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환상극장]길을 잃은 선비, 두타동천에서 사라지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

[환상극장]길을 잃은 선비, 두타동천에서 사라지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두타동천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무주암에 귀티 흐르는 젊은 서생이 나타난 건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 강원도 깊은 골짜기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는 개경 부호의 아들 최문해였다. 문해는 자신의 이름조차 숨기고 객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다 한 달이 흐르고 나서야 식사 공양을 담당하던 승려 증공에게 자기 신분을 내비쳤다.

“성은 최고, 이름은 문해라 하오. 선사께선 나이가 저랑 비슷한 듯한데, 어인 일로 출가하셨는지?”

객방 툇마루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증공이 긴 한숨을 내뿜고 입을 뗐다.

“소승은 실상 승려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사냥꾼이었습지요.”

놀란 눈을 한 문해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살생을 업으로 하셨다? 어쩌다 회심하셨는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저까지 삼대를 내리 사냥만 하던 집안이었습지요. 이게 세상에서 가장 험한 일 아닙니까요? 결국 제 명에 죽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조부께서 호랑이에 물려 돌아가시고 연달아 아버지께서도 절벽에서 굴러 시신도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홀어머니마저 마음에 병이 들어 약도 제대로 못 써본 채 절명하셨지 뭡니까. 실은 갈 데가 없어 절에 흘러들어 왔습니다요.”

상대를 그윽이 바라만 보던 문해가 천천히 말했다.

“팔자가 참 기구하시구먼! 뭐 내 운명도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지만.”

“개경의 부귀하신 댁 자제분이라는 소문은 얼핏 들었습니다요.”

“부귀하긴 했었소만 다 한때 얘기지. 듣고 나면 호젓한 산사 생활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여겨질 거요.”

최씨 가문 유일의 생존자

문해 집안은 고려가 세워진 뒤 연이어 벼슬을 하던 명문가였다. 왕을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는 내시부는 미래 권력을 기르는 권부였는데, 문해는 가문의 후광으로 벼슬을 내리는 음서제를 통해 그곳에 당당히 입성했다. 10대이던 그는 무서울 게 없었다. 어지간한 내직 관료조차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달콤하기만 할 것 같던 그의 삶이 삽시간에 무너진 건 무신의 난 탓이었다. 경기 남쪽에서 군사를 일으킨 정중부는 개경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문해 부친이 십자로로 끌려가 참수됐다는 소식을 들은 문해의 외조부는 재산의 반을 군부에 바치고 남은 식솔의 목숨을 샀다. 외손인 문해와 그의 어미도 명단에 오르는 덕에 살아남았다.

최씨 가문 유일한 생존자인 문해는 수완 좋은 외조부 덕에 목숨을 건지는 데서 더 나아가 궁중 서기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다. 까막눈이던 장수들이 고위 관직을 차지하면 어김없이 공문을 대필해 줄 문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불철주야 혼신을 다해 충성을 바쳤고, 예전 영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한 삶을 사는가 싶었다.

문해의 인생이 다시 한번 꼬인 건 외조부 댁에서 열린 어느 연회 탓이었다. 촉망받는 젊은 장수들을 초대해 뇌물을 바치고 기녀도 붙여줘 향후 안위를 도모하려던 외조부의 계획은 근사하게 설계된 것이었지만, 참혹한 결과를 빚을 변수 하나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바로 자신의 딸이자 문해의 어머니였다.

잔칫상을 준비하던 문해 어머니는 비록 과부였으나 여전히 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눈독을 들인 장수 하나가 겁탈한 뒤 자신의 여종으로 삼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만약 그녀가 남의 종이 된다면 문해 역시 종이 돼야만 했다. 외조부는 그나마 남은 재산을 다시 반토막 내 외손을 구했다.

긴 이야기를 마친 문해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던 증공이 속삭이듯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님께선 어찌 되셨는지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문해가 대답했다.

“그게 참 기가 막히는 얘기요. 차마 꺼내기 싫소만 뭐, 이제 내 인생 어찌 되건 뭔 상관일까? 안 그렇소? 이런 삶이 난 지겹다오.”

“차마 하기 싫으시다면 멈추십시오. 소승이 실례했습니다요.”

