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이종석 체제’ 2년 막전막후

북핵 압박과 피해자 의식이 낳은 ‘무오류 신화’의 명과 암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6-27 1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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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동안 떠돌던 ‘이종석 낙마설’은 6월 중순에 들어서자 오히려 ‘2기 이종석 체제’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으로 바뀌는 형국이다. 그간 NSC는 이번에 알려진 ‘조사’ 이외에도 청와대 내부의 문제 제기에 여러 차례 직면했다. 그러나 논쟁은 별다른 결론 없이 마무리됐다. 이 같은 상황이 반복해서 나타난 까닭은 무엇이며, 노무현 대통령은 왜 이처럼 이 차장을 신임하는가. 출범 초기 NSC가 안고 있던 세 가지 부담과 이후 겪은 세 차례의 위기로 풀어본 ‘이종석 체제’ 2년 대해부.
    ‘이종석 체제’ 2년 막전막후

    이종석 NSC 사무차장.

    ‘조사’와 ‘회의’, 그리고 ‘조사성 회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4월 청와대에서 두 차례 열렸다는 ‘그 무언가’를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 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주재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이종석 NSC 사무차장, 천호선 국정상황실장 등이 참석했다는 ‘그 무언가’는, 2003년부터 진행되어온 전략적 유연성 관련 한미 당국간 협의에서 문제점이 없었는지 검토하는 자리였다고 청와대측은 공식 설명했다. 언론은 ‘조사’라고 보도했지만 청와대는 ‘회의’라고 했고, 이후 언론에서는 이를 절충해 ‘조사성 회의’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5월 중순 언론보도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종석 차장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쏟아져 나왔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다룬 한미미래동맹정책구상회의(FOTA)를 실질적으로 책임진 것이 NSC이고, 4월의 ‘조사성 회의’는 국정상황실과 민정수석실이 검사 역할을, 정동영 장관이 판사 역할을 맡아 이종석 차장과 서주석 NSC 전략기획실장의 ‘설명’을 듣는 자리였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측은 6월초 청와대가 고영구 국정원장 후임으로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을 내정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종석 차장의 신변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전망으로 이어졌다. 국가안보보좌관이 NSC 사무처장을 겸임하는 현재의 시스템상 이종석 차장이 보좌관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 되면 형식적으로는 승진이지만, 내용으로는 좌천이나 다름없다는 관측이었다. 국가안보보좌관은 명목상 수장일 뿐 실질적으로 현안을 조율하고 정보를 총괄하는 책임은 사무차장에게 집중된 것이 현재의 NSC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언론에 후임 NSC 사무차장 내정자가 거론되는 등, 기정사실이돼가던 ‘이종석 좌천설’은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6월 들어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우선 이종석 차장이 자리를 옮긴다는 그림이 확정된 게 아닐 뿐더러, 실제로 보좌관으로 승진한다 해도 전임자들과 달리 계속해서 NSC를 총괄하는 방향으로 정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청와대 인사들의 설명이었다. 후임 사무차장 역시 당초 거론되던 인사는 배제될 공산이 크고, 오히려 NSC 내부에서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6월 중순 한 청와대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종석 체제는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 그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던 견제그룹이 빠르게 흩어지는 모양새다. 이미 주요쟁점은 모두 테이블 위에 올라와 검증을 거쳤으므로 더 문제를 제기할 것도 마땅치 않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2년여 동안 외교안보 정책결정의 핵심에 이종석 차장과 NSC가 있었음을 부인하는 정부당국자는 없다. 이렇듯 떠들썩하게 알려지기는 앞서의 ‘조사성 회의’와 관련한 언론보도가 처음인 듯하지만, 사실 청와대 내에서는 NSC의 업무수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쉼 없이 나왔다. 그 가운데는 대통령을 포함해 청와대 관계자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할 만큼 상황이 심각해진 경우도 있었고, 이에 따라 이종석 차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일정부분 흔들렸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쟁점이 불거질 때마다 마지막 순간에 이종석 차장을 지켜준 것은 다름아닌 대통령이었다. 제기된 문제는 특별한 ‘결과’ 없이 흐지부지되는 패턴을 반복했다.

