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논리로 산업 발전 막아선 안 돼
4차산업혁명만큼 중요한 2차산업 현대화
산업단지 혁신이 제조업 현대화 디딤돌
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는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인수위원을 맡았다. [지호영 기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인수위원으로 일한 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의 말이다. 독특한 이름이 눈에 익다. 고 대표는 2007년 한국우주인 배출 사업의 최종 후보였다.
그는 러시아에서 우주인이 되기 위한 최종 훈련 중에 탈락했다. 러시아의 대외비 문서를 들여다봤다는 이유였다. 탈락 후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학구열이 문제였다. 우주비행에 대해 더 자세히 공부하기 위해 비행 교재를 빌려 읽었는데 이 교재가 대외비였다. 탈락 뒤 러시아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는 “러시아 교관은 사소한 질문에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한국 훈련생 교육 목표는 우주비행 시 러시아 우주인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라며 “나는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 러시아에 왔지, 우주 관광객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우주인의 꿈에서 멀어지게 되자 그는 2010년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전공은 정책학이었다. 그는 “유학 당시 꿈은 정치인, 혹은 정책 전문가가 되는 것이었다”며 “우주인 배출 사업이라는 국가정책에 참여해 본 경험을 살려 과학 정책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수위 참여? 전혀 예상 못 해”
학업에 집중하나 싶었지만 돌연 창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는 창업 교육기관 싱귤러래티대(Singularity University) 견학이 그 계기가 됐다. 그는 “정책이나 창업이나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꾸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며 창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밝혔다. 그는 2011년 휴학 후 귀국해 한국판 싱귤러래티대를 만들겠다며 창업 지원 비영리 사단법인 ‘타이드 인스티튜트’(이하 타이드)를 설립했다. 2013년에는 제조업 솔루션 스타트업 에이팀벤처스를 창업했다.창업의 길을 걷나 싶었지만 3월 18일 인수위에 합류해 5월 6일까지 산업 및 창업 진흥 관련 정책 입안에 참여했다. 우주인에서 벤처기업 대표가 된 그는 인수위에서 어떤 정책 수립에 참여했을까.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당시 인수위원장)의 권유로 인수위에 합류했다고 들었다.
“그렇다.”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안 의원은 2011년 처음 만났다. 당시 안 의원은 KAIST 창업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창업교육 비영리법인 타이드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있었다. 한국 IT 창업 성공 1세대인 안 의원이 멘토로 타이드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안 의원에게 메일을 보내 면담을 요청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4월 30일 동그라미재단과 타이드인스티튜드의 합작 프로젝트 TEU-MED 2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동그라미재단]
안 의원이 흔쾌히 만나줬나.
“그렇다. 안 의원이 타이드에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좋은 조언을 많이 들었다. 이후에도 가끔 만나며 교류해 왔다.”
안 의원은 타이드에 지속적 관심을 보였다. 지난해 9월부터 안 의원이 설립한 동그라미재단은 타이드와 함께 TEU-MED 프로그램을 신설해 학생들을 모집했다. TEU-MED는 의료, 의과학 창업 교육 프로그램이다. 올해 5월 2일에는 안 의원이 직접 TEU-MED 2기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인수위 구성 전 최근에 만난 것은 언제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올해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 직전인 것 같다. 안 의원이 하는 유튜브 채널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어떤 내용의 프로그램이었나.
“우주개발사업과 한국의 스타트업·벤처기업 창업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인수위 영입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안 의원이 내가 하던 창업 교육 및 창업 활동을 인상적으로 본 것 같다.”
“규제 개선은 민간이 주도해야”
인수위에서는 어떤 역할을 했나.“경제2분과에서 창업, 기업 관련 업무를 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벤처, 스타트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갔다. 중소기업벤처부 관련 정책 개발 및 감수를 맡았다.”
한국의 창업 환경은 좋은 편인가.
“좋은 편이다.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창업 토양이 많이 좋아졌다.”
