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한국의 美 명문 사립고 인맥

금융계 주름잡는 초우트·앤도버 출신, 효성家는 사촌끼리 세인트폴스 동문

  •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5-12-29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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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美 명문 사립고 인맥
    “1990년대 중반 주(駐)싱가포르 대사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를 방문했죠. 미국 대사는 제가 부시 대통령과 같은 고교(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출신인 것을 알고, 저와 부시 대통령의 만남을 주선했어요. 부시 대통령이 절 보고 ‘앤도버 동문을 만났다’며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저를 유독 편하게 느끼던 부시 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손명현 전 주스웨덴 대사)

    “해외 여러 기업과 비즈니스를 할 때, 특히 고교(미국 세인트폴스 스쿨) 인맥이 큰 힘이 됩니다. 고교 시절 클래스메이트 중 듀폰(DuPont) 집안 자제가 있었어요. 그 친구 덕분에 기업의 대표 변호사를 거치는 복잡한 절차를 밟지 않고, 듀폰 회장님과 직접 사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글로벌 화학업체인 듀폰사와 효성그룹은 사업상 협력할 부분이 많거든요. 세인트 폴스 덕분에 도움을 받는 일이 많아서, 늘 모교에 고마운 마음입니다.” (조현준 효성 부사장)

    “초우트 로즈메리 홀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키워줬습니다. 고교 재학 시절엔 뛰어난 친구들과 무시무시한 경쟁을 치르느라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뒤돌아보면 그 경험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어요. 미국의 투자금융계나 언론계를 비교적 쉽게 접촉할 수 있다는 것도 초우트 졸업생이 갖는 메리트입니다.”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대표)

    ‘KS 라인’은 가라!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파워 엘리트는 흔히 경기고-서울대로 대표되는 ‘KS 라인’으로 여겨져왔다. 이들은 끈끈한 학연으로 뭉쳐 서로 밀고 끌어주며 정·재계 및 법조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이러한 명문고-명문대 출신의 인맥에 권력이 집중된 데 따른 위화감 조성의 폐해가 문제점으로 지적될 정도였다.



    그러나 세계화가 화두인 지금, 한국에 국한된 학연은 더는 큰 이점이 없다. 이미 한국 사회 최상층의 정점 연합을 형성한 집단 가운데 하나는 세계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하버드대 출신들이다. 특히 앞서 소개한 세 사람처럼, 미국 사회에서도 상류층만 입학할 수 있다는 명문 보딩스쿨(사립 기숙학교)을 거쳐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한 이들은 ‘성골 중의 성골’로 분류된다.

    미국의 명문 보딩스쿨은 미국의 웬만한 유명 사립대보다 더 입학하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연간 학비(기숙사비 포함)가 3만~4만달러(3000만~4000만원)에 달할 정도로 비싸고, 선발 인원도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 과거 유복한 백인자녀의 엘리트 교육을 위해 생겨난 보딩스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층 구분을 없애고, 인종 다변화와 성차별 폐지에 중점을 뒀다. 그 결과 각국의 상류층 자녀들이 명문 사립고로 몰려들면서 이들 학교는 정상급 글로벌 네트워크를 재생산하는 기제가 됐다.

    미국 명문 보딩스쿨의 강점은 학문뿐 아니라 문화, 스포츠 등 여러 영역을 두루 섭렵한 엘리트를 키운다는 것이다. 커리큘럼, 교사의 질, 교육 환경 면에서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유학상담 전문업체인 세계로유학원 김종애 원장은 “미국 명문 사립고를 무조건 ‘귀족학교’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선진 교육을 받은 이들이 국가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에 더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에서 운영되는 미국 명문 사립고 동문회의 역사는 10년이 채 안 됐거나, 재학생의 학부모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조기유학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중반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수의 미국 명문 사립고 출신들이 현재 외교, 경제, 학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세계화 시대가 요구하는 글로벌 네트워크와 유창한 영어 실력을 겸비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여러 명문가(家)가 특정 미국 명문 사립고와 깊은 인연을 맺으며, 형제 혹은 부자지간이 고교 동문이 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의 10대 명문 보딩스쿨을 꼽는 일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사립고 순위를 평가하는 기관마다 그 기준도 다르고, 해마다 각 고등학교의 아이비리그 대학 진학률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순위를 놓고 펼치는 학교간 자존심 싸움도 팽팽하다.

