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작스러운 추락.’ 2월10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핵보유 선언’ 담화를 전해들은 워싱턴과 서울의 당국자들은 그런 느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6자회담 조기 개최를 낙관하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형국. 과연 부시 행정부가 대통령 취임연설과 시정연설, 국무장관 인준청문회 등을 통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무엇이고, 북한이 이에 맞선 까닭은 또 무엇인가.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은 전세계적으로 비판과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우방인 영국을 제외한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유럽 국가와 러시아, 중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는 반테러·반확산을 구실 삼아 선제공격을 감행하고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등 미국이 구사하는 ‘힘에 의한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첫 임기의 유산을 바탕으로 지난 1월20일 두 번째 대통령 취임식을 치르고 4년 임기를 시작했다.
총론은 강화, 접근법은 다소 유연화
그렇다면 2기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는 무엇인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인준청문회, 부시 대통령의 취임연설과 2005년도 시정연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한마디로 ‘폭정’과 ‘압제’ 및 ‘공포’에 대항하고 이들을 종식시키기 위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이 지금까지 드러난 2기 행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라고 할 수 있다.
2005년 1월18일 라이스 국무장관 지명자의 상원 인준청문회 모두발언을 보면, 그는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과제로 ‘폭정 및 테러와의 투쟁’과 ‘자유와 번영의 확보’를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3대 외교과업을 내놓았다. 첫째는 공통의 가치와 법의 통치에 기반을 둔 국제체제를 건설하는 데 있어 민주진영의 단결, 둘째는 공통의 안보위협에 대한 투쟁, 테러를 낳는 절망적인 상황의 완화를 위한 민주진영의 강화, 셋째는 전세계에 걸친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산이 그것이다.
그러나 라이스는 국무장관 지명자답게 ‘지금은 외교의 시대’라는 점을 빼놓지 않고 강조했다.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군사·외교적으로 수렁에 빠져 있는 미국이 또다시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인 듯했다.
부시 대통령은 1월20일 취임연설에서 “전세계를 통해 폭정과 무법자 정권을 종식시키고 자유를 확장하는 것이 미국의 가장 핵심적인 이익이자 가장 깊은 신념이며, 이를 위해 미국은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자유가 없이는 정의도 인권도 없으며, 세계 각국 국민이 자신의 자유를 위해 폭정과 압정에 맞서 일어선다면 미국이 그들과 함께할 것”이라는 천명이다. 그가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자유의 확장’을 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또한 “폭정을 끝장내고 자유를 확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하겠”지만, “무력사용 이전에 각국 국민은 스스로 자유를 선택하고 수호해야 하며, 법의 통치 등을 통해 이를 지속시켜야 하고, 각국은 각기 관습과 전통이 다른 만큼 미국은 그들의 정부형태를 강제하지 않겠다”고도 밝혔다. 이러한 내용은 2월2일 발표된 2005년도 시정연설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부시 자신의 1기 대외정책, 즉 힘을 바탕으로 한 일방주의적 정책에 대한 전세계의 극심한 비판을 염두에 둔 유화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종교적 지도이념으로서의 ‘자유’
부시 대통령은 이 시정연설에서 취임연설을 통해 밝힌 ‘자유’라는 ‘지도 이상(guiding ideal)’을 국내외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특히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를 강조하면서 ‘폭정과 테러의 등장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인간 자유의 힘이며, 미국은 전세계에서 민주주의를 돕고 폭정을 종식시키는 노력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혔다.
부시 대통령은 특히 중동 평화를 방해하기 위해 테러를 지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하는 국가로 시리아와 이란을 지목했다. 특히 이란에 대해서는 농축우라늄 프로그램과 플루토늄 재처리, 테러지원 중단을 강력히 요구하며, 이란 국민이 자유를 위해 봉기하면 미국이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선언했다.
