈아 입직하게 하려고 원학을 보내어 종하를 부르니, 종하가 상왕의 강명(剛明)함을 꺼려서 가까이 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자신할 만한 경험이 없다 하여 나가지 아니하니, 원학이 다시 사람을 보내서 불렀으나, 또 가지 않으므로 곧 의금부에 내려 신문한즉, 종하가 말하기를, ‘상감께서 명철하오신데 만일에 방서(方書)를 물으시면 어찌 대답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하였나이다’ 하므로, 곧 대역으로 논죄하여 참형에 처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실록의 기록에서 진료하길 꺼렸다가 참형에 처해진 유일한 의원이 바로 정종하다.

    명철하면서 고금의 서적에 능통했던 태종의 지적 능력은 여러 차례 의학에 대한 논평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는 오만으로 느껴질 정도다. 태종 15년 1월 16일, 궁중에서 여남은 살 되는 아이가 병이 나자 조청이라는 의원이 약을 지었는데, 그게 어른 분량이었다. 소아의 약은 성인 분량의 반만 짓게 돼 있으므로 소아를 몇 살까지로 규정하는지에 대해 묻자 조청은 5, 6세까지를 소아라고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천금방’이란 책을 찾아 2, 3세를 영아라 하고 10세까지를 소아(小兒)라 하며, 15세는 소아(少兒)라고 구분한다는 대목을 직접 보여주면서 소아의 범위와 약 사용량에 관해 조청을 굴복시켰다.

    파리하고 허약한 체질

    파고지(破古紙)는 ‘동의보감’에서 신장의 기능이 떨어져 정액이 절로 나오고 허리가 아프며 무릎이 차고 음낭이 축축한 증상을 치료하는 성기능 개선 약재다. 이름 자체가 ‘오래된 문창호지를 뚫는다’는 뜻을 지녀 벽지와 착각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은 도벽지(塗壁紙)를 파고지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으니 의학자들이 약방서에 밝지 못하다고도 지적했다.

    왕권을 강화해 국가 이성이 되기를 원했던 태종은 궁중 생활을 좋아했을까. 태종 2년 9월 19일의 기록은 궁중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는지 잘 보여준다. “금년에는 종기가 열 번이나 났다. 의사 양홍달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 외출하지 아니하여 기운이 막혀 그런 것이니, 탕욕(湯浴)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간관(諫官)들은 왕에게 지지 않고 온천행을 반대한다. 태종의 반응은 그의 성격을 다시 한 번 잘 드러낸다. “간관들이 ‘전하는 춘추가 젊어서 반드시 병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20~30세의 젊은 사람은 반드시 병이 없는가, 간관이 내 병의 치료를 못하게 막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

    온천행을 포기하면서 강무(講武)를 가겠다고 하자 간관들은 다시 왕의 강무를 막는다. 강무는 사냥을 통해 무예를 익히는 행사인 만큼 말달리기를 포함하는데 태종은 말을 과격하게 몰아 속력을 내는 스피드광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말미에 조영무가 나서서 신하들의 걱정을 대변한다. “여러 아랫사람이 사냥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대로 말을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태종 8년의 기록은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입증한다. “태상왕이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었는데, 임금이 이때에 침구의 잘못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곧 편복으로 대궐 동쪽 작은 문을 나와 말을 달려가니, 시위(侍衛)하는 자들이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의학에 대한 논평

    실록은 태종 즉위 13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병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앞에 자신이 지목한, 종기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 외에 주목할 만한 질병 기록이 없다.

    태종은 재위 8년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병이 나기 시작한다. 세자에게 문소전의 제사를 대행하게 하고 날씨가 음산해지자 약주를 정지하게 하는가 하면, 고기반찬을 먹도록 청하기도 한다. 13년 8월 11일 기록에선 자신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내가 본디 풍질이 있었는데, 근일에 다시 발작하여 통증이 심하다. 지난밤에 조금 차도가 있었으니, 경들은 우려하지 말라.”

    태종은 풍질 증상이 여러 차례 반복되자 이를 구체적으로 호소한다. 같은 해 11월 16일 “임금의 손이 회복되지 않아 흘을 잡기가 어렵다고 하였다”거나 세종 1년 4월 29일 “오른팔이 시고 아리며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것에 차도가 있어 속히 돌아갈 것을 명했다”는 구절도 있다. 세종 1년 5월 5일엔 상왕이 목이 뻐근하고 아파서 돌아가는 길에 관원들이 나타나지 말 것을 부탁한다.

