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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지혜의 숲’과 벼룩시장의 오후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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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상인들을 위한 대안으로 송파구 문정동에 가든파이브가 지어졌지만 분양가도 높았고 임차 자격도 일정 조건 이상을 갖춘 상인 위주였다. 리어카 장수, 보따리 장수, 방물장수가 가든파이프에 입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복원된 청계천 주변을 헤맨 끝에 동묘 앞에 주말 벼룩시장을 조성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두 군데를 다 가보았다. 작년 가을에 들렀던 가든파이브는 거대했고 근사했으며 깔끔했다. 청계천에서 이주하여 간신히 터를 잡은 가게들이 일련번호에 따라 네모반듯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오가는 손님은 드물었고 ‘임대’ 혹은 ‘급매’라는 낱말을 써 붙인 빈 가게도 적지 않았다. 대규모 영화관과 NC백화점만이 성업 중이었을 뿐, 한산하여 씁쓸했다.

반면 동묘 앞의 벼룩시장은, 비록 일요일에 한시적으로 열릴 뿐이지만,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북적거렸다. 물건은 다소 허름했지만 값이 쌌고 잘 고르면 이른바 ‘명품 구제옷’을 1만 원 꾸러미에서 골라낼 수도 있다. 나는 지포 라이터를 열 개나 샀는데, 개당 3000원, 3만 원으로 득템하였다. 집에 와서 대강 손질하고 기름을 충만한 후 써보니 여섯 개가 정상 작동했다. 나머지 네 개도 심지를 갈고 돌을 교체해두었다. 흠집도 있고 벗겨진 데도 있어서 오히려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복잡한 질서를 위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 황동규 시선집 ‘풍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시집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시집 끝에 실린 김우창의 해설이었다. 그 무렵 읽었던 많은 시집의 해설과 달랐다. 우선 19세기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인 매슈 아놀드를 언급하면서 현대 문명의 위기와 지식인의 고뇌가 제시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논한 끝에, 황동규의 시 세계가 분석되기 시작했다. 나는 곧장 김우창이라는 이름으로 된 책들을 찾으려고 시내 큰 서점으로 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읽고 또 읽었다. 김우창은 본업인 문학평론만이 아니라 이를테면 ‘거대도시와 인간의 운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오랫동안 써왔다.



동묘 앞 벼룩시장, 그 언저리의 허름한 파라솔 의자를 어렵사리 구하여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앉았을 때, 문득 떠오른 글도 김우창의 것이었다.

김우창은 ‘사회공간과 문화공간’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일터나 놀이터를 향하여 가면서 통과하는 도시, 공간이나 그러한 통과 중에 마주치는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실감나는 것인가”라고 쓰면서 그러한 “단편적 자극들의 집적”이 한 도시에 대한 문화적 인상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보들레르가 파리를 ‘대낮에도 허깨비가 부르는, 몽환에 찬, 잡담의 도시’라고 하고, 엘리어트가 이러한 보들레르의 느낌을 연상하면서 런던을 죽음의 행렬이 흘러가는 ‘비현실의 도시’라고 한 것은 납득이 가는 일”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과연 서울은 보들레르의 파리나 엘리어트의 런던같이 실감 나는 도시인가. 서울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점 비대해져서 바코드와 태그로 이뤄진 가든파이브 같은 도시가 된다면, 그것은 악몽이 아닐까.

20세기 중엽 뉴욕, 시카고, 디트로이트 같은 대도시가 19세기부터 형성된 다양한 생활 질서를 네모반듯한 직선의 대로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할 때, 그에 맞서 싸웠던 건축평론가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일상 속의 ‘불가사의한 질서’, 그러니까 ‘미묘하고도 복잡한 질서’가 도시의 생명, 그 자체라고 강조한 적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오래된 도시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외견상의 무질서 아래에는 거리의 안전과 도시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사의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것은 복잡한 질서이다. 이 질서의 본질은 끊임없는 얽히고설킨 보도(步道) 이용과 그 결과물인 끊임없는 보는 눈의 연속이다. 이 질서는 이동과 변화로 이루어지며, 비록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생활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도시의 예술 형식이라는 공상적인 이름을 붙이고 춤에 비유할 수도 있다.”

제이콥스는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거대도시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유혹에 휩싸여 이른바 ‘개발 신드롬’에 빠져 있을 때, 도시 안에 내재된 수많은 ‘다양성’과 그것들이 교합하여 이뤄내는 생활 세계의 내면적 질서를 보호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김우창도 “문화적 도시는 볼만한 건물과 거리가 있으면서, 생활 전체가 그 나름의 미적 균형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책적 선택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생활의 아름다움의 선택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를 초월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미로에서 길을 찾다

파주의 지혜의 숲에서 동묘 앞의 벼룩시장까지, 나는 복잡하고 미세한 길이 사방으로 나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두 군데 모두 최소 두 시간 이상을 머물렀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만약 이 두 장소가 백화점처럼 네모반듯한 분류를 따르거나 일련번호로 된 가게였다면 쉽게 지치고 따분했을 것이다. 일상 속의 미묘한 질서, 복잡하고 다양한 미로, 쉽게 판별할 수 없는 미세한 삶의 경로가 교차하는 장소, 그런 장소에서의 산책은, 언제나 흥미롭다.

삶이 교차하는 미로에서의 산책

동묘 옆 골목에 터 잡은 오래된 여인숙.



신동아 201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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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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