“뭐 괜찮다니까 그러네. 우리 어머님은 잘 살고 계시거든. 그것도 아주 잘 살지!”

“무슨 말씀이시온지?”

“말 그대로 잘 사신다오. 정분이 얼마나 깊은지 자식도 둘을 낳았다지 뭐요? 안 재밌소? 한 번은 찾아간 적도 있소. 냉연합디다! 그게 인생이라는 거였소.”

외숙의 비극적 죽음

고개를 숙인 증공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불당 쪽으로 움직이려 하자 문해가 상대 옷깃을 거머쥐며 만류했다.

“좋은 얘기 들어놓고 내빼기는? 자기 얘기도 좀 해줘야 공평하지 않나?”

다시 털썩 주저앉은 증공이 입술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망설이자 문해가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외조부 얘긴 안 궁금하오? 그분은 얼마 전 돌아가셨지. 돈으로 살린 아들을 앞세우고 지옥을 사시다 그리 가셨소. 아들은 왜 죽었냐고? 외숙이 술에 취해 우리 어머니 집을 찾아간 거요. 누이가 보고 싶다고 말이지. 어머니를 빼앗은 그 장수가 애첩 오빠라며 상다리 부러지게 대접을 했는데, 글쎄 이 분이 만취해 그 장수한데 반말을 했다는군! 뒤채로 끌려가 맞아서 돌아가셨소.”

증공이 한숨을 푹 내뱉자 덩달아 한숨을 쉰 문해가 속삭였다.

“그래도 그게 내겐 또 행운이 됐지 뭐요?”

“무슨 말씀이신지?”

“외숙에겐 자식이 없었거든. 외가 혈통도 끊어진 거지! 덕분에 재산이 내 손아귀에 떨어졌소. 상속받은 걸 닥치는 대로 처분해 곧장 이리로 내려온 거요. 주지 외엔 내 정체를 아무도 모를 곳으로.”

증공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문해가 상대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제 스님 차례요.”

어린 증공을 키운 건 태반이 강원도의 산과 바람이었지만 젖을 물려 사람으로 만들어준 건 할머니였다. 가출했던 증공의 어미는 그가 다섯 살이 돼서야 갑자기 다시 나타났는데, 그녀 옆엔 젊은 사내가 하나 딸려 있었다. 증공은 그 사내가 자신의 아비인 줄로만 알고 기쁨에 겨워 포옹했다. 산아래 마을이란 마을은 모조리 헤매며 손자 젖동냥을 다니다 병을 얻은 늙은 할머니는 얼마 뒤 희미한 웃음과 함께 돌연 삶을 등졌다.

증공이 아비라 여긴 사내

문제는 증공이 아비라 여긴 사내였다. 그는 아내의 전 시아버지로부터 부지런히 사냥 기술을 배워 연마하더니 이내 상대를 추월해 버렸고, 마침내 스승을 능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술에만 취하면 집안 물건을 부수던 그는 말리는 할아버지마저 구타했다. 두 사람의 불화는 점차 극에 달해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날 듯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호랑이 손님이 찾아와 할아버지를 물고 갔고, 그의 시신 일부만 옷가지와 더불어 발견됐다.

증공은 가짜 아비의 폭력성을 잘 알았기에 살기 위해 철저히 순종하며 일찍부터 사냥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인적 없는 험준한 산비탈에 함정을 설치하는 일은 고독하고 위험한 것이었지만 언제 불같이 화를 낼지 알 수 없는 아비와 있는 것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그런 아비도 어느 날 낭떠러지로 굴러 실종됐다.

증공은 유일한 혈육이 된 홀어미의 병치레를 도우며 남은 소년기를 보냈다.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미를 돌봤지만 이미 나을 병이 아니었고, 약초꾼을 따라나서서 구해 온 약재마저 별 도움이 못 됐다. 그녀는 아들 품에서 비교적 평온하게 세상을 하직했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에 잠겼던 문해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방금 들은 얘긴 말이지, 뭐랄까, 뭔가가 부족하단 말이지. 아무리 자기가 한 얘기라지만 우리 스님도 그리 생각하지 않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진 증공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도대체, 뭐가 부족하다는 말씀이신지요?”