    최근의 분위기는 이러한 상황전개가 이번에도 반복되리라는 전망, 이미 절반 지점을 통과한 노 대통령의 임기를 감안할 때 이종석 차장은 마지막까지 대통령과 함께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벌써부터 ‘레임덕’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인데다 내년 지방선거가 끝나면 ‘내리막’인 만큼 대통령이 미묘하기 짝이 없는 외교안보라인의 ‘대장 말’을 갈아타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궁금증은 증폭된다. 이 같은 상황전개는 왜 반복되는가. 끊임없는 문제제기란 무엇이며, 견제그룹은 또 누구인가. 그럼에도 이종석 차장과 NSC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통령이 끊임없이 이 차장을 재신임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이러한 상황은 외교안보이슈의 정책결정 흐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지금부터 그 의문에 하나씩 답해보기로 한다.

    이종석 차장은 매일 아침 6시50분에 청와대 여민3관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출근한다. 대통령이 하루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간밤에 벌어진 주요사항을 확인해 보고하기 위해서다. 퇴근시간은 보통 밤 11~12시. 물론 현안이 있을 때는 더 늦어진다. 사무차장에 임명된 초기에는 새벽 2~3시까지 사무실을 지키는 날이 많았다. 출퇴근시간을 빼면 6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는 셈이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그의 성실성에 대해서는 청와대 내에서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업무 스피드와 조직장악력도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대통령이 보고지시를 내리면 어떤 이슈가 됐든 반나절 안에 보고서를 제출한다는 것은 NSC 내에선 일종의 불문율이다. 학자 시절부터 몸에 밴 완벽주의에 가까운 꼼꼼함 덕분에 조금이라도 허술한 부분이 있는 보고서는 그의 책상을 통과할 수 없다는 전언. NSC는 국방부와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가정보원 등 각 부처에서 모인 공무원에 대다수 학자 출신인 별정직 공무원들이 결합된 복잡다단한 조직이지만, 이종석 차장은미진한 구석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한 톤으로 질책하는 캐릭터로 조직 전체에 걸쳐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사실 이러한 업무능력은 그를 추천한 참여정부 인사들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종석 차장은 2002년 선거과정부터 노무현 후보의 캠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이른바 ‘창업공신’ 그룹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 때 세종연구소 남북한 관계연구실장 신분으로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을 담당했다는 상징성이 ‘햇볕정책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라인에 발탁된 주된 이유다.

    더욱이 현재의 NSC 체계를 처음 설계하던 무렵만 해도 사무차장이라는 자리가 이렇듯 ‘실세’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운영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사무차장은 안보보좌관이 겸임하는 사무처장을 ‘보조’한다고 되어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비중 있는 인사가 사무처장을 맡고, 성실하게 실무를 챙길 수 있는 인사가 차장을 맡는다는 것이 애초의 컨셉트였다(이러한 의미에서 이종석 차장이 현재와 같은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참여정부의 초대 안보보좌관 라종일 현 주일대사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북한을 아는 인물’