2기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선악’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외교안보정책의 기초로 사용하고 있으며, 국제정치에서 공통의 이익뿐 아니라 ‘자유’라는 가치의 공유를 중시하고 있다. 1월 말 실시된 이라크 제헌 임시국회 총선에서 투표율이 60%에 달하자 부시 대통령은 이를 ‘민주주의 확산의 대성공’으로 평가하고 최근 볼 수 없던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이들 연설의 특징을 분석해보면 부시 행정부가 동맹국들과 예전보다는 많이 대화할 것이라는 징후도 엿보인다. 그러나 한층 거시적으로 보면 대외정책의 철학적 배경, 외교안보정책의 기조, 정책의 우선순위가 크게 변하지 않은 한, 기본적으로는 1기 대외정책의 기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 1기와 전혀 다른 외교안보정책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라이스 국무장관의 지명에서도 볼 수 있듯 새로운 외교안보팀을 무엇보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중심으로 인선했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 제1기 외교안보팀과는 다른 부분이다. 그 동안 네오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던 파월 국무장관이 떠나고, 부시 대통령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는 충성파로 짜인 새로운 외교안보팀이 일사불란하게 한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과연 그 목소리가 어떤 방향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구체적인 대북정책은 전반적인 외교안보정책의 틀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강조된 ‘설득’, 그러나 정책변화는 없다
그렇다면 2기 부시 행정부는 북핵문제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가. 먼저 살펴볼 것은 미국 외교안보정책의 우선순위다. 거칠게 말해 미국은 현재 이라크 문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북한과 이란의 핵문제 순으로 외교안보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상원 청문회에서 이란과 북한이 핵무기 야망을 버리고 평화의 길을 선택하도록 미국과 동맹국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이스 장관은 북한을 쿠바, 미얀마, 이란, 벨라루스, 짐바브웨와 함께 ‘폭정 전초기지(outposts of tyranny)’에 포함시켰다. 라이스 장관은 나탄 샤란스키의 저서 ‘민주주의의 경우: 폭정과 테러를 극복하는 자유의 힘(The Case for Democracy: The Power of Freedom to Overcome Tyranny and Terror)’에서 묘사된 ‘마을광장 시험(town square test)’을 적용해 이들 ‘폭정 전초기지’ 나라들을 ‘공포사회(fear society)’라고 규정한 바 있다. 공포사회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쟁취할 때까지 미국은 편히 쉴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마을광장 시험’이란 구성원이 마을 광장 한복판에서 구속이나 투옥, 신체적 위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으면 ‘자유사회’요, 그렇지 않으면 ‘공포사회’라는 분류 방법이다).
부시 대통령의 경우 취임연설에서는 특별히 북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2005년도 시정연설에서 “미국은 북한이 핵 야망을 버리도록 설득하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과 긴밀하게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설득하다(to convince)’라는 표현은 대화와 협상을 통한 외교적인 노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북핵 문제를 일단 6자회담의 틀에 묶어두고 미국이 먼저 양보하는 일 없이 6자회담 참여국들이 한 목소리로 북한이 핵을 먼저 포기하게끔 공동압력을 가하는 정책을 지속할 것임을 재확인시켰다. 더욱이 그가 이란에 대해 사용한 매우 강력한 표현은 북한에 대한 간접적이지만 위력적인 경고로 해석할 수 있다.
실패한 평양의 ‘명분 찾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국은 자신이 북한의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두 가지 당근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만 북한의 리더십은 이를 당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공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북한의 정권교체(regime change)와 정권·체제전환(regime transformation)을 구별하면서 북한의 현 지도부를 붕괴시키거나 교체할 생각은 없고 단지 체제를 자유와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는 언급이 다른 하나다.