    태종의 풍질 증상을 종합하면 지금의 목 디스크와 유사한 질환이다. 풍질에서 풍은 어떤 의미일까.

    ‘황제내경’ 태소(太素)의 28권 제풍수류에 보면 ‘바람은 기(氣)와 하나인데 빠르고 다급하면 풍이 되고 천천히 질서가 있을 때는 풍이 된다’고 했다. 여기서 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연에서의 대기와 인체 내부에서 흐르는 원기가 그것이다. 자연의 대기가 풍이 되면 감기 증상을 유발해 오한 발열하는 것이고,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면 뇌혈관 질환이나 관절염 등 풍병을 발병케 한다. 예전엔 명의의 자질을 바람을 잘 관찰하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했다. 전설적 명의였던 편작(扁鵲)의 작(鵲)은 까치 작이다. 까치는 집을 지을 때 그해 불어올 바람을 예상해 짓기 때문에 나뭇가지 끝에 지어도 바람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편작은 바람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고, 여기서 바람의 원형은 기로써 기의 흐름을 잘 아는 사람이 명의라는 뜻이고 보면 한의학의 본질과 잘 맞아떨어진다.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어 풍질이 생겼다면 어떤 원인으로 풍이 생겼고, 어떤 장부와 관계가 있을까. 난경(難經)에선 풍은 간과 관계있으며 끈기 있게 일을 많이 하거나 화를 자주 내고 기가 흥분해 가라앉지 않으면 간의 혈이 허해지면서 신경통, 신경마비, 오십견 등의 절육통(節肉痛)이 생긴다고 경고했다. 애간장을 태우는 게 풍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다.

    풍질 다스리려 온천행

    태종은 자신이 국가 이성으로서 국가의 생존 강화라는 큰 목적을 위해 형제, 처가, 사가(私家) 모두에게 피를 뿌린 인물이다. 이 때문에 개인이 겪어야 할 인간적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태종 16년 5월 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며 보낸 전지에는 “가뭄의 연고를 깊이 생각해보니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무인(戊寅)·경진(庚辰)·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형제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음이다. 그러나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가뭄을 하늘이 주는 벌로 생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부담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격정적 토로다.

    태종은 풍질 치료를 위해 약물보다 온천행을 택했다. “나의 풍질에 약이(藥餌)의 효험이 없으니,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고치는 것이 비록 의서에는 보이지 않으나, 내 장차 이천(伊川) 온천에 가서 목욕하여 시험하려는데, 어떠하겠는가?” 이후 평산온천을 오가면서 태종의 풍질은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태종은 드라마 ‘용의 눈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권력쟁취 과정에서 골육을 제거하며 흘린 피눈물을 용의 눈물로 정의하겠지만, 진짜 용의 인간적 눈물은 막내아들인 성녕대군의 죽음 과정에서 흘렸다. 태종 12년 6월 23일 중궁인 원경왕후 민씨는 막둥이 아들을 낳았다. 출산 후 내의원에 근무한 어의들에게 상을 후하게 내린 건 물론이고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내가 심히 기뻐한다.”

    태종 18년 성녕대군은 갑자기 전염병인 완두창에 걸려 위독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 전기 의료의 실상이다. 의학(醫學)의 한자인 ‘醫’는 본래 받침이 ‘酉’가 아니라 ‘巫’다. 의학의 기원을 무속으로 본 것이다. 고대에는 무당을 의사의 역할을 대행하는 치유자로 판단했다. 역사 기록도 이런 견해를 반영한다. “지금 세상은 병이 나면 점치고 기도를 드린다. 그러므로 질병이 더욱 심해진다. ‘여씨춘추’ 진수편(盡數篇)에서 무당인 무의는 황제에게도 접근했다. 한(漢) 무제가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내고 난 뒤 병이 나았다. 이후 무제는 무당의 권유에 따라 자신을 감추고 그림자 정치를 펼친다.

