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 중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AT) 한국법인만큼 짧은 기간에 매출을 급성장시킨 회사도 드물다. 1999년 1%에 지나지 않던 국내 담배시장 점유율을 올해 16%까지 끌어올렸다. 철저한 시장분석과 한국인 기호에 맞는 제품 개발 등의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지만 BAT의 경쟁력은 인재중심 경영 마인드에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에게 BAT는 생소하기만 하다.
취업을 준비 중인 유명 사립대 졸업예정자의 말이다. 올해 나이 스물일곱 인 이 남학생은 높은 학점과 탁월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외국계 기업을 집중 공략할 생각이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은 외국계 회사가 갖가지 ‘기회’를 보장해주지만 ‘안정’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점. 아닌 말로, 어느 날 갑자기 한국지사가 없어질 수도 있고, 철저한 평가 시스템으로 인해 직원간 생존경쟁이 불꽃 튈 정도라고 하지 않는가. 국내 대기업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지만, 외국계 기업은 그 규모나 내실에 상관없이 인지도가 떨어져 부모가 취업을 썩 반기지 않는다는 점도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외국계 기업에 관심을 가진 취업 준비생의 이 같은 고민은 외국계 기업의 고민이기도 하다. 특히나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ritish American Tobacco·BAT)의 경우 담배 이름과 회사명을 동시에 광고할 수 없는 법적 제약에서 비롯된 낮은 인지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던힐’ ‘보그’ 같은 담배 이름은 비흡연자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것을 만드는 회사가 BAT라는 걸 모르기 때문. 외국계 담배회사라는 설명이 따라붙은 다음엔 ‘담배회사’라는 이유로 부모의 반응이 시큰둥하다고 한다.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 한국법인(BAT코리아) 인사 책임자인 김종복 이사의 말이다.
“문화, 교육, 자선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지만 우리 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채용설명회를 하러 대학에 가봐도 모르는 학생이 많죠. 그렇다고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면서까지 회사 이름을 알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막상 BAT코리아에 입사한 사람들은 직장에 대한 만족도가 꽤 높은 편이다. BAT코리아의 이직률이 연간 8%선에 불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반 기업의 이직률이 15% 이상이고, 통상 국내 기업보다 외국계 기업의 이직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BAT코리아 데스몬드 노튼 사장은 “모든 결정을 내릴 때 직원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반영한다. 이것이 회사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자부심이 남다릅니다. 2004년 8월, 본사를 광화문에서 지금의 역삼동 스타타워로 옮길 때도 전적으로 직원들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꼭대기층에 사무실을 마련한 건 비즈니스 리더가 되라는 의미였죠. 한 가지 예를 들었을 뿐이지만, 다른 어떤 결정을 내릴 때도 직원들 의견을 가장 먼저 고려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부심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요.”
서울 역삼동 스타타워 최고층에 자리잡은 BAT코리아 사무실.
BAT코리아의 모든 직원은 연말에 다음해 1년 스케줄을 제출한다. 그 안에 자신이 받고 싶은 교육 내용을 적으면 회사는 거의 모든 요구를 들어준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 본사에서 실시하는 인터내셔널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물론 경비는 모두 회사가 부담한다.
김종복 이사는 “BAT가 다른 기업과 구별되는 점은 단기간의 실적을 고려해 직원을 채용하거나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교육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개개인에 대한 평가를 하지만, 개발에 더 큰 비중을 둔다”고 설명한다.
“한국인 입맛에 맞춰라”
BAT는 1902년 창립, 전세계 담배시장의 16%를 점유하고 있는 세계 2위 다국적 담배회사다. 한국법인인 BAT코리아의 국내 담배시장 점유율 또한 16%로 지난해보다 1% 늘었고, 2004년과 2005년 2년 연속 국가고객만족도 담배부문 1위를 기록했다.
BAT코리아의 성공요인은 뛰어난 브랜드 관리와 철저한 현지화 전략. ‘던힐’ ‘보그’ 등 BAT 제품을 피워본 소비자들의 첫 반응은 대개 “국산 담배와 맛이 비슷하네”이다. 100년이 넘는 담배 제조 역사를 자랑하는 BAT는 각 나라 소비자의 기호에 맞게 타르 함량과 맛을 달리하는 노하우를 갖고 있다.
