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코스닥 기업인 삼키는 사채업자들

“연 수익률 50%·주가 4배 보장하라, 안 되면 부도낸다!”

  • 글: 김익태 머니투데이 기자(사채시장 담당) epping@moneytoday.co.kr

    입력2005-06-28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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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억원 빌리려면 2억원 주식 담보에 수수료 300만원, 월 이자 300만원 내야
    • 투자 수익률 낮으면 회사 찾아가 행패, 경영권 요구
    •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다 회사 돈 횡령하고 잠적한 경영자
    • 회사 부도 나면 직원, 소액주주만 고스란히 피해
    코스닥 기업인 삼키는 사채업자들
    벤처신화의상징으로 일컬어지던 컴퓨터 백신업체 하우리가 얼마 전 코스닥 등록 4년여 만에 허망하게 퇴출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1998년 창업 후 승승장구하며 안철수연구소와 함께 국내 컴퓨터 백신시장을 양분했던 유망업체의 상장 폐지라 시장의 충격이 작지 않았다.

    최근 들어 코스닥 시장이 활기를 되찾으며 자금난에 시달리던 벤처업계의 숨통이 트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일부 우량 기업에 한정된 것일 뿐 대다수 업체엔 여전히 남의 나라 얘기다. 은행 같은 제도금융권에서 외면당한 이들이 발길을 돌리는 곳은 살인적인 고리(高利)를 물어야 하는 서울 명동의 사채시장.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기업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채업자와 거래를 트면서 이들이 원하는 대로 엄청난 대가를 보장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급한 불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고리사채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또다시 사채를 쓰는 악순환이 지속된다. 코스닥 기업주와 사채업자의 이 같은 거래는 선량한 소액투자자들에겐 알려지지 않아, 사건이 터졌을 때는 일반투자자들만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사채시장 기웃거린 하우리

    코스닥 기업인 삼키는 사채업자들

    권석철 전 하우리 사장은 사채시장에서 빌린 자금을 갚지 못해 결국 회사에서 퇴출됐다.

    하우리가 코스닥 시장에서 상장 폐지된 것은 지난 3월. 하우리는 창업 이래 기록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창업 이듬해인 1999년 4월 출현한 ‘CIH바이러스’에 발빠르게 대응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외국계 백신업체를 제치고 안철수연구소와 함께 국산 백신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2002년 코스닥 상장 직후부터 하우리는 이상징후를 보였다. 등록 직전엔 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이듬해부터는 단 한 차례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 무리한 해외 현지법인 설립, 영화관 매입계약 등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2002년 7억원이던 적자 규모는 2003년 28억원으로 불어났고, 2004년엔 90억원의 손실을 봤다. 결국 회계장부에 ‘허수’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더니 회계법인에서 ‘의견 거절’을 받고 상장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주목해야 할 것은 권석철 전 하우리 사장이 실적 악화 탓에 회사 운영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사채시장을 기웃거렸다는 점이다. 은행이나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이 힘들어지자 대출금의 수배에 이르는 자신의 주식을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려 쓴 것이다. 이에 대해 권 사장은 “지난해 3월부터 개인적으로 코웰시스넷(유선통신기기 제조업체)에 자금을 단기 대여하기 위해 (하우리)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며 “당초 단기간에 해결될 것으로 보이던 코웰시스넷에 대한 대여금 문제가 시간을 끌고, 또 (하우리) 주가가 하락하면서 채권자들이 주식을 판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했다.

    그림의 떡 ‘시장 활성화’

    하우리는 권 사장을 회사 돈 84억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상태다. 그가 어떻게 사채업자들과 거래하다 망신을 당하게 됐는지는 검찰 조사결과 밝혀지겠지만, 권 사장은 경영진이 사채시장에서 빌린 자금을 제때 갚지 못해 주가가 급락하고 경영 일선에서 퇴출되는 전형적인 행태를 몸으로 보여준 셈이 됐다.