    조선 전기만 해도 전염병은 무당과 의사의 치료가 공존하는 영역이었다. 완두창의 예후를 알아보는 방법은 의사가 아니라 무당과 점쟁이가 주도했다. 태종은 승정원에 명해 점을 잘 치는 사람을 모아 병의 예후를 알아봤다. 점치는 맹인들은 점을 보고 모두 길하다고 예측했다. 세종 임금이 되는 충녕대군도 여기서 등장한다. 정탁을 시켜 주역점을 쳐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충녕대군이 나와 주역점을 풀이하자 모두가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의 결과와는 무관하게 성녕대군은 죽고 말았다. 태종은 성녕대군이 놀던 곳을 지켜보기 힘들어 개성 유후사로 이어(移御·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할 것을 의논하면서 속마음을 내비친다. “내가 옮겨 거동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애통하고 울울히 맺힌 정을 씻으려는 것이다.” 여러 날 동안 곡기를 끊자 수라 들기를 청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군이 병을 얻은 날부터 여러 날 옷을 벗고 자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유명(幽明)의 길이 막혀 있으니 비록 수라를 들려 해도 얼굴 모습이 선하여 잊지 못한다.”

    조선 전기에 완두창을 치료하던 방법은 의원들의 죄를 묻는 하교에서 드러난다. 꼼꼼하면서도 명철한 태종답게 경안공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분석한다. “을미년에 경안 궁주(慶安宮主)의 병 증세가 열이 나고 괴로움이 심하여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니, 양홍달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병의 증세는 의가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양위탕·평위산을 바쳤다. 내 마음에 보통 증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남에게 알려질까 부끄러워했으나, 졸(卒)한 뒤에 내가 방서를 보니,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는 것은 바로 발열하는 증세에 있었다. 성녕군의 창진(瘡疹)이 발하던 처음에 허리와 등이 아팠는데, 조청·원학 등이 풍증(風症)이라고 아뢰어서 인삼순기산을 바쳐 땀을 흘리게 하였다. 뒤에 의서의 두진문(痘疹文)을 보니, 또한 허리와 등이 아픈 것이 실려 있었다. 또 병이 위독하던 날에 이미 증세가 변하게 되어 안색이 회백색이 되었는데, 박거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순조로운 증세입니다. 안색이 황랍색(黃蠟色)이 되면 최상의 증세입니다’라고 했다. 이 사람들이 비록 고의로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실로 이것은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문제가 된 인삼순기산은 풍을 치료하는 약이다. 오한이 나고 뒷머리와 목이 뻣뻣하면서 아플 때 허약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처방이다. 땀을 내는 마황과 기를 고르게 하는 진피, 천궁, 백지, 백출, 후박, 길경, 감초, 갈근, 인삼이 들어간다. 한의학에서 전염병의 원인을 음액(陰液)이 마르면서 건조해져 바이러스나 세균이 인체에 깊이 침투하는 점으로 보는 걸 감안하면, 온병으로 땀을 내서 더 건조하게 만드는 치료 방식은 분명 실수였다. 같이 투여한 대금음자나 감응원도 소화기 질환에 두루 쓰는 범용 처방으로 완두창 치료와는 거리가 먼 약재였다.

    이성적 의료 최초 도입

    태종은 성녕대군의 죽음 이후 밀교 방식 둔갑술로 질병을 치료하는 총지종(摠持宗)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끊음은 물론 판수 무녀들도 모두 내쳤다.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세상을 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에 신선과 부처와 같은 것이 없다.”

    무당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적 치료 방식을 적용한 최초의 명의는 역시 편작이다. 그는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자의 병은 낫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생리와 병리를 음양이론에 맞춰 합리적으로 설명했다. 왕실 의료는 조선 의료의 중심이다. 태종은 조선에 무속을 배격하고 이성적 의료 방식을 자리 잡게 한 최초의 군주였다.

    태종을 치료한 어의중 평원해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일본의 중으로 우리나라로 귀화해 어의로서 태종을 오랫동안 진료했다. 실록에서 태종은 그의 공로를 이렇게 치하한다. “네가 의(義)를 사모하여 귀순해 와서,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증상을 진찰하고 약을 조제하되, 날로 더욱 근신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또 나라 사람이 병이 있으면 즉시 의료하여 자못 효험이 있었으니, 공로가 상을 줄 만하다.”

    태종은 어떤 질병으로 사망했을까. 실록엔 이에 대한 한 마디의 설명도 없다. 세종의 하교를 보면 태종의 병환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 4년 4월 22일, 태종과 세종은 동교에 나가 매사냥을 구경하고 왔는데 태종이 갑작스럽게 몸이 불편하면서 위중해진 것으로 기술했다.

