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워콤 관련, 정통부·산자부 장관 회동 주선 LG에 “김-오하라 메모 만들자” 제안 파워콤 인수 성공할까 오히려 겁났다 LG측에 ‘피맺힌 편지’ 보낸 사연 지난해 LG 2000억원, SKT·삼성 각 3000억원에 주인돼달라 요청 두루넷 인수 무산 비화 경찰의 비자금 조성 내사 “음해에 의한 것” 재벌이 통신사업 성공하기 힘든 이유
체신부 차관, 데이콤 사장을 거쳐 1997년부터 그 해 창립한 하나로통신 대표이사직을 맡아온 신회장은 ADSL 도입으로 우리나라에 초고속통신망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재직 동안 하나로통신은 파워콤 및 두루넷 인수를 시도하고 11~14억달러 규모의 외자유치에 나서는 등 통신산업 구조조정의 ‘핵’ 역할을 해왔다. 이른바 ‘통신 3강론’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해 온 신회장은 정력적 활동과 직언직설로 유명한 통신판의 ‘이슈메이커’이기도 했다.
LG그룹의 하나로통신 인수 작전으로 재계가 떠들썩한 요즘, 서울 양재동 국제전자센터 하나로드림 회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하나로통신 회장 퇴임 후, 통신업계 현안과 관련한 언론들의 집중적인 인터뷰 요청에 침묵으로 일관해 온 신회장은, 이 자리를 빌려 파워콤·두루넷 인수전 비화, 외자유치 좌절기, LG그룹과 하나로통신의 기막힌 인연, 현 통신산업 구도에 대한 견해, 경찰 내사에 대한 항변 등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먼저 2002년 내내 통신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파워콤(당시 한국전력 자회사이던 기간통신망 사업자) 인수전 뒷이야기부터 해주시죠. 결국 파워콤은 데이콤 손에 넘어갔는데요. 데이콤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그 주인인 LG그룹과의 한판 승부였죠?
“하나로통신이 설립된 게 1997년 9월입니다. 하나로통신은 그때부터 파워콤 인수를 검토했어요. 어차피 하나로통신도 새 망을 포설해야 하니, 파워콤을 인수한다는 전제하에 계획을 세우면 좋겠다 싶어 외부 회계법인에 용역을 줬습니다. 그때는 파워콤이 한전으로부터 독립하기도 전이었어요. 1999년 초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그를 통해 주당 가격은 7500~8000원 정도가 적합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죠. 그런 준비 끝에 지난해 4월, 한전에 파워콤 지분매각 입찰 의향서를 제출한 겁니다.”
“많이 쓰면 회장, 적게 쓰면 사장”
-파워콤 입찰은 상당한 난항을 겪었는데요, 2번이나 유찰됐으니까요.
“사실 그때도 사연이 좀 있어요. 2차 입찰이 진행될 즈음, 양승택 당시 정통부 장관과 장재식 당시 산자부(한전 주무부처) 장관이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어요. 셋이 롯데호텔에서 조찬을 했지요. 그 자리에서 제가 두 분께 요청했어요. 장장관께선 파워콤을 비싸게 팔겠다고만 생각 마시고 국가 통신백년대계를 위해 어찌 하면 좋을지 생각해주십시오, 또 양장관께선 산자부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게 해줄까 고민해주십사고요. 근데 그게 어찌 말이 나갔는지 기자들이 찾아오고 해서 겨우 빠져나왔지요. 그런 일 없다고 부인하는 해프닝도 벌어지고요. 아, 그런데 산자부 장관이 신국환씨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헌데 2차 입찰이 유찰된 다음 신문을 보니, 신장관이 한 모임에서 ‘적당한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수의계약을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거예요. 제가 발끈했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여기저기 청원을 넣었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하여튼 세 번째 공고가 나더군요. 세 번째 의향서를 넣고 LG측에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하나로통신은 계속 데이콤과의 그랜드 컨소시엄 구성에 관심을 가졌던 듯합니다만. 협상이란 바로 그걸 두고 하는 말인가요.
