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펜’에서 1년 ‘면벽 식사’하며 ‘한강의 기적’ 강의
- 2016년 달러 강세, 선진 경제 회복, 인도 浮上
- 美 정부 대처, 中 소프트랜딩, 日 정치개혁이 관건
- 한국 경제가 벼랑 끝? 지나친 비관!
교황과 성철스님
▼ 꼭 1년 만에 귀국했다. 모교인 ‘유펜’에서 강의했는데 어떤 내용이었나. 영어로 강의하는 게 어렵진 않았나.“평생 영어를 끼고 살아온 덕분에 소통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1년 계약교수로 갔다. 첫 번째 학기에는 ‘한국 경제 : 과거와 현재(Korean economy : past and present)’, 두 번째 학기엔 ‘한국 경제 도전과 전망(Korea in a global economy : challenges and prospects)’를 강의했다. 주로 경제학과 학생을 주축으로 워튼스쿨(경영대학원), 정치학과, 동아시아학과 학생들이 수강했는데, 한국인 수강생은 많지 않았다. 첫 번째 학기에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 경제의 성공사를 거시, 금융, 재정, 노동 농업, 무역, 통일 등을 배경으로 강의했다. 두 번째 학기엔 한국 경제가 앞으로 선진 일류가 될 수 있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춰 강의했다. 종합적이고 거시적인 강의였다.”
▼ 강의 평가는 좋았나.
“쑥스럽지만 10개 항목에 걸쳐 대부분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무기명 평가였는데, 객관적으로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웃음). 유펜의 ‘제임스 주진 김 펀드(James Joo-Jin Kim fund)’ 지원을 받았다. 김주진은 아남그룹 창업자인 고(故) 김향수 회장의 아들인데, 미국에서 반도체 기업 암코 테크놀로지(Amkor Technology)로 크게 성공해 모교인 유펜에 600만 달러를 기증했다. 내가 첫 수혜자였다. 학교 당국에서 연구실과 조교를 배정하는 등 배려해줬다.”
▼ 오랜만에 강단에 선 느낌이 남달랐을 듯하다.
“강의는 한 번도 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 자신이 수강생이라는 생각으로 강의했다. 내 지식과 경험을 정리해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새해 첫날을 포함해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실에서 강의 준비를 했다. 아내는 미국에 온 지 3주 만에 서울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사람도 거의 안 만나고 스님처럼 지냈다. 밥도 혼자 해 먹었다. 내가 지낸 학교 기숙사 벽이 흰색인데, 매일 그 흰 벽을 마주하고 밥을 먹었다. 성철스님의 면벽 수행, 일주일에 몇 번은 의도적으로 흰 벽을 마주하고 혼자 식사한다는 로마 교황이 생각났다. 그래서 외로울 때는 ‘교황식 식사’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컴퓨터엔 한글 자판도 한국 포털 서비스도 없었다. 한인 슈퍼 가서 혼자 장보고 음식 만들고 먹고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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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도 달러 가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해야겠다.
“그렇다. 신흥시장의 경제주체들은 이러한 여건 변화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면서 대처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경제 정책은 무엇이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여건의 변화에 어떻게 시의적절(timely)하게 대처하느냐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는 대외 경제 환경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할 능력을 갖추는 게 매우 중요하다. 외부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내부 여건에 몰입돼 있으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 유가 하락세도 심상치 않다. 폭도 큰 데다 장기화하는 듯하다.
“유가는 공급자인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의사결정, 석유와 경쟁관계인 셰일가스·오일 생산 규모, 달러 강세 여부 등에 달렸다. 수요 측면에선 중국 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의 회복 여부도 중요한 결정요인이 된다. 이런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유가가 더 크게 하락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렇다고 예전과 같은 수준으로 복귀하리라 예상할 수도 없다. 당분간은 현 수준에서 소폭의 등락을 거듭할 것으로 본다.
문제는 유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복합적이라는 데 있다. 공급 측면에서 볼 때는 당연히 유가가 낮아야 도움이 되겠지만. 유가가 낮다는 건 세계경제의 활력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방증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수출에 도움이 되는 상황이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가격변동에 따른 위험 요인을 최소화하면서 장기적으로 석유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산업정책을 펴는 것이다.”
▼ 잘나가던 일본 경제도 심상치 않다.
“일본은 전후 획기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했지만, 구조적인 문제를 많이 안고 있다. 인구 고령화 문제도 심각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제 규모에 비해 규제 자율화와 경제의 글로벌화 노력이 미진했다고 본다. 실물경제는 뛰어나지만 금융이 뒤떨어진 것도 경제성장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요인이다.