반면 북한은 미국이 이라크 문제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군사·정치적으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듯하다. 북한은 미국의 ‘불침공’ ‘불공격’ 발언이 자신들이 요구하는 안전보장과는 다른 것이며, 정권·체제전환이라는 것도 미국이 북한체제나 정권, 리더십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정권교체나 정권전환은 큰 차이가 없으며, 단지 시간 차이일 뿐이라는 상황인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라이스 국무장관의 인준청문회 발언, 부시 대통령의 취임연설 및 2005년도 시정연설을 모두 듣고 난 후 보인 공식반응이 문제의 2월10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이다. 북한은 이를 통해 “회담 참가 명분이 마련되고 회담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과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불가피하게 6자회담 참가를 무기한 중단할 것”이며 “미국이 핵몽둥이를 휘두르며 우리 제도를 기어이 없애버리겠다는 기도를 명백히 드러낸 이상 우리 인민이 선택한 사상과 제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고를 늘리기 위한 대책을 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북한은 6자회담 불참 결정의 배경으로 미국이 자신과는 ‘절대 공존하지 않겠다’는 것을 정책화하고 자신을 “적대시하다 못해 ‘폭압정권’이라고 하면서 전면 부정함으로써 미국과 회담할 명분조차 사라졌으므로” 자신들은 “6자회담에 더 이상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핵무기 제조·보유와 관련해서는 “자위를 위해 만들었다”면서 자신들의 핵무기는 “어디까지나 자위적 핵억제력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원칙적 방침과 조선반도를 비핵화하려는 최종목표에는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해석하건대 북한은 부시 2기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과 관련된 미국의 입장을 꾸준히 청취하면서 나름대로 미국의 정책변화를 확인하고 6자회담에 복귀할 명분을 찾으려고 했으나, 일단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설령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해 4차 회담이 열린다 해도 미국의 협조가 없으면 북핵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자신들이 실리를 전혀 얻지 못하면서 국제적으로 또 한 번 문제아 취급만 당하게 될 것이 뻔하다는 판단을 내린 듯하다. 나중에 그런 상황에 놓이느니 차라리 미리 핵무기 보유 및 6자회담 불참이라는 강력한 대미 압박카드를 사용함으로써 차기 6자회담에서 미국의 협조와 양보를 받아내려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한의 성명은 북-미 양국간에 주고받기를 가능케 하는 직접대화와 협상 없이는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경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년 전과 달리 미국은 북한의 핵관련 행위나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아무런 통제수단이나 지렛대가 없다. 정작 미국은 북핵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없으면서 오로지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해 스스로 핵을 포기하기를 바라는 정책을 유지한다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도 담겨 있다. 북핵문제는 평화적 해결과 더불어 ‘조속한 해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한 행동인 셈이다.
대북협력 없이는 ‘조속한 해결’ 불가능
이른바 2차 북핵위기가 발생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그간 우리 정부의 북핵문제 관련 정책을 평가하기 위해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2년 전과 비교해 북핵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됐는가, 아니면 더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가. 대답은 당연히 후자에 가깝다.
이러한 현실은 ‘튼튼한 한미 공조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정책이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은 2차 북핵위기 발생 이후 현재까지 정부가 ‘한미 공조’를 최우선으로 삼아 남북간에 핵문제 관련 대화나 협상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2년 넘게 지났다는 사실이다. 2년 전만 해도 영변 핵발전소와 관련시설에 국제원자력기구에서 파견한 감시인과 감시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조차 없어 ‘불투명성’은 더욱 증가한 상황이다.
이제 핵문제의 또 다른 당사자인 북한에 대해 관련대화와 협상의 채널을 열어야 할 때가 됐다. 남북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한이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게끔, 이미 핵무기를 제조·보유하고 있다면 이를 해체하게끔 직접 설득하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특사 파견이나 정상회담 추진은 단순한 유화정책이 아니라 이러한 압력행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이 만나 그간 훼손된 신뢰를 회복하고 핵문제와 여타 주요 현안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미국과 합의한 것을 가장 큰 성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평화적 해결은 당연하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조속한 해결’이다. 조속한 해결은 북한과의 협력 없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 남북한간에 핵 관련 직접대화를 추진하는 것이 미국의 북핵문제 해결노력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미국에 설득하고, 남북대화와 협상은 미국과 긴밀한 사전 협의와 협조하에 진행된다는 것을 확실히 함으로써 미국을 안심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새로운 동북아질서 형성 과정
우리 정부가 지난 2년 동안 보여준 소극적인 대북정책 대신 북한과의 적극적인 대화, 그리고 필요할 경우 ‘적극적인 주고받기’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에 나선다면, 북한이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로 나아가고 한반도에서 냉전체제를 종식해 평화를 정착시키는 역사적 책무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지금 우리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소명의식’일지도 모른다.
북핵문제의 해결은 그 자체로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 나타난 각국의 기여도는 앞으로 21세기 동북아 질서가 형성되면서 각 나라의 발언권을 결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러한 맥락만 살펴봐도 북핵문제 해결에서 남북의 협력은 필요 불가결한 일이다. 남북화해·협력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채 새로운 동북아 질서가 형성되면 장기적으로 우리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확보하고 신장하는 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