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결핵과의 전쟁 벌여온‘백신의 황제’

WHO 신임 사무총장 이종욱

  • 글: 송상근 동아일보 사회2부 기자 songmoon@donga.com

    입력2003-02-25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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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두들 “이것은 꿈이다”고 외쳤다. 그러나 한국인이 국제기구 선출직 의장에 뽑힌 것은 결코 기적이 아니었다. 이 당선자가 20년간 WHO에서 보여준 능력과 총력 외교를 펼친 정부의 뒷바라지가 엮어낸 한편의 드라마였다.
    결핵과의 전쟁 벌여온‘백신의 황제’
    “이 박사가 됩니다. 선거 전에 이런 얘기하면 안 되지만 당선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선거가 실시되기 하루 전인 1월27일 오후 7시경. 김성호(金成豪) 보건복지부장관은 이종욱(李鍾郁) 박사의 당선을 100% 장담했다.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 있는 뫼벤피크 호텔 지하 일식당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 자리에서였다.

    “표 분석이 다 끝났다”며 확신에 찬 표정을 짓는 김장관 옆에서 복지부 문경태(文敬太) 기획관리실장은 예상 득표수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1차 투표에서 우리만 더블 디지트(두자릿수)의 표를 얻을 겁니다. 다른 후보들은 5, 6표씩 분산될 것이고…여세를 몰아 3차 정도에서 끝날 걸로 봅니다.”

    한국인 최초의 국제기구 首長

    하룻밤만 지나면 김장관과 문실장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되겠지만 기자는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저러다가 만약에 이박사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언론에서는 벨기에의 피터 피오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봤다. 현지 분위기가 그런데도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온 김장관이 정반대로 얘기하니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월28일 오전 9시 반부터 시작된 투표 결과는 김장관이 말한 대로 나타났다. 1차 투표에서 이박사가 12표를 얻어 1위를 하고 7차까지 가는 접전 끝에 피오트를 누르고 당선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국제기구의 수장(首長)이 탄생하는 순간 투표장에 있던 한국 대표단은 서로 끌어안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 저녁 7시 제네바 시내의 한식당 ‘이조’에서는 당선을 축하하는 만찬이 마련됐다. 김장관, 정의용(鄭義溶) 제네바 대표부 대사, 엄영진 WHO 집행이사 등 참석자들은 선거 운동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박사가 WHO 직원들과 회의를 마치고 밤 9시50분경 식당에 들어서자 정대사가 인사말을 했다.

    “이박사를 국제기구의 수장으로 모시게 돼서 큰 영광입니다. 외교사에 빛나는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큰 영광입니다. 이박사가 연임하도록 축배를 제의합니다.”

    이박사는 “계속 영어로만 얘기하다 한국어로 하려니까 잘 안 된다”고 농담한 뒤 선거운동을 도와준 정부 관계자들에게 고마움을 나타냈다.

    “정대사님은 한 국가의 대사를 세 번 네 번 찾아다녔다고 어느 외국 대사가 말하더군요. 노력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김성호 복지부장관님은 전세계가 좁다 하고 다 돌아다녔습니다. 그게 다 표로 돌아왔습니다. 영국의 나종일(羅鍾一) 대사님은 눈이 펑펑 오는데 털모자 쓰고 저하고 같이 왔다갔다 하셨고요.”

    192개 국가가 가입한 WHO는 ‘유엔 산하 최대 국제기구’로 알려졌지만 정확히 말하면 산하 기구는 아니다. 독립적 성격의 전문 기구이다. 유엔 사무총장이 책임자를 임명하는 다른 유엔 기구와 달리 WHO는 투표로 사무총장을 선출한다. 2년 단위로 편성하는 예산 규모는 22억달러.

    WHO 사무총장은 국제 사회에서 유엔 사무총장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각국 원수에게 면담을 신청하면 예외없이 응한다고 한다. 질병 및 빈곤 문제가 심각한 아프리카, 동남아, 남미, 중동에서 WHO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전세계에서 8000여 명이 WHO에서 주는 월급을 받고 일하는데 사무총장이 인사권을 갖는다.

