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닉스에서 떨어져나온 ‘미운 오리새끼’ 현대큐리텔.
- 팬택 박병엽 부회장은 제 덩치의 두 배가 넘는 ‘부실덩어리’에 전재산을 쏟아부었다. 퇴출당했던 국내 휴대전화 시장에서 LG전자와 2위 자리를 다투게 되기까지, 팬택&큐리텔의 흥미진진 재기 비화.
팬텍&큐리텔의 카메라폰. 젊은 층에 특히 인기가 높다
“팬택&큐리텔이요? 삼성, LG를 제외한 중견 휴대전화 업체 연구개발진 치고 그 회사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거의 없을걸요? 연봉도 센 데다, 연구진 대우도 좋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거든요. 전망도 좋아 보이고…. 저요? 갈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가고 싶지요.”(모 휴대전화 제조업체 직원)
33만 화소 카메라폰으로 ‘대박’
“요즘 휴대전화 시장의 경쟁력은 스피드입니다. 소비자가 원하는 기능을 장착한 최신 모델을 누가 먼저, 다양한 모델로 출시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요. 삼성전자가 모토로라와 노키아를 누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팬택&큐리텔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피드 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아요. 앞으로 휴대전화 업계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한 기업 중 하나가 될 거라 믿습니다.”(동원증권 김태경 애널리스트)
요즘 증권가에서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는 기업 팬택&큐리텔의 단면을 보여주는 얘기들이다. 현재 거래소 상장 절차를 밟고 있는 팬택&큐리텔은 최근 상장 기업 중 공모 규모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공모 규모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가 우량하고 전망이 좋다는 뜻이다. 실제 팬택&큐리텔의 실적은 상당하다. 올 1분기의 경우 매출 2649억원(판매 수량 1314만대)에 영업이익 161억원.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98%, 판매수량은 71%, 영업이익은 51% 증가했다.
이뿐 아니다. 내수 시장 진출 1년도 안 돼 점유율 15%를 자랑하며 삼성, LG에 이은 3위 업체로 자리매김했다. 향후 휴대전화 시장의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폰에서는 이미 LG를 제치고 2위에 올라 있다. 지난 7월 국내에서 팔려나간 휴대전화는 모두 111만여 대. 이 중 카메라폰이 57만대로 이미 50%를 넘어섰다. 카메라폰 판매 대수는 삼성이 34만여 대로 1위. 10만여 대를 판 팬택&큐리텔이 2위다. LG전자는 2만여 대를 팔아 모토로라에 이어 4위에 그쳤다.
KTF가 집계한 판매 대수 기준 인기 순위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준다. 1~4위가 삼성전자, 5, 6위가 팬택&큐리텔 제품이다. LG는 9, 10위에 이름을 올려놨을 뿐이다. 팬택측 표현대로라면 “완전경쟁 시장에서 대기업 브랜드를 누른 최초의 중소기업 브랜드”가 될 날이 멀지 않은 듯도 하다. 이같은 사실은 홍콩 경제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하지만 ‘장사가 잘 된다’는 것이 요즘 팬택&큐리텔이 주목받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잘나가는 기업이 어디 한둘인가. 팬택&큐리텔이 화제가 되는 주요인은 다른 데 있다. 하이닉스에서 현대큐리텔이란 이름을 달고 분사해 나온 후 팬택에 인수되던 2001년 11월까지만 해도, 이 회사는 그야말로 돈만 잡아먹는 ‘미운 오리새끼’였다. 그런 업체가 2년도 채 안 돼 화려한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위기에 처한 ‘걸리버’
하이닉스로 이름을 바꾸기 전인 현대전자 시절. 당시 현대전자 휴대전화 사업부는 신인 탤런트 박진희(일명 걸리버 걸)를 내세워 ‘걸면 걸리는’ 걸리버 브랜드로 시장에 도전했지만, 계속 뒤로 밀려 2001년 초에는 내수시장 경쟁에서 사실상 탈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때문에 2000년 말부터는 엄청난 마케팅 비용이 들어가는 내수시장을 아예 접고 수출에만 매달렸다. 결과적으로 내수시장 점유율은 2000년 7%에서 2001년 1%대로 떨어졌다. 휴대전화 시장의 최대 각축장인 내수 시장에서 밀렸으니 수출 또한 활황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사업 시작 후 10년간 적자, 2001년 순손실 1427억원, 650명 선이던 연구개발진이 350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사세가 기울었다. 결국 하이닉스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계륵이던 휴대전화 사업부를 현대큐리텔이란 이름으로 분사시켰다. 2001년 5월의 일이었다.