“사실은 세 번째 의향서 제출 마감 전날 박운서 데이콤 회장(당시 부회장)에게 조찬을 요청했어요. 비서실도 안 통하고 비밀리에요. 내일이 마감인데 마지막 절충을 해보자, 이대로 가면 누가 선택되든 너무 비싸게 사게 된다고요. 외국 투자자들은 그때 파워콤의 가치를 주당 8000원 미만으로 보고 있었어요. 저는 1만원 정도가 적정하다 봤고요. 하여튼 비싸게 사는 것도 방지하고, 또 어차피 데이콤과 하나로통신은 통신시장 구조조정의 한 배를 타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협력하자고 강하게 요청했어요.”
-당시는 파워콤 인수 문제로 하나로통신과 데이콤 간 감정 대립이 상당하던 때였습니다. 박회장 반응은 어떻던가요.
“당신은 혼자 결정할 수 있으나 우리는 그룹 차원의 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다시 ‘김-오하라 메모처럼 우리도 메모를 교환하자’고 했습니다.”
‘김-오하라 메모’란 1964년 한일 수교 당시, 우리측 협상대표로 나선 김종필과 일본의 오하라가 비밀리에 교환한 메모를 뜻한다.
-어떤 내용을 담자고 제안했습니까.
“무슨 담합을 하자는 게 아니라, 최고 책임자가 실무자에게 눈 깜짝깜짝 하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서로 힘 합치기로 했다는 뜻을 밝히면 밑에서도 덜 긴장해, 그리 높은 가격을 쓰지는 않을 것이라는 거였어요. 그렇게 해서 좀 많이 쓴 쪽이 대표이사 회장, 적게 쓴 쪽이 대표이사 사장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근데 박회장의 뜻은 달랐어요. 일단 제출하고 보자더군요.”
-3차 입찰에서 하나로통신이 우선협상대상자로 결정됐는데요. 어쨌건 박운서 회장과의 만남은 아무 실익도 없이 끝난 거군요.
“그렇죠. 그때 파워콤을 공동경영하자 했더니 박회장은 ‘그래서 잘되는 걸 못 봤다. 지금 데이콤은 먹고 살 게 없다. 그러니 파워콤을 가져와 새로운 돌파구를 열려 한다. 차라리 하나로통신과 데이콤 통합하자’는 큰 그림을 내더군요. 그래서 제가 ‘통합에는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작은 것도 못하면서 어떻게 큰일을 함께하겠나. 지금처럼 감정이 쌓인 상태에서는 어렵다. 파워콤부터 보조를 맞추자’고 거듭 요청했습니다. 어쨌거나 협상은 무위로 끝났지만.”
-파워콤 인수는 그 자체로도 하나로통신에 의미 있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14억달러(1조8000억원) 외자 유치의 전제조건이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외자 쪽에서 제시한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죠.
“그랬죠. 파워콤 인수 비용 자체가 외자를 통해 해결돼야 할 상황이었는데, 그쪽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어요. 반드시 경영권을 장악해야 된다, 아니면 그와 비슷한 효과 낼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어야 된다…. 한편 그와 관련해 한전 강동석 사장은 ‘우리도 공기업인데 맘대로 할 수 없는 일 아니냐’며 난색을 표했고요. 그래도 제가 밀어붙였으면 됐을 겁니다. 제가 안 한 거죠.”
-내심 다른 생각을 했던 건가요.
“솔직히, 어차피 하나로통신 혼자 가져가서는 성공 못한다는 걸 알았거든요. 하나로통신이 파워콤의 새 주인이 됐을 경우 (하나로통신과 시외·국제전화 및 초고속인터넷망 경쟁사인) 데이콤이 파워콤 망을 빌려 쓰려 하겠습니까. 안그래도 망 이용율이 낮아 걱정인 상황인데요. 그건 하나로통신도 마찬가지죠. 하나로통신이 파워콤에 연간 1000억원을 지불합니다. 하지만 파워콤이 데이콤 소유가 되면 하나로통신이 그걸 쓸까요? 이 다음에라도 데이콤이 ‘망 안 빌려준다’ 하면 어쩔 겁니까.”