상대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문해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비 얘기가 빠졌잖소? 가짜 아비 말고 스님을 낳아준 진짜 아비 얘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증공이 객방 건너편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는 참새 떼를 쳐다보다 신음처럼 속삭이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그 얘기가 빠졌군요. 하지만 소승은 그가 사라진 이야기가 더 좋습니다요. 기억이란 게 뭐 별거겠습니까?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세상 살다 가도 좋다는 게 부처님 자비 아니겠습니까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허상이라면 그럴듯한 허상 하나쯤으로 자기를 속이는 것도 절에선 별일 아니니깝쇼. 가보겠습니다요!”

벌떡 일어서서 승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증공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문해가 툇마루를 내려와 불당을 향해 걸었다. 멀찌감치 서서 석가여래를 향해 머리를 까딱여 인사드린 그는 막 증공이 들어간 승사로 걸음을 옮겼다. 닫혔던 승사 여닫이문을 빠끔히 열고 얼굴을 내민 증공이 말했다.

“내일 저랑 산이나 타시겠습니까요? 암벽 오르는 기술이라도 배워두시면 다 쓸모가 있을 테니깝쇼.”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만 있던 문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투성이가 된 증공

아침나절에 등산을 시작한 증공과 문해는 해가 져도 돌아올 줄 몰랐다. 서서히 불안해진 주지는 승려들 손에 횃불을 들려 인근 산들을 뒤져보게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자취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틀 뒤 피투성이가 된 증공이 혼자 절로 돌아왔을 때, 주지는 불길한 예감에 말을 잃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치료되자 주지는 증공을 자기 방으로 불러 심문을 시작했다.

“증공아! 사실만 말해야 한다. 그래야 절이 살고 내 너도 어찌 살려볼 궁리를 할 수 있다. 알겠느냐?”

머리를 조아린 증공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진실만 말씀드리겠습니다요!”

등잔불 심지를 자른 주지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최문해를 죽였느냐?”

고개를 쳐들고 주지의 수척한 얼굴을 힐끔 노려본 증공이 격한 어조로 대답했다.

“천부당, 아니 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요! 소승 결코 누굴 죽이지 않았습니다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증공을 쏘아보던 주지가 어렵게 입을 뗐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기는 참으로 힘들다만, 어차피 해야 할 말이니까. 증공아! 너는 이미 살생을 한 전력이 있지 않으냐? 게다가 문해랑 네가 객방 툇마루에서 실랑이를 벌였다는 말을 누가 해주더구나. 문해가 너를 찾아 승사까지 쫓아왔다던데?”

“그건 오해십니다요! 서로 지난 얘길 주고받으며 가까워졌을 뿐입니다요. 울적한 기분이나 풀자고 등산을 제안한 건 사실입니다만.”

“산을 탈 줄 모르는 서생을 데리고 등산은 왜 해? 그리고 어디로 올랐느냐?”

“두타동천 암곡을 타다 내려오려고 했습니다요. 근데 이분이 계속 오르자고 조르지 뭡니까요. 너무 위태로워 만류하기를 여러 차례 했건만 아랑곳하지 않고 암벽 사이를 끝없이 오르지 뭡니까!”

“그게 가능하냐? 너처럼 산에서 뒹굴며 큰 신분도 아니고, 몸 쓰는 재주라곤 붓 잡는 일이 전부였을 텐데?”

“그게 놀라울 뿐입니다요. 그는 마치, 마치 뭐냐, 죽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주지스님께선 이미 자기 신세를 잘 알고 있다고 하더이다. 절벽 꼭대기 모서리에 위태롭게 서더니 소승을 등지고 넋두리하듯 말했습니다. 세상이 싫다고! 게다가 자기에겐 아내가 있었다고 해서 많이 놀랐습지요.”

“그런 얘기까지 하더냐?”

“네! 아내와 어미가 한 장수의 여종으로 같이 끌려갔다고 하더이다! 툇마루에서 나눴던 얘기랑 너무 달라 깜짝 놀랐더랬습지요.”

