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상 민주 절차, 결과적으로는 전횡 일삼아
여당 머릿속은 아직 혁명 진행 중
적폐청산=복수의 정치, 정권 말까지 못 버려
여권, 기득권 공격하면 ‘적폐’ 규정 공격
현 정부 권력 중독 상태, 조언해도 못 받아들여
K-방역은 정부보다 국민이 낸 성과
진보와 보수의 틀 깨는 정치세력 필요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월 15일 서울 관악구 중민연구재단 사무실에서 여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지호영 기자]
과거의 변혁 세력은 현재의 집권 세력이 됐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대학생 중 많은 수는 집권여당의 일원이 됐다. 2020년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총 300석 중 174개 의석을 차지했다. 정의당, 열린민주당, 시대전환, 기본소득당 등 범여권 의원까지 합한 총 의석수는 190석. 이 중 118명(62.1%)의 의원이 50대다. 그야말로 86세대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 셈이다.
한 교수는 여권의 주축인 86세대를 개혁 세력으로 봤지만, 최근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그가 2020년 2월에 발표한 ‘세계의 탈바꿈과 중민이론의 재구성’ 논문에는 “국가체제 안으로 진입한 86세대 중민 정치집단이 기성체제의 특징인 양극 대립, 특권과 차별의 제도화, 민중 배제의 모순을 걷어내고 통합과 화해, 상생의 길을 걸었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이에 관해 적지 않은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2월 15일 서울 관악구의 사무실에서 만난 한 교수는 1년 전 자신이 던진 질문에 답을 내렸다. 그는 “현재 집권여당의 행태는 한국 민주주의를 해치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與, 다수당 된 뒤 野 의견 전혀 안 들어
-집권여당이 한국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는 것인가?“정확히 이야기하면 집권여당의 주류인 86세대의 정치 방식이 문제다. 절차적 민주주의에만 집중하다 보니 본질과는 멀어졌다.”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면?
“바람직한 민주주의 정치라면 다양한 의견이 공존해야 한다. 한 사안을 두고 여야 간 의견이 다르다면 토의를 통해 이 격차를 줄여야 한다. 다수결에 부치는 투표는 도저히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지금의 여당은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뒤로 야권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국회의 역할인 입법부터 인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수결을 이용해 자신들의 의견만을 관철하고 있다.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의 절차를 잘 지키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전횡을 일삼고 있다.”
-여권은 왜 야당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야권을 공존할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권의 시각에서 이들은 타파해야 할 구악이다.”
1987년에 멈춘 86세대의 정치 문화
-여권의 주류가 된 86세대는 젊은 시절 진보적 사상을 품고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이들이 주축이 된 정권이라면 공존의 정치를 지향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면 독재에 가까워지는 사례도 있다. 특히 혁명을 통해 집권한 경우 독재정권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 이전의 사회체제를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지워버리는 것이 혁명의 속성이다. 혁명이 끝난 뒤에도 권력을 차지한 세력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을 적으로 본다면 독재정권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구소련의 볼셰비키혁명이나 중국의 문화대혁명도 결과만 보자면 일당독재 정권을 낳지 않았나.”
-현 정권은 혁명으로 집권한 정부는 아니다.
“현 정부의 주류인 86세대는 대학 시절 혁명적인 사상을 품었다.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다. 다소 이분법적인 사고였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국민이 이에 공감했고 1987년 민주화로 이어졌다. 민주화는 86세대의 공적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지금까지도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정치세력을 단죄하는 방식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민주당이 여당이던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지금처럼 야권을 무시하는 정국은 아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기에는 줄곧 여소야대 정국이었다. 야권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물론 여소야대가 아니었더라도 김 전 대통령은 원래 타협과 공존의 정치를 지향하던 사람이다. 특정한 신념을 관철해 사회를 바꾸기보다는 (야당과의) 소통을 통해 합리적 결과를 도출하려 했다.”
한상진 교수는 과거 민주당 계열 정부를 도왔다. 이들의 흥망성쇠를 지근거리에서 봐온 셈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기인 2002년에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국가정책 수립에 참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기에는 ‘광복 6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2013년에는 민주통합당에서 대선평가위원장을 지내며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원인을 짚기도 했다.
복수의 정치를 적폐청산이라 착각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기인 17대 총선에는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과의 연정을 꾀하지 않았나?“다수당이 됐을 때가 기회였다. 연정 등을 통해 새로운 정치 문화를 확립할 수 있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이를 기점으로 현재의 여당이 공존의 정치 문화를 잃었다고 본다.”
-열린우리당은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당시 신진 정치세력이던 86세대 정치인들이 너무 이념적이었다. 국민은 현실의 불합리가 해결되기를 바라는데 이 측면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보안법, 과거사 진상규명 법안 등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대선 참패로 이어졌다.”
2008년 대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은 1149만2389표를 얻어 대통합민주신당(현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를 541만7708표 차이로 이겼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재개된 이래 가장 큰 표차였다. 이 기록은 2017년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557만951표 차로 이기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정권을 잃은 것이 문제라는 것인가?
“진짜 문제는 그 뒤부터다. 집권한 한나라당은 전 정권의 개혁을 대부분 무위로 돌렸다. 이를 보고 당시 열패 의식에 빠진 민주당 신진 정치세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권을 차지해 개혁하더라도 권력을 뺏기면 전부 허사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게다가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있었다. 이때 (민주당 정치인들은) ‘다시 권력을 잡는다면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일종의 복수심이 생겼다. 정권 초창기부터 적폐청산에 나선 것은 이 복수심의 발로다.”