-결국 ‘무리하게 몰지 않았다’는 건 데이콤과 공동경영을 하게 될 걸로 봤다는 뜻이네요.
“그렇죠. 전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절박한 마음에 ‘피맺힌 편지’ 전달
-데이콤이 무슨 희망적 반응이라도 보여주던가요?
“그쪽에선 계속 끝나고 보자 했어요. 응해주지 않았죠. 하지만 저는 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뻔하다고 봤어요. 한 회사가 하면 망하게 돼 있는데요. 이번에 우리 떨어지고 데이콤에 기회가 가더라도, 막상 고민하다 보면 우릴 찾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죠. 오히려 전 그래서 우리가 덜컥 단독 인수자로 결정될까봐 내심 걱정을 많이 했어요. 굉장한 부담이잖아요, 더구나 외국 돈 끌어다. 처음부터 자신 없었어요. 또 만일 인수 결정 후 외자 쪽에서 딴 조건 내걸며 못 들어오겠다고 하면 어쩝니까. 외자도 공동경영을 하면 더 좋다 했어요.”
-공동경영이 더 좋다고요?
“뭐 더 좋다기보다… 그래도 좋다는 거죠. 하여튼 파워콤만 가져올 수 있으면요. 하지만 공동경영이라도 경영 주도권은 하나로가 잡아야 된다 등등 조건이 많았어요.
나중에는 박회장으로는 안 될 것 같아 강유식 LG 부회장(당시 LG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났어요. 세 번인가 만나 통신 큰 그림을 그려줬지요. 그때 따져보니 우리 통신산업 전체 매출액이 28조원 정도 돼요. 그걸 근거로 제가 계산해보니 2007년에는 50조원 규모가 되겠더군요. 그 정도면 시장을 3개 그룹(이른바 ‘통신 3강’ △SK텔레콤 중심 △KT 중심 △그 외 사업자 : LG 계열·파워콤·하나로통신·두루넷 등)으로 나눴을 때 살 만해지거든요.
LG텔레콤과 데이콤, 파워콤, 하나로통신, 두루넷 등을 묶어 한 회사로 만들면 2007년쯤에는 매출이 8조~10조원, 그러니까 SK텔레콤하고 비슷해진다 이거예요. 매출을 산술적으로 합하면 떨어지지만 유-무선사업 통합으로 시너지를 창출하면 SK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 넘버 2가 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는 구본무 LG그룹 회장까지 만났어요. 파워콤 주인이 결정되기 3일 전이었죠. 구본무 회장, 강유식 부회장을 모시고 1시간 동안 설명을 했지요. 그렇게 상당히 설득이 된 걸로 생각하고 돌아왔는데 다음날 조간에, 박운서 회장이 기자들에게 ‘이미 (데이콤 것이) 다 된 것 가지고 하나로통신이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나중이면 몰라도 지금부터 같이 하자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한 내용이 실려 있는 거예요.
절박한 마음에 제가 강유식 부회장 앞으로 편지를 썼어요. 피맺힌 편지를. 그걸 지금도 갖고 있어요. 나중에 자서전 쓰면 집어넣으려고. 40년 통신(산업) 한 사람으로서 마지막 절규하는 편지.”
-그때가 데이콤이 파워콤 주인으로 결정되기 하루 전이었나요?
“그렇죠.”
-(데이콤이) 파워콤을 갖고 간 다음에라도 같이하자는 거였나요, 아니면 아예 공동경영안을 발표하자는 거였나요.
“같이 하는 걸로 발표하자는 거였죠. 기한이 코앞이라지만 양사(兩社)가 연기해달라면 해주는 걸로 한전이랑 이미 얘기가 돼 있었어요. 제가 요청했거든요. 우리만 합의하면 됐던 겁니다.”
