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10년 만에 브레이브걸스가 쏘아 올린 신화
짤방, 직캠 등 밈 문화와 결합할수록 화제
드라마 대사가 지름신 강림 ‘사딸라’로 재가공
역주행 기간 갈수록 빨라지고 MZ세대 영향력 커져
우울한 시대, 역주행 도우며 위로와 희망 얻어
문화계 전반에 나타나는 ‘역주행 현상’은 재미있는 콘텐츠를 끌어올리는 MZ세대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명 10년 만에 브레이브걸스가 쏘아 올린 신화
그런데 이 노래가 발표 후 4년 만에 느닷없이 가요계 정상에 올랐다. ‘롤린’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음악콘텐츠협회가 집계하는 국내 공인 음악차트 ‘가온’ 3월 디지털 차트에서 아이유의 ‘Celebrity’, 임영웅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배경음악(BGM) 판매량에 가중치를 부여해 집계한 결과다. 이뿐만이 아니다. 브레이브걸스는 ‘롤린’ 한 곡으로만 여러 음악방송에서 1위에 오르며 7관왕을 달성하는 영광을 안았다. 2011년 데뷔해 10년 가까이 무명의 설움을 겪은 브레이브걸스는 이로써 ‘데뷔 후 지상파 1위 달성까지 가장 오래 걸린 걸그룹’(1854일)이란 진기록을 세우는 등 뒤늦게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인지도 높은 가수의 노래도 발표 직후 인기몰이에 실패하면 음원차트에 다시 진입하기 힘든 국내 가요계 환경에서 말 그대로 역주행의 신화를 쓰고 있는 것이다.국어사전에서 ‘역주행’을 찾아보면 ‘정해진 차로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주행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 사이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과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 우연한 계기로 뒤늦게 인기를 얻는 상태를 가리킨다. 역주행 현상을 주도하는 건 일명 ‘끌올’ 문화에 익숙한 MZ세대다. 끌올은 ‘끌어올리다’의 줄임말로,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사건이나 글, 사진, 영상 같은 게시물이 묻히지 않도록 반복해 게시하고 댓글을 달며 여론을 환기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재원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연구소 연구위원은 역주행 현상에 대해 “MZ세대의 비선형적 사고방식이 온라인 공간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의 부연 설명은 이렇다.
“MZ세대는 여러 온라인 콘텐츠와 그곳에서 파생된 링크를 넘나들며 정보를 빠르게 흡수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 같은 시간 개념 또는 기승전결 같은 흐름에 구애받지 않고 필요할 때 바로 찾아 활용하는 식이다. 또한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고, 여기서 나아가 콘텐츠를 소비할 뿐 아니라 생산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과거에 만들어진 콘텐츠를 발견하거나 다시 가공해 끌어올림으로써 만족을 얻는다.”
짤방, 직캠, 댓글놀이와 결합할수록 화제
문화계 전반에 나타난 역주행 현상은 인터넷 ‘밈’ 문화의 유행과 맞물려 있다. 인터넷 밈(meme)은 온라인 공간에서 공유되는 파급력을 가진 재미있는 ‘짤(인터넷에 나도는 각종 자투리 이미지 파일)’, 영상, 댓글, 유행어, ‘드립(상황과 맞지 않은 이미지나 엉뚱한 발언을 총칭하는 신조어)’ 같은 콘텐츠를 통칭한다. 최근 유행하는 역주행 현상은 일련의 패턴이 있다. 기존 콘텐츠에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콘텐츠가 더해져 누리꾼 사이에서 밈 형태로 소비되고, 결국 이것이 콘텐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역주행이 본격화하는 식이다.실제로 앞서 언급한 ‘롤린’ 역주행은 유튜브에 올라온 ‘롤린 댓글 모음’ 영상에서 시작됐다. ‘롤린 댓글 모음’은 유튜버 ‘비디터’가 브레이브걸스의 군부대 위문 공연 장면과 그에 대한 누리꾼의 댓글을 모아 교차 편집한 콘텐츠다. 브레이브걸스 멤버 유정이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노래하는 순간, 젊잖게 앉아 있던 장병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열광하며 ‘떼창(팬들이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이어간다. 이때 이 장면 하단에 ‘전쟁 때 이거 틀어주면 전쟁 이김’ ‘인민군도 신나서 흔들어 재낌ㄹㅇ(‘정말’이라는 뜻)’ ‘ㅋㅋㅋㅋㅋ 통일 되겠네 ㅋㅋㅋㅋㅋ’ 같은 재치 만점 댓글이 이어진다. 불과 3분 19초 분량의 짧은 영상임에도 밈 요소가 가득하다 보니 2월 24일 영상 공개 후 단 이틀 만에 조회수 110만 회를 넘어섰다. 이후 삽시간에 입소문이 퍼진 ‘롤린’은 음원차트와 음악방송에서 역주행에 성공해 히트곡 반열에 오른다. 6월 2일 기준 ‘롤린 댓글 모음’ 영상 조회수는 2043만 회에 이른다. ‘롤린 댓글 모임’ 2탄 조회수도 532만 회를 넘어섰다.