분사 당시 하이닉스는 세계 30여 개 유수업체에 투자 의향을 타진했다. 그 중 관심을 보인 업체는 일본의 도시바, 삼성전자, 이스라엘의 모 업체 등 3곳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과의 협상도 지지부진했다.
팬택 박병엽 부회장에게 인수 제의가 들어온 것이 이 즈음이었다. 현대큐리텔을 구조조정펀드 편입 차원에서 눈여겨보던 KTB가 함께 펀드를 구성하고 경영까지 책임질 인물을 찾던 중 박부회장이 대안으로 떠오른 것. 중견 휴대전화업체 팬택이 시장에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가 절실하다고 생각하던 박부회장은 고민 끝에 KTB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현대큐리텔을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이때가 분사 후 6개월 뒤인 2001년 11월이다.
당시 박부회장은 개인 자격으로 인수에 참여했다. 자칫 회사까지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후 현대큐리텔은 팬택&큐리텔로 이름을 바꾸며 기존 박병엽 부회장이 운영하던 팬택과 함께 팬택 계열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반. 이 기간 동안 팬택&큐리텔은 눈부신 변화를 거듭한다. 팬택 계열에 편입한 첫해인 2002년, 팬택&큐리텔은 매출 8500억원에 영업이익 650억원의 흑자기업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내수시장에도 다시 진출했다. 엄청난 광고 물량을 쏟아붓고도 좀처럼 경쟁 대열에 끼이지 못했던 걸리버 휴대전화가 팬택&큐리텔 이름을 달고 나온 이후로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마침내 시장 3위 브랜드로 자리잡은 것이다. 현대 시절 제일 잘나갈 때 월 15만대 정도 생산하던 물량이 지금은 공장을 풀가동하고도 모자라는 형편. 지난 7월에는 총 70만대 이상을 만들어냈다.
기술 개발에 목숨 걸다
당연히 회사 가치도 수직상승했다. 박병엽 부회장과 KTB 컨소시엄이 하이닉스로부터 팬택&큐리텔을 인수한 가격은 총 476억원. 2년이 채 안 된 지금, 이 돈은 수천억원대로 불어났다. 현재 장외시장에서 거래되는 팬택&큐리텔 주가는 3000원대. 이를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3000억원이 넘는다. 올 가을에 예상대로 상장에 성공하면 더 급격한 상승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각각 48%, 32%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박부회장과 KTB 네트워크가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수익 또한 엄청날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M&A는 많지만 제대로 된 M&A는 팬택&큐리텔이 거의 처음”이라고 평가한다. 머니 게임 성격의 M&A를 거치며 주가만 오른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인수-경영을 통해 기업 가치가 올라간 보기 드문 사례라는 것이다.
그 비결을 따지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인수 전 현대큐리텔은 문제가 많기는 했어도 잠재력이 있는 회사였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인력이 빠져나갔지만 남아 있던 개발진은 국내 최대 기업인 현대그룹에서 뽑은 인재인 만큼 기본이 탄탄했다. 특히 분사 직전 현대큐리텔 경영권을 넘겨받은 송문섭 현 팬택&큐리텔 사장은 삼성그룹에 근무할 당시 진대제 현 정통부 장관과 쌍두마차로 불릴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로, 현대전자에 스카우트 됐다 현대큐리텔 사장에 오른 상태였다. 박부회장이 눈여겨본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송사장과 함께 일한다”는 것을 인수 조건으로 삼아 경쟁업체보다 후한 가격에 인수를 완료했다.
또 당시 현대큐리텔의 적자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많았다. 특히 분사 후에는 금융거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LC(신용장)도 개설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부품을 현금으로 사와야 하니 자금흐름이 악화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대큐리텔로부터 물건을 납품받는 업체들은 현대큐리텔이 수출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가격을 맘대로 내려 받아 꽤 많은 물량을 수출하면서도 남는 것은 별로 없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수출을 그만두지 못한 것은, 그나마 그런 수출이라도 하지 않으면 회사가 완전히 망가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기술개발이나 인재 확보를 위한 추가 투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결국 문제의 상당 부분은 부족한 자금에 있었다. 기본이 갖춰진 인재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이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회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박부회장의 판단이었다.