    이처럼 막강한 자리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당선됐지만 정작 이박사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76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얼마 안 돼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줄곧 외국 생활을 한 데다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그를 만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말을 아낀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거 당일 저녁 이박사가 제네바 시내의 한식당 ‘이조’에서 열린 축하 만찬에 참석한 뒤 직접 차를 몰고 집으로 갈 때였다. 기자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운전석 옆자리에 뛰어 들면서 “몇 가지 질문이 있다”고 하자 그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선거 자료집에는 1981년부터 미국 ‘린든 B 존슨 열대지방 의료센터’ 의무관으로 미국령 사모아에서 지낸 것으로 돼 있다. 그 후 계속 WHO에서 근무했다. 대학졸업 뒤 왜 개업하지 않았는지, 5년간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했다.

    “봉사활동을 많이 하셨다면서요?”

    “아니에요, 다 돈 받고 한 일인데….”

    “WHO 근무 전에 남태평양에서 봉사활동을 하셨잖아요.”

    결핵과의 전쟁 벌여온‘백신의 황제’

    해방둥이(58세)인 이종욱 박사의 초등학교 시절 모습

    “뭐 그런 걸. 대단한 것도 아닌데. 나중에 자서전을 쓰면 그 때나….”

    집으로 돌아가는 이박사의 승용차 안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지만 끝까지 자세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본인은 “나를 슈바이처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지인들에게 자주 말한다고 한다.

    기자가 그날 차 안에서 새로 들은 ‘영양가 있는’ 내용은 취미였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어쩌다 하는 말도 아주 짧았다. 좀 무뚝뚝해 보이고, 그래서 특별한 취미도 없는 것 아니냐고 물으니 목소리를 약간 높이면서 “취미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스키와 스쿠버다이빙을 즐겨요. 선거만 아니면 매주 알프스 산맥에 가는 건데…”라고 말했다. 그리곤 차를 돌려 숙소인 뫼벤피크 호텔에 기자를 내려놓고 가버렸다.

    언론에 알려진 이박사의 개인 얘기는 대부분 본인의 입이 아니라 몇몇 지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국민참여센터 본부장인 이종오(李鍾旿) 계명대 교수가 그의 동생이어서 이박사의 옛날 얘기가 더 자세히 알려지게 됐다.

    대학 때 ‘나자로마을’에서 봉사활동

    그는 서울의 마포 용산 서대문 종로 구청장을 지낸 이명세(李明世)씨의 4남1녀 중 셋째로 서울서 태어났다. 이종오 교수는 넷째이고 성공회대 사회학과의 이종구(李鍾久) 교수가 막내다.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어서 유복하게 어린 시절을 지냈지만 4·19 직후 아버지가 종로구청장을 사임하고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은 힘든 시절을 보냈다. 이박사가 경복고 1학년 때였다.

    이리저리 돈을 융통해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고교 졸업 후 공대에 입학했다. 본인 표현을 빌리면 “공대 다니다 군대 갔다와서 다시 의대에 들어갔다.” 어느 대학 공대인지, 어디서 군생활을 했는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런걸 꼬치꼬치 물으면 그는 “외국 기자들은 개인 얘기는 절대 묻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대학 시절 그는 경기 안양의 나환자촌 마을인 ‘나자로 마을’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동갑(1945년생)으로 가톨릭 신자인 카부라키 레이코 여사를 거기서 만나 결혼했다. 하와이 주립대로 유학 가서 공중보건학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1983년 WHO와 첫 인연을 맺었다. 남태평양의 피지에서 나병 관리 책임자로 근무하기 시작한 것. 그리고 WHO의 지역 사무처 질병관리국장, 예방백신 사업국장, 세계 아동백신운동 사무국장을 잇따라 역임했다.

    그는 남태평양과 동남아의 많은 국가에서 의료봉사를 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본인은 사실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귀국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일이 좋고 봉급이 좋아서 계속 남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이박사를 가리켜 “외교관 타입이며 대단한 실용주의자이자 성과 지향적”이라고 말한다.

