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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침묵 깬 ‘전두환 최후인터뷰’가 어떻기에…

‘신동아’ 2016년 6월호 특종…발포명령 전면부인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30년 침묵 깬 ‘전두환 최후인터뷰’가 어떻기에…

  • ●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겠어”
    ● “돌 맞아서 5·18 가족 오해가 풀린다면…”
    ● 북한군 침투 정보보고…“오…그래?”
    ● 1995년 12월 ‘골목성명’ 이후 유일한 인터뷰
    ● 사망 소식 전해지자 기사 ‘재소환’


11월 23일 향년 90세로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0월 26일 서거한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단숨에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는 이듬해 육군본부 보안사령관 신분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면서 정권 탈취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어 같은 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구성원만이 투표권을 가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퇴임 후에는 군사반란 및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처벌받았으나, 구속 2년여 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이후 자신의 과오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던 그는 ‘신동아’ 2016년 6월호 인터뷰(‘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를 통해 퇴임 후 처음으로 언론 취재에 응했다. 1995년 12월 2일 검찰 소환에 반발하며 발표한 ‘골목 성명’ 이후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한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그의 최후인터뷰가 됐다. 이 인터뷰는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인터뷰는 그해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 전 대통령 자택에서 3시간여 진행됐다. 인터뷰에는 부인 이순자 여사, 정호용 전 의원, 고명승 전 3군사령관, 윤덕대종사, 김충립 목사(전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가 배석했다. 이중 운덕대종사는 천태종 총무원장을 지낸 인물로 전 전 대통령의 사면복권을 도운 인연이 있다.

2016년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신동아’와 인터뷰 전두환 전 대통령. [조영철 기자]

2016년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신동아’와 인터뷰 전두환 전 대통령. [조영철 기자]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겠어”

전 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사실 광주사태(광주민주화운동)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또 “어느 나라든 보안사령관이라는 권한과 임무가 있는데.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꺾고, 청와대를 꺾고, 이렇게는 절대 못한다”며 책임 소재를 최규하 전 대통령 쪽으로 돌렸다. 이순자 여사 역시 “(5·18 당시) 보안사령관은 대통령께 정보 조언은 할 수 있지만 작전에는 참여할 수 없는데도, 광주사태의 직접 책임을 이 양반한테 씌우려고 재판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또 전 전 대통령은 “그때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겠어”라며 “보안사령관은 정보 수사 책임자다. 어떤 정치인, 어떤 대통령이 되려다 못 된 사람이 그런 모략을 그쪽(5·18 책임 전가)으로 풀었는지 몰라도, 내가 광주사태를 일으킨 걸로, 주동한 걸로 나쁜 소리를 하는데 내가 이후 대통령이 됐으니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전 당시 보안사령관이 계엄군에게 사격명령을 내렸다는 ‘발포명령설’에 대해 전면 부인한 것이다. 이어 ‘광주에 가서 사과할 의향이 있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광주에 가서 내가 뭘 하라고요?”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 인터뷰를 돕던 이 여사는 “각하께서 광주에 가서 돌을 맞아서 모든 게, 5·18 가족들과 오해가 말끔히 풀리고 정말 분이 다 풀린다면 뭘 못하겠어요”라고 거들었다.

그는 미납 추징금에 대한 질문에 이 여사가 억울하다는 취지로 답하자 “왜 쓸 데 없는 소리를 해”라며 답변을 가로막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 일가가 내야 할 추징금 총액은 2205억 원이다. 검찰은 2013년 서울중앙지검에 특별환수팀을 구성해 전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을 추징하고 있다. 이와 관련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는 지난 6월 23일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 총 2205억 원 중 1235억 원(56%)을 추징한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군 침투 정보보고…“오…그래?”

전 전 대통령은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나’라는 질문에는 “전혀”라고 답한 뒤 배석자 사이에서 관련 대화가 이어지자 “오…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라며 전혀 모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배석한 고명승 전 사령관 역시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정작 1년여 뒤 펴낸 회고록에서는 “광주사태는 북한 특수부대에 의한 게릴라 작전이었다”면서 약 15쪽에 걸쳐 5·18이 북한에 의한 무장 봉기였고, 이에 불가피하게 시민들을 진압했다는 취지로 썼다.

이러다보니 신동아‘ 인터뷰는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한 지만원 씨 판결과 ‘전두환 회고록’의 출판·판매 금지 판결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2018년 10월 광주지법 민사13부는 5·18 단체 4곳과 당사자 5명이 지 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9500만 원 배상) 판결을 했다. 또 2017년에는 ‘전두환 회고록’ 출판·판매 금지 처분을 내렸다. 당시 법원은 ‘신동아 인터뷰를 한 시점에서 1년이 채 경과하기도 전에 회고록을 통해 5·18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한 것은 일구이언(一口二言)의 모순적 주장’이라고 판단했다.

앞서 2017년 4월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등으로 표현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이 재판에서도 그의 인터뷰 발언은 명예훼손의 주요 근거가 됐다.

결국 전 전 대통령의 ‘신동아’ 인터뷰는 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가 돼버렸다. 이에 향후 사가(史家)들이 ‘전두환 시대의 그늘’을 서술하는 데 있어 중요한 1차 사료로 쓰일 전망이다. 공교롭게도 전 전 대통령은 1988년 11월 23일 아침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고 백담사로 향한 그날 사망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全文)이다. 그의 육성이 실린 동영상도 공개한다.

전두환 최후인터뷰
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
“광주 가서 돌 맞더라도 분 풀린다면…”

● “5·18 희생자 명복 빌고 총체적 유감 표명”
● 광주시민, 계엄군 위한 영가천도 기도…“업이야 업”
● “내가 5·18 발포? 바보 같은 소리!”
● “정승화가 김재규 앞세우고 정권 잡으려 해 잡아넣었다”
● “퇴임 후 ‘포대기’ 씌워 차고 때리고…가혹했다”
● “노태우 대통령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 같아 백담사行”
● 회고록은 이 여사가 준비…“5·18은 건드리지도 않아”


열계단을 오르니 초등학교 교실만한 앞마당에 파릇파릇 잘 깎인 잔디가 눈에 들어온다. 눈부신 봄날, 분홍색 보라색 철쭉꽃의 강렬함이 하얀 목련의 순수함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앉은뱅이’ 옥향나무는 동그랗게 파마를 했다.

“여기 오셨으니 꽃구경 한번 하시죠. 많이 심었죠? 제가 대령 때 월남 연대장하고 오니까 할마이(이순자 여사를 지칭)가 이 집을 지었는데, 아 그때 이 동네는 전부 논이어서 흙을 메우고 지었습니다. 저 소나무도 직접 심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2016년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신동아’ 기자와 만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가 2016년 4월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신동아’ 기자와 만나고 있다. [조영철 기자]

“꽃구경 하시죠”

4월 27일 오후 전두환(85) 전 대통령과 이순자(77) 여사는 서울 연희동 자택 뜰 앞 계단에서 ‘신동아’ 취재진을 맞았다.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간 접견실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전 전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사’를 담은 대형 액자도 이채롭다. 직사각 형태의 소파 8개가 2개씩 붙어 있고, 소파 사이에 놓인 작은 탁자들 위엔 커피 2잔과 스낵이 놓여 있다.

