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각색만 4년 걸려
연기가 적성에 가장 맞아
종일 ‘헌트’ 홍보에 새벽엔 ‘에미’ 캠페인
실제 사건은 영화적 장치일 뿐
정치 지향은 중도
이정재는 영화 ‘헌트’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고 각본과 주연배우로도 이름을 올렸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8월 3일 영화 ‘헌트’ 개봉을 앞두고 만난 이정재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속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작품에서 그가 쓴 왕관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주연배우에 각본, 연출까지 맡았다. 더구나 아티스트스튜디오가 공동 제작을 맡아 기획 단계부터 그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아티스트스튜디오는 그가 ‘절친’ 정우성과 함께 차린 영화제작사다.
‘헌트’는 1980년대 군부 정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첩보 액션영화다. 안기부에 숨어든 스파이 ‘동림’을 색출하기 위해 해외팀 차장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차장 김정도(정우성)가 서로 의심하고 갈등하는 과정을 팽팽하게 그린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연기 호흡을 맞춘 건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이다.
이 영화는 드라마 ‘오징어게임’ 주인공이 처음 감독을 맡은 작품이어서 해외에서도 큰 관심을 보인다. 5월 열린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인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공식 초청받은 ‘헌트’는 상영 후 관객들로부터 7분간 기립박수를 받았다. 판권이 북미 시장을 빼고도 144개국에 선판매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영화에 든 제작비는 205억 원. 관객 400만 명이 손익분기점이지만 해외 판매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다양한 OTT(Over The Top) 채널에 유통될 계획이어서 손해 보진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 관계자는 “이정재 감독이 사전 준비를 치밀하게 해 촬영하며 발생할 수 있는 누수를 많이 줄였다”고 전했다. 또 “정우성 배우와 ‘청담부부’로 불릴 정도로 절친한 데도 촬영 현장에서 서로 선을 넘지 않고 존중하며 배려하는 모습이 돋보였다”고도 했다. 이런 이정재를 주변 사람들은 “귄위적이지 않고 나이스한 매너 남”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일할 땐 완벽을 기하는 워커홀릭”이라고 평했다.
배우를 넘어 감독으로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 이정재와 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정장 대신 편한 의상을 걸친 그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지천명의 나이에도 슈트를 모델처럼 소화하는 패셔니스타가 아닌가. 그는 1993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한 후 스크린과 TV를 오가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제는 월드 스타 반열에 오른 30년차 배우이자 신인 감독에게 영화를 보며 쌓인 궁금증을 던졌다.
영화, 잘 봤다. 결과물이 만족스럽게 나왔나.
“작품에 대해서는 늘 아쉬움이 남는 것 같다. 다음 작품에서는 아쉽지 않게 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영화를 봤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칸영화제에 좀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선보였을 것이다. 칸에 갔다 와서 개봉 날까지 시간이 촉박해 욕심껏 수정하진 못했다.”
판권이 144개국에 사전 판매됐다.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은 거 아닌가.
“K-콘텐츠의 부가가치가 높아져 요즘은 우리 영화가 많은 나라에 팔린다. 큰 금액에 팔리는 건 아니어서 손익분기점에 다다를 정도는 아니다. 다만 이제 K-콘텐츠가 더 널리 알려져 다음 영화는 더 많은 나라, 더 높은 가격에 팔릴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자체가 뜻깊은 일이 아닌가 싶다.”
박평호 역을 겸하며 연출하다 보니 현장에서 정장 입는 감독으로 시선을 끌었다.
“박평호가 양복만 입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정장을 입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오는 장면이 아닐 땐 정장과 구두가 너무 불편해 ‘추리닝’에 운동화를 신었다. 어떤 날은 산발을 하고 다녀서 메이킹 필름 찍는 기사가 난감해하더라.”
어쩌다 보니…
‘헌트’의 원작은 ‘남산’이라는 시나리오다. 이정재는 ‘관상’ 한재림 감독을 통해 ‘남산’의 존재를 처음 알았고, 한 감독이 영화화를 포기한 후 우연히 그의 손에 들어온 ‘남산’을 읽고 나서 제작을 결심하고 7년 전 판권을 사들였다. 이후 각본을 맡을 작가와 연출할 감독을 찾았지만 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정재는 작가와 감독을 좀 더 쉽게 설득하고자 시놉시스 형태로 ‘남산’ 수정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4년 동안 작품을 각색하다 보니 수정본이 시나리오가 됐다. 원작에서는 주연이 한 명이던 것을 투톱으로 바꾸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해 북한 장교 이웅평 월남 사건, 아웅산 테러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 굵직한 사건을 버무려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그는 ‘헌트’가 완성되기까지 지난 7년을 돌아보며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중에게 사랑받을 영화를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그동안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등장하는 영화가 많이 나왔다. 기존 작품과 차별화한 지점을 꼽는다면.