    이종석 차장을 포함한 참여정부 외교안보라인은 출범 직후부터 매서운 공격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것이 서동만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 내정자에 대한 국회 정보위 인사청문회에서 나온 야당 일각의 ‘친북좌파’ 주장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종석 차장도 피해갈 수 없었다. ‘비판적 내재적 접근’을 바탕으로 20년 가까이 북한을 연구한 그에게도 어김없이 공격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야당이나 보수층 뿐 아니라 정부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참여정부 초기 외교안보 관련 인사들은 전한다. 출범 직후 외교부와 국방부 등 실무부처와 청와대 사이에 만만찮은 불화가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NSC 관계자들은 초기의 의사소통 문제일 뿐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이후에도 실무부처 관계자들과 NSC가 불협화음을 낸 사례는 종종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더욱이 이종석 차장과 NSC는 출범초기부터 ‘북핵’이라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었다. NSC가 현재와 같은 위용을 갖추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2002년 11월 불거진 이른바 2차 북핵 위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에도 국회 국방위와 학계를 중심으로 ‘외교안보에 대한 총괄조율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러한 이론적 논의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준 것은 하루가 다르게 악화일로를 걷던 북핵 문제였다(이렇듯 급박하게 만들어진 태생 때문에 현재의 NSC 시스템과 국가안전보장회의법 등 관련규정은 일정부분 괴리가 있다. 이는 야당이 현재까지도 NSC의 법적근거를 문제삼을 수 있는 ‘약한 고리’가 된다).

    북한문제 전문가인 이종석 차장이 사무차장에 발탁된 것도 이와 관계가 깊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내부에서는 북핵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국방개혁과 남북한 군비통제를 포함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같은 거시적인 작업을 진행하려면, 북한을 잘 알고 신뢰를 쌓을 수 있는 인물이 적합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북핵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복잡한 이슈가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때문에 NSC와 이종석 차장의 업무범위는 갈수록 넓고 깊어졌다. 여기에 앞서 말한 실무부처와 갈등으로 인해 불신이 누적되면서, ‘모든 핵심적인 문제를 NSC가 직접 챙기는’ 경향 역시 강화됐다. “정권 초기에는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다”는 것이 NSC 관계자들의 설명. 이쯤 되면 오전 6시50분 출근에 밤 12시 퇴근이라는 이종석 차장의 근무패턴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짐작할 만하다.

    세 가지 부담

    외부의 공격, 북핵 문제, 방대한 업무범위. 이러한 ‘NSC의 세 가지 부담’은 이후 NSC가 적지않은 오류와 혼선을 빚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특히 북핵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은, 한미동맹이라는 참여정부 외교안보 이슈의 또 다른 축을 상대적으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이른바 ‘견제그룹’이 이종석 차장과 NSC의 업무수행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한 이슈는 대부분 전략적 유연성이나 작계 5029-05 문제처럼 주한미군에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지적된 문제의 대부분이 정책방향이나 원칙의 차이 같은 큰 틀의 문제가 아니라, 보고누락이나 관리부실 같은 실무적인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내에서는 이와 관련해 크게 세 번의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 NSC의 업무처리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며 시작된 논란으로 이종석 차장과 NSC는 가볍지 않은 위기를 겪었다. 세 차례 논란을 꼼꼼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NSC의 부담’이 어떻게 혼선과 오류의 원인요소로 작용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위기 용산기지 이전협상 논란

    우선 2003년 겨울의 용산기지 이전협상과 관련된 조사부터 살펴보자. 이종석 차장이 취임 후 처음 겪은 이 조사는 지난해 1월 이른바 ‘부적절한 발언’ 파동을 겪으면서 일부분이 외부에 알려졌고, 10월에는 이와 관련해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보고서 내용이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도마에 올랐다(사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동아’ 2004년 11월호 164쪽 ‘용산기지 이전협상 청와대 보고서의 진실’ 기사 참조).

    당시 민정수석실은 협상과정에서 미국측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협상팀의 ‘일탈행위’와 함께 협상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협상내용을 그대로 추인해주었다며 NSC의 관리소홀 및 부실보고를 강하게 문제삼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외교부 관계자들에 대한 문책이 중심이 되면서 NSC의 책임부분에 대해선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부차적인 문제로 처리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문제로 윤영관 당시 외교부 장관을 비롯해 위성락 북미국장, 조현동 북미3과장이 줄줄이 문책을 당하고 인사조치됐지만, NSC에서는 ‘다친’ 사람이 없었다.