“공덕이 높은 스님만 커피를 마실 수 있어요. 큰스님, 커피 드세요. 어, 영감 오슈?”

육사 11기 동기인 정호용 전 의원(특전사령관, 국방부·내무부 장관 역임)이 접견실로 들어와 일행과 인사를 했다. 전 전 대통령은 그를 ‘영감’ ‘정 장관’이라 칭했다. ‘큰스님’은 동석한 대한불교천태종 운덕대종사를 가리킨다.

“우리 ‘정 장관’ 어른은 육사 다닐 때부터 배짱은 장군감, 행동은 매 맞을 감이었어요(웃음). 우리가 기합 받을 때 ‘선착순’을 하면 이 친구는 맨날 꼰빠리(꼴찌)야. 무슨 놈의 배짱인지 뛰질 않아. 남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는데 실실 걸어와. 부대장들도 정 장관이 겁나서 혼을 못 내고. 머리가 아주 좋고 공부도 잘했으니까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와 정호용 전 의원, 고명승 전 3군사령관, 운덕대종사, 김충립 목사(한반도프로세스포럼 대표)가 소파에 둘러앉았다. 김 목사가 과거 보안사령부 장교 시절 전 전 대통령이 자신을 발탁해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정보보좌관을 지낸 인연을 들려주자 전 전 대통령은 기억이 잘 안 나는 듯 “아 그랬어요?” 하며 짐짓 놀란 표정이었다.

김 목사가 “신동아 측과 대종사께서 이 자리를 만들었다.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역사 기록이 될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하자 이순자 여사가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가 청와대를 나온 지 30년이 돼가는데, 그동안 한 번도 기자들을 만난 적이 없어요. 한 신문사와 인터뷰 하면 다른 신문사는 (기사를) 안 좋게 내던데…그게 좀 걱정스럽고 조심스럽긴 해요. 하긴 뭐,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더 내려갈 곳도 없지만요.”

“사람은커녕 개미도 안 와”

고명승 전 3군사령관 “각하께서 이런 (인터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진짜 수십 년 만이지요.”

사진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자 이 여사가 거듭 당부했다.

“좋은 사진 골라 내실 거죠? 어떤 때는 의도적인가 싶을 정도로 얄궂게 찍을 때도 있더라고요.”

전두환 전 대통령 “어떻게든 찍으면 어때. 이제 나이가 다돼서, 황천길에 가서 대통령이나 한 번 더 할까, 늙어서 뭐(웃음).”

기자 “운덕대종사께서는 충북 단양 구인사에서 먼 걸음을 하셨습니다.”

전두환 “저는, 요새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개미도 잘 안 와. 사람이 힘이 좀 있으면 별별 사람이 다 찾아오는데. (요즘은) 찾아와봐야 그 사람 신발 닳지, 커피 한잔 못 얻어먹지…누가 옵니까. 그런데 오늘 이렇게 큰스님이 오신 건 적선하는 차원에서 오신 거예요(웃음).”

운덕대종사 “사월 초파일 행사도 다가오니 상월원각 대조사 스님(1911~ 1974)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천태종을 중창하고 1945년 구인사를 창건한 분입니다. 제가 1966년 ROTC 1기로 복무한 뒤 제대하고 경북 안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구인사에 들러 대조사 스님을 찾아뵌 게 인연이었어요. 저는 불교 신자도 아니었지만, 당시 그분은 ‘생불(生佛)님’으로 불릴 만큼 명성이 자자해 한번 찾아뵌 겁니다. 이후 여태껏 ‘발이 붙어서’ 구인사에서 못 나오고 있습니다(웃음). 그분이 열반하시기 전에 ‘앞으로는 한국이 세계를 주도한다’고 하셔서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전두환 “아니, 왜요?”

운덕 “제가 동국대 경제학과를 다녔는데, 경제학과 교수들은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한국은 강대국, 일류국가가 될 수 없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대조사께선 반대로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가난한 한국이 어떻게 세계를 주도합니까’ 물었더니 ‘사람이 물질을 지배하지,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는 게 아니야’ 하며 웃으셨어요. 세계 운(運)이 한국에 도래하면 모든 인재는 한국으로 몰려오고, 그러면 세계 자원은 모두 한국의 자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땅덩어리는 지구 전체로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상월원각 대조사의 예언

기자 “지구 전체를 봐야 한다?”

운덕 “세계지도를 보면 한반도는 소의 머리, 일본은 소의 목줄기, 중국은 가슴팍, 유럽은 앞다리, 소련은 등줄기, 미국은 뒷다리라는 겁니다. 또 호주는 소똥이고, 아프리카는 소 여물통인데 ‘소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는 과정이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이다’고 하셨어요.

잠자던 소가 깨려면 심장의 동요가 있어야 하는데, 일찍이 중국에서 공맹(孔孟)과 한자가 나오며 ‘앞가슴’이 뛰어 세계를 지배했고, 심장이 뛰어서 소가 일어나려고 하니 그 힘이 앞다리로 가서 유럽이 주도했고, 앞다리의 힘이 뒷다리로 가면서 미국이 주도했다는 겁니다. 소는 일어서고 나서 머리를 들잖아요. 머리를 들면 몸뚱이는 따라오고요.

그런데 한국이 머리라는 겁니다. 1970년대 초, 그 가난한 시절에 대조사께선 ‘지금부터 세계 운은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라고 아주 공개 선언을 했어요.”

전두환 “누가 그랬다고요?”

운덕 “구인사를 창건하신 대조사 스님이.”

전두환 “야…그 어른, 야심이 컸구먼. 제발 그리 되면 좋겠네(웃음).”

전 전 대통령은 한 가지 주제로 대화가 오래 이어지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듯 자꾸 되묻곤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질문하면 “내가 그때 뭐하고 있었더라…” 하는 식이었다. 운덕대종사는 이후 우리나라가 아시아경기대회, 올림픽, 월드컵을 개최하고 경제부국으로 부상했다며 남북통일도 한국의 주도로 이뤄진다고 한 대조사의 예언을 전했다.

운덕 “통일이든 세계대전이든 큰 일이 이뤄지려면 천지(天地) 운이 도와야 하는데, 자기 정권 유지를 위해 악정을 펴는 사람을 (하늘이) 돕지는 않는다고 해요. 북한 주도로는 절대 안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전두환 “제발 그리 되면 좋겠어요.”

이순자 여사 “당시엔 북한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도 나았고 한국의 위상도 낮았는데, 그때 벌써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운덕 “그랬죠. 대조사께서는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되는데, 40년 뒤에 된다고 하셨어요.”

전두환 “그럼 지금이 그 시기네요.”

운덕 “지금부터 통일 운이 무르익어가는 거겠죠.”

전두환 “아이고, 어림도 없습니다. 그건 희망사항이고….”

이순자 “또 모르죠. 우리가 예전 구라파(유럽)에 갔을 때, 누구도 동독이 망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런 낌새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렇게 (통일이) 되더라고요.”

“미국 얘기는 좋게 하세요”

‘신동아’ 인터뷰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생각을 밝히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운덕대종사(왼쪽). [조영철 기자]

‘신동아’ 인터뷰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생각을 밝히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운덕대종사(왼쪽). [조영철 기자]

운덕대종사가 마음에 담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부처님오신날(5월 14일)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마음을 열어 화해하자는 메시지였다.