    미국의 주간지 ‘US뉴스앤드월드 리포트’나 하버드대가 발간하는 ‘독립 사립고등학교 가이드’를 통해 우수한 보딩스쿨을 꼽아볼 수 있다. 두 매체가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학교로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필립스 아카데미(앤도버), 세인트폴스 스쿨, 초우트 로즈메리 홀, 그로튼 스쿨, 디어필드 아카데미, 하치키스 스쿨, 콩코드 아카데미, 밀턴 아카데미, 로렌스빌 스쿨이 있다. 이 중 앤도버와 엑시터는 한국인과도 오랜 인연을 맺어왔다.

    한국의 美 명문 사립고 인맥

    앤도버 동문 왼쪽부터 손명현 전 주스웨덴 대사, 김병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김병표 (주)주원 대표, 김도우 메릴린치 공동대표, 수영선수 장희진.

    부시 가문과 앤도버

    미국 최초의 사립 기숙학교는 1778년 설립된 필립스 아카데미(앤도버)다. 새무얼 필립스 주니어가 삼촌 존 필립스 박사의 재정지원을 받아 설립한 앤도버는 조지 부시 대통령 부자의 출신고교로 더욱 유명하다.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인근에 위치한 앤도버는 500에이커의 대규모 캠퍼스에 160개 동의 건물을 갖고 있다. 학생수도 1000명이 넘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의 고교 시절에 대해 “앤도버는 나의 인생항로를 크게 바꿔놓은 경험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고교시절 학업에서도, 야구와 농구 같은 운동에서도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회고한 것을 보면 앤도버에서 경험한 치열한 경쟁이 그의 성장에 값진 자극제가 됐음을 엿볼 수 있다.

    앤도버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김병국(46)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동아시아연구원장)가 1981년 자신의 유학 경험담을 담은 책 ‘무서운 아이들’을 발간하면서부터. 훗날 홍정욱 헤럴드미디어 대표는 자신의 저서 ‘7막7장’에서 “‘무서운 아이들’이 미국 유학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한다.

    김상기 전 동아일보 회장(성곡학술문화재단 감사)의 장남인 그는 동생 김병표(45) (주)주원 대표와 함께 1972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두 형제는 필립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나란히 하버드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김병국 교수와 김병표 대표는 자녀들도 모두 앤도버에 진학시켰을 만큼 이들 가문의 모교 사랑은 지극하다.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의 공동대표 김도우(Dow Kim·43) 사장도 앤도버 출신이다. 그는 2005년 7월 뉴욕의 100대 고액연봉 순위에서 26위를 기록했다. 한국 출신 금융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부친인 김동환 인도네시아 코린도 그룹 부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아들이 한국의 기존 통념인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왔더라면 지금처럼 메릴린치의 글로벌헤드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세계의 인재들이 모인 앤도버에서 무한경쟁을 경험한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 현재 세계금융의 중심인 뉴욕 월스트리트를 지배하는 주요 인사 중 상당수가 명문 사립고와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했다.

    2001년엔 여자 자유형 50m 한국기록 보유자 장희진(19)양이 앤도버에 진학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며 태릉선수촌 입촌을 미루다 대표자격을 박탈당한 일화의 주인공. 그는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한국에서는 수영과 학교 공부 두 가지를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앤도버에서는 운동 때문에 수업을 빼먹을 순 없죠. 오히려 운동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하면 선생님이 ‘운동을 포기하라’고 종용할 정도예요.

    초등학생 때,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아버지를 따라 1년간 미국에 머문 적이 있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하지만 앤도버에서 영어로 과제를 해내려면 네이티브 스피커보다 두 배의 시간이 걸리곤 했어요. 영어로 수업을 받고, 수영기록도 유지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모자랐죠.”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 장양은 3년 연속 미국 동부지역고교연합 최우수선수(MVP)와 유력지 ‘보스턴 글로브’가 선정하는 ‘올해의 수영선수’로 선정됐다. 이후 그는 여러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러브 콜을 받았으나, 2005년 9월 수영에 특히 강세를 보이는 텍사스대로 진학했다. 학업과 수영의 꿈을 동시에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한 앤도버의 선진 교육환경은 운동선수의 학습권을 박탈하다시피 하는 우리 교육 풍토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창래와 댄 브라운