재기의 주역, 박병엽
앞서 김태경 애널리스트가 말한 대로 결국 팬택&큐리텔의 성공은 스피드 경쟁에서 승리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스피드 경쟁력의 요체는 기술력과 연구진 수. 많은 모델을 한꺼번에 출시할수록 히트 모델을 건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박부회장은 팬택&큐리텔 인수 후 자신의 팬택 전지분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1000억원을 빌렸다. 자신의 전재산과 인생을 건 셈이다.
팬택과 팬택&큐리텔을 합쳐 매출 2조원대에 육박하는 중견기업 오너 경영인이라기엔 다소 젊어 보이는 박병엽 부회장은 전형적인 자수성가 기업인. 196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호서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휴대전화 제조회사인 맥슨텔레콤에 입사했는데, 이 곳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해 입사 3년 만에 ‘최고 영업사원’으로 성장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여러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박부회장은 이직 대신 창업을 택했다. 1991년 신월동의 20평 사무실에서 무선호출기 제조업체 팬택을 설립한 것. 세계 최초로 광역고속무선호출기를 개발해 대 히트를 친 후 박부회장은 미련 없이 호출기 사업을 접었다. 조만간 사양사업이 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신 휴대전화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박부회장의 예상은 맞아떨어져, 팬택은 무리 없이 휴대전화 회사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팬택은 1998년 모토로라와 전략적 제휴에 성공해 또 한번 도약했다. 당시 모토로라는 한국에 CDMA R&D센터를 만든다는 복안 아래 손잡을 업체를 찾고 있었다. 모토로라는 팬택에 인수 합병을 제의했지만 박부회장은 대신 투자를 요구했다. 모토로라가 박부회장의 뜻에 동의한 것은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다. 박부회장이 “내가 경영을 잘못하고 있다 싶으면 언제든 직접 나서도 좋다. 투자 완료 후 5년 이내에 언제든 M&A를 원하면 그 뜻에 따르겠다. 단, 팬택 주식 800만주를 증자해줘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이에 모토로라는 인수 대신 투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지난 7월, M&A가 가능한 5년 기한이 끝났다. 그 날 모토로라는 “지금까지의 성과에 만족한다. 향후에도 지금처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자”는 의견을 보내왔다.
어쨌든 이렇게 팬택 주주가 된 모토로라는 팬택 제품에 모토로라 이름을 붙여 전세계에 팔기 시작했다. 한국에 뿌리를 둔 기업이 다 어려웠던 외환위기 시절, 팬택은 모토로라와 손잡은 덕분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박부회장은 남다른 친화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바로 호칭이다. 박부회장은 언론계에 호형호제하는 사람이 많은 기업가로 꼽힌다. 인터뷰 전 나이, 학번 등을 따져보고 자신보다 위면 무조건 “형”이라 부른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경영진에도 마찬가지다. 삼성 ‘애니콜’ 신화의 주역인 이성규 팬택 사장(박부회장이 삼성전자 전무로 애니콜 개발을 총괄하던 이사장을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한 일은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LG 출신의 박정대 팬택 계열 총괄사장, 송문섭 팬택&큐리텔 사장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장님”이라고 하지만, 사석에서는 무조건 “형”이나 “선배님”으로 호칭한다.
저돌적 투자, 뛰어난 용인술
용인술도 뛰어난 편. 현재 팬택 계열을 책임지는 3명의 CEO 중 송문섭 팬택&큐리텔 사장을 제외한 두 사람은 외부 영입 인사다. 이들 외에도 요소요소에 많은 외부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일단 입사가 결정되자 박부회장은 이들에게 꽤 많은 액수의 ‘금일봉’을 전달했다. “사람은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중요하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에게 술도 사고 넥타이 등 작은 선물이라도 하라”는 배려였다. 노순석 팬택&큐리텔 상무는 박부회장으로부터 금일봉을 받던 당시를 떠올리며 “개인적으로 스카우트한 사람도 아닌, 헤드헌팅 업체를 거쳐 합류한 나에게도 그런 대우를 해주는 걸 보고 정말 믿고 일해볼 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팬택&큐리텔이 빠른 시간 안에 정상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박부회장의 개인 역량이 작용한 바 크다고 한다. 박부회장은 여비서 한 명만 데리고 팬택&큐리텔에 들어갔다. 팬택 인력을 우르르 데리고 들어가 ‘점령군’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직원 750명에 매출 3900억원의 벤처기업이 직원 1200명에 매출 9500억원의 대기업 계열사를 인수한 마당 아닌가.