운덕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화합하고 단결해야 멋있게 통일을 맞을 텐데, 지금 우리 사회나 정치권이 이렇게 갈등을 빚고 해서야….”

전두환 “스님이 이렇게 걱정해주시니 잘될 거예요.”

운덕 “그래도 나라를 이끌어온 분들이 좀 생각을 갖고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동서 문제, 남북 문제도 풀리지 않겠습니까. 그냥 방치해선 안 될 일이라는 생각에 김 목사와 여러 차례 얘기를 했어요. 신동아 기자분도 두 차례 만났고요.”

김충립 목사 “대종사 말씀은, 지금 우리나라에 남북통일 기운도 있으니 통일에 대비해 국민 대통합이 돼야 한다, 동서화합과 국민 대통합에 전 전 대통령이 참여하는 게 좋겠다는 겁니다.”

운덕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대조사 말씀을 전하면서 ‘임기 중에 통일이 될지 모르니 관심을 가지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대조사께선 ‘통일이 되려면 주변국의 참여도 중요한데, 한국이 발전하려면 중국이 빨리 일어나야 한다’고 하셨어요. 한국을 지원하는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있는 것이니 (한반도에서) 나가지 말라고 해도 언젠가는 나가게 돼 있다고….”

이순자
“북한 핵실험 이후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 통과 때 중국이 참여하는 걸 보고 박 대통령이 중국에 공을 들인 결과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전두환 “맞아. 근데 큰스님, 내가 건의 하나 드릴게요. 지금 한반도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지만, 미국·소련·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암암리에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거든요. 우리나라에도 CIA(미 중앙정보국) 자금 지원 받는 사람이 많고, 소련 KGB(구 소련 시절 비밀첩보 조직) 첩자들도 무지하게 들어와 있고, 중국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신도들에게 바로 영향을 미치는 종교지도자인 큰스님이 (미국에 대해) ‘엉뚱한 소리’를 하면 아주 큰 적(敵)이 돼요. 그럼 없애버리려고 하지. 그렇기 때문에 외국, 특히 미국과 관련한 말씀은 좋게 하세요(웃음). 지금은 미국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잖아요.”

이순자 “우리가 미국 핵우산의 보호를 받고 있어야 되는 형편이니까요.”

전두환 “우산이 아니라 사단이 와서 지켜주고 있잖아요. 이북 놈들이 사단 겁나서 함부로 못 오는 거고.”

“희생자 이름 다 적어와 기도”

고명승 스님께서는 사명감을 갖고 대한민국의 여러 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십니다. 이 문제(동서화합, 남북통일)도 국민적 차원에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운덕 “동서화합 문제는 5·18로 인해 전라도 분들과 얽혀 있는데, 그걸 제대로 풀려면, 전 대통령께서 확 풀면 쉽게 풀리는 건데….”

전두환 “그걸 내가 풀 수 있을까요?”

전 전 대통령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목을 빼면서 진짜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기자들이 건넨 명함을 담배 말듯 돌돌 말아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운덕 “그럼요.”

전두환· 이순자 “아, 그래요?”

김충립 “이 문제를 풀려고 정호용, 고명승, 고(故) 이학봉 장군 등 5공 인사들을 만나왔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대종사께서 뜻을 같이하셨고, 5·18 단체 관계자들과도 어제 광주에서 회합을 하고 올라왔습니다.”

김 목사는 5공 인사와 5·18 단체 관계자들이 인사하고 회의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전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해 총체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유감을 표하면 5·18 단체 인사들이 5공 인사들과 화해할 수 있다는 뜻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이순자 “저희 각하께서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희생된 시민들, 그리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명령에 의해 치안을 유지하러 갔다가 희생된 계엄군 모두 희생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불교 신자도 아니었는데, ‘정치 바람’으로 외국에 망명하느니 이 땅에서 죽겠다며 (1988년 11월) 백담사로 가서 2년 넘게 고생했잖아요.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백담사 가서 그냥 고생한 것으로 끝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거기서 2년 넘게 기도를 했습니다.”

기자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이순자 “광주 망월동에 사람을 보내 5·18 희생자 이름을 다 적어왔고, 육군본부에 가서 희생된 장병 이름도 모두 찾아와 영가천도 기도를 드렸어요.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도 아직 원한이 덜 풀린 거 같아요. 그때 기도드리던 사진이 여기 제 회고록 (원고)에 나와 있는데…여기 있네요. 기도 발원문하고.”

“계속 보복이었지”

이 여사는 A4 용지 2장을 기자에게 건넸다. ‘5·18 희생자들을 위한 백일기도를 드린다’는 당시 신문 기사와 함께 ‘1996년 8월 옥(獄) 밖에서 함께한 5·18 희생자를 위한 영가천도기도’라는 제목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순자 “부처님은 모든 게 인연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모든 게 업이 덜 끝나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 여사는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회동해서 ‘5공은 (백담사 생활) 그만하고 서울 와서 살라’고 해서 서울에 왔는데, 느닷없이, 새로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옛날 사건을 다시 재판해서 (전 전 대통령을) 교도소에 보내 2년 넘게 교도소 생활을 했거든요. 이건 따지고 보면 머리에다….”

‘1노3김 회동’은 1989년 12월 15일 4당 총재가 모여 보름 뒤 전 전 대통령을 광주청문회 증언대에 세워 특위 활동을 매듭짓기로 한 자리를 의미하는 듯하다.

전두환 “계속 보복이었지, 보복”.

이순자 “머리에 포대기 씌워놓고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면서 돌 던지고 발로 차고 때리고 하는 것보다 더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사실 사람을 죽였다고 쳐도 ‘가혹한’ 형벌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우리는 한 번도 변명 안했어요.”

기자 “전 전 대통령의 생각도 같습니까.”

이순자 “저는 각하의 대변인이 아니고, 각하하고 백담사도 가고 그러다 보니 ‘각하의 분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거와 각하가 생각하는 거는 같아요.”

기자 “왜 변명을 안 했습니까.”

이순자 “우리는 처음으로 권력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온 사람들이고, 우리가 받는 이것(고통)까지도 민주화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받았습니다. 청와대 나오실 때 (전 전 대통령은) 58살이었어요. 은퇴하기 너무 이른 나이죠. 대통령이 임기 마치면 퇴임하고, 국민이 (대통령을) 바꾸고 싶으면 바꾸고 해야 민주화 아닌가요? 그걸 각하가 했잖아요. 58살에 (청와대에서) 나와 30년간 인생의 황금기에 당했어도, 우리는 그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기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우리가 백담사에서 2년간 불경을 읽으면서, 각하가 교도소에 계실 때도 ‘얽힌 업을 각자 있는 곳에서 풀자’고 했어요. 백담사 2.5평, 독방 3.5평에서.”

전두환 “백담사는 형무소 같아서…조그만 방이 있거든요. 그만해요, 이건 업보야 업보.”

이순자 “각하 교도소 계시는 동안 저는 중앙승가대가 있는 개운사(서울 안암동 소재)에서 500여 명을 위한 100일 천도기도를 드리고 49재를 세 번 했습니다. 앞서 김천에 있는 수도암에서도, 중국의 지장보살 모셔놓은 절에서도 희생자 명단을 가지고서 기도드렸어요.

그래서 저는 영가(靈駕, 불교에서 말하는 영혼)들은 천도(薦度, 죽은 사람의 넋이 정토나 천상에 나도록 기원함)됐다는 마음의 확신이 오더라고요. 정말 마음을 다해 기도했어요.”

