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6월에 벌어진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외과의사인 남편 이씨는 자신의 병원을 정식으로 개원하는 날 아내와 딸을 잃고 그 자신도 ‘사회적 죽음’을 당했다. 그는 사건 발생 80여 일 만에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씨는 한 번도 범행을 자백하지 않았고, 직접적인 증거도 없었다. 다만 이씨에게 불리한 정황과 증언이 있었을 뿐이다. 이때문에 법원의 판단도 극과 극을 오갔다. 2심은 증거 불충분으로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1998년 11월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이를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 이씨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의 화재 실험을 하고, 외국의 법의학자를 동원하는 등 대한민국 강력사건 사상 가장 뜨거운 법의학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건은 2003년 2월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8년여 간의 지리한 법정 공방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비슷한 사건이 아름다운 섬,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2001년 6월25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텃밭에 들렀다 교회에 다녀오겠다며 외출한 목사 부인 김씨(사망 당시 52세)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새벽, 집에서 멀지 않은 다리 밑 풀밭에서 김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남편인 목사 K씨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사건 발생 1년10개월 만에 구속,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과연 이들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내의 외출
2001년 6월25일 월요일 오후 8시40분에서 8시50분 사이, 제주시 화북동 H아파트 주차장에서 서성이던 K목사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A씨 부부를 만난다. K목사는 이들에게 “화요예배 모임으로 외출한 아내가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9시 무렵, K목사는 A씨의 집으로 찾아가 A씨의 아버지에게 오후에 아내를 본 일이 있느냐고 묻고는 “오늘이 월요일인데 화요일로 착각했다”고 말하고 돌아간다. K목사는 10시20분경 다시 A씨의 집을 찾아가 “신고해야겠다”며 인근 파출소 위치를 물었고, A씨는 K목사가 당황해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아 자신의 차로 파출소에 데려다주던 중 부인 김씨가 집을 나간 시각이 오후 8시30분경이라는 말을 듣고 파출소에 신고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에 차를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K목사는 자신과 아내가 다니는 B교회에 전화해 C목사의 처 D씨에게 아내의 행방을 물었다. 10시40분경 집으로 찾아온 D씨에게 K목사는 아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K목사는 그 뒤로도 자신이 간사로 있는 신학교 관계자들과, 평소 연락이 뜸했던 처제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아내와 연락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아내의 행방이 묘연하자 11시 5분 전쯤 파출소에 전화를 걸어 아내가 교회에 갔는데 귀가하지 않고 있다고 알리고, 병원에 후송된 환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A씨 집을 찾아가 파출소에 신고했다고 말한다. 그때가 11시경이다. 11시30분경 K목사 집에 C목사 일행이 다녀간 다음, 자정 무렵 K목사는 승용차를 몰고 나갔다가 돌아와 C목사 집에 전화를 걸어 D씨에게 “(아내가) 혹시 다른 교회에서 기도 드리다가 잠이 들었을지도 모르니 날이 밝으면 다시 한번 찾아보자”는 취지의 말을 한다.
다음날인 6월26일 새벽 5시10분경, B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마친 K목사는 C목사와 함께 김씨를 찾아 나선다. K목사가 차를 세운 곳은 자기 집에서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제주시 도련동 삼화교(橋). K목사는 C목사에게 자신이 삼화교 서쪽 소로를 찾아볼 테니, 삼화교 남쪽의 좁은 길을 살펴보라고 한 후 헤어진다.
K목사는 잠시 뒤에 도착한 D씨와 함께 C목사가 간 방향을 향해 길 아래 냇가 쪽을 살피며 가고 있었다. 앞서 가던 D씨가 뒤돌아보니 K목사가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고 있었고,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든 D씨가 마침 맞은편에서 수색을 마치고 돌아오던 남편 C목사를 불러 확인한 결과 김씨의 시신이 포대자루에 덮여 있었다. 5시30분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