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호

“장롱 속 작품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미술품 1만여 점 한국 기증한 재일교포 하정웅

  • 박은경│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01-22 17: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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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홀, 샤갈, 피카소 등 ‘기증 릴레이’
    • 화가 꿈 꺾인 조센징 소년…“밝은 태양 아래 살고파”
    • 조총련-민단 사이에서 고통…“이데올로기는 요물”
    • 50차례 광주 드나들며 광주시각장애인복지관 건립
    “장롱 속 작품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1981년 어느 날, 중년의 신사가 광주일보 취재부로 들어섰다.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대뜸 “사장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약속이 돼 있느냐?”는 직원의 질문에 “아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사장과 마주 앉은 신사는 “광주는 예향(藝鄕)이라고 알고 있다. 이 지역에서 최고의 인품을 가진, 존경받는 문화인을 소개해달라. 내가 알려주고 배워야 할 게 있다. 기왕이면 화가가 좋겠다”고 방문 이유를 설명했다.

    사장은 그에게 서양화가인 오지호 작가를 소개하면서 “그분 성격이 간단치 않아서 신문사 사장인 나나 우리 기자가 찾아가도 절대 안 만나준다. 취재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먼 길을 찾아온 신사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사장은 옆에 있던 기자에게 “오 선생에게 전화라도 한번 넣어보라”고 했다.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 들은 오 작가는 “당장 만날 테니 그분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자 기자는 허둥지둥 취재수첩과 카메라를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다.

    텅 빈 미술관

    대낮에 신문사에 들이닥친 신사는 재일한국인 2세 사업가이자 30여 년 동안 수만 점의 미술품과 사료를 수집해 한국에 기증한 컬렉터 하정웅 씨(75)다. 이때의 인연으로 그는 5차례에 걸쳐 2300점의 그림을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했고 상설전시장 ‘하정웅컬렉션기념실’의 주인공이 됐다.

    ▼ 고(故) 오지호 선생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자그마한 키에 몸집도 작은 분이 하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집에서 기르던 큰 개를 데리고 큰길까지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늦가을 누런 벼가 출렁이는 논을 뒤로하고 서 계신 그 모습이 멀리서 봐도 참 어여뻤어요.”

    ▼ 반갑게 맞아주던가요.

    “폼 잡고 ‘내가 누군데’하고 뻐기는 기색이 일절 없었어요. 만나자마자 환한 얼굴로 내 손을 잡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자’ 하셨지요.”

    ▼ 무슨 얘기를 나눴나요?

    “못 배운 ×들(재일동포)이 고국의 국회의원 한자리나 차지할까 하고 한국에 들어와 푼돈 기부하면서 환대받고 여자 끼고 술이나 마시면서 뻐긴다고 ‘개×’ ‘똥×’라 욕했어요.”

    ▼ 초면에 당황스러웠겠네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 ‘재일동포 1세대가 고국에서 하지 못한 것을 우리 2세대가 하겠다. 고국의 인품 있는 분을 만나고 싶어 무작정 비행기 타고 찾아오는 나 같은 사람도 있지 않으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하 선생을 만난 오늘부터는 재일동포를 더는 욕하지 않겠다’고 해요. 오 선생처럼 저명한 문화인조차 우리 재일동포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가진 걸 보고 결심했어요. 존경받고 인품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 그 인연으로 광주시립미술관에 그림을 기증한 건가요.

    “결과적으로 그런 셈이죠. 그날 방문 이후 아들 오승윤 작가와 친구가 됐으니까요. 나와 동갑내기여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친구로 지내왔어요. 그런데 2006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전 어느 날 한국에 왔더니 이 친구가 광주에 시립미술관이 생겼다고 함께 가보자고 해요. 공공미술관이 생겼다는 얘길 들으니 무척 기뻤지요. 지방까지 문화가 활성화됐다는 의미여서 더 반가웠고요. 이 친구가 ‘기념으로 그림 한두 점을 기증해달라’고 해요.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좀 더 많이 기증해줬으면’ 하는 속내를 아니까 일부러 딴청을 피웠어요. 한두 점이라고 했으니까 ‘석(세) 점?’이라고 되물었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가 뛸 듯이 기뻐해요.”

    家電·부동산 사업으로 성공

    ▼ 1차로 기증한 그림이 모두 212점이잖아요.