운덕대종사는 “잘하셨다”고 말한 뒤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거꾸로 쓰는 일기장

기자 “건네주신 자료에 기도 사진과 기사가 있는데, 회고록의 일부인 것 같네요. 최근 전 전 대통령 회고록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보도됐는데요. 회고록에 5·18 발포명령과 관련된 내용도 담겼습니까.”

이순자 “한두 번도 아니고…엉터리(보도)가 많아. (회고록을)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전두환 “내보낼 것도 없고, (5·18과 관련해서) 건드리지도 않았어. 그건 (누군가가) 띄우는 거야.”

이순자 “제 회고록은 거의 다 됐어요. (전 전 대통령이 우리 나이로) 86세인데, 이제는 두 노인네 건강 관리하면서 자손들한테 애 안 먹이고 살다 갈 일 생각할 나이인데, 이것(회고록)으로 우리가 정치나 명예회복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명예에 대한 집착도 없고요. 한때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저희 이름을 건 기록은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준비한 겁니다.”

기자 “두 분의 회고록이 각각 출간됩니까. 어떤 내용이 담겼나요.

전두환 “이 양반(이순자 여사)이 먼저 하고 있고, 난 준비도 안 하고 있어.”

이순자 “대통령 부인으로서, 평범한 여자로서, 남편이 대통령 되는 바람에 겪은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쓰고 있어요. (우리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도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아 국민과 청와대의 거리가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어요.”

기자 “회고록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신 건가요.”

이순자 “처음에는 스프링 노트에 쓰다가 양이 많아지니까 컴퓨터로 해야겠더라고요. 제 회고록은 대필자 몇 번 만나 자료 보고 쓴 게 아니에요. ‘말 많고 탈 많은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고, 형식도 모르지만 ‘거꾸로 쓰는 일기책’처럼 썼어요. 그러니 명예회복 차원도 아니고요.”

전두환 “(이 여사를 가리키며) 컴퓨터 잘해. 난 하나도 못하고. 이 양반, 직접 쓰고 있어.”

기자 “5·18이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사임과 관련한 내용도 있습니까.”

이순자 “광주사태 책임이 있고 없고를 떠나, 각하는 광주사태 나고 3개월 후에 대통령이 되셨다는 그 업보 때문에 ‘광주사태 학살자’라는 누명을 쓰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요즘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부르죠).”

전두환 “사실 광주사태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이순자 “5·18 재판에서 ‘광주에서 발포 명령자는 없었다’고 분명하게 결과가 나와 그나마 학살자라는 누명은 벗었어요. (5·18 당시) 보안사령관은 대통령께 정보 조언은 할 수 있지만 작전에는 참여할 수 없는데도, 광주사태의 직접 책임을 이 양반한테 씌우려고 재판을 만들었지만 그건 얹을 수가 없었어요. 이 양반은 2년 동안 고생했지만 그 덕분에 누명은 벗었습니다.”(상자기사 참조)

“대통령 생각 전혀 없었다”

전두환 “나는 원래 정치인이 아니고 군인이란 말이야. 군인으로서 그때 나라가 어렵고, 내가 대통령이 안 될 수가 없어서 한 건데, 내가 대통령이 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오. 대통령 하고 싶으면 뭐 하러 군대 들어갔겠어요. (대통령 되려는) 계획이 전혀 요만큼도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약속한 대로 하고 딱 한 번(대통령 단임) 하고 나왔잖아. 사람들은 내가 계획을 다 세워서 한 줄 아는데, 내가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었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나오지도 않았겠지.”

이순자 “저도 그래요. 1980년 1월 15일에 한국외국어대 영어학과 편입시험을 치렀어요. 학교에 한번 알아보세요. 이 양반이 대통령 하려 했다면 제가 왜 편입시험 치르려고 시험장에 앉아 있겠습니까. 그때 이 양반은 그런 생각이 없었거든요.”

한국외대에 이런 사실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하자 “입학한 학생들의 학적 자료는 남아 있는데, 응시생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기자 “12·12 때는 집권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겁니까.”

이순자 “그랬으니 그 이듬해 외대 편입시험을 치렀죠.”

전두환 “12·12가 뭐더라?”

이순자 “10·26사건 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새로 수사한 거요.”

전두환 “아, 그거. 정승화는 왜 잡아놨느냐. 우리가 볼 때, 젊은 장군들이 볼 때 (정승화가) 김재규를 앞세워 정권을 잡으려 했으니까. 김재규 머리로는 안돼. 큰일 나. 그래서 잡아넣었어.”

이순자 “그래서, 10·26 일어난 뒤에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의 태도가 너무 거침없어서 ‘미국의 사주를 받아서 (10·26 사건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많았어요.”

전 전 대통령 부부의 이러한 ‘현대사 인식’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허화평 전 의원 등 5공 인사들의 그것과 궤를 같이한다. 5공 청문회와 12·12 및 5·18 사건 재판 과정과 인터뷰에서 5공 인사들은 “12·12는 10·26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우발적 충돌이지 권력장악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10·26은 김재규, 정승화, 김계원(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합의로 일어났기 때문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조사해야 했지만, 그가 계엄사령관에 임명되면서 부득이 충협회 이 빚어졌다는 것.

5공, YS, DJ, 미국의 인식

또한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 계엄사령관을 잡아가면서 일약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고 해도 5·18 당시 계엄사령부―2군사령부―광주 지역계엄군으로 이어지는 명령체계를 뛰어넘어 ‘조종’할 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12·12부터 5·18까지 일련의 과정 속에 우리 의사와 관계없이 등 떠밀려 간 거지 의도한 건 아니다”(허화평) “중대한 시기에 ‘결단력이 약한’ 최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진 것은 국가적 불행이다”(노태우)라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나서 자신들을 반란군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한다(한국대통령 통치구술사료집 2 전두환 대통령 17쪽, 연세대 국가관리기록원 편, 선인출판사, 2013/ 노태우 회고록 上 248쪽, 조선뉴스프레스, 2011).

그러나 신군부에 맞선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미국의 인식은 5공 인사들과는 정반대다.

“1980년 4월 30일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의견이, 다음 날에는 계엄사에서 열린 전군 지휘관회의 결의가 신문 1면 톱에 등장하는 등 신군부가 전면에 나서려는 듯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김영삼 회고록 2, 192쪽, 백산서당, 2000)

“신군부는 처음부터 나와 광주를 겨냥했던 게 분명하다. 나는 10·26 이후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성을 계속 경계해왔는데 이런 점이 신군부를 자극했을 것이다. (…) 신군부는 학원 소요를 조장하고 북한 위협을 과장해 이를 정치 전면에 나서는 구실로 삼으려 했다. 정권 장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김대중 자서전 1, 408쪽, 삼인출판사, 2010)

“미국은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한국군 장교들이 군부를 장악한 12·12사건에 대해 어떠한 사전 통고도 받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군 장군들이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권에 속하는 부대를 적절한 통보 없이 사용한 것에 대해 분노했으며, 권력을 강탈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것에 대하여 깊이 우려했다. (…) 12·12사건 이후 한국 군부 지도자들이 정권 장악을 포기하거나, 민주화 일정을 세울 의도가 없다는 증거가 누적됨에 따라 미국은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했다.”(주한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 게시된 미국 정부 성명서 일부)

기자 “5·18 당시 앞서 두 차례 진압은 차치하고, 전남도청과 YMCA 건물 장악을 위한 광주 재진입작전을 할 때는 ‘사람을 살해해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 있다’고 재판부가 판결했습니다.”(상자기사 참조)

“보안사령관이 그렇게는 못해요”

전두환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그때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겠어. 광주사태 때 내가 보안사령관이었을걸? 보안사령관은 정보 수사 책임자요. 어떤 정치인, 어떤 대통령이 되려다 못 된 사람이 그런 모략을 그쪽(5·18 책임 전가)으로 풀었는지 몰라도, 내가 광주사태를 일으킨 걸로, 주동한 걸로 나쁜 소리를 하는데 내가 이후 대통령이 됐으니 그러는 거지.”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하고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순자 “당시 최고책임자는 최규하 대통령이고, 1980년 8월 16일 광주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셨잖아요.”