-통신 3강 구도 실현이 신회장의 지론인 줄은 압니다만, 역시 그때는 외자 유치가 너무 절박했지요? 파워콤을 가져올 수 없으면 외자유치도 불발이 되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요. 당시는 하나로통신 주가도 괜찮을 때였고, 그 기회를 놓치면 절대 안 되겠다고 판단해 제가 그렇게 (편지로) 절규한 겁니다. 국가적으로 보더라도 파워콤이 어떤 개인의 감정이나 특정 그룹의 이익에만 좌우되는 것은 문제 아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신회장의 예측이 빗나갔네요. 데이콤 단독으로 파워콤 지분 45.5%를 가져갔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고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돈도 돈이지만 이용률도 떨어지고요. 제가 하나로통신을 나와버렸으니 다 중단됐지만, 사실 그때 저는 2500억원 들여 파워콤 망을 대체할 자체 시설을 완전히 깔아버리려 했습니다.”
-요즘 사안으로 들어가보죠. 사실 LG는 파워콤을 인수하던 때만 해도 ‘통신 3강 구도’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듯합니다. 신회장께서 LG에 직접 하나로통신 인수를 제안한 적도 있었지요?
“2001년 말, 또 2002년 초 두 차례에 걸쳐 LG에 제안을 했습니다. 강유식 부회장을 찾아가 유상증자를 하든 전환사채를 발행하든, 처음에는 3000억원, 나중에는 2000억원만 넣어달라 했어요. 3000억원에서 2000억원이 된 건 그 사이 주가가 그만큼 떨어졌기 때문이고요.”
-그러니까 주인이 돼달라는 거였죠.
“결국 그런 얘기죠. LG 지분이 16% 가까이 되니 3000억원만 넣으면 30% 이상 돼 경영권을 인수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저는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했어요. 사실 그때부터 전 물러나는 수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업계고 어디서고 계속 ‘신윤식이 사장 자리 보존하려고 술수 쓴다’ 그런 말들이 참 많았는데 전혀 아니에요. 사실 창업기에 회사 키우려고 제가 (사업을) 얼마나 무리하게 추진했습니까. 그러다 보니 잘한 일만 있겠어요, 못한 일도 있겠지.”
-하나로통신의 ‘주인’을 찾는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다는 뜻인가요.
“통신사업을 해보니 재벌이 하면 회사가 클 수 없어요. 데이콤이 20년 넘은 회사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미래가 불투명해요. 왜냐. 제가 사장으로 있을 때만 해도 데이콤 콘텐츠는 상당히 우수했어요. 그걸 빨리 온라인화했어야 하거든요. 하나로통신보다 먼저 초고속망을 시작했어야 해요. 그랬으면 지금 엄청난 회사가 됐을 겁니다. 그럼 그걸 왜 못했냐. 제가 데이콤 고문 시절 그 권유를 하니 당시 사장이 LG그룹 구조본에 의견을 물었어요. 근데 2000억원 정도가 들어간다니까 구조본에서 반대한 거지요.
통신사업은 신속한 의사결정, 전광석화 같은 행동이 필수입니다. 그걸 못하면 이길 수 없어요. 그렇다면 SK텔레콤은 어떻게 잘 되나. SK는 그게 본업처럼 돼 있고, 우수한 인재 많고, 또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가 바뀐 것이라 기본이 탄탄했거든요. 특수한 상황이지요.
예를 들어 온세통신, 드림라인, 두루넷을 보세요. 다 하나로통신보다 먼저 생기지 않았습니까. 헌데 하나로통신이 훨씬 큰 회사가 됐어요. 제가 다른 누구의 관여도 받지 않고 오너처럼, 어떻게 보면 제 분야에 관한 한 재벌 총수 이상으로 휘두르면서 했기 때문이에요. 덕분에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래서 매출 1조3000억원짜리 회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 정도 규모가 됐으니 주인을 찾아도 되겠다 했던 거지요.”
‘주인 찾은 후 외자유치’ 시도
-다시 지난 얘기로 돌아가보죠. LG에 가져가달라 했더니 반응이 어떻던가요.
“강유식 부회장 말씀이, ‘통신사업에 대해 우리는 아직 결심을 못한 상태다. 원로들과 논의해보겠다’고 하더군요. 1주일 후 다시 만나 식사를 하는데 ‘미안하다’ 그러세요. 제가 말했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외자를 도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로통신은 외국 회사가 돼버리고 3강구도 재편도 물 건너간다. 강부회장은 ‘일리 있는 말이다.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직 결론을 짓지 못했다. 그러니 외자 도입을 하라’ 하더군요. 그래서 하나로통신의 외자유치 작업이 시작된 겁니다.”