    한국의 美 명문 사립고 인맥

    엑시터 동문 왼쪽부터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 김민녕 한국외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소설가 이창래.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는 필립스 집안이 설립한 앤도버의 자매학교다. 앤도버가 설립되고 3년 후인 1781년 존 필립스 박사가 뉴햄프셔주 엑시터시(市)에 보딩스쿨을 세운 것. 앤도버가 자유롭고 진보적인 환경에 가깝다면, 엑시터는 학업과 규율을 강조하는 경직된 분위기가 강하다. ‘프렙 스쿨(Preparatory School·예비학교)의 하버드’라 불릴 만큼 명문대 진학률도 높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엑시터와 앤도버는 서로 최고라고 자부하며 미묘한 경쟁을 벌인다.

    엑시터를 졸업한 한국인은 약 300명. 그중 한국에 거주하는 이는 30명 정도다. 10년 전 결성된 엑시터의 한국 동문회는 국내에서 진행되는 입학설명회와 면접을 지원한다. 2005년 11월에는 엑시터의 입학부처장이 국내 학생들을 직접 인터뷰하기 위해 방한했다.

    ‘네이티브 스피커’ ‘제스처 라이프’를 발표하며 미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2000년 ‘뉴욕타임스’)로 선정된 소설가 이창래(40)씨는 엑시터가 배출한 세계적 문인.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의 작가 댄 브라운도 엑시터 동문이다.

    한국인 최초로 엑시터를 졸업한 인물은 김정원(69) 세종대 석좌교수다. 1955년 경기고를 졸업한 그는 1년간 엑시터를 다닌 후 하버드대에 진학했다. 그는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과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1987년 대선 때는 김영삼 후보 외교안보특보를 지냈고, 문민정부 때는 안기부 2차장을 맡았다. 이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국제 관계에서 두드러진 행보를 보였다.

    “1950년대 중반, 당시 경기고 학생들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군용 천막을 치고 공부했죠.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미국 유학은 제게 커다란 꿈이었습니다. 영어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새벽에 열리는 ‘타임’지 강독반에 꼬박꼬박 참석했던 기억이 나네요. 문교부 유학 시험에 통과해, 어렵게 저의 유학이 결정됐습니다. 엑시터 200년 역사상 한국인을 받아들인 것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존 하인츠 상원의원(하인츠 그룹 창립자의 손자), 존 네그로폰테 국가정보국장 등과 함께 학교를 다녔죠. 한 클래스에 12명이 함께 공부하면서 다양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교육 환경은 행복 그 자체였어요.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60달러였는데, 엑시터의 1년 학비가 1200달러였으니 저는 엄청난 특권을 누린 셈이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마련해준 엑시터에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크니스 테이블’ 수업

    엑시터 4년 과정을 이수한 첫 번째 한국인은 김민녕(51) 한국외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다. 부친인 고(故) 김동조 외무부 장관의 부임지를 따라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한 그는 큰 어려움 없이 엑시터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국내 엑시터 동문회를 주도하고 있다.

    “엑시터의 토론수업은 정평이 나 있죠. 선생님과 학생이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토론을 벌이는 ‘하크니스(Harkness·테이블 토론 수업의 창안자) 테이블’ 수업을 통해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깨우칠 수 있었죠. 준비를 많이 해온 날은 수업에 적극 가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어 당황했거든요. 또한 엑시터의 수학 클럽은 미국 전체 고교 중에서도 최상위 수학 영재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낼 때의 짜릿한 쾌감이 지금도 잊히질 않습니다.

    2개의 아이스하키 링크, 23개의 테니스 코트, 14개의 스쿼시 코트 등 운동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시설도 대단했죠. 아이스하키 클럽에 들어가 손에 땀을 쥐며 앤도버와의 정기 리그를 벌이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밖에도 국제 컨설팅 기업 엑스뮤러스(Xmuros)의 국진 대표, 김앤장법률사무소의 유진아 변호사, 한상원 모건스탠리 한국 부지사장 등이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는 엑시터 출신이다.