    세종은 한글과 과학기술을 발달시킨 명민한 왕이지만 무속과 불교에 심취한 것은 세종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태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다시 한 번 토속신앙인 성요법(星曜法)으로 길흉을 점쳤다. 하지만 자신의 능을 만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학자인 태종의 신념은 확고했다. “이 능은 내가 들어갈 데인데 더러운 중들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다.”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세조의 무덤인 광릉. 유언에 따라 석곽을 쓰지 않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이 없다.

    줄초상 공포에 시달린 세조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1417~1468, 재위 1455~1468)는 태종과 비슷하지만 다른 인물이다. 태종은 한때 자신의 혁명동지였던 공신들, 원경왕후와 처가, 가까운 형제, 사가의 사람들을 왕권을 위해 희생시켰다.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주변을 희생시킨 무소유적인 외향형 인간이다. 반면 세조는 자신의 혁명에 동참한 공신들을 위해 권력을 분점하거나 사유화한 욕망적 내향형 인간이다. 세조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은 당연히 공포로 마음을 짓누르기 마련이다.

    세조 3년 7월 27일, 의경세자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젊은 나이에 걸린 병이었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세자는 그해 9월 2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둘째인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고 세자빈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 간택됐다. 세조 7년 11월 1일, 불안하게도 이번에는 세자빈이 병들었다. 세자빈은 11월 30일 원자를 낳고 5일 만에 죽고 말았다. 원자 또한 세조 9년 10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줄초상의 슬픔은 세조에게 계유정난 과정에서 죽은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과 살생부로 죽어간 수많은 원혼을 떠올리게 하고 마음의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일부 호사가들은 이런 점을 확대 해석해 야사(野史)로 윤색했다. 세조가 상원사에 묵고 있을 때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나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왕후가 침을 뱉어 피부병이 생겼다는 이야기, 혹은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이야기들이다.

    실록은 유사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세조 8년 11월 5일의 기록엔 임금이 상원사에 거동할 때 문수보살은 아니지만 관음보살이 현상하는 이상한 일이 있어 살인, 강도 이외의 죄를 사면했다는 기사도 있다. 세조 3년 9월 7일 기록엔 현덕왕후의 묘소에서 일부 훼손이 있었음을 증거하는 대목이 실렸다.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신주(神主)와 의물(儀物)을 일찍이 철거하였으니, 그 고명(誥命)과 책보와 아울러 장신구를 해당 관사로 하여금 수장(收藏)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는 태종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의학에 대해 한 수 가르치려는 점도 닮았다. 세조 9년, 의사를 8종으로 분류하고 그중 첫 번째로 마음을 고치는 심의(心醫)를 꼽은 것은 자신이 마음병에 걸린 반증은 아닐까. “심의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도록 가르쳐서 병자가 그 마음을 움직이지 말게 하여 위태할 때에도 진실로 큰 해가 없게 하고, 반드시 그 원하는 것을 곡진히 따르는 자이다. 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2011년 방영된 KBS 2TV 수목드라마 ‘공주의 남자’ 제작발표회.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건인 계유정난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세조는 평소 자신의 건강을 자신했다. 그러나 세조 9년 9월 27일엔 효령대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 방장한 혈기로써 병을 이겼는데, 여러 해 전부터 질병이 끊어지지 않으니, 일찍이 온천에 목욕하자고 하였습니다.” 질병으로만 기록하고 분명한 병명이나 증상은 기록하지 않았다.

    세조는 온천욕에 대해서도 한 수 짚고 넘어간다. 세조 10년 4월 16일 “내가 지금 온천욕을 시험하여 보니, 그 효력이 신통한 것 같아서 풍습(風濕)의 병이 낫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출입(出入)할 즈음에 감풍(感風)이 실로 많아서 예전의 병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뒤의 병이 바야흐로 시작되는데, 지나치면 어지럽고 정도에 미치지 못하면 효험이 없으니 마땅히 기를 가지고 스스로 조절하고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저 늦봄의 초기에 해가 높이 떠오르고 날씨가 바람기가 없으며, 마침 배 속이 오히려 부족한 듯하면서 많이 먹고 싶지 않을 때를 틈타 나가서 목욕한다.… 이 절목(節目)을 가지고 길이 양방(良方)으로 삼도록 하라.”