최 대통령은 “학생들의 소요와 광주사태에 대해 국정 최고지도자로서 정치도의상 책임을 통감해 왔다”며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김충립 “물론 최 대통령이 사회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실력자로서 ‘파워’가 셌으니까 그렇게 보는 거죠.”

이순자 “최 대통령이 대통령 되려다가 국내가 너무 시끄러우니까 이 양반한테 자리를 내주고 갔는지도 모르죠. 그건 스토리가 좀 맞겠지만, 자꾸 ‘실력자’라는 건 좀 그렇습니다. 사형선고 받고 교도소에서 20년 살다가도 진범이 나타나 무죄로 나오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 사람은 교도소에서도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해요. 우리도 우리가 아는 진실이 아니니까 아니라고 하는 거고요. 진실이 영원히 안 풀린다고 해도…. 우리가 정치적 사면이 급하다고 해서 거짓말한다면 그건 역사 앞에 죄를 또 짓는 거예요.”

전두환 “다 지나간 얘기인데…너무 무식해서 그런 거예요. 군대는 아무리 천하에 없는 놈이라 해도 사단장이 군단장을 능가해서 절대 못해요. 어느 나라든 보안사령관이라는 권한과 임무가 있는데.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꺾고, 청와대를 꺾고, 이렇게는 절대 못합니다.”

고명승 “제가 정리의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전두환 “어, 그래요.”

‘순발력’ VS ‘결단’

고명승 “각하께서 윤허해주셨기에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동안 5·18사건과 관련해 많은 인터뷰 요청을 받았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자분들과 스님을 모신 자리에서 한번 정리해보겠습니다.”

고 전 사령관은 10여 분에 걸쳐 5·18 관련 36년사(史)를 정리하면서, 5·18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순발력의 결과’로 분석했다.

“법원은 최초에 5·18과 관련해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내란방조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란음모죄로 판결했습니다. YS는 1993년 5월 ‘12·12는 쿠데타였지만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YS 선거캠프 상임고문이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22명이 군 형법상 반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1995년 10월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자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노태우 비자금 20억 원을 받았다고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러자 ‘DJ에게 노태우 비자금 20억 원이 갔다면 YS에게는 얼마나 갔겠느냐’는 국민적 의심이 제기됐고 YS는 혈압이 오른 겁니다.

이때 YS 특유의 순발력이 발휘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5공 인사들에 대한 사면복권이 단행됐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연금 문제 등은 해결된 게 없습니다.”

역사는 재구성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식된다고 했던가. 역사라는 이름으로 취사선택된 것엔 이미 개인적인 견해가 들어가 있다. 자기 처지에서 기록을 남긴다. YS는 회고록 하 (141~142쪽, 조선일보사)에서 고명승 전 사령관이 ‘순발력’이라 칭한 것을 ‘일생일대의 결단’이라고 표현했다.

“노태우는 수사가 진행되자 재임 중 약 5000억 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해 퇴임 때 1700억 원가량이 남았다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분노를 억누르며, 이 사건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고 정경유착 악폐를 영원히 추방할 기회로 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 김대중 씨가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는 ‘실토’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자당을 탈당해 나의 선거운동을 괴롭혔던 노태우 씨가 야당 김대중 후보에게 거액을 줬다는 것도 놀랍지만, DJ 스스로 ‘광주 학살 살인마’라고 비난해온 노태우 씨에게 돈을 받은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호재를 만났다고 적극 공세를 펼칠 DJ는 노태우로부터 부정 축재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노태우 사과문 발표 전) 먼저 발표한 것이다. (…) 노태우 씨의 부정축재 사건으로 촉발된 국민들의 엄청난 공분은 부정부패에 대한 처벌에서, 그 원인이 됐던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학살자 단죄 요구로 이어졌다. 나로서는 일생일대의 무거운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또한 고 전 사령관은 5·18에 대한 정치적 판단과는 별개로 광주지역 계엄사령관-2군사령관-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명령체계에서 보안사령관, 부대를 배속시킨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5·18 때 최규하 대통령이 육군참모총장과 관계 장관들을 대동하고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가서 직접 작전회의를 하고 지휘를 했습니다.”

이순자 “그래도 아직 5·18 단체들이 오해를 하니까요. 각하께서 광주에 가서 돌을 맞아서 모든 게, 5·18 가족들과 오해가 말끔히 풀리고 정말 분이 다 풀린다면 뭘 못하겠어요. 지금까지도 이렇게 우리가 고생을 했는데. 그런데 5·18 당시에 각하가 셌으니깐 모두가 ‘5·18 책임자’라고 하는데, 이걸 ‘오케이’하는 건 별개 문제인 거 같아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건데.”

전두환 “아니야. 목에 칼이 들어오고 그런 거 없어. 군대에서는 법이 딱 있으니까.”

기자 “비록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해도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역사적 책임감으로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에 헌화하고 무릎 꿇은 것처럼 사과할 의향은 없습니까.”

전두환 “광주에 가서 내가 뭘하라고요?”

기자 “빌리 브란트 총리도 자신이 하진 않았지만 나치의 잘못을 대신 사죄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심을 보여준 그의 사죄는 독일 통일과 유럽 평화를 향한 동방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으로 평가받았습니다(당시 언론은 ‘총리 한 명이 무릎 꿇었지만 독일 전체가 일어났다’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순자 “2차대전 당시 독일은 구라파 사람들에게 너무 잘못했고, 그래서 독일말만 해도 구라파 사람들이 돌아설 정도로 감정이 아주 나빴어요. 그 분이 독일인의 후예로서 그렇게 한 건 참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광주사태는 양비론이 있다고 봐요. 민주화든 세계 평화를 위해서든 폭력사태로 번졌을 때는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진압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각하는 계엄군의 행동 자체에 대한 상징성이 있는 만큼 신중할 필요는 있어요. 물론 각하가 망월동 묘지에 참배를 못 할 이유는 없지만요.”

기자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이 문제를 제기한 지만원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장은 최근 세 번째로 고소당했다).”

전두환 “전혀.”

이순자 “각하가 청와대를 경호하는(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때 북한 특수군(1968년 김신조 일행의 1·21 침투사건)이 내려온 걸 물리쳤고, 1사단장 하실 때 북한이 땅굴을 파고 남침한 걸 잡아냈죠. 그래서 광주사태 때 간첩을 집어넣어서 광주사태를 악화시켰거나, 또 그걸 기화로 이북에서 사람을 들여보냈거나 그럴 개연성은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증거가 없어요. 그래서 각하는 아예 말씀을 안 하세요.