최근엔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보그’에 숯 필터를 접목하는 모험을 감행했는데, 중장년 남성에게 인기가 높다. 같은 브랜드 내 제품군(群)을 다양화하는 전략은 흡연자들에게 ‘골라 피우는 재미’를 선사해 호응을 얻었다. ‘던힐 라이트’를 피우던 흡연자가 어느 날은 부담없이 ‘던힐 1mg’으로 바꿀 수 있는 것.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국내외 다른 담배회사들도 비슷한 노력을 하고 있다. 다만 BAT코리아는 다른 다국적 기업에 비해 한국시장에 대한 이해가 ‘2%’ 더 깊었다. 한국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현지 법인을 만들었으며, 생산에서부터 유통, 관리까지 ‘한국화’를 시도했던 것. 2002년엔 외국계 담배회사로는 처음으로 경남 사천에 공장을 완공해 최첨단 설비를 들여놓고, 한국 기술자 270여 명을 선발했다. 2005년 말 기준으로 BAT 사천공장은 140억개피 이상의 물량을 생산했으며, 본사에서 실시하는 제품품질지수 테스트에서 3년 연속 1등을 기록했다. 이쯤 되면 ‘남의 나라 장사꾼이 몸에 좋지도 않은 담배를 들여와 팔고 돈을 긁어모아 자기네 나라로 돌아간다’는 오해에서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입사 2년 만에 과장 승진 가능
제품 생산과 유통 면에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폈지만, BAT코리아에 근무해보거나 사업상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BAT코리아가 외국계 기업 한국법인이 아니라, 그냥 외국기업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회사들이 대개 시간이 지날수록 기업문화를 한국화하는 데 반해 BAT코리아는 글로벌 기업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BAT 본사와 긴밀하게 연계된 BAT코리아의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인력 양성 프로그램은 BAT코리아의 브랜드 현지화 전략과 버금가게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BAT코리아의 채용 형태는 크게 MT(Management Trainee), 경력사원, 영업사원, 공장생산직, 이렇게 네 부류로 나뉜다. 대졸 신입사원은 대개 ‘경력 2년 미만의 대졸자’ 중에서 선발하는 MT에 지원한다. MT가 되면 BAT의 리더 양성 프로그램인 ‘챌린지 이니셔티브(Challenge Initiative)’에 따라 2년간 실질적인 업무를 부여받고, 직무능력·리더십·비즈니스 경험을 평가받은 후 매니저급(과장 이상)으로 인사발령을 받는다. 말하자면 간부후보 양성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이름만 다를 뿐이지 간부후보 양성을 위해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 기획홍보부 예성희 과장은 “새로운 인력을 채용해 비어 있는 자리에 채워 넣는 식이 아니라, 스스로 독립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까지 트레이닝을 시킨다”며 “2년이란 기간도 타 회사의 유사 프로그램보다는 긴 편”이라고 설명했다.
MT는 1년에 10~15명 채용한다. 전공제한은 없고, 영어성적과 학점을 평가하지만 이것이 선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점수보다 외국계 회사에서 일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리더로서 발전 가능성이 있는지를 비중 있게 평가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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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의 목적은 채용과정에서 하나의 분류 기준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후에 우수 인재를 최대한 많이 보유하기 위함이다. 사실, 오래 근무했다고 해서 ‘우수한 인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MT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BAT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함께 세계 리더로 성장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꼭 그렇게 원대한 목표가 아니어도, 여자는 24~25세, 남자는 28~29세라는 젊은 나이에 과장 직함을 달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다.
“180여 개 나라로 무대를 넓혀라”
BAT코리아 마케팅 책임자였던 한승희 이사는 지난해 9월부터 영국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로컬 마케팅 담당자가 본사의 마케팅 책임자로 승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 한국에 법인이 생긴 지 7년 만에 시장점유율을 15배(1999년 1% 2005년 15%)나 신장시킨 현격한 공로가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인사가 가능한 건 기본적으로 ‘우수사원 교환근무(Talent Exchange)’ 제도라는 BAT의 독특한 인사 시스템 때문이다.
우수사원 교환근무 제도는 BAT의 글로벌 인재양성과 사원의 경력 개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영국 본사를 포함해 여러 나라의 지사에서 근무하다보면 업무 능력이 향상되는 건 물론 리더십이 한층 성숙한다는 게 경험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이러한 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건 젊은 직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영국에 머물고 있는 한승희 이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180여 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펼치는 BAT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대단합니다. 전세계 9만여 명에 달하는 BAT 직원은 그 네트워크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으니 정말 좋은 기회죠. 자신의 역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해외 파견 근무를 꼭 한 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현재 한승희 이사 외에도 영업부 이택규 전무가 캐나다 지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공장에서 생산부 책임자로 근무했던 한성주 이사와 베트남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던 김영우 부장은 이미 우수사원 교환근무를 끝내고 BAT코리아로 돌아왔다.
한국이 좁다고 여기는 젊은이라면 BAT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