-SK와 삼성 쪽에도 인수 요청을 했나요.
“SK에 3000억원, 삼성에도 3000억원. 그 정도만 들여오면 주인 될 수 있다, 주인이 되어달라 그랬죠. SK도 손길승 회장이나 최고위층 만나 얘기를 다 했어요. 그렇게 되면 같은 외자라도 훨씬 유리하게 들여올 수 있다, 지금 상태로는 외국 자본의 신뢰를 얻기가 힘들다고요. 하지만 결국 아무도 응하지 않았어요. 주인을 못 찾은 거죠.”
-SK텔레콤은 하나로통신 인수에 정말 욕심이 없는 걸까요.
“아직은 CEO가 유선의 필요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하나로통신의 효용에 눈뜨게 되리라 믿습니다. 전 이번 유상증자안이 통과됐다면 SK텔레콤은 거기 참여했으리라 생각해요.”
-이제 두루넷 인수합병 건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죠. 파워콤 인수가 좌절된 직후인 지난해 12월 말부터, 다시 두루넷 인수를 조건으로 한 외자유치 작업이 시작됐죠?
“그 얘기를 꺼낸 건 우리랑 쭉 투자 건을 상의해온 외자, 그러니까 AIG하고 뉴브릿지였어요. 잘 모르지만 아마 두루넷 쪽에서 먼저 말을 넣었나봐요. 외자 입장에서도 하나로통신 투자한다고 1년을 주물렀는데 뭐가 잘 안 되니 그렇게라도 돌파구를 뚫고 싶었겠죠. 사실 두루넷하고 우리는 과거지사가 있지 않습니까. 전 그때 느낀 배신감이 하도 커, 사실 두루넷에 대해서는 일체 생각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자 쪽에서 그렇게 나오니 다시 해보자 했죠.”
파워콤 인수 협상이 벌어지기 전인 지난해 초, 하나로통신과 두루넷은 합병 협상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두루넷이 전용회선 사업 분야를 SK글로벌에 전격 매각하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당시 두 회사는 서로에게 책임을 물으며 날카로운 대립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서로의 필요에 따라 2차 협상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두루넷 인수전 막전막후
-두 번째 역시 실패로 돌아갔죠. 이때는 감정의 골이 처음보다 더 깊게 파였던 걸로 아는데요.
“임원 둘에게 일을 전담시키다시피 했는데, 그 사람들이 괜찮다는 거예요. 그래서 롯데호텔에서 세리머니까지 하고 사인을 하려는데 누가 ‘실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물으니, 앞으로 10일간 (계약서 상에 적힌 내용 외의 정보를 담고 있는) ‘공개 목록’에 대한 실사를 진행해 하자가 있으면 그때 관둬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었어요. 그래서 그 전제하에 사인을 했죠.
직원 30명이 들어가 실사를 했는데 시한 이틀을 남겨놓고 재무담당 임원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부도난다. 그쪽 적자가 고스란히 하나로통신 적자로 반영되게 돼 있다. 또 보이지 않는 빚(우발 채무)이 너무 많다. 공사업자한테 안 준 돈만 500억 원’이라는 얘기였어요. 급하게 이용태 삼보컴퓨터(두루넷 모회사) 회장을 찾았지요. 다음날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조찬을 하며 ‘어렵겠다’ 했더니 이회장 얼굴이 하얗게 질려요. ‘상황이 무척 어렵다, 며칠만 여유를 달라’고 해 임원들에 전하니 대다수가 ‘그럴 수 없다, 법대로 해놓고 보자’는 겁니다. 해서 이회장에게 전화를 해 ‘임원들이 모두 반대하니 아들(이홍선 두루넷 부회장)을 보내 마지막으로 한번 설득해보라’고 했지요. 그러자 이회장이 큰아들을 데리고 왔어요. 저녁 늦게까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상황이 결정적으로 꼬인 건 여기서부터였던 듯하다. 이회장은 “알고 보니 그 와중에 이미 오후 5시쯤 주요 임원들이 두루넷측에 팩스로 계약 파기를 통보하고 고시까지 해버렸다. 사장님은 모르는 척하시라더니 정말 그렇게 했다. 결과적으로 그때 인수를 안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두루넷은 “하나로통신측이 중간 조정 과정을 생략한 채 일방적으로 결렬을 공표했다. 대기업의 기업윤리와 신의를 저버린 납득하기 어려운 조치”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협상이 결렬된 것은 올 1월16일. 이후 신회장과 두루넷 경영진의 관계는 극히 악화돼, 한 통신업계 모임에서 양자간에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가는 모습이 연출됐다고 한다. 현재 두루넷은 법정관리 상태에 있다.