지난 수년간 금융, 재정, 구조개혁 등 ‘아베노믹스’ 정책을 추진한 것은 의미 있는 노력이라고 본다. 다만 단기적인 거시정책 효과보다는 구조개혁 같은 장기적인 성장잠재력 확충이 관건이다. 개혁 성공 여부는 여기에 달렸다. 새해 일본 경제는 성장률에서 2015년보다는 조금 나아지겠지만, 큰 변화는 예상되지 않는다. 결국 구조개혁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정치력이 핵심이다.”
칼날 위에 선 균형
▼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가 저성장으로 접어드는 뉴 노멀(New Normal)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어떠한 국제경제 질서가 만들어질 것인지가 포인트다. 다극화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따라서 글로벌 단일 균형이 아닌 국지적 다중 균형이 이뤄질 것이다. 과거에는 균형이 유지되는 한 안정적이었으나, 이제는 여러 균형이 공존한다는 뜻이다. 좋은 균형과 나쁜 균형이 공존하며, 이는 ‘칼날 위에 선 균형’처럼 매우 불안정하다. 예전과 달리 미국, 유로존, 일본, 중국 등이 서로 다른 각자의 정책을 수행해나가는 것이 그런 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 나라들 간 정책협조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각국의 정책이 상호보완적 기능을 수행하게 해야 글로벌 경제의 성장과 안정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연 이런 노력을 이끌어갈 글로벌 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시대의 관건이 된다. G20 체제가 이 같은 임무를 적절히 수행해야 그나마 글로벌 경제의 안정이 유지될 수 있다.”
▼ 한동안 주목 대상이던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도 시들한 거 같다.
“브릭스는 급속하게 성장하는 신흥 경제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브라질, 멕시코,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자원 경제’가 특징인데, 세계경제 침체 속에 자원에 대한 수요가 줄어 가격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들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욱이 달러 강세로 자원 가격은 상대적으로 약세가 된다. 달러 강세가 이들 경제에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인도는 예외적으로 7% 넘는 고성장을 이뤼낼 것으로 예상된다. 규제 개혁과 더불어 지도자의 긍정적인 경제 마인드가 고성장을 이끄는 힘이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세계로, 미래로’를 모든 정책 근간으로 삼고 이에 상응하는 ‘글로벌 코리아’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경제의 동태성(dynamism)을 간과해선 안 된다. 정태적 상황에서 현상의 잘못을 교정하는 것은 이해집단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미래에 다가서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여가면서 교정하는 게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움직이려면 ‘비전’이 선결 요건이다. 국민이 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정책 수행에 추동력이 생긴다.”
취약한 非교역 부문
▼ 한국 경제 개혁의 핵심은 뭐라고 보나.“가장 중요한 개혁과제는 렌트 시커(rent seeker, 지대 추구자. 이익을 위해 비생산적인 활동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낭비하는 사람)를 없애고, 비교역부문(non-tradable sector)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대학, 정치, 공무원, 공기업, 의료, 금융, 법률 시장 등이 대표적인 비교역 부문이다. 이 분야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중요하다.
교역 부문은 시장에 맡기면 되지만, 비교역 부문은 이른바 ‘철밥통’으로 요지부동이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데 빗장을 걸어놓고 있다. 우리 경제에는 엄청난 부담이다. 내가 몸담았던 중앙은행도 마찬가지인데, 총재로 있을 때 늘 강조한 것이 선진국 중앙은행과 경쟁하려면 지금보다는 몇 배의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내외 문제의 균형적 해법을 이끌어낼 ‘유능한 정부’를 만드는 것이 최대의 과제다.”
▼ 개인적인 얘기로 인터뷰를 마무리하자. 청와대 경제수석, 대학 총장,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중앙은행 총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 등 경력도 화려하고, 바둑 1급에 골프와 테니스도 수준급이다. 정운찬 전 총리, 장승우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함께 ‘경기고 3대 천재’로 불린다. 누구 덕인가. 조상 묏자리 덕인가.
“나도 궁금하다(웃음). 말씀하신 자리들은 대부분 인사권자와 일면식이 없는 상황에서 발탁됐다. 수주작처(隨主作處, 어느 곳에서든 주인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의 자세라고나 할까. 좌고우면하지 않고 맡겨진 일만 했다. 그래서 ‘독일병정’, 일만 하는 ‘곰바우’란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 너무 일만 한다고 해서 ‘곰바우’가 아니라 ‘곰바위’(우스개 영어지만 not bear stone but bear rock)란 말까지 들었다. 일은 정말 원 없이 해봤다. OECD 가입을 위해 프랑스 파리에 2년 있었는데, 귀국 사흘 전에야 루브르 박물관을 처음 가봤다. 개선문, 에펠탑도 못 보고 왔다. 경기고 3대 천재? 언론의 과찬이다. 그냥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너무 맹숭맹숭한 대답인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