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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목숨 건 直筆 세상을 밝히다

‘동호직필’ ‘춘추필법’ 다시 읽기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목숨 건 直筆 세상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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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던져 直筆한 형제들

동호의 직필 정신은 그 뒤 중국 역사가들에게 역사 기술의 모범으로 전해졌다. 그리하여 정직한 사관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사덕(史德) 전통 중에서도 가장 고상한 도덕적 정조로 자리 잡았다.
기원전 6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기까지 제(齊)나라의 영공(靈公)과 장공(莊公) 때 제나라 조정의 실세이던 최저는 자신의 손으로 옹립한 장공이 자신의 후처인 당강(棠姜)과 간통을 일삼자 기원전 548년 난을 일으켜 장공을 시해했다. 최저는 장공의 측근들까지 대거 제거한 다음 공자 저구(杵臼)를 모셔와 옹립하니 그가 경공(景公)이다. 경공이 즉위하면서 최저는 스스로 우상이 되고, 공모자인 경봉(慶封)을 좌상에 앉혀 경공 초기 제나라 공실의 실권을 농락했다.
그런데 이때 제나라의 기록을 담당한 사관 태사(太史) 백(伯, 태사 가문의 장남)이 “5월 을해일에 최저가 주군 광(光, 장공)을 시해했다”라고 직필했다. 최저는 불문곡직(不問曲直) 태사 백을 죽였다. 그러자 그 동생 중(仲)이 형을 이어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똑같이 썼다. 최저는 중도 죽였다. 이어 그 동생 숙(叔)도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두 형에 이어 직필했고, 최저는 숙도 죽였다. 그랬더니 막냇동생인 계(季)까지 나서 죽음을 불사하면서 형들처럼 직필했다.
최저는 태사 집안의 막냇동생에게 장공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하라고 요구했다. 최저는 태사를 협박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태사는 “사실에 근거해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은 사관의 직책이오. 목숨 때문에 사관의 일을 저버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오. 당신이 저지른 일은 이르건 늦건 언젠가는 다들 알게 될 것이니 설사 내가 쓰지 않는다 해도 죄와 책임을 덮을 수 없는 일이오. 이를 덮으려 하면 천하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오”라고 통렬하게 쏘아붙였다. 최저는 사관들의 붓이 이토록 날카롭고 무서운 것이냐며 차마 계까지 죽이진 못했다. 이렇게 해서 역사서에는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는 사실이 남게 됐다.
태사 형제들이 최저의 죄상을 직필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사씨(南史氏, 이 사람도 사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는 죽간을 들고 제나라 도성으로 달려왔다. 그러다 태사 집안의 막내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발걸음을 돌렸다고 한다. 남사씨는 만약 태사 집안의 형제들이 모두 죽었다면 자기가 나서 직필할 생각으로 죽간을 들고 제나라 도성으로 달려오던 길이었다.
목숨 건 直筆 세상을 밝히다

사마천의 사당과 무덤으로 오르는 길을 안내하는 ‘사필소세’ 현판.


공자가 세운 ‘춘추필법’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인 기원전 546년에 최저 집안에서는 전처의 아들들인 성(成), 강(彊)과 당강(棠姜) 소생인 명(明) 사이에 종주권과 봉지를 놓고 분란이 일어났다. 장공을 시해하는 데 가담했던 경봉이 이 틈을 타 최저 가문을 멸문시켰다. 최저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저는 정변을 통해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장악한 역신이다. 그러나 그의 권력이 공실의 권력을 압도하던 상황이었기에 그에게 맞설 세력이나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사관 집안의 형제들이 이에 맞서 단호히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최저의 죄상이 역사에 길이 남게 된 것이다.
동양의 훌륭한 역사 서술 전통으로 ‘춘추필법(春秋筆法)’이란 것이 있다. 대개 공자가 집필하고 정리한 ‘춘추(春秋)’에서 그 선구적 형식을 찾을 수 있다. 공자는 기강이 무너진 천하를 과거를 거울 삼아 바로잡겠다는 취지로 춘추를 집필했다. 그리고 집필 원칙으로 사건을 기록하는 기사(記事), 직분을 바로잡는 정명(正名), 칭찬과 비난을 엄격히 하는 포폄(褒貶)을 제시하고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집필했다.
누구도 이 원칙을 벗어나거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의 효시인 춘추가 탄생했고, 이렇게 대의명분을 따라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엄정하게 기록하는 태도 내지 집필 방법을 춘추필법이라 일컬은 것이다.
춘추에는 주나라 천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사실과 다른 기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동호나 제 태사의 엄정한 직필 정신을 제대로 계승해 후대 역사 서술의 원칙이자 정신을 수립했다. 공자는 특히 군주를 시해하고 힘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는 최저 등과 같은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직필함으로써 권력에 굴하지 않는 역사가의 굳센 절개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공자는 “나를 알아준다면 그것은 춘추일 것이고, 나를 벌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도 춘추일 것이다”라는 말로 춘추에 대한 큰 자부심을 드러냈다. 유가에서는 공자가 춘추를 지어 ‘무관의 제왕’과 같은 업적을 이룩했다고 칭송한다. ‘붓 하나로 충신과 효자를 칭송하고 난신적자를 토벌해 대의를 밝히고 질서를 엄정하게 바로잡았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고난 속에 탄생한 ‘史記’

산시(陝西)성 한청(韓城)시는 역사학의 성인, 즉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 태사공 사마천(司馬遷)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사마천의 사당과 무덤이 남아 있다. 그곳에 오르다 보면 가파른 계단 끝 산문의 현판 하나가 눈길을 붙잡는다. ‘사필소세(史筆昭世)’,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이라는 젊은 장수를 변호하다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 괘씸죄에 걸렸다. 그는 옥에 갇혔고, 일이 틀어져 반역자의 편을 들었다는 죄목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때 사마천의 나이 48세였다. 40세가 지나면서 필생의 과업인 역사서를 집필하던 중이었다. 날벼락 같은 충격 속에 사마천은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남기로 결심했다. 당시 사형수가 죽음을 면하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돈을 내는 것이었고, 하나는 성기를 자르고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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