물론 구조조정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대상은 20여 명선에 그쳤다. 오히려 실무진 중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 사람들을 대거 임원으로 발탁했다. 이어 다양한 사기 진작책을 펼쳤다. 직원들에게 “1등 회사를 만들고 싶은 만큼 먼저 1등 대접을 해주겠다. 앞으로 2년이다. 그동안 부족함 없이 투자하고, 아무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믿고 기다리겠다”는 뜻을 전한 것. 3개월간 1200명의 직원을 팀 단위로 모두 만나 독려했다.
아울러 철저한 성과급제를 도입해 경쟁의식에 불을 붙였다. 팬택은 매년 우수사원을 선발해 일정한 보상을 한다. 최우수 사원은 승진과 함께 격려금으로 본인 2000만원, 부인 1000만원을 받는다. 우수 사원 상금은 본인 1000만원, 부인 500만원이다. 이 외에 신제품을 개발했거나 특허를 출원한 경우, 이로 인해 매출이 크게 신장된 경우에도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팬택&큐리텔에도 같은 제도를 도입했다.
직원들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는 본격적인 연구개발인력 확보에 들어갔다. 업계 최고 수준을 보장하며 유능한 인력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애초 350여 명이던 연구진 수는 현재 700여 명으로 늘었다. 팬택과 팬택&큐리텔 양사를 합치면 1300여 명에 이른다. 삼성(2500명), LG(1800명)에는 못미치지만 중견 휴대전화 업체들이 100명도 안 되는 개발인력으로 근근이 꾸려나가는 것에 비하면 상당한 수준이다. 삼성전자와 비슷한 연봉에 기술자 우대 정책을 편다는 소문이 나면서 먼저 입사를 타진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수시장을 공략하라”
이성규 팬택 사장의 역할도 컸다. 이 사장은 팬택뿐 아니라 팬택&큐리텔의 연구개발도 진두지휘했다. 그 결과 타사에 비해 4개월 이상 뒤처졌던 신제품 개발 시기가 상위업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향후 시장의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폰에서는 삼성전자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평도 듣는다. 팬택&큐리텔의 카메라폰 출시는 삼성전자에 약간 뒤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당시 10만 화소급이던 삼성전자 카메라폰과 비교해 품질이 훨씬 뛰어난 33만 화소급 제품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가격은 삼성 제품보다 약간 쌌다. 단말기 업그레이드에 민감한 청소년층에 크게 어필했음은 물론이다.
경영상의 또 다른 특징은 통합 구매다. 현재 팬택과 팬택&큐리텔은 완전히 다른 회사다. 연구개발 등도 독자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부품 구매만은 통합구매부서에서 전담한다. 자연히 가격 협상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2002년에는 구매 부분에서만 원가를 전년 대비 15% 이상 줄일 수 있었다.
팬택의 ‘투명경영’이 이식된 것도 팬택&큐리텔을 변화시킨 요인이다. 1998년 모토로라가 16% 지분을 사들인 후 팬택은 글로벌기업으로 변신했다. 7명의 이사회 멤버 중 2명이 모토로라 출신. 자연히 글로벌 스탠더드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대큐리텔 시절에는 전표 양식 하나를 바꾸는 데도 며칠이 걸렸다 한다. 그러나 팬택과 같은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을 도입한 후로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반나절이면 웬만한 결재는 끝이 난다.
수출이 호조를 보이고 영업이익이 증가하면서 경영진은 내수시장 재진입을 결정했다. 반대도 많았지만 전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판이라는 한국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다면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기 힘들다는 쪽에 더 큰 힘이 실렸다. 팬택&큐리텔은 완벽한 애프터 서비스와 거의 쇼맨십에 가까운 마케팅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팬택&큐리텔이 내수 시장에 진출한 시기는 지난해 10월. 그 3개월 전인 7월, 163개의 AS센터를 구축했다. AS센터가 이상 없이 가동됨을 확인한 후 비로소 내수 제품을 출시했다.
다소 극성스러울 정도의 마케팅은 후발업체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국내 휴대전화 시장의 판도를 결정하는 것은 마케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렇다. SK텔레콤에서 단말기를 선정할 때 검사하는 항목은 수천 가지에 이른다. 수신 감도 검사만 해도 환경에 따라 수십 가지다. 이를 모두 다 통과해야만 비로소 SK텔레콤에 납품이 가능하다.
“그런 만큼 납품이 결정된 제품의 품질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 업체별로 기술 차가 있지만 일반 소비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결국 소비자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마케팅인 셈이다.”
SK텔레콤에서 단말기 선정 실무를 총괄하는 한창문 차장의 설명이다.