    “관장의 안내를 받아 전시실로 갔는데 열쇠로 문을 따는 거예요. 그 공간이 110평쯤 됐어요. 관장이 그곳을 제 기념전시실로 만들 계획이라면서,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작품 50점 정도를 기증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요. 근데 갑자기 늘어난 기증 작품 숫자보다, 미술관을 만들어놓고 작품이 없어 전시실 문을 잠가놓고 있다는 게 더 놀라웠어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이건 시설(건물)이지 미술관이 아니다. 이런 곳에 미술관이라고 떡하니 간판을 달아놓은 건 사기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허가가 난다니 황당하다’고 했지요.”

    그 뒤 일본을 찾아온 오승윤 작가와 미술관장에게 그는 212점의 그림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작품을 기증받을 수 있을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두 사람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이 미처 예상치 못한 대규모 기증을 제시한 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전시는 적어도 분기마다 작품을 바꿔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시실 규모에 맞춰 한 번에 50점의 그림을 걸려면 적어도 200점 이상은 갖춰야 해요. 그 정도면 여러 가지 조합으로 새로운 전시를 얼마든지 기획할 수 있으니까요.”

    ▼ 많은 작품을 준비하느라 힘들지 않았나요.

    “오래전부터 하나하나 수집해서 가지고 있던 그림들을 내놓은 거지, 일부러 기증하려고 따로 수집하진 않았어요.”

    ▼ 그림 수집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1960년대 중반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회화전이 열렸어요. 그게 일본에서 한국 미술을 소개하는 첫 전시회였어요. 그때 한국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고 한국과 일본 작가 컬렉션을 시작하게 됐어요.”

    ▼ 언제 그림을 수집할 만큼 여유가 생겼나요.

    “196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부조금으로 얼마간의 돈을 손에 쥘 수 있었어요. 그걸로 도쿄 북쪽 사이타마현에 있는 가와구치에서 조그만 가전양판점을 열었어요. 4평짜리 가게였고 그 뒤에 살림집이 딸려 있었죠. 그런데 그때 도쿄올림픽을 한 해 앞두고 컬러TV가 보급되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가게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돈을 좀 벌었어요. 그리고 부동산 임대업을 시작했는데 그게 시기를 잘 탔어요.”

    오랜 세월 차곡차곡 수집한 그의 컬렉션은 광주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부산 등 국내 공공미술관에 7000점이 기증됐다. 부모의 고향인 전남 영암에는 2500점의 그림이 기증돼 ‘영암군립河미술관’에서 빛을 보고 있다. 순종황제와 영친왕·이방자 여사의 자료와 역사적 사료 기증까지 포함하면 지금까지 그가 국내에 들여온 컬렉션은 1만 점이 넘는다. 일일이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다.

    반 고흐 일본展의 충격

    “장롱 속에 숨겨놓은 작품은 그 가치를 상실한다”는 철학을 가진 하정웅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역 내 미술전람회 때 학교 대표로 작품을 출품해 1등상도 여러 번 받았다. 가난한 집안 장남에 ‘조센징’이라는 멸시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맞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희망을 던져준 게 그림이었다.

    “미술은 경계도, 민족도, 차별도 없고 오로지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였어요. 그림으로 상을 받았다는 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거죠. 그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화가가 될 결심을 한 그는 아키타공업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미술부를 직접 만들었다. “요즘은 제품에도 예술이 필요한 시대다. 미학이 없는 공고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학교 측을 설득했다. 이후 아키타현 8개 고교미술부연합회 회장 직에 올랐다. 하지만 졸업과 함께 화가의 꿈을 접어야 했다. 성적이 전교 3등 안에 드는 ‘집안의 기둥’ 장남이 그림에 빠져 지내자 어느 날 어머니가 “그림 그려서 제대로 입에 풀칠하고 사는 위인을 본 적 없다”며 스케치북과 물감, 붓 등을 모조리 들고 나가 강물에 던져버렸다.

    ▼ 포기가 쉽게 되던가요.

    “부모님은 소학교(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분들이에요. 그래서 늘 ‘배우지 못한 사람은 소나 말처럼 육신을 움직여 먹고살 수밖에 없다. 내 자식들만큼은 반드시 공부시키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어요. 어머니는 우리 5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전쟁을 치르다시피 했죠. 오사카에서 도쿄를 오가며 쌀 암거래를 하다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고, 산지에서 직접 농산물을 떼다 팔거나 탁주를 만들어 팔았어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고통을 모두 지켜봤으니 좌절감이 들었지만 그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 좌절은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고교 3학년 가을에 우에노 국립박물관에서 반 고흐 전시회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열렸어요. 그것만큼은 꼭 봐야겠다 결심하고 여름방학 내내 닥치는 대로 일해서 돈을 모았어요. 근데 하필 그때가 학교 수학여행 기간과 겹쳤어요.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지요. 감기 때문에 못 간다고. 그리고 우에노행 밤 기차를 타고 전시회를 보러 갔어요.