    이 때의 강도 높은 조사를 거치면서, 이종석 차장은 이전협상의 문구 하나까지 꼼꼼히 챙겨가며 협상과정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협상내용에 대해서도 민정수석실을 비롯한 이른바 ‘견제그룹’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견제그룹이 문제점을 지적하며 제기한 논리는, NSC가 처음부터 외교부와 국방부의 반발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대신 이들에게 끌려가며 동일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무부처 전문관료들의 반발에 ‘크게 덴’ NSC가 너무 쉽게 이들의 논리를 수용했다는 요지다.

    ‘이종석 체제’ 2년 막전막후

    3월17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오른쪽 아래에서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이종석 NSC 사무차장,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 윤광웅 국방부 장관, 정동영 NSC 상임위원장,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이와는 다른 시각에서 제기된 비판으로는, NSC가 용산기지 이전 협상을 비롯한 미군관련 문제에서 미국측 입장을 최대한 ‘배려’함으로써 북핵 문제와 6자회담에 대한 미국의 유화적인 태도를 이끌어내려 한 것이 아니냐는 관점이 있다. 북핵 문제를 조기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사안을 억지로 이어 붙이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NSC 관계자들은 이같은 비판에 대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이라고 반박하기 시작했다. 한미관계나 외교관례를 무시하고 시민단체 등의 주장에 따라 사안을 진행할 수는 없지 않냐는 것이었다. NSC 내부에서 “우리는 우로부터도, 좌로부터도 공격받는다”는 말이 등장한 것도 이 때부터다. 우로는 보수적인 실무부처 관료들이, 좌로는 ‘정부 내 근본주의자’들이 사안마다 NSC를 괴롭히고 있다는 토로였다.

    NSC측이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된 데에는 대략 두 가지 배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은 출범 초기부터 계속 야당 등 외부의 공격을 받아 일종의 ‘피해자 의식’을 갖게 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앞서 설명했듯 이종석 차장과 학계출신 NSC 인사 상당수가 노무현 후보의 선거캠프부터 함께한 ‘창업공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386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이나 대선과정에서 동지의식을 키운 이들과, 학문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사안에 정밀하게 접근하는 NSC 사람들은 처지가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여기에 얽혀있는 인적 요소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산기지 이전협상과 관련해 문제제기의 ‘총대를 멘’ 이석태 당시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이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에서 미군문제를 오랫동안 다뤄온 인물이라는 점, 실질적으로 이를 지원한 것으로 알려진 이호철 당시 민정1비서관이 대통령의 의원 시절 보좌관 출신인 386측근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NSC측의 이러한 인식이 견제그룹의 초기 문제제기를 탄력적으로 흡수하지 못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사안을 검토하는 자세보다는 사적인 자리에서 감정적인 모습을 비치는 경우까지 생겼다. 이렇게 되면서 해당사안에 접근하는 NSC 관계자들의 자세는 더욱 경직되었고, 청와대 내부의 문제제기도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NSC에 대한 비판이 ‘좌와 우의 문제’라는 NSC 관계자들의 생각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다음 쟁점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른바 ‘견제그룹’의 문제제기가 정책방향이나 자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보고문제’라는 극히 실무적인 부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기망(欺罔)’이라는 용어가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부터다. 더욱이 이호철 비서관 등 초기 견제그룹 멤버들이 청와대를 비운 사이에도 다른 주자들이 나서서 비판을 이어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논쟁에 해당하는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 논란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두 번째 위기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 논란

    2004년 봄과 여름 사이에 벌어진 두 번째 논란은 주한미군의 감축 일정을 공론화하지 말자는 2003년 9월의 합의가 한국과 미국 가운데 어느 쪽 제안에 따른 것이었느냐를 두고 빚어졌다. 논란의 불을 댕긴 것은 2004년 5월 국정상황실이 대통령에게 제출한 “미국측이 감축 공론화를 연기해달라고 했다는 NSC의 보고는 사실과 다르다”는 요지의 보고서. 그때까지 NSC에 대한 견제를 주도해온 민정수석실의 바통을 이어받아, 당시 국정상황실장을 맡고 있던 박남춘 현 인사제도비서관이 명실공히 ‘NSC 견제그룹’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는 계기였다(상자기사 참조).