‘비화폰’ 해프닝의 전말
현재 팬택 계열을 아우르는 홍보실 직원은 모두 16명이다. 매출 2조원대의 중견기업 치고는 상당한 규모다. 수장은 데이콤 상무 겸 LG인터넷 사장을 지낸 노순석 상무. 홍보에 거는 회사의 기대와 사내에서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팬택&큐리텔이 내수시장에 진출하면서 처음 선택한 마케팅 ‘도구’는 가수 윤도현이었다. 지난해 ‘오 필승 코리아’로 월드컵 이후 최고 인기 모델이 된 그를 내세워 젊은 층을 파고든 것이다. 광고를 통해 조금씩 이름을 알려나가던 팬택&큐리텔이 확실히 ‘뜨게’ 된 데에는 휴대전화 도청 논란이 큰 몫을 했다.
지난해 말에서 올 초까지 우리 사회는 휴대전화 도·감청 문제로 상당히 시끄러웠다. 한나라당이 “국가정보원 내에 도·감청을 총괄하는 조직이 있다. 휴대전화도 도청한다”는 주장을 편 것. 팬택&큐리텔은 이같은 분위기를 십분 활용했다. 올 초 설 연휴가 지난 바로 다음날, “이제 휴대전화 도·감청 걱정마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도·감청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비화(秘話)폰’ 출시를 공표한 것. 발표 날짜도 절묘했다. 설 연휴 직후라 이렇다 할 기사거리를 찾지 못한 언론은 이 뉴스를 크게 다뤘다.
하지만 ‘비화폰’ 해프닝은 실상 ‘마케팅을 위한 마케팅’에 불과했다. 휴대전화간 통화는 ‘휴대전화→기지국→교환기→전용선→교환기→기지국→휴대전화’의 경로를 거친다. 이 중 휴대전화에서 기지국을 거쳐 교환기까지 가는 과정은 무선, 교환기부터 다시 기지국까지의 구간은 유선이다. 무선 구간에서는 통상적으로 도·감청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실제 휴대전화 통화 과정의 70%를 차지하는 유선 구간. 이 구간에서 도·감청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무선을 거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맞서 있었다. 물론 팬택&큐리텔은 도·감청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쪽에 섰다.
팬택&큐리텔이 내놓은 ‘비화폰’은 휴대전화 내부에 음성 암호화 알고리즘을 내장한 것. 음성이 암호화된 디지털 신호로 전달되기 때문에 유선 구간에서도 도·감청 우려가 없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기능이 구현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우선 전화를 거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둘 다 팬택&큐리텔의 비화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모든 통화에 다 가능한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이 비밀통화에 동의하고 비화 기능이 작동하도록 코드를 맞춰야 한다.
“LG, 게 섰거라”
이런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면 비화폰이 별 매력 없는 상품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때문에 팬택&큐리텔에서도 애초 이 제품을 개발할 때는 연인끼리 비밀대화를 즐기는 개념으로 마케팅할 계획이었다. 심지어 비화폰 홍보 보도자료를 돌리려 하자 기술개발팀에서는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고 비화에 대한 근거도 확실치 않다”며 유보를 요청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비화폰은 어떻게 됐을까. 비화폰 보도가 나오자 타 휴대전화 제조업체에서 비난이 빗발쳤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얄팍한 상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정부로부터도 싫은 소리가 이어졌다. 내부에서도 당장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는 얘기가 계속된 데다, 당시 팬택&큐리텔은 시장이 불투명한 비화폰 대신 히트예감이 확실한 카메라폰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기였다. 결국 비화폰은 시장에 나오지도 못하고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러고 보면 요즘 팬택&큐리텔이 사사건건 LG전자를 걸고 넘어지며 “우리가 2위”라 목소리를 높이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이런 과정을 통해 팬택&큐리텔은 ‘미운 오리새끼’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했다. 그렇다면 미래 또한 동화처럼 ‘해피엔딩’일까.
“팬택 설립 후 13년간 한눈 팔지 않았다. 벤처 붐이 한참일 때도 투자니 뭐니 하는 쪽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기업은 본연의 업무를 통해 돈을 벌어야지, 영업외 수익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 그 순간 망가지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인허가와 관련한 사업에도 관심이 없다. 완전경쟁시장에서 정직하게 싸워 얻은 성과라야만 의미가 있다. 실제로 삼성, LG와 싸워 대등하게 가고 있다는 자신감이 직원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런 자신감만 있으면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박병엽 부회장의 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