    고흐는 제가 처음으로 사랑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그의 생애가 고스란히 드러나 마치 삶의 증거처럼 여겨졌지요. ‘사이프러스’의 격렬히 흔들리며 약동하는 선과 색채, 프랑스 아를의 태양처럼 눈부신 ‘해바라기’…. 그림 하나하나에서 전율을 느꼈어요. 그 순간 ‘나도 밝은 태양 아래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롱 속 작품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1955년 아버지 생신 기념으로 촬영한 가족사진. 하정웅 씨는 재일교포 가정의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외상 술값

    하정웅은 1939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동북지방 아키타현 오보나이(현 다자와코) 마을에서 유년과 학창시절을 보냈다. 삶은 녹록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부모는 고향(전남 영암)으로 돌아가려고 가재도구를 정리해 미리 배편으로 보내고 출국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언제 출항할지 기약 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귀국을 포기하고 다시 오사카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가재도구 하나 없이 맨몸으로 시작해야 하는 가족의 살길은 막막했다. 그때 그의 외숙부뻘 되는 친척이 가족을 아키타로 불러들였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발전소 공사 현장의 소장인 외숙부를 도와 짐마차를 끄는 마부가 됐고, 어머니도 함께 일을 나가 자갈을 채취하고 시멘트를 운반했다.

    매일 새벽 6시면 일터로 향하는 부모를 대신해 장남인 그는 동생 넷을 책임져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갓난아기였던 막내 남동생을 등에 업고 양손에 각각 동생들의 손을 잡고 등교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도시락을 도둑맞는 소동이 벌어졌다. 체육시간에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간 사이, 배가 고픈 막내가 책상 밑을 기어 다니며 도시락에 손을 댔던 것이다.

    ▼ 동생을 데리고 학교 가는 게 창피했겠네요.

    “형편이 어쩔 수 없었으니 그렇진 않았어요. 셋째와 넷째는 얌전해서 말썽 피우는 일이 없었고 친구들도 싫어하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동생을 어머니처럼 돌봐줬고요.”

    ▼ 가출은 왜 했나요.

    “기업들이 ‘조센징’이라고 꺼리며 취직시험 볼 기회조차 안 줬어요. 거기다 아키타에서 아버지가 겪었던 노예 같은 삶도 싫었고. 졸업식날 밤 책가방에 대충 짐을 꾸리고 교복 입은 채로 집을 나왔어요. ‘지금부터는 밝은 태양 아래 살겠다’는 마음으로 우에노행 기차를 탔어요. 도쿄에서 혼자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어요. 두 번 다시 아키타엔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떠났어요.”

    아버지는 걸핏하면 술에 취해 파업했다. ‘돈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뼈 빠지게 부려먹기만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외숙부에게 불려가 아버지 대신 일하느라 학교도 빼먹어야 했다. 어느 날 새해가 되자 외숙부가 그에게 세뱃돈으로 100엔을 줬다. 당시 아버지의 하루 일당이 180엔이었으니 매우 큰돈이었다. 하지만 그 돈은 얼마 못 가 다시 외숙부의 주머니로 되돌아갔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일하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로 빼앗아갔다.

    아키타에서 그 역시 부모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배달을 했고, 일요일엔 집 근처 두부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비가 늘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집에 가는데 가게 주인이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저한테 아버지의 외상술값 청구서를 내밀었어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진 돈이 있는 줄 아니까. 그때 중학생이었는데, 그런 일로 아버지한테 불평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어린 내 눈에도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 보이니까, 내 힘으로 술값을 갚아드릴 수 있어 행복했어요. 지금은 외상값, 얼마든지 갚아드릴 수 있는데….”

    7시간에 걸친 인터뷰 동안 딱 한 번, 이 말을 할 때 그의 말문이 막혔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는 1974년 작고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인간다운 대우 한 번 못 받고 노예처럼 일해 자식 다섯을 키워냈다”며 “대단하고 존경스럽고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우리 풍토’에서 이런 상을…

    1994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지난해 10월에는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수상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아키타에 잠들어 있는 외숙부 산소에 들러 인사를 했다.