    코스닥 시장이 3년 만에 부활하면서 경기침체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던 벤처기업들에도 햇살이 비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연말부터 시작된 코스닥 시장의 랠리는 올 연초부터 3개월간 지속되며 시중 부동자금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였다. 현재 환율 쇼크와 치솟는 유가로 조정을 받고 있지만, 시장의 체질이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게 시장 주변의 평가다.

    코스닥 시장의 부활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벤처 활성화 대책에 힘입은 바 크다. 정부는 2005년을 ‘제2의 벤처 붐’의 해로 만든다는 방침을 정하고 지난해 12월 말 ‘벤처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벤처기업을 위한 1조원 규모의 모태펀드 조성을 비롯해 세제 및 금융 지원, 코스닥 시장의 벤처기업 전문화 등 성장 단계별로 지원내용을 담았다. 기술력은 있으나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 벤처기업을 집중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코스닥 시장 상승세와 공모주 투자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무엇보다 코스닥 상장에 대한 벤처기업들의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저가 화장품 브랜드 ‘미샤’로 잘 알려진 에이블씨엔씨로 시작된 공모 열기는 수조원의 공모자금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였다. 몇몇 우량한 새내기 종목은 ‘공모가 대비 100% 이상의 시초가 형성 상한가 행진’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올해 코스닥에 상장하는 기업 수는 100개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지난 2년간 코스닥 상장 기업 수는 연 50여 개에 불과했다). 코스닥위원회 관계자는 “상장 예비심사에서 보류 판정을 받거나, 새로 공모하려는 기업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코스닥 시장이 활기를 되찾자 코스닥 상장법인이 증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도 급증했다. 증권선물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에 따르면 올해 들어 4월까지 코스닥 상장법인이 유상증자 및 사채 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은 총 1조176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8.6% 증가했다. 이 기간 중 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은 7479억원으로 전년 동기대비 279.3% 증가했고, 유상증자를 통한 자금조달액은 4287억원으로 16.9% 늘어났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부실 은폐?

    총 109건의 유상증자가 이뤄졌고 이 중 89건이 제3자 배정 또는 일반 공모 방식이었다. 특히 일반 공모 방식을 통한 유상증자가 지난해 9건에서 올해 40건으로 대폭 증가했고, 조달금액은 269.6% 증가한 1069억원이었다. 코스닥 상장법인이 발행한 총 51건의 사채 중 전환사채는 25건(1051억원), 신주인수권부사채는 17건(676억원)으로 집계돼 주식연계사채의 발행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코스닥 시장은 이처럼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지만 모든 기업이 장밋빛 전망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적 저조와 수익모델 부재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기업들은 이런 얘기를 한마디로 ‘그림의 떡’이라고 말한다.

    지난 4월말 자본잠식률이 50%가 넘어 퇴출 위기에 몰린 기업은 모두 14개. 이 기업들은 자본 확충 등을 통해 올해 6월말까지 자본잠식률을 50% 미만으로 낮춰야 퇴출을 면할 수 있다. 이들 외에도 상장 유지가 한계에 도달한 기업은 부지기수다.

    이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자본 확충을 위해 증자를 하는 것이다. 올해 유상증자가 늘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상당수가 이들 한계 기업의 증시 퇴출 모면용이었다. 올해 일반 공모 유상증자를 실시한 40개 기업 중 11개 기업이 현재 관리종목으로 지정돼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유상증자에는 제3자 배정뿐 아니라 기존 주주에게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주주 배정과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모으는 일반 공모가 있다. 그러나 코스닥 기업들은 증자 과정에서 경영권을 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제3자에게 배정하는 유상증자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를 잘 들여다보면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증권업계 전문가들은 제3자 배정을 통해 신주를 배정받은 당사자가 기업인 경우 대부분 M&A(인수합병)와 관련됐다고 본다. 증권선물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제3자 배정을 기업의 부실 은폐수단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증자 과정에서 인위적인 기업가치 조작이 발생할 여지가 남아 있다”며 “투자자들은 이런 부실 가능성을 샅샅이 살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특히 실체가 불분명한 개인이 배정을 받거나, 배정을 받으면서 보호예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는 십중팔구 사채시장 자금과 관련이 있다. 자금 압박을 받은 일부 코스닥 기업들이 사채업자들로부터 돈을 융통하면서 자사 주식을 담보로 잡히기 위해 유상증자라는 허울을 쓰기 때문이다.