“최근 수년 동안 액션이 부각되거나 액션과 코미디가 결합된 스파이 영화는 있었지만 정통 스파이 영화는 나오지 않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과거의 정통 스파이물과 달리 전개가 빠르고 액션을 좀 더 리얼하게 담아 관객이 좀 더 흥미롭게 영화에 몰입하도록 했다. 그래서 시나리오 단계부터 액션 몇 개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감정으로 찍을 것인지 구체화했다.”
제작 노트를 보면서 정말 어느 하나도 소홀하지 않고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원래 주도면밀하고 완벽을 기하는 성격인가.
“개인적으로는 치밀한 성격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니 준비가 꼼꼼하게 이뤄졌다.”
영화가 픽션이긴 하지만 1980년대 벌어진 실제 사건이 등장한다. 역사적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많다. 그 때문에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역사적 사건을 다뤄선 안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부담스러웠지만, 강한 신념을 가진 두 남자가 자신의 신념이 잘못됐음을 깨닫는 장치로서 필요했다. 이 영화는 두 요원이 대립과 갈등을 통해 보여주는 심리를 밀도 있게 그린다. 사건 자체는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잘못된 신념을 고집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연기는 물론 연출과 각본에도 도전했다. 적성에 가장 맞는 것은 뭔가.
“연기다. 대중에게 사랑받을 영화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예전부터 느꼈지만 이번처럼 시나리오 각색부터 촬영, 후반작업, 홍보, 관객과의 만남까지 전 과정을 모두 경험한 건 처음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고민과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한다는 걸 새삼 절감했다.”
‘절친’의 건강한 자극
영화 ‘헌트’의 한 장면. 이정재는 ‘절친’ 정우성과 23년 만에 연기 호흡을 맞췄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정우성이다. 4년 동안 거절했다. 얄밉진 않았다. 직업상 수없이 거절을 해보고 당해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절하는 이유는 작품이 싫어서일 수도 있고. 스케줄이 안 맞을 수도 있고, 캐릭터가 내키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배우는 시류에 따라 관객이 원하는 것에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기에 (정우성에게) 거절당해도 서운한 감정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우성 씨와 내가 너무 친해서 이번에 작품을 함께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의논해 작품을 결정하는지 알리고 싶다.”
정우성 씨가 결국 뭐라면서 출연 제의를 수락하던가.
“잘 고쳤다. 시나리오가 잘 정리된 것 같다고 하더라.”
친구나 동료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 정우성 씨를 평가한다면.
“사실 아티스트스튜디오를 만든 건 배우, 감독 같은 영역의 경계를 없애보자는 취지였다. 예전에는 ‘연기자가 무슨 감히 연출이야? 감독이 연출이나 잘하지 무슨 제작을 해?’ 그런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영역의 벽이 많이 허물어져 그냥 필름 메이커라는 호칭이 가장 적합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고, 감독이 배우를 할 수도 있고, 영화 안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수직적 관계보다 수평적 관계가 중요해졌다. 모든 사람의 의견이 다 소중하고 모든 사람이 하는 일이 다 중요하다고 여기게 됐다. 서로를 평가하는 시각도 감독일 때와 동료일 때가 다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우성의 연기는 멋있다. 캐릭터를 굉장히 무게감 있게 표현하고 액션 경험이 많다 보니 현장에서 아이디어도 많이 냈다. 정우성은 경험 많은 영화인이기에 동료 영화인으로서 도움을 얻고 싶고, 배우고 싶은 사람이다.”
정우성 씨는 “두 사람이 친하기에 함께하는 것이 더 어렵고 조심스럽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났다”고 한다. 당신은 어땠나.
“부담스럽기보단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있게 찍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김정도라는 인물이 원래 멋있는 캐릭터다. 김정도 캐릭터가 잘 살아야 박평호와의 긴장감이 유지돼 폭발력이 커진다. 그래서 더 잘 찍어주고 싶었고, ‘그 아저씨(정우성)’를 보면서 나도 그만큼 에너지를 뿜어내야 한다는 건강한 자극을 받았다.”
정우성이 냉철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던데.
“경험이 워낙 풍부하니까 전체적인 면에서 흐름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짚어줬다. 촬영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스태프와 배우들이 불편하지 않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래야 최상의 컨디션에서 촬영할 수 있다.”
숨은 메시지 찾기
강도 높은 액션 신이 많이 나온다. 어떤 면에 중점을 뒀나.“액션 장면을 시나리오대로 구현하되 임팩트 있게 보여주고 싶었다. 임팩트가 있으려면 아이디어가 좋아야 한다. 임팩트를 비주얼이 아니라 배우들의 감정 연기로 보여줬으면 했다. 총을 뽑기 전까지 심리 상태가 총을 뽑는 행동보다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국 영화에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폭파 장면이나 새로운 액션 신을 삽입해 신선한 재미를 더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그래서 촬영 준비를 위한 회의를 할 때는 무술팀만 오는 게 아니라 미술팀, 소품팀, CG팀, 카메라감독, 조명감독, 자동차업체까지 모든 스태프가 참여해 가장 이상적인 틀을 짰다. 그렇게 꼼꼼하게 준비한 것이 현장에서 사고 없이 촬영하고, 찍는 시간과 예산 낭비를 줄이는 데도 도움이 됐다.”