    용산기지나 전략적 유연성을 둘러싼 논란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이 사안이야말로 노 대통령이 이종석 차장과 NSC에 대해 가장 크게 실망감을 표출한 사건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종석 차장의 최대 위기였던 셈. 그간 대통령이 “왜 미국이 공론화를 꺼리느냐”며 의구심을 표할 때마다 NSC의 보고는 한결같았기 때문이었다. 용산기지 문제의 경우 ‘대통령에게 적절히 보고했는가’가 쟁점이었던 데 비해,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 문제의 경우는 ‘NSC가 대통령을 속인 것 아니냐’는 민감한 주제를 건드린 것이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 와서는 NSC 관계자들 역시 “당시에는 여러 가지 이슈로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주한미군 감축이 일찌감치 공론화될 경우의 파장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측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이 문제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도화선이 된 2004년 5월28일 이종석 차장의 백그라운드 브리핑은, 미군 감축 문제를 둘러싸고 “참여정부의 반미성향이 미군 철수를 부른다”는 한나라당의 공격이 거세던 시점에 이뤄졌다. 참여정부를 비판하는 보수층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다가 빚어진 문제라는 분석이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상황을 파악한 뒤 노 대통령은 ‘매우 심각하게 화를 내며 질책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용산기지 이전협상 때와 마찬가지로 이때도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거나 경질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선은 대통령 본인이 “결국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는 말로 논란을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의구심이 든 2003년 가을의 첫 보고 때 문제를 꼼꼼히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뉘앙스였다. 결국 감축 공론화 연기 문제는 사실관계도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정리됐다.

    대통령이 이러한 판단을 내린 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었다. 우선 논란이 정점으로 치닫던 2004년 6월이라는 시점을 살펴봐야 한다. 이미 6월23일 3차 6자회담이 예정되어 청와대와 백악관 NSC 사이에 긴밀한 조율이 진행되던 시점이었고, 6월21일에는 김선일씨 피랍사건이 발생해 외교안보라인이 발칵 뒤집혔다. 한마디로 ‘문제를 꼼꼼히 짚고 넘어가려야 갈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 이종석 차장을 도운 것은 역설적으로 보수언론과 야당이었다. 이들은 김선일씨 사건이 비극으로 끝나자 안보현안을 책임진 NSC와 이종석 차장의 책임론을 집요하게 거론하고 나섰지만, 참여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이들의 비판은 오히려 청와대 내에 ‘이종석을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내가 바꾸고 싶을 때는 바꾸지만, 남이 바꾸라고 해서 바꾸지는 않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독특한 인사 스타일이 반영된 사례다.

    여기에 ‘대안부재론’이 힘을 보탰다. 주로 NSC 관계자들이 제기한 이 논리는 인재풀이 좁은 참여정부의 특성상 이종석 차장을 대신할 만한 인물을 찾기가 마땅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종석 차장의 탁월한 업무능력도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무부처를 포함해 조직을 강력하게 장악해온 이 차장의 캐릭터도 한몫을 했다. 이 차장의 직선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고 이 때문에 견제그룹이 늘어난 측면도 있지만, 거꾸로 실무부처를 강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것 또한 그 캐릭터 덕분이었다는 견해다.

