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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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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트랩
2002년 1월 중순 오후 6시, 한겨울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서울 논현동 거리는 쓸쓸하게 느껴졌다. 도로를 꽉 메운 자동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바쁜 길을 재촉했다.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스산한 겨울바람에 코트 깃을 꼿꼿하게 세우고 종종걸음으로 바삐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마다 각자의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확신을 가지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이곳을 떠나면 가야 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마음이 착잡했다.

A협회에서 2년을 잘 버티어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마음은 굳어졌다. 그러나 59세에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화려한 경력과 야망도 1997년 금융위기 쓰나미에 휩쓸려 퇴색했고, 일에 대한 열정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전화벨 소리에 놀라 후닥닥 수화기를 들었다. 현대건설의 이 전무였다. 뜬금없는 전화에 의아했지만 반가웠다.

“오랜만입니다. 이 전무가 이 시각에 전화를 하다니 웬일입니까?”



“한번 뵙고 싶어서요. 시간 좀 내주시지요.”

“회사가 망합니다!”

다음 날 저녁, 이 전무의 주선으로 토목본부장과 만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홍콩 CT-9 프로젝트는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착공 20개월째인 현재 공사기간이 많이 지연되면서 발주처가 현장조직을 완전히 바꿀 것을 요청했고 급기야 계약 해지를 들먹이는 긴급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잘못되면 회사가 망합니다. 홍콩에 출장 중인 김 특보께서 특별히 백 사장을 현장소장으로 추천했으니 부탁합니다.”

그의 태도는 사뭇 비장해 나조차 긴장될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로서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려고 고민하던 중이었기에 김 특보의 추천은 좋은 기회로 생각됐다. 내 생애 첫 직장으로서 20년간 청춘을 바친 현대건설이 아니던가. 개인사업을 하기 위해 뛰쳐나온 지 정확히 11년 만에 다시 옛 직장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홍콩 공사의 발주처는 한 회사나 정부기관이 아닌 3개의 서로 다른 회사가 대표를 파견해 구성된 공동체였다. 발주처의 공식적인 업무는 한시적으로 설립된 사업관리사무소(PMO)에서 대행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각 투자회사와 그 대표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모든 의사결정이 늦고 진행이 까다로워 현장을 운영하는 데 애로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엔지니어 회사도 서로 다른 2개의 설계회사가 합작,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기력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발주처의 눈치만 보는 상황이어서 간섭만 심하게 할 뿐 막상 필요한 의사결정을 끌어내지 못했다. 게다가 사업시행허가를 내준 홍콩 관청의 온갖 간섭까지 겹쳤다.

너무 낮은 가격으로 공사를 수주한 것 외에도 이러한 주변 환경의 악재가 겹쳐, 공사기간은 1년 이상 지연됐고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공사를 끝낼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현장소장을 비롯한 임직원은 각종 간섭과 불신에 시달려 의욕을 상실하고 체념상태에 있다고 했다. 기회만 있으면 이 현장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전출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2002년 1월31일 나는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2주간의 분주함을 떨쳐버리고 휴식을 취하려고 했으나 나의 뇌는 휴식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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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호 / 일러스트·이승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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