    혀 내두를 이면계약

    코스닥 기업인 삼키는 사채업자들

    코스닥 시장의 상승세에도 자금난을 겪는 코스닥 기업들은 사채시장을 기웃거린다.

    이 같은 편법은 지난해 초 주식시장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금 허위납입, 이른바 ‘유령주 사건’ 발생 후 금융감독 당국이 공시심사를 강화하면서 위축됐다. 제3자 배정 방식은 자본잠식을 당했거나 부도 징후가 나타나는 등 한계상황에 처한 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기업이 부실하다 보니 회사채 발행은 말할 것도 없고 주주 배정이나 일반 공모는 실패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 방식이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증자 결의에서 자금 조달까지 단 2주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정 투자자는 대주주 주변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채업자가 대부분이다. 사채업자들은 일반적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참여시 대주주와 특정 수익률을 보장받는 이면계약을 맺고, 어음이나 당좌수표를 담보로 잡는다.

    명동의 한 사채업자는 “제3자 배정방식으로 자금을 투입할 때의 조건은 주식을 살 때 500원짜리 주식이면 최소 2000원까지 4배는 튀어야 하고, 3개월 수익률이 최소 10% 정도는 나야 한다는 것”이라며 “약속한 수익률이 나오지 않으면 담보로 잡은 어음이나 당좌수표를 돌린다”고 말했다. 그는 “생각보다 수익률이 저조할 때는 어음을 돌려서 부도를 낼 수 있다고 경영자를 협박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일반 주식 투자자들은 이런 이면계약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다.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주식담보와 어음할인이다. 살인적인 이자를 물며 사채를 끌어다 쓰지만 이마저 하지 않으면 당장 회사가 쓰러지니 ‘울며 겨자 먹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명동 사채시장에서 주식담보 대출 이자율은 월 2.5~3%에 형성된다. 물론 수수료 3%는 따로 지불한다. 대여기간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2개월이 대부분이다.

    문제는 담보 주식가치가 현재 주가의 절반밖에 평가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제때 상환하지 못할 경우 반대매매에 따른 물량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기에 주가는 급락한다. 예컨대 코스닥 대주주가 사채시장에서 주식담보로 1억원을 빌려 쓰려면 2억원 어치 주식을 맡겨야 한다. 여기에다 선수수료 300만원을 떼고 월 250만~300만원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명동의 한 사채업자는 “예전엔 코스닥 기업의 담보율이 50%였지만, 지금은 30~40%까지 떨어졌다”고 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사채시장의 주식담보 대출이 대부분 한계 기업을 상대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급한 마음에 사채를 빌려 쓰지만, 갚을 길이 막막한 기업가는 사채업자의 상환 요구에 지속적으로 시달린다. 사채업자들은 회사에 찾아가 돈을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험악한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때론 경영권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듣지 않던 경영자들은 이 같은 모욕을 당하면 당장이라도 회사 문을 닫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실제로 ‘에라 모르겠다’며 회사자금을 횡령해 잠적한 경영자도 적지 않다.

    사채업자가 제3자와 짜고 경영권을 탈취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코스닥 기업 B사의 최대주주는 주식을 담보로 사채를 쓴 후 돈을 갚지 못했다. 그러자 B사에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는 담보로 맡아둔 주식을 시장에 내다팔았고, 그 영향으로 주가는 연중 고점 대비 3분의 1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사채업자가 시장에 주식을 매도할 때, 이를 모두 매수한 제3자는 단숨에 B사의 최대주주로 올라섰고,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를 몰아내고 자신이 사장으로 앉았다. 사채업자들은 요즘 ‘대주주 지분 장내매각’ 조회공시가 나간 코스닥 기업의 경우 거의 다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명동 사채업자의 담보권 행사로 보면 된다고 전했다.