    ‘나이스 가이’의 등장, 그러나…

    이렇듯 심각한 논란을 지켜보면서, 대통령은 외교안보 문제에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듯하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해주기 바란다”고 했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이를 엿볼 수 있는 단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NSC는 실무를 담당하고 민정수석실·국정상황실은 비판적으로 문제를 찾아내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최악의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막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박남춘 당시 국정상황실장이 주한미군 감축 공론화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국정상황실의 임무에 비추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국정상황실에 대한 NSC 일부 관계자들의 생각은 ‘시스템 상의 역할을 한 것뿐’이라는 대통령의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견제그룹에 대해 ‘정서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 아니냐’는 반감에 찬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2005년 1월 청와대 인사에서 박 실장은 인사제도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후임자는 청와대 안에서 ‘나이스 가이’로 통하던 천호선 당시 의전비서관. 온화한 성품에 적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인데다, 목소리부터 터프한 박 실장과는 대비되는 스타일이었다. 견제그룹의 수장 격이던 박 실장의 이동과 천 실장의 등장으로 청와대 내에서는 ‘NSC 사람들이 요즘 표정관리 하기 바쁘다’는 설이 돌았다. 국정상황실이 더 이상 ‘NSC 견제그룹’의 중심역할을 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청와대 회의석상에서 이 차장의 독주를 정식으로 거론하며 견제그룹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하고 있던 박정규 민정수석비서관도 자리를 옮긴 터였다. 한마디로 ‘NSC의 독주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번째 위기 전략적 유연성과 작계 5029 논란

    ‘이종석 체제’ 2년 막전막후

    6월10일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NSC와 관련해 청와대 내부에서 벌어진 논란 가운데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최근 문제가 된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 관련 조사’ 문제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논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바로 ‘나이스 가이’라던 천호선 국정상황실장이었다. 천 실장이 제출한 문제제기 보고서에 민정수석실이 힘을 보탰고, 이로 인해 4월 초 두 차례의 ‘조사성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이 논쟁의 내용에 관해서는 ‘신동아’ 2005년 1월호 276쪽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논쟁의 실체’ 기사 참조).

    국정상황실이 제기한 논쟁의 핵심 내용은, 기지이전과 감축, 작전계획의 변화 같은 구체적인 움직임의 총론에 해당하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 그간 NSC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과의 FOTA 협상과정에서 논의된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근본에 해당하는 쟁점에 대해 협상을 뒤로 미룬 것은 실책이며, 더욱이 이 근본쟁점에 대해 대통령에게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는 두 가지 쟁점으로 나뉜다. 우선은 FOTA 협상팀과 NSC 관계자들이 미국측과의 협상과정에서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03년 가을 무렵 외교부 북미국이 역시 청와대의 검토를 받지 않은 채 서둘러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는 ‘문서화’ 조치를 진행했을 때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국정상황실의 보고를 받은 대통령이 즉각 ‘진상 조사’를 지시하며 힘을 실어준 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시작은 노 대통령이 동북아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있어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밝힌 3월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이에 대해 미 국방부 관계자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느냐”고 반발했다. 이러한 반발은 2003년 겨울부터 한미 군사당국이 추진하던 개념계획 5029-99의 작전계획화 작업에 NSC가 제동을 걸고 나선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미국측의 격앙된 반응은 5월부터 언론을 뜨겁게 달군 ‘한미관계 이상기류설’의 뿌리가 됐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미국의 이러한 반응에 어리둥절해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인은 아직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아무런 지침을 내린 바가 없는데, 왜 미국은 한국이 말을 바꿨다고 생각하느냐는 의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호선 국정상황실장이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해 NSC의 관리 및 대응, 보고 등에 문제가 있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므로, 대통령의 반응은 즉각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논쟁은 이전에 비해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심판’, 즉 2004년 8월부터 NSC 상임위원장을 겸임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정 장관은 상임위원장을 겸임하면서 실질적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통할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구체적으로는 NSC와 이종석 차장의 실질적인 직속상관 역할을 했다. 노 대통령이 정 장관에게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 임무를 맡긴 것, 두 차례의 회의를 정 장관이 주재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 두 차례의 회의에서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는 점이다. 심지어 언제 어디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고 어떻게 문서가 오갔는지 등의 사실관계에 있어서도 양측의 이야기에는 적지않은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 장관은 ‘가벼운 실수는 있었지만 고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앞으로 민정수석실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도록 한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리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NSC와 견제그룹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모양새였다.

