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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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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해해주는 단 한 사람을 위해
너는 감옥을 없애는 것이 무엇인지 알잖아? 그건 바로 깊고 진한 정이야. 친구와 형제로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지고의 힘, 마술적인 힘으로 감옥의 문을 열지.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죽은 거나 다름없어. 정이 되살아나는 곳에서는 삶도 되살아나지. 게다가 감옥이란 편견과 오해, 치명적인 무지와 의심 그리고 교만이라고 할 수도 있어.

-‘고흐의 편지’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그림 중에 ‘성경이 있는 정물’(1885)이란 작품이 있다. 아버지를 향한 고흐의 복잡한 애증이 묻어난 그림이다. 육중한 무게감으로 화면 전체를 장악하는 성경은 고흐의 아버지를 연상하게 한다. 아들이 어떤 항변을 해도 늘 고리타분한 원칙만을 들먹이는 아버지. 아들이 자신이 기대하던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고 ‘정상적인 성인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들을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는 폭언을 멈추지 않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심,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존경심 같은 것이 이 거대한 성경의 이미지에 묻어난다.

하지만 그림에서 관객의 눈을 빛나게 만드는 것은 무겁고 침울하며 글씨까지 뭉개져 있는 성경책이 아니라, 칙칙한 성경의 색깔에 비해 더욱 환하게 빛나는 에밀 졸라의 소설이다. 성경은 ‘거대하고 육중하지만 이제는 의미를 잃어가는 세계’를, 에밀 졸라의 소설은 ‘작고 소박하지만 이제 막 비상의 날갯짓을 시작하는 예술가’의 해방된 영혼을 상징하는 듯하다. 내게는 이 그림이 고흐의 첫 번째 ‘독립선언’으로 다가온다.

성경이 있는 정물



아버지의 죽음 직후 그린 이 그림에서 고흐는 어떤 ‘해방감’을 말하는 듯하다. 고흐는 에밀 졸라의 소설을 사랑했다. 에밀 졸라는 고흐로 하여금 민중의 고통에 눈뜨게 한 작가였다. 고흐의 눈에는 에밀 졸라의 소설이야말로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임과 동시에 ‘자신이 개척해야 할 세계’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했지만 아버지로부터 결코 이해받을 수도 존중받을 수도 없었던 아들이, 이제 아버지의 원칙주의라는 거대한 먹구름 없이도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 그림에 서려 있다. 하지만 그 앞에는 더 큰 시련이 닥쳐오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지는 강력했지만, 그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캔버스, 물감, 무엇보다도 모델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동생 테오는 이런 형의 마음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형을 후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흐는 늘 경제난에 허덕였다.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에 불타오르던 그는 더 많은 캔버스, 더 많은 물감, 더 많은 모델을 원했기에. 그는 때로는 유리걸식하고, 값싼 빵으로 허기를 채우면서도, 제대로 된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는 재료비와 모델료만은 포기할 수없었다.

무엇보다도 고흐는 ‘사람의 온기’를 원했다. 사람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집, 그저 건축물로서의 집이 아닌 ‘가정’의 온기를 원하던 고흐는 아이가 둘이나 딸린 창부 시엥과 몇 년간 함께 살기도 했지만 그녀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다.

도중에 가방에 있던 그림이나 스케치 한두 점을 주고 빵 조각을 얻어먹었지만, 10프랑이 다 떨어지고 나서 마지막 사흘 밤을 길바닥에서 자야 했지. 한 번은 버려진 수레에서 잤는데, 이튿날 아침에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썼지. 또 한 번은 장작더미에서 잤는데 그다음은 조금 나은 편이었어. 마침 건초 더미 속에서 거의 남의 눈에 띄지 않고 편안히 잘 수 있었지. 이슬비 때문에 온전히 즐기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아무튼, 이토록 비참했지만 힘이 다시 솟는 것을 느꼈고 이런 말이 나오더라. 상심이 깊고 늘 한구석에 그늘이 져 있지만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어! 연필을 잡고 다시 그림을 그릴 거야.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모든 것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어.

-‘고흐의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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