“정통부 나서 교통정리 해야”
-신회장께서는 지난 3월28일 하나로통신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하나로통신 경영권 인수를 노린 1대 주주 LG의 축출 의지에 삼성전자(2대 주주), SK텔레콤(3대 주주) 등이 동조한 때문이었다는데요. 표 대결로까지 가지 않은 건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입니까.
“사실 전 2년 전부터, 외자유치가 되거나 회사 주인을 찾게 되면 은퇴하리라는 뜻을 굳히고 있었어요. 그러니 올 3월이면 계획보다 오래 한 거죠. 근데 외자유치도 안 되고 LG가 그렇게 나오니 오기가 발동하데요. 또 제가 그만두면 회사는 진공상태가 됩니다. 그걸 방지하려고 헤드헌팅 회사 통해 사장 후보 여러 명을 인터뷰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했어요.
뭐 비상 대책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상법 조항을 활용하면 상임 이사는 아니어도 다음 주총까지 이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거든요. 이 회사가 사실 내 회삽니다. 제가 일군 회사예요. 외자유치도, 사장 선임도 안 됐는데 무책임하게 물러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 나이도 그렇고 가족 반대도 극심하고…. 아내가 ‘당신 나이에 상처뿐인 영광은 필요 없다’ 하데요.”
-신회장께서 물러난 후 오랫동안 추진해온 외자유치 건은 LG의 반대로, LG가 추진한 유상증자 건은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야 이제 뭐 관련 없는 사람이지만,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잘됐어야 했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질 않습니다. 세 회사 다 지금껏 주주로서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LG는 2000억원만 내고 가져가라 할 땐 뒤도 안 돌아보더니, 이젠 어떻게 하면 경영권 장악할까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삼성·SK는 아예 주식을 팔겠다고 시장에 내놔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정적 순간이 되니 다 자사 이익만 쫓아, 하나로통신의 운명이며 국가 통신산업의 미래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해버린 거예요. 사실 따지고 보면 세 회사 모두 정부의 통신산업 지원정책 덕분에 오늘의 부를 이룬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전 정부에도 섭섭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번 LG 유상증자 건만 해도, 정통부가 나서 교통정리를 했으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아니었습니까. 장관이나 누가 나서 맥을 짚어 집중 추궁하고, 언론 플레이도 하고, 저라면 기자회견이라도 열었을 겁니다.”
-신회장께서는 올 초부터 서울경찰청 수사과의 내사를 받아왔습니다. 3월 주총에서 자진 사퇴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요. 비자금 조성, 고객센터 운영자 리베이트 수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걸로 압니다.
“7월16일, 노대통령과 CEO포럼 회원들이 함께한 오찬 석상에서도 제가 그 얘기를 했어요. 대통령께서 ‘건전한 기업인들이니 신주류로 생각하겠다’고 하시기에 ‘그리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신주류라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근거 없는 모함을 받는다면 (정부가 나서) 보호해줘야 하는 것 아닌지요’ 하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그럼 그게 뭐냐. 모함이에요. 저를 음해하려는 업계 인사, 특정 기업의 조작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껏 뒤져도 아무것도 안 나오지요.”
경찰, ‘하나로’ 직원 20여명 소환
-신회장께서도 직접 조사를 받았습니까.