    김민녕 교수는 “엑시터와 앤도버는 ‘Non Sibi(나를 위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삼는다”고 강조하면서, 미국 명문 사립고를 그저 귀족학교로 치부하는 시각을 바로잡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체화한 두 학교의 졸업생은 훗날 거액을 모교에 기부함으로써 자신이 누린 교육 혜택을 후배들에게 환원한다는 것. 이러한 전통은 미국 명문 사립고가 국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도 엘리트 교육의 산실로 거듭날 수 있었던 근간이다.



    동양인 최초 야구팀 주장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세인트폴스 스쿨은 1856년 영국 성공회가 설립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학교다. 전교생은 520여 명 정도로 미국 보딩스쿨 중 중간 규모에 해당한다. 교사 1인당 학생수가 5명으로 교사 대 학생 비율이 최저 수준이며, 아이비리그 대학의 재정을 능가하는 대규모 학교 기금으로도 유명하다.

    영국 보딩스쿨의 이미지를 지닌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매너를 엄격하게 가르친다. 남학생은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여학생은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매일 저녁 ‘싯다운 디너(Sit Down Dinner)’에 참석한다. 일부 학생에게 통학을 허용하는 여느 보딩스쿨과는 달리, 학생 전원이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것도 세인트폴스의 전통이다.

    세인트폴스 재학생은 미국 대통령후보의 연설을 제일 먼저 관전하는 특권을 누린다. 미국의 대선은 전통적으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출발하는데, 바로 세인트폴스에서 대통령후보의 유세가 진행되기 때문. 그러나 정작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아쉬움이다. 2004년 벌어진 미국 대선에서 세인트폴스 출신인 존 케리와 앤도버 출신인 조지 W. 부시가 격돌한 바 있다. 1972년 대선의 존 린제이, 1964년 대선의 댄 브루스터 등도 세인트폴스가 배출한 대통령후보다.

    금융계와 언론계에서도 세인트폴스 동문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세계적인 금융인 존 피어폰트 모건, 신문왕으로 불리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바로 세인트폴스 출신이다. 아울러 듀폰 가문, 펜실베이니아 금융기관을 석권한 멜론 가문, 대부호 록펠러 가문이 세인트폴스와 관련된 명문가다.

    세인트폴스 스쿨은 한국의 효성그룹과도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다. 조석래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37) 부사장이 세인트폴스 스쿨을 졸업한 1987년부터 효성은 매년 국내에서 열리는 세인트폴스 입학설명회를 지원해왔다. 세인트폴스에 입학한 ‘1세대 한국인’에 속하는 조 부사장은 결혼식을 모교에서 올릴 만큼, 학교 사랑이 각별하다.

    “서울에서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LA의 이모 댁에 1년간 머물며 미국 고교 입학을 준비했습니다. 여러 학교를 가봤는데, 특히 세인트폴스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입학 당시 저는 유일한 동양계 남학생이었습니다.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 처음엔 친구를 사귀는 데도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다 라이벌인 그로튼 스쿨과의 축구경기에서 골을 터뜨리고 나서부터 친구가 많이 생겼어요. 저는 축구팀과 야구팀 멤버로 활동했는데, 세인트폴스 역사상 최초로 동양인 야구팀 주장이 되기도 했죠.

    학과 중에서는 종교 수업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2학년이 끝날 때 ‘신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종교철학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는데, 저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조 부사장은 세인트폴스를 거쳐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일본 게이오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후 일본 미쓰비시 상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도 세인트폴스 인맥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한다.

    한국 학생 경쟁률 100대 1 넘어

    “어느 날 미쓰비시 상사 벤 마키하라 회장이 말단사원인 저를 불렀습니다. 회장과 평사원의 독대가 흔한 일이 아니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알고 보니 마키하라 회장이 바로 세인트폴스 출신이었습니다. ‘당신이 미쓰비시 상사에 입사한 두 번째 세인트폴스 동문’이라며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어요.”