    ▼ ‘미운 외숙부’에게 왜 갔나요.

    “어릴 때부터 외숙부를 반면교사 삼아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했으니까요. 덕분에 살면서 배운 것도 많고 인간교육을 제대로 받은 셈이죠. 그래서 조국으로부터 훈장도 받을 수 있었잖아요(웃음).”

    ▼ 훈장을 받은 소감은.

    “우리나라 같은 풍토에서 제가 상을 받을 줄은 몰랐어요. 덕분에 많은 분께 과분한 축하를 받았죠.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돌아가신 부모님, 나보다 앞서 저세상으로 간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지요.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혔던 분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구나 싶어 감격스러웠어요.”

    ▼ ‘우리나라 풍토’라니….

    “처음 광주시립미술관에 그림을 기증한 뒤 ‘재일동포가 쓰레기를 기증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작품을 가치로 따지지 않고 돈으로 여기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죠. 주로 재일동포 작가들 그림이었어요. 이우환, 곽인식, 문승훈 작가 같은 분들은 일본 현대미술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가질 뿐 아니라 화풍이 한국으로 건너와 우리나라 현대미술사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미술사에서 가치 있는 작품들을 신중하게 골라 보낸 건데 뜻밖의 반응이 나온 거예요.”

    ▼ 그런 얘기를 듣고 가만있었나요.

    “아니죠. ‘재일동포의 역사와 미술사에 사료가 되고, 기념물이 되고, 후세에 연구와 교육 자료가 되는 그림들이다. 그게 이 작품들의 가치다’라고 되받아쳤어요. 어디에 살든 우리 민족의 유산은 중요한 거고, 재일동포 미술사 역시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 말을 듣고도 계속해서 앤디 워홀, 피카소, 샤갈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내놓은 이유가 뭔가요.

    “광주시립미술관장이 제게 3가지를 부탁했어요. 앞으로도 도와주고, 미술관을 계속 키워달라, 꾸준히 사랑해달라고. 그분의 마음이 진정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리고 일본만 해도 수백 년 된 공공미술관이 있는데, 우리는 없잖아요. 그게 하루속히 이뤄졌으면 하는 염원이 있어요. 또 나 같은 재일동포 2세대가 노력해서 한국에서 우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바뀐다면, 일본에서도 재일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거라고 믿어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 인격이라고 봐요. 그게 인간의 최고 가치죠. 이런 생각들 때문에 당장 욕먹는다고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장롱 속 작품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2011년 서울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순종황제 일생을 주제로 한 하정웅 기증전에서.



    ▼ 광주시각장애인복지관 건립 때도 적지 않은 사비를 들였습니다.

    “1980년대 초에 재일동포 1세대 작가인 전화황 선생 전시회 준비를 위해 광주의 한 호텔에 묵었습니다. 그때 몸살이 나서 일주일간 시각장애인에게 마사지를 받았어요. 마지막 날 그가 부탁이 있다며 어렵게 말을 꺼냈어요. 광주에 시각장애인복지협회를 구성해 교육시설을 만들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없느냐고요. 땅 사고 건물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그건 개인이 할 일이 아니라 국가나 지자체가 할 일이라고 했어요. 내가 시청이나 도청에 얘기해주겠다고 하니 손사래를 치는 거예요. 이미 할 만큼 다 해봤는데. ‘네, 네’ 하기만 한 게 10년이 넘었다고요.”

    ▼ 이후 7년 동안 50여 차례 광주를 드나들며 결국 복지관을 건립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 시공사가 일정 부분 자금을 지원하고, 기금 마련 전시회도 열어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원래는 시각장애인들이 30평 땅에 건물만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던 건데, 당시 광주를 포함해 도내 시각장애인이 2000명이었어요. 30평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돈을 더 보태서 164평 대지에 120평 규모의 건물을 세웠어요. 제게 돈이 더 많았다면 1000평 땅에 더 큰 건물을 짓고 싶었어요. 형편에 맞춰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쉬움을 달랬죠.”

    광주시각장애인복지관 건립 주도

    시각장애인들의 염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건 그에게도 동변상련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교 졸업 후 객지에서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디자인학교를 다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실명하게 된다. 그는 “일상생활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며 “그때 시각장애인들의 심정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다행히 3개월 후 예전 시력을 회복했다.