    사채업자 등치는 간 큰 경영자

    명동에 가면 ‘어음중개’란 간판을 단 사무실을 쉽게 볼 수 있다. 중개업자들은 기업이 발행한 어음을 액면가보다 낮게(할인해서) 산 뒤 만기까지 갖고 있다가 현금으로 바꾸거나 아니면 만기 전에 수수료를 챙기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 이것이 바로 어음할인, 속칭 ‘어음 와리깡’이다.

    명동에서 거래되는 어음은 대부분 물품이나 용역, 서비스 같은 실거래를 동반한 진성어음이다. 진성어음과 물품(또는 용역, 서비스)의 거래가 동반되지 않고 단순히 돈을 빌리기 위해 발행한 융통어음도 거래된다. 융통어음은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차용증 형태로 발행하는 것이다. 한계 기업이 자금조달을 위해 사채시장에서 발행하는 것은 통상 융통어음이다. 일단 기업이 융통어음을 들고 나오면 회사 자금사정에 ‘적색등’이 켜졌다고 보면 된다.

    어음은 발행기업의 신용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이에 따라 할인율, 즉 금리가 달라진다. 어음은 발행 기업의 신용도와 재무상태, 만기에 따라 등급이 결정되는데 통상 A, B, C급으로 나뉜다. A급 어음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발행한 어음으로 할인율은 시중 사채금리의 지표로 사용된다. 현재 A급 어음의 할인율은 월 0.7%(연 8.4% 내외), B급은 월 1%(연 12% 내외), C급은 월 1.3%(연 15.6% 내외) 정도다.

    어음은 발행한 기업이 부도 나면 순식간에 휴짓조각이 되기 때문에 사채업자들은 어음을 할인할 때 최대한 신중하게 한다. 한 어음중개업자는 “명동에서 금리가 매겨진 코스닥 기업들은 그나마 사채업자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 곳”이라며 “한계 기업의 어음은 사실상 할인이 불가능해 금리가 월 3% 이상에서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사채시장이 무서운 것은 사채업자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단단한 끈으로 연결돼 좋지 않은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간다는 점이다. 최근 우량기업으로 알려진 K사는 사채시장에 퍼진 소문 때문에 낭패를 당했다. K사가 100억원의 자금을 사채시장을 통해 조달한다는 소문이 나자, K사에 돈을 빌려준 저축은행과 신용정보업체의 관계자들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명동뿐 아니라 강남 사채시장에서도 K사의 어음할인 진위를 알아보려는 문의가 잇따르자 사채업자들은 일단 사태를 지켜보는 것으로 결론 지었다. 혹시 부도가 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어음할인을 주저한 것이다.

    106억 횡령하고 도피한 기업 사냥꾼

    이런 소문이 나면 돈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한 사채업자는 “어음할인이 어렵다고 하면 당좌수표를 할인해 달라고 통사정하는 코스닥 기업들이 있다”며 “이런 경우 어음할인율은 부르는 게 값이고, 대주주들은 거의 대부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때로는 사채업자의 등을 치는 간 큰 코스닥 경영자도 있다. 코스닥 기업이 위조와 변조를 이유 삼아 발행한 어음을 피사취부도 처리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이것이 사채업자들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피사취부도는 어음 또는 수표 발행의 전제가 된 원인관계, 예컨대 물품매매, 차용관계 등의 불이행, 무효, 취소를 이유로 어음 발행 기업이 어음 금액의 일부 또는 전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은행은 어음(수표)을 제시한 사람에게 돈 지급을 거절한다. 쉽게 말해 기업이 자금은 갖고 있지만 어음을 결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한국툰붐의 전 재무이사가 임의로 약속어음을 발행해 2억3000만원을 챙긴 뒤 잠적했다. 약속어음을 할인해준 사채업자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은행에 지급을 요구했으나 기업의 피사취부도를 이유로 거절당했다. 사채업자가 역으로 코스닥기업 임원에게 당한 것이다. 이 같은 일은 요즘 코스닥 기업들이 M&A를 통해 경영진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전 경영진이 발행한 어음을 현 경영진이 피사취부도 처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하는 사채업자가 늘수록 코스닥 기업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 어음 중개업자는 “경영진이 교체된다든지, 사업 방향이 바뀌면 만기가 도래한 어음에 대해 피사취부도를 내는 코스닥 기업이 늘고 있다”며 “가뜩이나 코스닥 기업들을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는데, 최근 피사취부도가 늘면서 코스닥 업체들의 신용도를 싸잡아 낮추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일단 코스닥 업체들이 발행한 어음의 진위를 파악하기가 과거에 비해 더욱 어려워졌다”며 “이럴수록 코스닥에 대한 할인율이 높아지고 아예 할인을 꺼리는 상황이 벌어져 자금조달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코스닥 기업인 삼키는 사채업자들