    정동영의 한계?

    그러나 그나마 동력을 상당부분 잃었던 민정수석실의 사실관계 확인작업은, 5월 들어 ‘오일 게이트’가 터져 청와대가 발칵 뒤집히면서 더욱 지지부진해진다. 여기에 5월 중순, NSC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청와대가 “아무런 문제가 없어 일단락됐다”고 급히 해명하면서, 사실관계 재확인은 완전히 유야무야된다. 이로써 전략적 유연성 논쟁은 앞의 다른 논쟁들과 마찬가지로 명확한 결론 없이 ‘모두가 불만족스러운 상태’에서 막을 내렸다.

    이러한 결말과 관련해 심판 역할을 맡았던 정동영 장관의 태도에 아쉬움을 표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NSC와 관련해 제기된 논점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사실관계가 가려진 적이 없는 까닭이다. ‘힘 있는’ 정 장관이 과단성 있는 모습으로 책임소재를 분명히 가리고 상황을 정리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된 두 가지 쟁점, 즉 총론을 놔두고 용산기지 등 ‘각론’에 해당하는 문제를 먼저 합의해줬다는 비판과 이 문제에 대해 상당기간 대통령에게 제대로 된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문제제기는, 결국 NSC가 전략적 유연성 문제의 중요성을 사전에 알고 있었냐는 질문으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 잘 알면서도 이미 상당부분 진행된 한미간 협상에 대한 비판이 두려워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이냐, 아니면 북핵 문제 등 산적한 현안에 몰두하다 보니 꼼꼼히 검토할 여력이 없어 지나친 것이냐는 의문이다.

    물론 전자는 견제그룹이 제기했던 논지이고, 후자는 NSC 관계자들에게서 주로 들을 수 있는 논리다. NSC 관계자들은 전략적 유연성과 작계 문제 모두 실무부처에서 주도적으로 처리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해달라고 말한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의 경우 2003년 가을 실무부처에서 이를 인정하는 문서화 작업을 벌일 때 NSC도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고, 작계 문제의 경우 군사적 사안이므로 국방부와 합참에 맡겼다는 것이다. 또한 두 문제가 모두 배태된 2003년 가을이라는 시점은 NSC가 2차 6자회담을 앞두고 정신이 없던 시기라는 사실, 실무부처에 대한 NSC의 장악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기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의문이 생긴다. 북한문제 전문가인 이종석 차장의 경우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당기간 간과할 수 있다 해도, 한국국방연구원(KIDA) 연구위원으로 오랜 기간 일하며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해온 서주석 전략기획실장의 경우는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서주석 책임론’이다. 이러한 논리는 작계 5029를 둘러싼 한국정부 내 혼선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실무부처에서 처리한 일이므로 NSC는 알 수 없었다’는 논리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대목이다.