일선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새 정부가 규제 등을 통해 창업 환경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스타트업 중에는 기존 산업의 미비점을 해결하려는 업체가 간혹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산업을 영위하던 업체들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 충돌을 막기 위해 규제가 생긴다. 윤석열 정부가 창업 관련 규제를 고칠 때 각 산업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는다면 규제가 창업을 막는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 대표는 “다행히 윤석열 정부는 규제 혁파 의지가 크다. 부처별로 규제 혁파 TF를 만들 정도”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걱정의 배경에는 규제로 인해 사업 규모가 대폭 축소된 승차 공유 서비스 타다가 있는 것 같다. ‘제2의 타다’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에 스타트업들이 정부 눈치를 본다.
2019년 12월 2일 이재웅 전 타다 대표(왼쪽)와 박재욱 VNCN 대표가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타다의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 관련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타다 측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동아DB]
승차공유 플랫폼이던 타다는 2019년 12월부터 택시업계와 갈등을 빚었다. 타다는 쏘카의 차를 운전기사와 함께 빌려주는 방식이었다. 차와 운전기사를 함께 빌리는 형식이었으니 택시보다 운임은 비쌌지만 소비자의 반응은 좋았다. 재탑승자 비율이 90%를 넘었고 소비자들이 평가하는 운전기사 만족도(이하 평점)도 5점 만점에 4.7점이었다.
이에 택시업계는 타다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34조를 어겼다며 이를 고발했다. 이 조항은 차를 빌려주고 운전자를 알선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물론 예외가 있는데 11인승 이상의 승합차는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타다는 이 부분에 착안해 11인승 카니발을 사용해 왔다.
2020년 2월 법원이 타다의 손을 들어줬지만, 같은 해 3월 4일 ‘타다 금지법’이라고 불리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이 국회를 통과하며 타다의 영업이 어려워졌다. 개정안에 따르면 관광 목적이 아니라면 운전자와 차를 동시에 빌려줄 수 없다.
고 대표는 이 사례에 대해 “정부가 할 일은 조율이었다. 각 업계의 이야기를 듣고 그 간극을 조절해 규제를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했고, 법을 만들어 사업을 막아버렸다”며 “현 정부는 규제 개선은 민간 주도로 하겠다는 원칙이 있다. 제2의 타다 사태는 향후 5년간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스라엘·미국에 비하면…”
규제 문제를 제외하고 한국 스타트업을 둘러싼 문제점을 꼽는다면.“문제점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한계점은 있다.”
어떤 한계인가.
“국내 유니콘 기업은 대부분 내수 기반의 전자 상거래 혹은 서비스 업체다. 이제는 글로벌 시장에 도전하는 기업도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서비스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창업이 늘어야 한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기술의 사업화다. 대학의 연구실, 정부나 기업 출연 연구기관의 기술개발(R&D) 결과물의 사업화가 중요하다. 개발된 신기술을 가지고 직접 창업하거나 기술을 이전할 수 있는 토양이 확보돼야 한다.”
지금도 신기술을 활용한 창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리콘밸리나 이스라엘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다. 이스라엘 히브리대에는 ‘이숨(Yissum)’이라는 기술이전 센터가 있다.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대학의 기술이전 실적을 설명하며 세계지도를 펼쳐 보여줬다. 국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외국으로 기술을 이전하거나 창업하는 사례가 드물다.”
중기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창업 기업은 141만7973곳. 이 중 기술을 기반으로 창업한 기업은 23만9620곳(16.8%)이다.
기술을 기반으로 한 창업이 적은 이유는 뭔가.