    사채업자의 과도한 빚 상환요구를 못이겨 회사가 부도나면 직원들은 길거리로 내몰린다.

    한계 기업이 늘면서 횡령 사고도 빈발하고 있다. 지난 3~4월에만 9개 코스닥 기업이 횡령 사고를 당했다. 횡령 주체는 대부분 대표이사나 최대주주다. 횡령 사고가 늘어나는 것은 한계 기업이 늘면서 한탕주의 유혹에 빠지는 경영진도 늘기 때문이다. 횡령사건이 발생한 기업 중 올해 상장 폐지된 기업도 상당수다.

    경기 침체에 따른 자금난으로 M&A 시장에 매물로 나온 등록기업이 늘어나는 틈을 타 기업 사냥꾼들이 회사를 인수한 뒤 회사자금을 빼돌려 거덜내는 경우도 있다. 전문 기업 사냥꾼들은 기존 대주주가 회사에 지고 있던 개인적 채무를 인수한 뒤 사채업자와 짜고 회사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쉽게 인수한다. 인수 후에는 사채를 갚기 위해 회사자금을 횡령한 다음 회사를 또 다른 기업 사냥꾼에게 팔아넘긴다. M&A업계 전문가는 “정상적으로 영업활동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던 업체들이 갑자기 부도를 맞는 것은 대부분 기업 사냥꾼들이 손을 대면서 부실화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근 자본잠식률이 50%를 넘어 상장폐지 위기에 몰린 오폐수 처리설비 전문업체 M사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초 이 회사는 전 대표이사 P씨가 공금 106억원을 횡령한 후 미국으로 도주했다. P씨는 지난 2002년 10월 코스닥 기업 한 곳을 인수한 후 다음 해 11월 팔아치운 전력이 있다.

    ‘관찰’ ‘노력’ ‘가능’

    이렇듯 코스닥 시장에서 분탕질을 하는 몰상식한 경영자가 늘자 정부는 코스닥 등록기업의 퇴출규정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는 코스닥 시장에서 강제 상장 폐지되는 기업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엔 36개사가 퇴출됐고, 올해는 이를 넘어설 것이 확실하다. 이미 30여 곳이 지난 4월말 상장 폐지가 확정되는 등 올해 약 50~60개의 코스닥 기업이 퇴출될 것으로 증권업계는 예상한다. 그만큼 일반 투자자의 피해가 불가피하다.

    명동 사채업자들은 퇴출기업 대부분이 사고를 치기 전 사채시장에서 공통적인 전조(前兆)를 보였다며 사전에 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 어음할인율을 보면 해당 기업의 건전성을 파악할 수 있고, 할인율 변화 추이를 꼼꼼히 살피면 적어도 부도 날 기업의 주식을 사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예컨대 ‘중앙인터빌’이란 홈페이지(www.interbill.co.kr)에 접속하면 거래되는 어음의 할인율 정보가 게재돼 있다.