    세 차례 위기 겪고도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NSC에 대한 ‘견제그룹’의 문제제기는 주로 한미동맹과 관련된 사안이었다.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별달리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사실은, 서두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NSC와 이종석 차장이 북핵 문제라는 부담을 안고 출발했다는 사실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북핵 문제와 6자회담에 중점적으로 매달리는 한편 지나치게 다양한 이슈를 직접 나서서 처리하는 동안, 그에 못지않은 의미를 지닌 한미동맹 문제를 상대적으로 간과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사실 최근 논란이 된 ‘한미관계 이상징후설’은 엄밀히 말하면 ‘청와대 NSC와 미 국방부의 이상징후설’에 가깝다. 작계와 전략적 유연성 등 제기된 이슈들이 모두 여기서 불거져 나온 것이고, 실제로 한국정부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 인사들은 대부분 펜타곤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백악관 NSC, 국무부 등과 청와대 NSC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지난해 7월 방한한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청와대 NSC의 공로를 치하한 바 있다. 이러한 현상은 6자회담 성공을 위해 ‘매파’로 분류되는 펜타곤보다는 국무부 및 백악관 NSC의 ‘비둘기파’에 집중한 청와대 NSC의 분위기와 관계가 깊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전히 ‘한두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또한 그 문제들이 앞서 언급한 한미동맹 관련 사안이기는 하지만, 외형적으로 한미관계 이상기류설은 6월10일 한미 정상회담의 성공과 함께 잦아드는 분위기다. 사실 NSC와 펜타곤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정상회담 같은 ‘특단의 조치’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난해 여름부터 청와대 일각에서 꾸준히 제기된 바 있다. ‘아래에서 삐걱거렸으니 위에서 크게 바로잡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청와대 내부에서 ‘이종석 체제’가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힘을 얻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다. 5월 말까지만 해도 한미동맹 문제를 제대로 풀어나갈 수 있는, 북한보다는 미국을 잘 아는 인사가 사무차장을 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견제그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형국이었다. 일부 언론에서 “NSC 사무차장으로 내정됐고 조만간 발표될 것”이라고 보도한 P교수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P교수 카드’는 내정 보도 이후 오히려 급격히 힘을 잃고 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특히 이종석 차장의 보좌관 승진 가능성이 커지면서, 새로운 인사가 사무차장으로 올 경우 두 사람 사이의 권한을 조율하는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문제가 대두됐다. NSC 실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차장이 승진한다면 이전의 보좌관들처럼 형식상 수장에 머무르지 않을 가능성이 큰 까닭이다.

    세 차례의 큰 위기를 겪고도 ‘이종석 체제’가 계속 유지(혹은 강화)될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외교안보라인 인사에 적잖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동영 장관과 관련해서도 풀이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NSC 문제에 대해 정 장관은 ‘혁명적 변화’보다는 ‘안정적 관리’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향후 대권(大權)을 바라보는 정 장관으로서는 앞으로도 새로운 인물보다는 본인이 잘 알고 있는 인사가 외교안보를 맡기를 기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책임을 맡은 자의 의무

    분명한 것은 2기 이종석 체제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서두에서 설명한 ‘NSC의 부담’은 이미 상당부분 해결됐다는 것이 첫 번째 근거다. 북핵 문제는 조속한 해결보다는 안정적 관리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NSC에 대한 보수층의 비판도 예전의 파괴력을 잃은 지 오래다. 참여정부가 반환점을 돌면서 실무부처와의 의견대립도 크게 불거지지 않는 양상이다. 청와대 내 견제그룹의 비판도 주요쟁점이 이미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같은 수준으로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종석 차장과 NSC 관계자들은 그간 공·사석에서 “왜 우리만 이렇게 공격당해야 하느냐”며 여러 차례 항변했다.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NSC가 대한민국의 외교안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책임을 맡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부터 NSC를 둘러싼 환경이 우호적이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꾸로 NSC 역시 정책적 실책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을 으레 정치적 영역으로 해석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무오류(無誤謬)의 신화’에 빠져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자신감으로 어려운 환경을 돌파해온 긍정적 측면이 있으되, 반대로 많은 쟁점을 놓치며 문제를 배태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이제까지 살펴본 주요 논란이 전하는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종석 차장과 NSC가 그간 견제그룹이 제기해온 쟁점들을 어떻게 흡수해갈 것이냐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던 견제그룹에 대한 감정적 앙금을 떨쳐버리는 것이 급선무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그 동안 비판적으로 제기되어온 주요 쟁점이 한 차례씩 검토를 거쳤음을 감안하면, 지금부터의 과제는 견제그룹이 갖는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스스로 극단적인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이는 결국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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