지금 그 말(북한군 침투설)을 하는 사람은 각하가 아니고 지만원이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우리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독불장군이라 우리가 통제하기도 불가능해요. 그걸 우리와 연결시키면 안 돼요.”

고명승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습니다.”

전두환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어디로 왔는데?”

정호용 “5·18 때 광주로. 그래서 그 북한군들하고 광주 사람들하고 같이 봉기해서 잡았다는 거지.”

전두환 “오…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전 전 대통령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민, 계엄군 모두 희생자”

이순자 “5·18도 36년이 지났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면서 국가적으로 굉장히 불안한 시기이니 서로가 더 마음 아프게 하지 말고, 당시엔 (서로가)그 길이 국가를 위한 길이란 신념을 가지고 한 일이니 서로에 대한 미움을 풀고, 국가 발전을 위해 마음을 합했으면 좋겠어요. 말 한마디에 엇박자가 날 수 있으니….”

이 여사는 서랍에서 또 다른 2장의 A4 용지를 꺼냈다.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광주사태가 난 후 3개월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는 이유로 학살자라는 누명을 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5·18 재판 과정을 통해 그 누명은 벗었습니다. 저는 당시 정보사령관 겸 안기부장직(‘중앙정보부장 서리’의 오기)에 있으면서 대통령과 계엄사령관에게 지휘조언은 해줄 수 있었지만 작전에는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임이 누구에게 있건, 나는 한때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광주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모두 왕생극(락)하기를 기원해왔습니다. 나는 늘 광주사태 때 희생된 시민뿐 아니라 사태를 진압하러 광주에 출동했다 희생된 계엄군 모두가 희생자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부디 광주사태 36주년을 맞은 이때에, 북한에서 원자탄을 만들어 모두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때에, 대종사님의 (동서화합) 노력이 열매를 맺어 서로서로 미워하는 마음을 거두고 국가 발전을 위해 힘을 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추징금? 떳떳하다 말 못해”

전두환 “내가 말한 게 아니고 우리 영부인이 하는 말입니다(웃음).”

이순자 “각하가 생각하시는 걸 제가 옆에서 알기 때문이죠. 목사님이나 대종사님께서 하시는 일(동서화합)을 도울 수 있도록 표현을 완곡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우리가 없다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고요.”

기자 “지휘 체계 때문에 5·18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굳이 기도할 이유가 있었나요.”

이순자 “회고록에 자세하게 적어놨는데. 옛날에 각하 호를 지어주신 스님이 각하 재임 중에 하신 말씀이, 건국 이래 계속 나라가 어지럽고 시끄러운 건 유교(사화)를 통해서, 또 이념 때문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을 위한 위령제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사실 그때는 ‘불이 난 집에 불 끄러 들어간 소방수 역할’을 맡았으니 불 다 끄고 세간 정리해놓고 나오셨잖아요. 운명이 끌고 들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나오셨고. 권력에 욕심이 없는 분이에요. 나와서 그 스님 생각이 났어요.”

기자 “불편할 수 있겠지만 추징금에 대한 질문도 드려야겠네요. 이 집도 경매에 넘어갔다가 다시 산 건가요.”

이순자 “이 집은 제가 샀고, 앞집(별채)은 각하 이름으로 돼 있어요. 저 앞집이 각하 이름으로 경매가 돼 남동생이 딴 사람한테 팔릴까 싶어, 땅 판 돈으로 16억 원에 낙찰받았어요. 그런데 남동생도 사업을 하다가 은행 압류가 들어와 막내며느리가 이 집을 경매 받아 샀어요. 아무리 추징금이라고 해도 한 집을 두 번이나 경매에 부쳤어요.”

기자 “진돗개와 가재도구도 경매에 넘어갔죠?”

이순자 “예. 추징금에 대해서는 저희가 국민들께 떳떳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억울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노 전 대통령 회고록을 보면 김영삼 후보 선거자금으로 3000억 원을 지원했다고 해요. 박계동 의원이 계좌번호 대면서 폭로하니까 가지고 있던 2600억 원을 선고한 거예요. 그러니 완납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노 대통령 액수에 ‘발란스’를 맞추라고 ‘위’에서 지시가 와서 기업들 불러 (전 전 대통령에게) 얼마씩 냈다 하라고 했데요. 우린 계좌번호도 없습니다. 우리는 선고할 당시에 300몇 억밖에 없었는데, 추징금 완납 못 했다고 전임 대통령 예우 못 한다고 하는 건….”

전두환 “왜 쓸 데 없는 소리를 해.”

전 전 대통령 일가가 내야 할 추징금 총액은 2205억 원이다. 1995년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7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이 중 5400억 원을 민정당 창당·운영자금으로 사용하고 퇴임 때 1600억 원을 갖고 나와 관리했다고 발표했다. 1997년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 검찰은 예금과 무기명 채권 등 312억9000만 원을 추징했지만 이후 3년마다 돌아오는 추징시효 만료 연장에 급급했다. 추징금 집행시효인 2013년 10월을 앞두고 여론이 악화하자 국회는 그해 6월 시효를 2020년까지 연장하는 ‘전두환 추징법(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고, 검찰 수사도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미술품과 부동산에 대한 압류 절차가 시작돼 600여억 원이 추가 환수됐다. 장남 전재국 씨의 집 창고에서 나온 미술품들과 자녀들이 내놓은 부동산 일부가 처분됐지만, 경기도 오산 땅(13만 평) 등 남은 부동산은 경기 불황 탓에 값이 떨어지면서 매각 작업이 지지부진하다. 지난해 말 현재 검찰이 전 전 대통령 일가로부터 환수한 금액은 1134억여 원(전체 추징액의 51.4%)이다.

기자 “장남이 검찰 수사에 대비해 미술품 유통에 관여한 A씨를 종용해 해외 출국시켰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순자 “그림은 다 들고 갔어요. 비자금 조사를 한다면서 우리 친정어머니 초상화도 갖다 팔고, 우리 둘째 아들이 외국에 있으면서 그린 그림도 다 가져다 경매하고, 개인이 그린 건 왜 가져갔는지….”

기자 “서울 강남의 땅, 미국 캘리포니아 주 뉴포트 비치의 저택, 서울 한남동 빌딩, 시공사 건물 부지…이렇게 계속 추징되다 보니 ‘돈이 있으면서 안 낸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이순자 “근데요. 기사들이 전부 엉터리예요.”

기자 “무슨 말씀이신지….”

이순자 “우리 막내 사돈댁이 미국 나파밸리에서 와이너리를 운영하는데, 그걸 우리 것이라고 하니까 미칠 노릇이죠.”

“죽일 정도 아니면 물고 뜯지 마”

전 전 대통령의 삼남 재만 씨의 장인인 이희상 회장이 운영하는 사료·제분기업 동아원은 2005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나파밸리에 ‘다나 에스테이트’를 설립해 와인 제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동아원 전무인 재만 씨가 실소유자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자 2013년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동아원그룹은 지난 2월 사조그룹에 인수됐다.

전두환 “우리 막내 사돈은 그 와이너리, 그런 것만 하는 분이야.”