    예방백신 사업국장 시절 소아마비 유병률(有病率)을 세계인구 1만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려 사실상 박멸에 가까운 성과를 올리자 1995년 미국 잡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이 그를 ‘백신의 황제’라 불렀다.

    하를렘 브룬틀란트 현 총장이 취임한 1998년 이후 이박사는 수석 정책보좌관, IT프로젝트 담당관으로 WHO의 핵심 정책부서장을 두루 역임했고 2000년 결핵관리국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사무총장 아래 고위 관리직 37명 중 한 명이었다.

    이박사는 회원국이 내는 연간 5000만달러의 기부금으로 북한에 6만명분의 결핵약을 공급하는 등 19개 국가를 대상으로 ‘결핵과의 전쟁’을 벌여왔다.

    지난해 8월 결핵퇴치 문제로 북한을 방문했다가 서울에 들른 이박사는 브룬틀란트 현 사무총장이 건강을 이유로 차기 선거에 나오지 않겠다고 하자 출마 의사를 굳혔다. 한번도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20여 년 전부터 마음에 둔 WHO 사무총장 선거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먼저 인권대사이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인 박경서(朴庚緖) 박사를 찾았다. 박경서 박사는 제네바에 있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에서 오래 근무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였다. 이박사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WHO 사무총장이 돼야 하는 이유를 A4 용지 8페이지에 담아 도움을 요청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오랜 인연이 있는 박위원은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에게 이박사 얘기를 전했고, 박실장은 다음날 박위원에게 “대통령님께서 이해하셨다”며 지원을 약속했다.

    WHO 사무총장은 총회가 아닌 집행이사회(32개국)에서 선출한다. 총회는 이 결과를 그대로 인준하는 것이 관례다. 외교통상부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지명도가 너무 낮아 승산이 희박하다는 반응이었다. 당시 정부는 국제박람회 여수 유치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복지부는 조금 달랐다. 이박사는 5년 전에도 사무총장 선거에 도전하려다 노르웨이 수상 출신인 브룬틀란트가 너무 버거운 상대여서 포기했었다. 다행인 점은 남북한이 모두 집행이사회 멤버라는 것이었다. 집행이사국은 WHO의 6개 지역별로 정해진다. 원래 순번대로 서태평양 지역의 집행이사국이 될 베트남은 한국의 설득으로 자리를 양보했다. 북한은 서남아시아 지역의 집행이사국이었다.

    WHO를 통해 남북한이 보건의료 분야에서 협력을 늘리기 위해 한국이 북한과 함께 집행이사국이 됐는데 이것이 선거에서 엄청나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32표 중 남북한의 2표를 그냥 먹고 들어간 셈이기 때문이다. 7차까지 가는 투표 결과가 17[:]15로 끝나 남북한의 2표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입증됐다.

    김성호 복지부장관은 지난해 10월 김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이박사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보고했고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 지난해 12월3일 국제박람회 유치에 실패하자 외교부 역시 총력지원 체제로 돌아섰다. 국내 보건의료계 인사들은 후원회를 만들어 활동비를 모금했다.

    이박사는 투표권이 있는 32개국 중 20여 개국을 직접 다녔다. 지난해 11월 30일 이집트 방문을 시작으로 미얀마 몰디브 필리핀 일본 중국 미국 그레나다 카자흐스탄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이탈리아 영국 스웨덴 리투아니아 등 전대륙을 돌아다녔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는 짐이 분실돼 현지 한국 대사가 준 속옷과 양말을 입고 다녔다.

    김성호 장관은 미얀마 몰디브 러시아 중국 일본 필리핀 브라질을, 신언항(申彦恒) 복지부 차관은 그레나다와 보고타를, 문경태 기획관리실장은 가봉 가나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를 돌았다. 정부는 가봉의 집행이사와 기니아의 보건부 차관을 국내에 초청해 지지를 호소했다.