    사채업자들은 어음을 할인할 때 해당 기업의 재무상태, 즉 단기재무 건전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주로 외상매출 채권이나 만기 3개월짜리 진성어음에 손을 대기 때문이다. 사채업자들은 보통 “어음할인율의 변화는 주가에 길게는 1개월 짧게는 2주일가량 선행한다”고 말한다. 특히 재무 리스크가 거래소 상장기업보다 큰 코스닥 기업들의 경우 이런 경험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명동에서 구설에 오르는 기업은 반드시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다.

    올해 외부 감사인에게 감사의견 거절을 받은 기업들은 대부분 지난해 이미 명동 사채시장에서 어음할인율과 관련, ‘관찰’ 및 ‘노력’, 그리고 ‘가능’으로 분류돼 있던 곳이다. 이미 사채업자들은 관련 기업의 이상 징후를 포착하고 거래를 끊은 것이다.

    사채시장에 따르면 의견거절을 받은 기업 중 동방라이텍(2004년 7월), 맥시스템(2004년 4월), 인츠커뮤니티(2004년 9월), 지니웍스(2004년 9월), 엔에스아이(2003년 12월), 성진산업(2004년 8월), 아이엠아이티(2004년 12월) 등은 2년 전부터 ‘관찰’로 분류됐다. ‘관찰’은 말 그대로 거래가 안 되는 회사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텔슨정보통신(2004년 6월), 후야인포넷(2005년 2월), 업필(2004년 9월), 창민테크(2004년 11월)도 어음 할인이 가능하지만 다른 곳보다 더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는 ‘노력’으로 분류됐다. 슈마일렉트로는 지난해 8월 어음할인율과 금액만 맞으면 거래를 할 수 있는 ‘가능’으로 분류됐다 올해 2월에는 ‘노력’으로 재분류됐다.

    그들만의 ‘촉수’

    한 어음중개업자는 “일반적으로 기업의 어음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원리에 따라 명동에서 순조롭게 할인율이 결정되지만, 어음을 발행하지 않는 기업의 경우에도 여러 방법을 이용해 할인율이 결정된다”고 말했다. 어음을 발행하지 않아 거래가 이뤄지지 않아도 향후 해당기업의 어음이나 외상매출채권 등이 시장에서 유통될 것으로 보고 그동안의 중개 경험과 시장 상황, 그리고 나름대로의 기업신용분석 도구를 이용해 어음할인율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명동 사채업자들은 부도나 상장폐지를 당한 기업들은 사전에 시장에서 자금운용과 관련된 이상 징후가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수십년간 제도권 시장의 보완재 역할을 담당해온 그들만의 ‘촉수’로 문제 기업을 가려내는 경험칙이 있다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자금 결제가 지연된다는 것. 어음 의 결제기일이 3개월에서 4개월로 늦춰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 단계가 지나면 은행이나 상호저축은행을 통해 자금조달이 시작된다.

    기업어음 발생 시도도 이뤄지는데 갈수록 이 같은 행위가 벌어지는 시간이 짧아진다. 이때부터는 융통어음 할인도 시작된다. 융통어음 할인으로도 자금사정이 개선되지 않으면 당좌수표를 들고 시장에 나타난다. 최악의 경우로 가는 것이다. 이때는 대주주가 자기 소유 지분까지 담보로 내놓는다. 명동 사채업자들은 최대주주 교체가 빈번한 기업, 제3자 배정 유상증자가 빈번한 기업, 장외기업 투자나 최대주주 금전대여가 빈번한 기업, 공시 번복이 잦은 기업 등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험악한 곳으로 알려진 사채시장, 그리고 그곳을 기웃거리는 코스닥 상장 기업가는 필연적으로 은밀한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 아쉬워 사채시장을 노크한 경영자의 눈은 이미 반쯤 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주를 위한 경영’은커녕 직원들에게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거짓말도 서슴지 않으며,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불법을 자행하기도 한다. 이런 다급함을 사채업자들은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배를 채운다. 이 와중에 당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과 소액주주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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