    세인트폴스를 나온 또 다른 한국인으로는 김석동(44) 잇츠티비 대표(전 굿모닝증권 회장)가 있다. 고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자의 3남으로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세인트폴스와 브라운대를 졸업했다. 김 대표와 조현준 부사장을 제외한 10여 명의 한국인 졸업생은 대부분 20대로 아직 학업을 쌓고 있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동생인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의 세 자녀도 모두 세인트폴스를 졸업했다. 조현준 부사장과 그의 사촌형제들이 모두 고교 동문인 셈.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장남 동관(22)씨와 차남 동원(20)씨도 세인트폴스를 거쳐 각각 하버드대와 예일대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美 명문 사립고 인맥

    초우트 동문 홍정욱 헤럴드 미디어 대표(왼쪽), 박재영 故 박성용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장남.

    코네티컷주에 있는 초우트 로즈메리 홀은 홍정욱(35) 헤럴드미디어 사장이 쓴 ‘7막7장’을 통해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탔다. 1993년 책이 발간된 후 초우트 로즈메리 홀의 한국 학생 입학 경쟁률이 100대 1까지 치솟았다.

    초우트 로즈메리 홀은 여학교 로즈메리 홀(1890년 설립)과 남학교 초우트 스쿨(1896년 설립)이 1974년 병합돼 탄생한 학교. 500에이커가 넘는 드넓은 교정에 116개 동의 건물, 150여 명의 교사진을 보유할 만큼 탄탄한 교육환경을 자랑한다. 교육 전문가 하워드 그린은 초우트 로즈메리 홀에 대해 “학문, 예술, 운동, 과외 활동의 적절한 조화를 강조하는 동부의 가장 융통성 있는 사립고교 중 하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애들레이 스티븐슨 전 부통령(1952년, 1956년 대통령후보) 같은 정치가에서부터 마이클 더글러스, 글렌 클로스와 같은 배우까지 초우트가 배출한 유명인사들은 정계, 재계, 예술계 등에 포진해 있다. 이는 운동과 교양을 강조하는 초우트의 르네상스적 학풍을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홍정욱 사장은 “학문과 더불어 문화의 중요성을 늘 강조한 초우트의 교육이 언론사 CEO로서 결단을 내리는 데 큰 힘이 되곤 한다”며 “‘내외경제신문’을 문화 및 연예 영역을 강조한 ‘헤럴드 경제’로 탈바꿈시킨 것도, 기자를 선발할 때 지원자의 학점보다 ‘끼’를 중시하는 것도 초우트에서 체득한 ‘문화 마인드’ 덕분”이라고 밝혔다.

    홍정욱 사장은 고 박성용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외아들인 박재영(35)씨와 더불어 한국 초우트 동문회의 최고 선배 격이다. 2005년 330억원에 이르는 유산을 물려받은 박재영씨는 현재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미국에서 영화제작 공부를 하고 있다. 홍 사장은 “재영이는 어머니가 미국인인데도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한국인 기질이 강했다. 백인 주류층과 어울리고자 했던 나와 달리, 그는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동양 친구들과 더 가까이 지냈다”고 회상한다.

    국내 초우트 로즈메리 홀 동문회는 2004년에 결성됐으며, 20여 명의 동문이 활동하고 있다. 1996년부터 졸업생의 숫자가 급증해, 20대 후반이 동문회 참가 멤버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크레디트스위스퍼스트보스턴(CSFB), 모건스탠리, 베인 캐피탈 등의 글로벌 금융기업에서 투자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동문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폭파사건으로 순직한 고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차남 김승회(34·글로벌 디자인 기업 IDEO의 디자인 컨설턴트)씨, 법무법인 광장의 임진호(31) 변호사도 초우트 출신.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장남인 최제욱(27)씨는 초우트를 거쳐 예일대를 졸업하고, 현재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초우트는 예일대와 인접해 있어 때때로 예일의 자매 고등학교로 인식되기도 한다. 국내 초우트 동문 중 예일대 졸업생의 비중이 가장 높은 것도 흥미롭다.

    쿠싱아카데미 파워

    1865년 매사추세츠주에 설립된 쿠싱아카데미도 다수의 한국 유명인사를 배출했다. 쿠싱아카데미 월러드 램프 교장의 가문은 특히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그의 큰아버지인 고 헨리 윌러드 램프 목사는 1941년부터 40년간 평북 선천에서 살았다.