이순자 “그래서(사돈) 집을 ‘작살’을 내놨잖아요. 시공사 본사 건물도 대통령 되기 전부터 갖고 있던 땅이에요. 우리가 백담사 가기 전에 재산을 모두 공개하고 다 내놨거든요.”

이 여사는 1988년 11월 백담사로 떠나기 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들려줬다.

“백담사로 떠나기 얼마 전 저녁에 ○○○씨가 찾아와 ‘노태우 대통령께서 각하를 빨리 연희동으로 모시려고 하는데, 그러려면 재산을 모두 헌납하겠다고 하세요. 그래야 국민들에게 임팩트가 있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국민들은 대통령직을 이용해서 얼마나 치부했느냐고 하는데, 월남 갔다 와서 장만한 이 집도 내놓으라뇨. 그것도 제 명의인데. 우리 신세를 그렇게 많이 진 사람이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냈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 ‘우리를 외국으로 쫓는 사람이 딴 사람이 아니고 노 대통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아무도 못 찾아오는 산골로 가자’ 해서 백담사로 갔죠. 무서웠어요. 외국에 망명가라고 그러더니….”

이 여사는 그때가 생각나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에 눈물이 맻혔다.

전두환 “정 장관도 처음 듣지?”

정호용 “네. 처음 들어요.”

이순자 “6·29 선언을 자기(노 전 대통령)가 했다고 하고,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는 건 아닌가 해서, 우리 부부는 빨리 백담사로 간 겁니다. 정치라는 게 참으로 무서운 거예요. 그 전에는 ‘노 대통령이 지켜줄 텐데 왜 자꾸 이렇게 몰려가나’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백담사로 간 겁니다. 분노했다기보다 무서웠어요.”

기자 “6·29 선언에 대해선 노 전 대통령의 주장과 엇갈립니다. 장남 재국 씨가 6·29 선언과 관련해 ‘메신저’ 노릇을 했습니까.”

이순자 “그건 회고록 나오면 얘기하죠.”

전두환 “가만있어봐. 회고록이고 뭐고 간에. (이 여사를 쳐다보며) 그만해.”

전 전 대통령은 5·18 발포 문제와 추징금에 관해 이어지는 질문이 언짢은 듯했다.

전 재산 29만1000원

“근데 자네들도 언론인이니까, 앞으로 국민들에게 교훈적인 의미에서 (기사를) 남기는 게 좋을 거야. 어느 나라든지 국가원수를 지낸 사람에 대해서는 국민적 예우가 있어야 돼. 집안은 아버지 어머니 잘 모시고, 나라는 대통령 지낸 사람이면 조금 잘못이 있더라도 죽일 정도가 아니면 좋은 교훈 정도만 남기되, 자꾸 물고 뜯는 게 아냐.”

기자·김충립 “하지만 언론엔 언론의 역할이 있습니다. 남은 재산이 29만1000원이라는데….”

이순자 “그 얘기하면 속이 터집니다. 1997년 추징금 선고하면서 금융자산이 전부 압류됐는데, 백담사 갈 때 일부 현금은 있었어요. (압류 통장 중) 휴면계좌에서 이자가 29만 원이 된 거예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고액 체납자는 재판정에 나가서 ‘나는 이것밖에 없다’며 선서하게 만들었어요. 당시 각하는 집도 있었고, 진돗개, 피아노, 응접세트 등 재산을 다 적었어요. 그때 우리 변호사가 잘못한 게 500만 원 미만은 신고를 안 해도 되는데, 그새 이자 29만 원을 적은 거죠. 우리는 선서만 하는 요식행위라고 해서 무방비로 나갔는데, 판사가 각하한테 ‘29만 원밖에 없는 사람이 골프를 어떻게 치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각하가 당황했죠. 언론에도 보도됐고. 우리가 조롱거리가 돼버렸어요.”

전두환 “아주 나쁜 놈들이야.”

검찰은 2003년 2월 추징금 미납액(당시 1872억 원)을 안 내고 있는 전 전 대통령의 재산을 공개해달라며 법원에 ‘재산명시신청’을 냈다. 전 전 대통령의 재산 목록엔 ‘현금은 없고 예금과 채권 29만1000원’으로 명시됐다. 이것이 압류 통장 중 휴면계좌에서 발생한 이자 총액이라는 게 이 여사의 설명이다. 전 전 대통령은 “전 재산이 29만 원”이라고 얘기한 적이 없는데도 그렇게 알려져 ‘고유명사’가 됐다는 것.

이순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우리를 ‘종크’ 먹인 거지. 이렇게 추징금을 못 낼 줄 알았다면 교도소에서 1000일(노역) 하면 되는데, 나오라고 해놓고는 전직 대통령을 ‘×걸레’로 만드냔 말이에요.”

정호용 “우린 사면복권이 다 됐는데도 연금 안 나오지, 국립묘지 못 가지, 훈장도 다 반납하라고 해서 반납했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 군인들이 어디 돈 모아둔 게 있습니까. 연금 받고 살아야지. 지급하지 않은 연금의 50%는 우리가 낸 거요. 50%가 정부에서 도와주는 건데, 우리가 낸 돈도 안 내주니….”

이순자 “그건 보복이죠. 훈장을 회수하더라도, 5·18 사태를 진압하면서 받은 훈장은 회수해가는 건 말이 된다고 쳐요. 그런데 6·25 참전, 월남전 참전한 공로로 받은 훈장도 다 가져가고. 월남전 고엽제 피해자들에게도 매달 얼마씩 주는데 5·18과 관계됐다고 다 뺏으면….”

정호용 “나는 (고엽제 피해자) 신청도 안 했어요. 그것(고엽제) 때문에 당뇨도 생기고 했는데. 그래도 육군대장 출신 아닙니까. 그러니 돈 좀 얻어먹겠다고 할 수도 없어서….”

이순자 “재산이 압류돼 있는데 재산세는 왜 나오는지….”

기자 “그래서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에 포함됐습니까.”

이순자 “네. 처음엔 현금 압류하고, 3년 있다가 집을 압류하는데 양도소득세가 3억인가 나와요. 그러고는 지방세가 10%인가 또 나와요. 근데 그때 이미 각하 금융자산은 다 압류돼서 3년이 지났기 때문에, 양도소득세도 지방세도 낼 돈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울시는 신문에 고액 세액 체납자로 이름을 올리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추징할 때 거기서 세금 빼고 추징해달라고 했어요. 고액 체납자 전두환…하여튼 망신스러운 건 말도 못해요.”

“대통령은 사람 많이 만나야”

전 전 대통령은 2003년부터 고액 체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에는 수사과정에서 삼남 명의의 서울 한남동 건물을 전 전 대통령 명의신탁 재산으로 분류해 이를 공매처분했는데, 이때 발생한 양도소득세와 가산금 등 4억1000만 원을 미납해 고액 상습 체납자 명단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한편 현행 국립묘지법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내란죄를 지은 사람은 안장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다. 사면·복권을 받은 경우에 대한 별도 규정은 없어 국가보훈처 안장대상심의위원회가 판단한다. 만약 사후 국가장(葬)이 치러지면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주어진다. 이때는 국무회의 심의로 결정해야 한다.

기자 “두 분이 20대 총선에서 투표하는 모습이 보도됐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많이 당선되길 바란다’고 하셨는데, 결과는 어떻게 보십니까.”