    민간의 선거운동도 큰 힘이 됐다. 아프리카의 어느 국가에 진출한 한국 기업 관계자는 그 나라 대표가 투표를 위해 출국하자 자신도 선거기간 중 제네바에 머물며 지원했다.

    예비선거에서 이변 연출

    이박사가 1월21일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예비선거에 나섰을 때 세계 언론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해 미국 상하원 의원 54명이 이박사에 대한 지지서한을 미국 국무부와 보건부에 보냈고 WHO 내부에서는 숨은 일꾼으로 꼽혔지만 국제적으로는 무명의 인사였기 때문이다. 이박사는 벨기에 출신의 피터 피오트 유엔 에이즈퇴치계획 사무국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수상 또는 장관 직책을 가지지 않은 후보였다.

    그러나 예비선거의 뚜껑이 열리고 그가 두 차례의 투표에서 1, 2위를 차지하자 각국 대표단이 깜짝 놀랐다. 1월28일의 최종 선거는 첫 투표에서 과반 득표가 나오지 않으면 최저 득표자 1명을 탈락시키고 나머지 후보를 대상으로 과반수가 나올 때까지 계속 투표하는 교황선출 방식. 이에 따라 투표권을 가진 32개 국가를 대상으로 물밑 교섭, 특히 1차 투표 이후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합종연횡이 활발했다. 이박사는 7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17:15로 피오트 후보를 누르고 WHO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선거가 끝난 뒤 각국의 대표들이 한국 관계자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넸다. 재미 있는 사실은 끝까지 한국을 지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몇몇 집행이사국이 “마지막 7차 투표에서 우리가 이박사를 지지해 당선에 기여했다”고 밝혔다는 것. 이박사는 “스웨덴 대표만 유일하게 ‘사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같이 일을 잘해보자’고 털어놓았다”고 전했다.

    당선 요인은 이박사가 오랜 기간 WHO에서 근무하면서 보여준 능력,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한국의 위상, 민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박사는 “저는 상품이고 여러분(정부 관계자들)이 그걸 팔아주셨다”고 말했다.

    좋은 상품(자질과 능력)과 판촉 능력(외교력과 경제력), 둘 중 하나가 없거나 부족했어도 유엔에서 가장 큰 국제기구의 수장에 한국인이 선출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WHO 개혁이 공약의 핵심

    그는 “WHO를 이끄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유엔 산하에서 가장 큰 국제기구인 만큼 책임이 무겁다”고 자주 말했다. 그래서 정식 취임(7월) 전까지 계획을 세우고 여러 사람과 많이 상의할 작정이다.

    그는 선거기간 중 WHO의 개혁, 특히 분권화와 투명성을 공약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인력과 예산의 75%를 본부가 아닌 6개 지역에 나눠주겠다는 것. 선거가 끝나자마자 지역 사무처 직원들과 하루 종일 회의를 가진 이유가 이해됐다.

    그는 북한 문제에도 많은 신경을 쓸 것으로 보인다. 현재 WHO와 북한이 의료협력 프로그램을 갖고 기초의약품 생산시설, 혈액관리, 수액 제조시설 건설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기초의약품 생산시설을 만들기 위해 1000만달러 모금목표를 세웠지만 모금액이 부족한 상태. 북한에 대해서만 지원을 파격적으로 늘리기는 어렵겠지만 인도적 차원의 지원과 보건의료분야의 남북한 협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박사는 당선 축하 만찬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선거운동 과정에 여러 비화가 있는데 앞으로 총회 인준이 남아 있습니다. 듣고 아는 얘기라도 절제해서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비화는 (다 밝히면) 도움이 안 됩니다. 앞으로 다른 선거에도 도움이 안 되니 잘 부탁드립니다.”

    기자는 그가 5월 총회뿐 아니라 5년 후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보건대학원 학장인 배리 블룸 박사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박사는 자신의 내면을 아주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일을 추진하기 위한 개인적 야심을 드러내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유엔 최대 국제기구의 수장이 된 그가 올 7월부터 WHO를 5년간 성공적으로 이끌고 연임에 성공할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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