잠시 눈을 감은 주지가 염주를 쥐고 ‘극락왕생’을 여러 번 중얼거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건 사실이다. 난 개경에 머물 때 그의 외조부 집안 대소사를 돌보던 복전이었다. 자주 들러 집안 복도 빌어주고 궂은일도 처리해 주곤 했지. 문해의 아내는 심지어 나이도 몹시 어렸다. 아주 힘든 시절이었지.”

한숨을 돌린 증공이 조금 나른해진 음성으로 물었다.

“소승, 결단코 서생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물러가도 됩니까요?”

증공을 살짝 노려본 주지가 되물었다.

“그래서 문해는 어떻게 죽었는데?”

“그게 말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말입쇼!”

“뭐가 그리 이상하더냐?”

“춤을 췄습니다요.”

“춤을? 누가?”

“그분이 마지막에 춤을 췄습니다. 빨리 안전한 제 쪽으로 오라고 손을 내밀었건만, 덩실덩실 춤을 추며 웃었습니다. 그러곤 순식간에 낙하해 버렸지 뭡니까요.”

학을 타고 나타난 문해

[GettyImage]

[GettyImage]

혐의를 대충 벗었다고는 하지만 증공에게 씌워진 살인 누명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직접 심문한 주지조차 바라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너무 괴로워 저녁마다 불당에서 밤새 염불하며 문해의 무사 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런 간절함이 기적을 일으켰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허황된 환상이었는지, 어느 날 새벽 학 한 마리가 불당 앞으로 사뿐히 날아와 앉았다.

밤샘 염불로 지친 채 승사로 향하려던 증공은 거대한 학이 자기 앞에 내려앉는 장면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꿈일까 하여 눈을 비볐지만 그건 분명 학이었고, 그 등에 타고 있는 건 문해였다. 땅 위로 내린 문해가 다가오며 말했다.

“내가 죽었다고 여긴 게로구먼. 보시오! 멀쩡히 살아 있소만.”

앞으로 다가가 상대를 왈칵 껴안은 증공이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요. 우선 불당 안으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듣겠습니다.”

불당 안에 앉은 문해는 그간 증공의 마음고생을 위로하고 나서 자기가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다 천만다행 나뭇가지에 옷이 걸렸지 뭐요. 간신히 발 디딜 공간을 발견했는데 하필 바로 옆에 커다란 틈이 있었소. 사람 하나가 통과할 정도였는데, 살고 봐야겠기에 무작정 안으로 들어섰소. 긴 회랑이 나오더니 나선 계단으로 연결됐고, 한참을 걷다보니 갑자기 사방이 환해지더란 말이지. 도착한 곳이 어디였는지 아시오?”

“어디였습니까?”

“동해 용왕의 궁전이었소! 용궁을 발견한 거였지. 거긴 사람 세상이랑 그리 다를 바가 없더란 말이요. 용왕이 나를 어찌나 극진히 대접하는지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소.”

“그럼 그동안 그곳에서 지내신 겁니까요?”

“그렇소. 갓 낙성한 전각의 상량문 지어주느라 바빴고, 또 잔치도 여러 번 열렸거든. 초대 손님도 엄청난 자들이었소. 다 신선이었다니까! 그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자가 동선이라고, 용왕도 함부로 못하더군. 계곡의 신선이었는데, 더 놀라운 건 그가 날 잘 알더라 이 말이지.”

“속계와 선계는 질서가 다른데 어찌 알았을까요?”

“자신이 나와 같은 가문이라고 했소. 수백 년 전 경주에서 살다 신선이 된 최씨라면 누가 떠오르시오? 선사는 모르시려나?”

“최치원 공 아니십니까? 소승 아무리 무식해도 선가 생활이 몇 년쨉니다.”

만면에 미소를 띤 문해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옳지! 우리 가문이 최치원 공 후손이라 그 말이지. 그분께서 동선이 돼 계시더라 그 말이요. 가슴이 쿵쾅대고 죄 사라졌던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이 새삼 생기더란 말이지.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소.”

“그런데 어찌 돌아오셨습니까? 동선의 후손이면 역시 신선이 되시는 거 아닙니까요?”

“암! 약속을 받았소. 1년 후에 삼신산에서 뵙기로.”