‘무야호’ 역주행 또한 신조어와 밈 문화가 결합돼 인기를 끈 사례다. 무야호는 ‘신난다’는 의미의 신조어. 인기리에 종영한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2010년 알래스카 특집방송에서 유래했다. 당시 유재석은 ‘무한도전’ 멤버들에게 “이건 알래스카에 사는 김상덕 씨도 아는 건데”라며 농담 투로 말했고, 멤버들은 이를 실제로 재현하는 도전에 나선다. 멤버들은 알래스카로 직접 날아가 교민들을 상대로 김상덕 씨를 찾던 중에 두 할아버지를 만난다. “평소 ‘무한도전’을 보신 적 있느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한 할아버지는 “없다”고 했지만, 또 다른 할아버지는 제작진을 배려하려는 듯 “자주 본다”고 답했다. 노홍철이 손을 앞으로 죽 뻗으면서 “무한도전 액션도 아느냐”고 물었다. 평소 프로그램을 시청한 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익숙한 동작이지만, 이를 알 리 없는 할아버지는 갑자기 손을 입에 모은 채 “무야~호~”를 외쳤다. 할아버지의 착한 거짓말과 순진무구한 표정, 정형돈이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그만큼 신나시는 거지”라고 마무리 멘트를 했던 게 ‘무야호’가 ‘신난다’의 뜻을 가지게 된 배경이다.
역주행 소요 기간 갈수록 짧아져
방송이 나간 2010년에는 ‘무야호’가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토트넘’의 조세 무리뉴 감독 인터뷰 영상과 ‘무야호’ 영상을 합성한 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급기야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10년 전 무한도전의 ‘무야호’ 영상이 화제로 떠오르면서 이내 신조어로 자리 잡았다.인터넷 공간에 역주행 현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스마트폰과 동영상 플랫폼이 대중화한 2010년대부터다. 가수 비의 ‘1일1깡’(노래 ‘깡’ 가사), 배우 박해준의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드라마 ‘부부의 세계’ 대사), 배우 김응수의 ‘묻고 더블로 가’(영화 ‘타짜’ 대사), 가수 이애란의 ‘못 간다고 전해라’(노래 ‘백세 인생’ 가사) 등이 역주행 신드롬을 일으켰다.
또한 2003년 종영한 드라마 ‘야인시대’ 영상이 최근 유튜브에 올라오면서 일명 ‘사딸라’ 짤이 온라인을 달구기도 했다. 극 중 협상에 나선 김두한(김영철 분)이 “미치겠구만…. 좋다 4달러!”라고 말하는 장면만 편집한 것이다. ‘사딸라’는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지름신’이 강림했을 때 사용하는 짤로 자주 쓰인다. 대중의 호응이 뜨겁자 햄버거 프랜차이즈 브랜드 버거킹은 김영철을 모델로 발탁해 ‘사딸라’ 문구를 전면에 내세운 광고를 선보이기도 했다.
현재 역주행 현상은 화력을 키우며 진화하고 있다. 콘텐츠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역주행을 시작하기까지 소요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역주행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5인조 걸그룹 EXID의 노래 ‘위아래’와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을 비교해 보자. EXID는 2014년 8월 발매한 노래 ‘위아래’ 활동 당시 음원차트 하위권에 머무르는 등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그해 10월 경기도 파주에서 열린 ‘한마음 위문공연’에 참석한 한 팬이 EXID 멤버 하니의 공연 모습을 ‘직캠’ 영상으로 찍었고, 유튜브에 공개하자마자 입소문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후 EXID의 ‘위아래’는 음원차트에 다시 진입, 그해 12월 여러 음원차트에서 1위를 치자했다. 이듬해 1월 지상파와 케이블 등 여러 음악방송에서도 1위를 석권했다. EXID의 ‘위아래’가 역주행을 하는 데 걸린 기간은 약 3개월에 이른다. 그러나 브레이브걸스의 ‘롤린’ 역주행은 이 모든 과정을 단 3주 만에 이뤄냈다. 이에 대해 이재원 연구위원은 “역주행 콘텐츠를 복제하고 소비하는 이용자, 더 정확히는 MZ세대의 파급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역주행 도우며 위로와 희망 얻어
2015년 9월 강원 인제군 스피디움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걸그룹 ‘여자친구’ 멤버들. 비에 젖은 무대에서 계속 넘어지면서도 꿋꿋하게 공연을 마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튜브 유저 ‘smile –wA-’ 영상화면 캡처]
역주행 콘텐츠를 즐겨 보는 직장인 서유미(29) 씨는 “역주행을 한 아이돌 그룹은 모두 중소 기획사 소속으로, 별다른 지원 없이 자기들 실력만으로 성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래들의 근성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감정을 이입하게 되니 자꾸 찾게 된다. 기적 같은 역주행을 통해 당사자가 보상을 받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중혁(25) 씨는 “인위적으로 꾸며낸 ‘역주행’이 아니라면 역주행 현상은 지금보다 더 많이 나타나도 좋을 것 같다. 내 마음대로 인생이 안 풀리고 포기하고 싶을 때 역주행 콘텐츠를 찾아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빛을 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위로를 받고 희망을 품게 된다”고 말했다.
역주행 현상이 하나의 주류 문화로 떠오르면서 이를 소비하는 팬덤의 위상도 달라지고 있다. 이상호 경성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는 “과거에는 미디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팬덤을 마치 극성스러운 집단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브레이브걸스 팬덤이 ‘꼬북좌’라는 별명을 가진 멤버 유정을 오리온 ‘꼬북칩’ 모델로 발탁하게끔 여론을 형성한 사례에서 보듯, MZ세대는 매스미디어나 기업을 향해 자기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을 권리로 여기고, 그것을 밈 문화처럼 즐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역주행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재원 연구위원은 “과거 영상과 음원을 이제 일반인도 얼마든지 동영상 플랫폼에서 쉽게 소비할 수 있게 됐다”며 “역주행은 앞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이나 범위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이상호 교수는 “역주행을 즐기는 과정에서 저작권 침해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글, 음원, 영상 등의 콘텐츠가 개인 미디어를 통해 여러 번 가공되다 보면 의미가 퇴색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며 “콘텐츠에 담긴 원작자의 의도를 훼손해 저작권 침해 등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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