    쿠싱아카데미 출신 한국인은 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는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이 학교 출신으로 조양호(56) 대한항공 회장, ‘아시아 호텔업계의 최고 마케팅 전문가’로 불리는 박성주(56) 쉐라톤워커힐 호텔 지배인, 박성우(45)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 이정훈(44)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등이 있다. 또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둘째딸 정영이(21)씨는 상명여고 1학년 때 미국 유학을 떠나 쿠싱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지금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부 재학 중이다.

    앤도버, 엑시터, 세인트폴스, 초우트, 쿠싱아카데미 출신이 한국에서 나름의 ‘동문 파워’를 구축한 데 비해 다른 명문 사립고 동문회는 아직 ‘학부모 모임’에 머물고 있다. 일부 명문 사립고 출신 한국인은 취약한 국내 기반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개인기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독립군’처럼 활약한다.

    다국적 종합광고회사 멕켄월드그룹 한국지사의 김동위(43) 사장은 미국 뉴저지주에 위치한 로렌스빌 스쿨 출신이다. 그는 맥켄월드그룹 한국지사의 첫 한국인 대표로 코카콜라, 소니, 로레알 등 대형 광고주들의 마케팅 컨설팅과 홍보 및 광고 업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고 있다.

    1810년 남학교로 출발한 로렌스빌은 엄격하고 보수적인 전통을 갖고 있으며, 특히 역사와 과학 분야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다. 로렌스빌이 남녀공학이 된 것은 1987년부터. 김 사장은 로렌스빌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리며 “초등학교 5학년인 내 아이도 모교에 보내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美 명문 사립고 인맥

    쿠싱아카데미 동문 왼쪽부터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 박성주 쉐라톤 워커힐 호텔 지배인 , 박성우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 이정훈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SBS 기자 출신인 이지현(37) NSC(국가안전보장회의) 공보담당관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근교의 콩코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그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장녀로, 초등학교 시절 ‘나홀로 조기유학’을 떠난 용감한 학생이었다. 1922년 상류사회 여학생을 위해 설립된 콩코드 아카데미는 25년 전 남녀공학으로 변신했다. 350여 명의 학생이 공부하는 이 소규모 학교는 특히 예능 분야의 커리큘럼이 강하다. 이 공보담당관은 “수업이 소규모로 이뤄지다 보니 급우들간의 유대관계가 특히 좋았다”고 회상했다.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함에도 미국 명문 사립고에 대한 따가운 시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 명문 사립고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에서 ‘신(新)귀족주의’를 함의하며, 월스트리트의 금융인이나 법조인, 정치인 등 전통적 엘리트를 생산해왔기 때문. 더욱이 이들 학교의 졸업생은 외교관, 정치인, 사업가, 법조인, 의사 등 고위층 인사를 부모로 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엘리트 교육기관이 일반인의 상대적 박탈감을 가중시키며 ‘팍스 아메리카나’를 확산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매사추세츠주의 명문 사립고 밀턴 아카데미 졸업생이자 베스트셀러 ‘나 혼자 간 미국고등학교 유학기’의 저자 허창희(22·시카고대 경제학과, 현재 군 복무 중)씨의 시각은 다르다. 명문 보딩스쿨에서 그가 배운 것은 ‘엘리트적 특권의식’이 아니라 ‘인종과 국적을 뛰어넘는 폭넓은 유대감’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교육의 정점(頂點)은 고등학교에 있다고 생각해요. 대학만 하더라도 같은 민족끼리 뭉치는 것이 다반사거든요. 하지만 고등학교에서는 인종, 국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 친구가 돼요. 기숙사 생활을 하며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이란 브랜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유용한 경력이 된다. 특히 미국 명문 사립고 인맥은 전세계 상류층을 연결하는 ‘핫라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국 명문 사립고 졸업생의 진정한 무기는 단지 ‘일류 브랜드’가 아닌, 치열한 경쟁을 통해 배양된 실력이라야 한다. 명문 사립고 출신 엘리트의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조기유학 1세대’ 김정원 교수의 말은 되새겨볼 만하다.

    “제가 미국 대학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이제는 미국의 상원·하원의원이 됐어요. 그들과 1년에 한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한미 두 나라의 공동 이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서구인과 몇 분만 대화를 나눠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뚫을 정도예요.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가적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바로 선택받은 엘리트들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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