단적인 예로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교육개혁안이던 고교 내신등급제를 집권 즉시 폐지했다. 이외에도 노무현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며 도입한 종합부동산세도 2008년 폐지했다. 종합부동산세는 2018년 문재인 정부에서 부활했다.
현 정부 권위주의 세력 닮아가는 중
-전직 대통령 2명을 전부 구속했지만 현 정권의 적폐청산은 집권 4년차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여권에서는 본인들이 임명한 윤석열 검찰총장이 조국 전 검찰총장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자 그에게도 ‘적폐’라는 꼬리표를 붙였다.“지금의 여권은 적폐청산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고하게 다지는 일과 동의어로 생각하고 있다. 기득권을 공격한다면 ‘적폐’로 규정하고 공격한다.”
-여권이 기득권만 챙긴다면 자신들이 적폐라 부르는 과거의 정치세력과 다른 점이 없지 않나?
“여권은 기득권을 다지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바꿔온 사회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여권이 자신들이 부정하는 세력을 닮아가는 데도 2020년 4월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얻었다. 이유가 뭐라고 보나?
“코로나19 사태가 변곡점이 됐다. 다른 나라에 비해 코로나19 방역 조치가 뛰어나다는 점이 알려져 여권이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총선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고 본다.”
-현 정부가 방역을 잘했다고 생각하나?
“정부보다 국민이 낸 성과다. 국가 재난 상황에서 민주주의 정부가 걱정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국민의 반발이다. 방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반발이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서구 일부 국가들은 반발이 있어 초기 방역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한국 국민은 정부의 통제를 기꺼이 따랐다.”
여권은 국회 의석의 약 5분의 3을 차지했다. 국회법상 국회의원 정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 개헌을 제외하고는 야권의 동의 없이도 대부분의 법안 통과가 가능하다. 야당의 반대에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 경제 3법, 대북전단금지법 등 3개 법안을 지난 12월 한 달에 처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여당보다 야당에서 희망 찾아야
2020년 12월 1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가결됐다. [동아DB]
“다수 의석을 가졌고 공생할 의사가 없으니 당분간 방법이 없다. 외부의 비판을 받아들이기도 어려워 보인다. 현재 여권은 권력 중독 상태에 빠졌다.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매력적인 야당이 등장하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
-제1야당인 국민의힘의 역량에 달렸다는 것인가?
“대안이 되는 것이 꼭 국민의힘일 필요는 없다. 게다가 제1야당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서는 승산이 없다.”
-국민의힘은 김종인 대표를 선임하고 국민소득 등 여권의 이슈를 선점하는 등 체질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여주기식일 뿐이다. 대다수 국민에게 여전히 국민의힘은 보수세력이다. 지금과 같아서는 국민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본다.”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인가?
“대선은 너무 먼 이야기다.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 물론 현 정부가 실정을 이어간다면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보수세력이 정권을 쥐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는 지금과 같을 것이다. 이들은 현 정부를 또 다른 형태의 적폐로 볼 것이다. 결국 매 정권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숙청이 반복된다. 정권을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국론은 다시 분열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답보 상태에 머물게 된다.”
진보·보수에 얽매이면 증오의 정치 반복
2월 3일 국회에서 열린 4·7 보궐선거 서울시장 예비후보 기자간담회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진보와 보수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정치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두 이념은 근대의 해묵은 산물이다. 이념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실용에 따라 변하는 정치세력이 현 정권의 대안이 돼야 한다.”
-1980년대의 중민이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는 중산층이었다면 2020년대의 중민은 가치보다는 실용을 추구하는 세력인가?
“중민이론은 민주화 과정에서 발전시킨 이론이다. 민주화는 이미 성취했다. 지금 필요한 변혁 세력의 형태를 묻는 것이라면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라 답하겠다. 정쟁보다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관심 있게 지켜보는 야당이 있나?
“아직은 없다. 하지만 4월 7일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위해서라도 정치권이 나름의 대안을 준비할 것이라 본다.”
-현재 야권의 서울·부산시장 후보 중 대안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대안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안철수라는 정치인에 대해 실망한 국민도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 교수는 2016년 안 대표를 도와 국민의당 창당준비공동위원장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지금도 ‘안철수의 정치적 멘토’라 불린다.
안철수·금태섭 등 제3지대에서 희망 본다
-그럼에도 안 대표에게서 희망을 보는 이유가 있다면?“여러 후보 중 그가 가장 기성 정치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일찍이 정치에 투신한 86세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바꿔왔다. 정치 대신 전문가를 만나 강연을 기획하는 등 권력 없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했다. 그의 새로운 정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자 비로소 정치에 나선 사람이다.”
-하지만 그와 연대했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그와 사이가 멀어졌다.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기성 정치인과 사고의 구조가 달라 문제가 발생했다고 본다. 정치인들은 정쟁을 통해 정권을 쟁취하고 권력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하지만 안 대표는 정치적 이해관계보다는 사회문제 해결에 집중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르니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안 대표는 금태섭 전 의원과 서울시장 후보 제3지대 단일화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금 전 의원은 2014년 안 대표와의 친분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으나 둘은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라섰다.
-금 전 의원도 제3지대의 인물로 꼽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여당 내에서 공수처 설치에 반대하는 등 소신 있는 행보를 보인 인물이다. 진보와 보수를 벗어난 대안적 인물로 발돋움하는 중이라고 본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1989년 서울 출생. 2016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4년 간 주간동아팀에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노동, 환경,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등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20년 7월부터는 신동아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생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년대 생으로 청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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