    한의학에서 습열은 피부질환을 의미하고 풍습은 대부분 관절병을 가리키는 용어임을 감안하면, 당시 온천욕은 신경통 치료를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세조의 질병이 분명하게 드러난 건 세조 12년 10월 2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한계희(韓繼禧), 임원준(任元濬), 김상진(金尙珍)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꿈속에서 생각하기를, 현호색(玄胡索)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 여겨 이를 먹었더니 과연 가슴과 배의 아픈 증세가 조금 덜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약인가? 이에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七氣湯)을 올렸더니 과연 병환이 나았다.”

    질병과 고통을 불심으로 달래

    동의보감은 칠기탕의 칠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칠기란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 칠기가 서로 어울려 담연이 뭉친 것이 솜이나 엷은 막 같기도 하고 심하면 매화씨 같다. 이러한 것이 목구멍을 막아서 뱉으려 해도 뱉어지지 않으며 삼키려 해도 삼켜지지 않는다. 속이 그득하면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기가 치밀어서 숨이 몹시 차게 된다. 심해지면 덩어리가 되어 명치 밑과 배에 덩어리가 생기며 통증이 발작하면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이럴 때 칠기탕을 쓴다.

    세조의 질환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인한 마음병이었다. 줄초상을 당해 큰 충격을 받으면서 야사가 전하는, 구천의 원혼이 저주하는 공포에 시달렸다.

    세조는 공포를 불심으로 이기려고 했다. 세조의 아버지 세종은 자신의 질병과 고통을 신미스님을 통해 위로받았다. 세종 32년 1월 26일 실록은“임금의 병환이 나았는데도 정근(精勤)을 파하지 않고 그대로 크게 불사를 일으켜, 중 신미를 불러 침실 안으로 맞아들여 법사를 베풀게 하였는데, 높은 예절로써 대우하였다.”

    세조도 신미를 통해 자신의 죄업을 막고자 했다. 세조 10년 2월 18일 질병 치료를 위해 온양온천으로 향한다. 실제론 속리산 복천사에 있는 신미를 만나기 위해 신미의 동생 김수온을 데리고 충청도로 향한 것이다. 2월 27일 신미를 만나 자문을 한 후 세조 11년에 국가에서 물자를 지원해 중건한 절이 오대산 상원사다.

    세조의 불심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에 대해 이의를 걸었다는 이유로 황보인의 손서 김종련 본인과 자손 모두 내수소(內需所·조선시대에 왕실 재정의 관리를 맡던 관아. 세조 12년에 내수사로 이름을 고침)의 노비로 전락시켜버릴 정도였다. 실록은 “임금이 일찍이 김종련에게 불설(佛說)을 물으니, 김종련이 논대(論對)하는 것이 자못 임금의 뜻에 거슬리었다”고 기록했다.

    불교와 관련해 믿기 어려운 기적도 여러 차례 나타났다고 실록은 적었다. 예를 들면 신미를 만나는 복천사에서도 불교에서 기적으로 여기는 현상인 방광(放光)이 있었고, 세조 12년 법회하는 날에는 서기가 광채를 내쏟고 꽃비와 사리의 기이함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공통점은 ‘의원들, 공부 좀 더 해라’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학회 이사

    現 갑산한의원 원장, 한의학 박사, 동아일보·농민신문·프레시안 칼럼 집필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낮은 한의학’ 등 다수


    실록엔 세조의 질병에 대한 기록이 43회에 걸쳐 나타난다. 세조 10년부터 본격적으로 질병에 시달렸는데, 12년에 50세가 되면서 병이 상당히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세조 14년 7월 19일엔 신숙주, 구치관, 한명회를 불러 자신의 전위를 심각하게 의논하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7월 22일 14명의 대신을 4번으로 나눠 세자를 도와 정무를 처리하게 하는 원상제를 도입했다. 세조는 14년 9월 8일 52세를 일기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난다.

    실록의 기록에서 야사에 거론되는 피부병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실록은 단지 질병 유무의 사실만을 기록해 관절병이나 신경통으로 추정되는 풍습병과 유일하게 처방명이 나오는 칠기탕을 근거로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한 세조의 내면을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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