“이스라엘 이숨의 비결은 영업이다. 학교가 개발한 연구 결과를 세계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영업하고 있었다. 각 회사에 홍보 메일을 돌리고 직접 만나가며 만든 결과물이다. 한국에는 아직 이숨 같은 조직이 없다. 좋은 기술을 개발·발표하면 기업이나 투자자가 자연히 찾아올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한국판 이숨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한국의 국각 R&D 예산 규모는 작지 않다. 올해만 해도 29조8000억 원이다. 이 예산이 전부 국민 세금이다. 이 정도 기금을 투자한다면 기술개발에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를 사업으로 만들어 기술이 실용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수위에서도 이 같은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높은 수준 제조업은 그 자체로 무기”
에이팀벤처스의 제조업 연결 플랫폼 ‘카파(CAPA)’. [카파 홈페이지]
“제조업에 관심이 많다. 지금 내가 운영하는 서비스 ‘카파(CAPA)’도 제조업을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카파는 제품화를 원하는 기업과 제조업자를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이다. 기존에는 물건을 대량 혹은 소량으로 제조하려면 도면을 들고 제조업자를 직접 찾아가야 했다. 카파를 이용하면 온라인에 도면을 올리고 그 상태에서 다양한 제조업자들의 견적을 받아볼 수 있다.
제조업은 산업부에서도 다룬다.
“산업부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분야는 제조업 중에서도 반도체, 자동차 같은 산업이다. 대기업이 진출해 결과를 내고 있는 대규모 제조업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고 대표는 “중소 규모의 부품·소재 제조업이 산업계 최전선에 있다. 이들이 대기업에 좋은 제품을 납품해 왔기에 지금의 자동차, 조선, 반도체 산업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통적 산업보다는 4차산업혁명에 맞춰 신산업에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지는 제품에도 그와 관련된 부품이 필요하다. 일본이나 독일 등 제조업 강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상당수 부품, 재료에서 두 나라를 대체할 만한 곳이 아직 없다. 2019년 7월 일본의 불화수소 한국 수출 제재만 봐도 알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제조업은 그 자체로 무기가 된다.”
제조업 산업단지 부활시키려면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0일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동그라미재단]
“인력난이 심각하다. 대부분의 중소 규모 제조업은 산업단지에 있다. 산단을 찾아가 보면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다.”
취업난에도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보면 안다. 예전에 만든 산단은 요즘 말로 ‘번듯한 일자리’가 있는 곳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힘든 산단도 많다. 규모가 큰 산단 중엔 그 내부에서 이동할 수단이 갖춰져 있지 않은 곳도 있다.”
그래서 유능한 인재가 외면한다?
“산단 입주기업 경쟁력 강화 사업이 지금까지 줄곧 진행돼 왔다. 일정 부분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산단 내 기업은 대부분 최저임금 이상의 급여를 보장한다. 그럼에도 장기 근속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일자리 수는 1958만9000개, 그중 21%(414만3000개)가 제조업에서 나온다. 제조업이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2, 3위인 도소매업(208만 개), 보건사회복지업(218만4000개)에 비해 일자리가 200만 개 이상 많다. 다만, 제조업 일자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에만 전년 대비 6.6%포인트 줄었다.
그렇다면 산단을 어떤 방식으로 고쳐야 하나.
“일하기 편한 곳, 일하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파주출판산업단지는 산단치고는 젊은 인력이 많은 편이다. 산단 근처에 즐겁게 살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된 덕분이다. 산단으로 가는 대중교통이 잘 갖춰져 있고, 주택단지와 거리도 멀지 않다. 쉴 수 있는 공원도 있고, 각종 문화예술 시설도 있다.”
도시개발 정책처럼 들린다.
“지방에 흩어져 있는 산단을 제대로 개발함으로써 제조업이 좋은 일자리를 만들 역량을 갖춘다면 지방 도시들도 활력을 찾을 것이다. 산단 문제만 잘 해결해도 지역균형발전,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다. 인수위는 끝났지만 현 정부에서 산단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줬으면 싶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1989년 서울 출생. 2016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4년 간 주간동아팀에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노동, 환경,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등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20년 7월부터는 신동아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생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년대 생으로 청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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