코로나19 사태로 해외 촬영이 힘들었다. 태국이나 일본, 미국 장면은 어떻게 촬영했나.
“일본과 태국 장면은 처음부터 한국에서 찍으려고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계획을 세워뒀다. 현지를 가지 않더라도 미술적으로 적당히 효과를 내고 CG로 빈 공간을 채우면 가능할 것 같았다. 현지에 가서 찍는 것만큼 효과적인 건 없지만 코로나 시국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코로나 확산세가 갈수록 심해져 외국에 나가려면 예산이 2~3배가 더 들어야 했다. 미국 신은 꼭 현지에서 찍고 싶었다. 국내에서 촬영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 탓에 출국 일정을 미루다 보니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아 결국 CG와 기마대로 리얼리티를 살렸다. 그 시대에는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기마대가 있었다. 극장에 사람이 몰리면 말 탄 경찰들이 와서 혼란 상황을 정리해 줬다고 한다. 그래서 기마대가 와야 흥행한다는 말을 믿는 영화인이 적지 않았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드러낸 적이 없다. 그런데 ‘헌트’를 보니 “이정재가 이렇게 강렬하게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를 만들었어?” 하는 반응이 관객 사이에서 나온다.
“내 정치적 지향은 중도다. 영화 제작에 200억 원이 넘게 들어갔는데 어느 한 진영에서만 재미를 느끼게 만들면 되겠나. 내 메시지가 영화에 많이 반영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제나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사회를 마치고 기자나 관객들과 후일담처럼 영화 에필로그를 말하는 것이 좋다. 이번 영화에서는 평호와 정도의 신념과 올바른 선택이 부각된다. 그리고 이념 갈등보다 세대 간 갈등을 중요하게 다룬다. 현실에서도 세대 간 갈등이 심각하다. 다만 영화에서는 세대 간 갈등 정도가 심하진 않고 계속 소통하려 노력하는 점이 고무적이다. 관객이 저마다의 관점에서 공감할 부분을 찾기 바란다. 그런 부분이 잘 읽히고 관객이 공감한다면 그 자체가 만든 이로서는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 이정재는 박평호를 연기하며 허스키한 목소리를 낸다. ‘신과 함께’ 시리즈나 ‘관상’에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다. 이정재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연기한 작품은 대부분 흥행했다. 허스키한 톤이 자연스러워 기자는 그의 목소리가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작품에서 왜 목소리를 바꾸느냐는 우문에 그가 현답을 내놨다.
“연기자는 표정뿐 아니라 목소리 음역대도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캐릭터에 맞춰 목소리를 바꾼다. 가장 적합한 목소리를 구사하기 위해서다.”
함께하는 소중함
스펙터클한 액션 신을 대역 없이 소화했다고 들었다.“대역을 쓴 장면도 있다. 다만 웬만하면 직접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내년이면 30주년을 맞는 그의 배우 인생을 관통한 두 가지 철칙이 있다.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 것”과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동료가 되는 것”이다. 촬영 현장에서는 개인기 못지않게 팀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같이 일하는 게 힘들고 괴로우면 누구도 손 내밀지 않을 것”이라며 “나 나름의 철칙을 잘 지켜 지금까지 연기를 업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삶을 흔들리지 않게 지탱하는, 인생의 나침반 같은 좌우명은 뭘까. 그는 잠깐 생각에 골몰하더니 “옳은 길을 찾자”라고 답했다. 안전하고 편한 길이 아닌 ‘옳은 길’이라는 단어가 단단하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앞으로 활동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지금은 ‘관객과의 만남’에 충실하고 싶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이후 실로 오랜만에 갖는 만남이다. 예전에는 영화를 개봉할 때마다 ‘관객과의 만남’을 진행해 그 소중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요 몇 년 동안 코로나19로 만남이 단절되다 보니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느끼게 됐다.
차기작은 정했나.
“아직 정하지 못했다. 시나리오 몇 편이 들어왔지만 읽을 시간이 없었다.”
9월 12일 열리는 에미상 시상식에 ‘오징어게임’으로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시상식이 열리기 전까지 ‘오징어게임’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영화 홍보 활동과 병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영화 홍보 일정과 겹치지 않는 새벽에 캠페인 활동을 펼친다. 당분간 불철주야 바빠 다른 일 생각하는 건 엄두를 못 낼 것 같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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