전두환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얘기하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는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정치에 대해서는 평을 들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당이 잘됐든 야당이 잘됐든 좋은 사람 많이 되면 되지.”

기자 “내년 차기 대선과 관련해서는….”

전두환 “대통령 통치권에 대한 얘기니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건방지게 그럴 수 없어요. 선배 대통령이라 해도 뭐라 할 수 없지. 상당히 어려워. 한 가지 조언해주고 싶은 것은, 대통령은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많이 만나야 돼요. 자기가 평소 공부한 걸로는 안 됩니다. 시대가 자꾸 변하고. 특히 우리나라는 남북 대치가 심각하고. 참모가 알아서 모시겠지만. 가급적이면 많은 분야의 사람들을 불러서 만나주시면 좋겠어요.”

기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잘 아시죠?”

전두환 “잘 몰라.”

기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10·26 이후 신군부가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해 설립한 기관) 재무분과위원으로 있다가 11,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내며 전 전 대통령 시절 경제정책을 입안했는데요.”

전두환 “김종인 의원을 알긴 아는데 그렇게 가깝진 않아. 국보위 들어온 것도 내가 하는 게 아니고 밑에서 하니까. 나는 사인만 해줬지. 잘 몰라(웃음). 귀한 손님 오셨는데, 오늘 스님이 재미없었겠어요. 오늘 이상하게 얘기하다 보니 우리 집에 ‘조사 오는 사람들’처럼 됐는데. 어떻게 됐든 간에 옛날 얘기인데. 나는 옛날 얘기이지만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나이도 많고.”

“좋네, 좋아”

운덕 “이 자리에 앉아 얘기 들으면서 나도 참 오해가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광주 문제는 전 대통령께서 관련돼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각자의 주장과 생각이 달라 여러 얘기를 들을 수 있었네요. 마음 아픈 모든 사람의 오해도 풀어졌으면 좋겠네요. 정부나 광주 시민들이 이런 얘기를 얼마만큼 믿고 듣느냐는 문제가 남았습니다.”

이순자 “각하가 망월동 묘지에 가면, 그래서 오해를 풀고 진실이 밝혀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충립 “그럼 지금까지 대화를 종합해보면, 5·18 당시 중요직에 있었고 그 직후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에게는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총체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유감 표명이네요.”

전두환 “네. 좋네, 좋아.”

全·李 인터뷰 이렇게 이뤄졌다

신동아는 지난 연말부터 전두환 전 대통령 인터뷰를 추진했다. 올해 1월호부터 김충립 목사(전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의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를 연재하면서 김 목사의 방대한 옛 기록을 검증해왔는데, 1960~80년대 격동의 시기를 다루는 이 수기의 중심에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있었다. 신동아는 5공 인사들을 포함, 과거 권력 주변 인사들과 접촉하며 사실관계를 확인했으나 전 전 대통령과는 직접 연락이 닿지 않았다. 5공 인사를 통해 만남을 요청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 신동아와 김 목사의 거듭된 설득, 천태종 운덕대종사의 회동 제안 끝에 연희동은 4월 27일 드디어 자택 문을 열었다. 운덕대종사는 7차례 천태종 총무원장을 지내며 오늘의 종단을 키운 인물로 국민화합 차원에서 전 전 대통령의 사면복권을 도운 인연이 있다. 김 목사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군복을 벗었지만, 5공 인사와 5·18 관련 단체의 화해를 주선해왔다.

인터뷰는 4월 27일 오후 약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후 이순자 여사, 고명승 전 사령관 등과 전화통화를 했다. 대면 및 전화 인터뷰에서 이순자 여사는 기억을 되살려 비교적 또박또박 답변했지만, 전 전 대통령은 가끔씩 기억을 잘 떠올리지 못했고 몇 차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이 여사는 “오해와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며 미리 준비한 자료를 기자에게 건네기도 했다. 인터뷰 자리에 많은 인원이 참석한 탓에 인터뷰가 일관된 흐름으로 진행되지 않아 일부 대화 내용은 주제별로 순서를 바꿔 재구성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인터뷰는 논란의 여지가 큰 정치적 갈등과 대립, 5·18민주화운동 당시 발포명령, 전 전 대통령의 사과, 5공 인사들의 인식, 추징금 문제 등 민감한 사안들을 담았다. 인터뷰의 일부 내용은 정확한 사실 규명이 필요한 일방적 주장일 수도 있지만, 전 전 대통령의 나이와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할 때 우선 그의 육성을 그대로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도 의미가 클 것이다. ‘어둠의 시대’ 5공을 조명하고 의미를 짚어보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과제다.

5·18 발포명령 논란
대법원_ “재진입작전 강행은 발포명령”
전두환_ “모르고 하는 바보 같은 소리”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의 ‘5·18 내란 사건’ 판결문은 ‘발포명령’과 관련, 크게 3가지 시간대로 나눠 유무죄를 판단했다.

먼저 최초 발포와 관련해서는 “5월 21일 이후 육군본부로부터 2군사령부를 거쳐 광주 계엄군에게 이첩, 하달된 자위권 발동 지시를 내용으로 하는 전통을 발령하거나, 5월 22일 자위권 발동 지시라는 제목으로 된 계엄훈련 제11호를 하달함에 있어 관여하였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 (…) 시위진압의 효과를 조속히 올리기 위해 ‘무장시위대가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발포하여도 좋다’고 하는 이른바 ‘발포명령’이 위 피고인들의 지시에 의해 육군본부로부터 광주의 계엄군에게 하달됐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3공수여단 11대대 병력이 5월 21~23일 광주교도소로 접근하면서, 총격을 가해 오는 무장시위대와 교전 과정에 시민을 사망하게 한 것도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불법한 공격을 감행하는 무장시위대로부터 교도소와 같은 주요 국가보안시설을 방어하기 위한 정당행위’라고 봤다.

여기까지 보면 이순자 여사의 말처럼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음이 밝혀져 학살자 누명을 벗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월 27일 실시된 광주 재진입작전에 대해선 내란목적살인 책임을 인정한다.

“광주 재진입작전(상무충정작전)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작전지침으로 완성하고, 이를 전두환 황영시 등이 참여한 가운데 실시를 결정했다. (…) 재진입작전 실시 강행한 데는 살상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하는 의사가 있었음이 분명하고, 시위대에 대한 사격을 전제하지 아니하고는 수행할 수 없는 성질이어서 작전 범위 내 사람을 살해해도 좋다는 발포명령이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 광주 시위를 조속히 제압해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않으면 내란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다시 말해 집권에 성공할 수 없는 중요한 상황인 만큼 작전에 저항 내지 장애가 되는 범위의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은 내란목적을 위한 필요 수단이다.”

이 같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모르고 하는 바보 같은 소리”, 이 여사는 “판결문이 ‘맞다’ 해도 우리가 아는 진실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 !

10·26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

12·12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신군부세력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면서 일으킨 군사반란.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27일 광주·전남 시민들이 군사독재에 반대하고 계엄령 철폐, 정치 지도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

6·29 선언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국민의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특별선언. 6·29 선언 발표 과정에 대해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주장이 엇갈린다.

5공, 5공 특위 5공화국(5공)은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이 주도해 1981년 3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지속된 다섯 번째 공화국. 5공 특위는 제13대 국회 내에 설치된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 약칭.



신동아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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