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때 나는 노동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탄광촌을 돌아다니다 태백 황지탄광에서 만난 광부의 식사 초대를 받았다. 부인이 곗돈 들고 도망가 혼자 살던 이라 손수 밥상을 차려 왔는데, 라면과 김치 찌꺼기가 밥상 여기저기 붙어 썩고 있었다. 구역질을 참으며 먹는 둥 마는 둥 앉았다 돌아오는 길에 회의감이 밀려왔다. 글로 읽어 얻은 관념과 실체의 괴리가 부끄러웠다.”
이듬해 다시 찾았을 때 그 광부는 갱도 매몰사고로 사망한 뒤였다. 번호표 ‘황지330’이 붙은 그의 작업복을 화폭에 옮겨 명성을 얻은 황 작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작 세상 구경꾼 주제에 무슨 예술을….’
그려낸 작품의 무게를 책임질 방도를 고민한 끝에 탄광촌으로 터전을 옮겼다. 고향 전남 보성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종일 그림만 그리던 어린 시절처럼, 외곬으로 묵묵히 붓만 움직이며 세월을 쌓았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말한 양졸(養拙, 질박함을 기르다)의 가치를 몸으로 좇은 자취가 그의 작품과 작업 공간 곳곳에 화석처럼 남았다.
“그림에 ‘땀의 증거’를 담고 싶었다. 어떤 일을 하든 삶의 모든 조화는 땀에서 비롯한다. 작게는 미술계, 크게는 현대사회가 그 믿음에 어긋나 있다고 판단해 떠나왔다. 어떤 작가는 그림에 자신의 생각을 담는다. 나는 내 생각을 담은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 내 그림은 내 땀이 자득(自得, 스스로 얻기)한 흔적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