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호

알커피 녹이다 버큠포트 넘어 에스프레소에 닿다

[김민경 ‘맛’ 이야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2-12-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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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릿빛 크레마 밑에 숨어 있는 에스프레소. [Gettyimage]

    구릿빛 크레마 밑에 숨어 있는 에스프레소. [Gettyimage]

    10월 26일 경북 봉화군에 있는 광산이 무너지며 갱도에 고립돼 있던 광부 2명이 9일 만에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일이 있었다. 221시간 만에 두 발로 걸어 갱도를 빠져나온 광부들의 무탈한 생존기의 조력자는 놀랍게도 ‘믹스커피’였다. 길쭉한 믹스커피 1봉지에는 탄수화물, 당류, 지방, 나트륨 등이 들어있다. 40봉을 하루에 다 먹으면 한국인 남성의 하루 에너지를 채울 열량이 된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다.

    1976년 태어난 믹스커피는 대한민국에 마련된 크고 작은 사무실과 거의 모든 가정집은 물론이며 식당과 다채로운 노동과 축제의 현장, 온갖 여행 가방 속에 있어 왔다. 믹스커피 전에는 동결 건조한 커피, 일명 ‘알커피’와 구수한 프림, 흰 설탕을 입맛대로 컵에 넣고 섞어 마셨다. 내 인생의 첫 커피는 ‘커피 하나, 프림 셋, 설탕 셋’이었고 그 다음에는 믹스커피를 만나 지금껏 함께하고 있다.

    쓴맛 부드럽게 퍼지는 버큠포트 커피

    병아리콩을 닮은 헤이즐넛. [Gettyimage]

    병아리콩을 닮은 헤이즐넛. [Gettyimage]

    그 사이 급류에 올라타 바라보는 풍경처럼 속도감 넘치는 커피 유행에 휩쓸리며 오늘까지 왔다. 초등학교 때 아빠가 홍콩에서 일본산 커피머신을 들고 오셨다. 이후 집안 곳곳에서 헤이즐넛 향이 났다. 동네 아줌마들끼리 선물로 주고받던 달콤한 향의 블루마운틴 커피가루에서 나던 향이다. 사실 병아리콩처럼 생긴 헤이즐넛에서는 그런 향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꾸루룩 꾸루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은 유리주전자로 떨어지던 액체는 커피라기보다는 커피 가루를 통과한 물에 가까웠다. 헤이즐넛 블루마운틴은 이후 티백으로도 나와서 또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 지금의 아메리카노와 비슷한 커피를 파는 커피전문점이 생겼다. 그곳에는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있어 삐삐(beeper)를 확인하며 커피잔을 잡고 친구를 기다렸다. 대학에 입학하자 커피전문점은 화장을 고치고, 시간을 죽이며, 소개팅을 하는 장소가 됐다. 이때까지 커피는 구실일 뿐이었다.

    스무 살엔 친구가 신촌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신촌·홍대 부근의 여러 공연장에서 활약하던 가수들이 자주 온다기에 가보았다. 마치 과학자나 쓸 것 같은 기계 즉, ‘사이폰 드립’, 정확하게는 버큠포트(Vacuum pot) 커피를 처음 보았다. 쓴맛이 부드럽게 퍼져 있고, 향긋하며, 뜨거운 대신 따끈해서 좋았다. 커피 추출 과정을 보는 재미는 좋지만 너도나도 따라하기에는 번거로운 방법이다. 지금까지도 신촌 그 카페에 가면 변함없이 버큠커피를 맛볼 수 있다. 같은 시절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베트남 쌀국수 식당이었다. 이곳의 명물은 연유 커피였다. 컵 바닥에 연유를 잔뜩 넣고, 베트남식 드리퍼에 커피 가루와 따뜻한 물을 부어 나간다. 입자가 무척 고와 탁하고 텁텁한 커피가 연유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새까만 커피와 연유를 재빠르게 섞으면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음료가 된다. 오래지 않아 입자가 느껴지는 새까만 베트남 커피의 유행도 왔다. 믹스커피처럼 연유가 들어있는 것, 밀도 있게 쓴맛을 주는 오리지널 커피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의 ‘커피 인심’

    진공포트 커피. [Gettyimage]

    진공포트 커피. [Gettyimage]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이탈리아로 갔다. 요리 학교를 마치려면 반드시 일정 시간 견습생으로 식당에서 일해야 했다. 대체로 보조의 보조 역할이었는데 밤 한 가마니를 주면 껍질을 벗기고, 한 박스의 양파를 썰고, 한 바구니의 아티초크를 손질하고, 한 양동이의 생선뼈와 내장을 제거하곤 했다. 그 사이사이에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이탈리아의 ‘커피 인심’은 전 세계에서 가장 따뜻하다. 카페에 가서 에스프레소 두 잔 값을 내고 한 잔만 마신다면 먹지 않은 한 잔이 남는다. 주머니에 커피 값이 부족한 누군가를 위해 남겨두는 것이다. 이는 누구라도 커피만큼은 마음 편히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이탈리아만의 나눔 활동인 ‘카페 소스페소(caffè sospeso)’다. 나누고 배려하는 문화의 중심에 에스프레소가 있다. 배는 부르지 않겠지만 마음을 살찌우는 문화다. 그 덕분에 견습생인 내게도 품질 좋은 에스프레소가 밤낮 얼마든지 제공됐다. 누구든 눈만 마주치면 “커피 한 잔 할래?”가 생활이었으니까.



    현재의 내가 가진 커피 습관은 그때 뿌리내린 것이다. 기름이 돌 정도로 까맣게 볶은 커피콩을 분쇄해 추출기에 약 7g을 담고, 꾹꾹 골고루 눌러, 섭씨 90도 정도의 물을, 9bar라는 엄청난 압력으로 25초 정도 통과시켜 25㎖의 커피를 얻는다. 기름이 반들반들 도는 구릿빛 크레마 밑에 숨어 있는 에스프레소로 커피를 배웠고 내 혀는 강렬한 맛에 단단히 길들여졌다.

    한국에 돌아와 작은 잡지사의 막내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이탈리아 요리 학교 동문인 편집장과 섬세한 미식가였던 발행인을 따라다니며 매끼 에스프레소를 얻어 마셨다. 그땐 내 커피의 시작과 끝은 모두 에스프레소구나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새로 물꼬가 터진 급류에 휘말리게 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라도 커피만큼은 마음 편히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사진은 이탈리아 커피전문점. [Gettyimage]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라도 커피만큼은 마음 편히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사진은 이탈리아 커피전문점.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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