“1년 동안은 어디에 계시고요?”

“용왕과 지내야지 뭐 어쩌겠소? 아까 말했나? 용왕의 권력이 아무리 세도 동선의 위엄을 넘볼 수는 없다고!”

“그렇담 다시 용궁으로 돌아가십니까? 제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진 않으시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문해가 증공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조금만 버티면 내 선사를 데리러 다시 오리다. 등반도 같이 했거늘 신선이 사는 삼신산도 함께 가야지! 안 그렇소?”

학 울음소리를 들은 문해가 쏜살같이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학의 등에 가볍게 올라탄 그가 증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1년, 1년만 잘 버티시오. 우리도 의젓하게 함 살아봅시다!”

학이 훨훨 날아오르더니 공중에서 한 바퀴 크게 선회했다. 문해의 목소리가 아득히 높은 곳에서 울렸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증공이 문해가 사라진 동쪽 하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직면한 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실종되기 직전 낭떠러지에서 했던 문해의 마지막 말이 문득 떠오른 증공은 말없이 눈물 흘렸다.

문해의 마지막 약속

낭떠러지 끝에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선 문해는 평소답지 않게 용감해 보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팔을 뻗으며 빨리 돌아오라고 외치는 증공에게 속삭였다.
“이런 곳에 서보니 제법 사내가 된 기분이 드는군. 그건 그렇고 말해 보시오.”

너무 위험해 더 다가가지는 못하고 그저 손만 내밀며 문해를 설득하던 증공이 물었다.

“뭘 말하라는 말씀이신지? 그러지 마시고 어서 돌아오십시요!”

“선사의 진짜 아버지 얘기 말이지. 난 어쩌면 여기서 죽을 텐데 뭐가 두렵소?”

이를 악물며 눈을 감은 증공이 득음한 창기처럼 외쳤다.

“살인 얘기가 그리 듣고 싶으십니까? 맞습니다요! 할아버지께선 계부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호랑이는 애초 있지도 않았었지요. 제 눈으로 그 장면을 목격했었으니까요. 너무 어려 그 의미만 몰랐을 뿐, 분명 마음 안에 담아둔 기억입니다. 계부는 인정사정없이 할아버지를 난자해 죽였습니다요. 은인자중 때를 기다렸다 저도 그에게 똑같이 해줬던 겁니다!”

“절벽에서 굴렀다고 안 했소? 어떻게 복수했소? 정말 듣고 싶구려.”

“절벽으로 떠밀었습지요! 강인했던 계부는 손가락 힘으로 암벽 끝을 잡고 버티더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소?”

“낫으로 손가락 마디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습죠. 아주 천천히 즐기며 했습죠!”

“그럼 그 계부가 당신 친아버지도 죽였겠구려? 그걸 알면서도 어머니는 그와 살았고?”

“그렇습니다. 할아버지가 그걸 눈치채자 살해해 버렸던 겁니다요. 철없는 어머니가 실토했던 거지요. 제 어미는 저를 낳고 몇 달 뒤 아비와 함께 아랫마을 나들이를 갔답니다. 거기서 계부에게 겁탈당했고 제 아비는 그걸 말리려다 살해당하신 거지요. 저는 계부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엿보다 그 사실까지 알게 됐습죠.”

“어머니는? 진짜 잘 모셨소?”

“잘 모시려고 했습니다. 마음을 드릴 순 없었지만, 나름대로 불쌍한 여자였습니다요.”

문해가 갑자기 똑바로 일어서서 바람을 맞이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떨어지기 직전 그가 말했다.

“산다는 건 말이지. 춤추는 거거든. 춤을 못 추면 그게 삶인가? 안 그렇소? 난 이제 마음껏 춤을 춰보려 하오. 우리 다음 생에서는 신선쯤은 돼서 만납시다.”

#최치원 #두타동천 #무주암 #기재기이 #신동아

* 이 작품은 신광한의 ‘최생우진기’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프란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를 활용해 각색했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21년 8월호

윤채근 단국대 교수
목록 닫기

[환상극장]길을 잃은 선비, 두타동천에서 사라지다

댓글 창 닫기

2021/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