    ▼ 객지에서 실명했을 때 충격이 컸겠어요.

    “객지 생활 2년 만에 눈이 안 보이니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좌절감을 감당하기 벅찼지요. 20세 때부터 4년간 조총련에 몸담았는데 실의에 빠져 하마터면 이북으로 갈 뻔했어요. 북송선에 탑승했다가 출항 직전에 내렸어요. 조총련 간부가 날 불러 세워 북한에 못 가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 북한에서 살고 있었을 거예요.”

    ▼ 조총련을 어떻게 빠져나왔나요.

    “결혼하고 사업이 바빠지면서 그만두게 됐어요. 어느 날 조총련 사무실에 들렀는데 ‘그만둔 인간이 왜 왔느냐? 스파이니까 서류 못 만지게 하고, 앞으로 두 번 다시 발도 못 들이게 하라’고 누군가 소리쳤어요. 4년 동안 헌신한 곳에서 스파이 취급을 당하니 배신감이 치밀었어요. 그날로 집에 돌아와 김일성 훈장을 쓰레기통에 처박았어요.”

    이후 민단에 몸담은 그는 거기서도 뜻밖의 곤욕을 치렀다. 어머니 생일에 동네에 사는 조총련 동포들을 집으로 불러 잔치를 벌였는데, 얼마 뒤 민단에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조총련 간부들을 초대한 것은 민단 간부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처신이니 사임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총련과 민단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으로 재일동포들마저 남북으로 갈라졌어요. 저는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같은 동포로서 형제처럼 왕래하며 서로 도우며 살았거든요.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요물이란 걸 이때 절실히 느꼈습니다.”

    ▼ 한국에 드나들면서 조총련 전력이 문제가 된 적은 없나요.

    “1973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한국에 왔어요. 이후 계속 왕래했는데 그때마다 안기부에서 미행했어요. 그 이듬해 재일동포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사건이 있었잖아요. 그때 영부인이 돌아가셨으니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재일동포에 대해 ‘혹시 간첩 아닌가’ 의심을 거두지 않았죠. 또 복지관 건립으로 동분서주할 때도 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고 시각장애인 표 모으고 다닌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明歷歷 露堂堂

    ▼ ‘내 돈 쓰며 뭐하려 욕먹고 다니나’ 싶은 생각도 들었겠어요.

    “그동안 한국을 드나든 게 250차례가 넘을 겁니다. 자존심도 다치고 상처 받을 때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버틸 힘이 없었다면 오늘도 없을 겁니다. 20년쯤 지나니까 그런저런 불편함과 부정적인 시선이 사라졌어요. ‘미아리 눈물 고개, 울고 넘는 이별 고개~’하면서 아리랑고개 넘듯 넘어왔죠. 하하.”

    ▼ 그 정신적 힘은 어떤 건가요.

    “선불교의 정신세계에 ‘명력력(明歷歷) 노당당(露堂堂)’이라는 게 있어요. ‘역력하게 밝고 당당하게 드러나 있다’는 뜻인데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말과 행동, 흔적이 깨끗이 드러나니 올바르게 살라는 의미죠. 한국을 드나들면서 인격, 인간성, 사람의 가치, 그런 것들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그게 힘이죠.”

    ▼ 자수성가해서 번 돈과 그림을 한국에 내놓으면서 아깝지 않던가요.

    “복지관 건립할 때 처음엔 단돈 100원도 내는 사람이 없었어요. 작은 돈이나마 내가 씨앗을 뿌리니 여러 사람이 가지를 쳐서 수십 배 규모로 커졌어요. 100원을 1000원만큼의 가치가 될 수 있게 쓰자는 게 제 소신입니다. 운 좋게 돈 벌어서 가치 있게 쓰니 전혀 아깝지 않아요. 덕분에 훌륭한 분들도 만났고 친구도 많이 얻었어요. 그동안 기증한 그림은 한국의 미래 세대에게 우리 재일동포들이 살아온 힘겨운 여정을 돌아보게 하는 메시지 혹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하 씨는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바쁘게 생활하고 있다. 중앙대 전(前) 이사장 고(故) 김희수 박사가 생전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21세기 문화입국의 포부를 바탕으로 2009년 설립한 재단이다. 수림문화재단은 전통문화예술의 육성, 한일문화예술교류 확대, 한국전통예술의 해외투어 지원 등의 사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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