“아직 전화 한 통 못 받았습니다. 제가 그 감을 잡은 게 2월 말, 3월 초쯤이에요. 모 관련회사 대표가 ‘신윤식은 비리가 많아 이번에 안 나가면 구속시킨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전 코웃음을 쳤죠. 제가 하나로통신을 그만둔 후, 그러니까 5월6일부터 직원을 소환하기 시작했어요. 20명쯤 조사받았습니다. 전무 하나는 3회에 걸쳐 31시간이나 조사를 받았어요. 지금도 방계 업체들을 계속 뒤지고 있는 걸로 압니다.”
-수사 시작의 근거는 뭐죠.
“투서가 있었습니다. 누가 했는지도 알아요. 하나로통신 현직 임원들입니다. 외부 세력의 사주를 받아 인사와 관련한 불만을 그렇게 터뜨린 거죠.”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말도 안 되지요. 먼저, 친척 회사를 거쳐 ADSL 모뎀을 비싸게 사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부분 말입니다. ADSL 모뎀 가격이 처음에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60만원이었어요. 그게 2년 사이에 4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니 가격이 오죽 들쭉날쭉했겠습니까. 고객은 50만 명씩 웨이팅돼 있지, 장비는 거의 독점이지. 그러니 좀 비싸거나 싸도 그냥 살 수밖에요.
또 그 친척이란 사람이 우리 누님 사위입니다. 금융사, 건설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회사에 도움을 많이 줬어요. 그 사람이 퇴직 후 통신 관련 회사를 인수한 거죠. 저로 인해 임원들을 알게 된 건 사실이지만 다 자기가 똑똑하고 열심히 해서 회사를 키운 거예요. (하나로통신과) 거래량 많은 순으로 따지면 9위쯤 될 겁니다.
또 제가 고객센터 운영자들한테 3억~10억씩 받아먹었다는데요. 운영자 선정을 모두 제 임의로 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평소 신조랑 관련이 있어요. 전 직원들 보고 ‘외연 넓혀라, 누가 부탁하면 전부 들어줘라’ 그럽니다. 물론 원칙은 있어야죠. 객관성, 회사에 손해 끼쳐선 안 되고, 대가를 받아서도 안 되고. 또 저는 공개입찰도 했지만 반 이상은 적정 가격을 산출해, 우리 회사에 기여가 많은 업체 순으로 납품 물량을 줬어요. 3억원짜리면 1억원씩 세 회사에 나눠줬구요. 신세를 져야 신세를 갚는 겁니다. 남들 보기엔 뭘 받아먹지 않고서야 운영권을 줄 리 있느냐 하겠지만 아니에요. 경찰이 그렇게 뒤졌는데 아직 한 건도 적발 못했잖아요.”
신회장은 경찰 조사에 대해 ‘모함에 의한 과잉 수사’라며 거듭 결백을 주장했다. 지난 6월11일에는 경찰청장을 상대로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경찰의 최종 수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다.
“LG, 투자 의지 보여야”
-최근 하나로통신 상황을 좀 돌아보죠. 유상증자를 수단 삼은 LG의 접근이 서툴렀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동의합니다. 이왕 5000억원을 쓸 생각이었다면 전환사채 발행 후 외자도입을 시도하는 수순을 밟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삼성전자도 SK텔레콤도 아무 말 못했을 겁니다. LG가 하나로통신을 싸게 먹으려는 게 아니라, 정말 투자할 생각이 있다는 걸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도 됐을 거고요.”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왜 LG의 마음이 바뀐 걸까요. 통신시장 관망에서 적극 참여로요.
“데이콤 때문이겠죠. 지금 거기 들어간 돈이 2조원 아닙니까. 데이콤을 살리려면 하나로통신과의 합병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을 겁니다.”
신회장은 “하나로통신의 미래에 대한 고언을 해달라”는 요청에 “신임 윤창번 하나로통신 사장에게 누가 될 수 있다”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다만 “LG가 정말 하나로통신을 가져가 통신산업 구조조정에 나설 의지가 있다면, 그런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하는 조치부터 취한 후 외자유치에 나서는 것이 여러 모로 이로울 것”이라는 견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