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 중앙아시아학회 엮음/ 사계절/283쪽/ 1만5000원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실크로드라는 학술용어는 그 자체가 문화교류의 여러 루트나 교역의 부산물로서의 모호한 문화교류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명멸한 여러 문화권 사이의 복잡다양한 문화교류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화변용(變容) 현상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이번에 간행된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는 아시아 지역사 연구 모임인 중앙아시아학회가 2005년 가을에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의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1993년에 발족한 중앙아시아학회는 그동안 역사학을 비롯해 고고미술사학, 언어학, 복식학, 음악학, 음식학 등 다방면의 학자가 참여해 공통 관심사에 대한 학제적(學際的) 연구를 수행해왔다.
실크로드의 역사적 현장성 확인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글은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실크로드 각지에서 전개된 주민들의 구체적인 삶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종교를 살펴봄으로써 그 역사적 현장성을 확인하려는 작업의 일환이다.
수많은 논저를 통해 ‘실크로드 학자’로 익히 알려진 정수일은 ‘실크로드의 개념과 그 확대’에서, 실크로드를 유라시아 대륙에 한정된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신대륙’까지 포함하는 환지구로(環地球路)로서 그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예일대 교수 밸러리 핸슨(Valerie Hansen)은 ‘실크로드 무역이 한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에서, 소위 실크로드를 통한 대상(隊商)무역이 지역사회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실크로드의 요충이자 중국문화와 중앙아시아 문화가 만나는 지점인 투르판 오아시스의 아스타나 고분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문서를 분석해 실크로드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당대(唐代)에조차 투르판 지역 주민 대부분은 실크로드 무역에 종사하기보다 토지 경작에 생계의 근거를 뒀으며, 실크로드 무역은 투르판 지역 경제에 별 중요한 구실을 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원주대 교수 김용문은 ‘신 출토자료에 나타난 소그드 복식’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아프라시압 벽화, 소그드인의 고도(古都)로 알려진 타지키스탄의 판지켄트 벽화에 나타난 인물의 복식을 비롯해, 근년의 괄목할 만한 발굴 성과의 하나로 여겨지는 중국 내 소그드인 묘지의 부조(浮彫)에 나타난 인물 군상의 복식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중국 신장(新疆) 문물고고연구소의 위즈융(于志勇) 부소장은 고대 서역의 대표적인 오아시스이자 실크로드의 교통요지 누란과 영반에서 출토된 상장의례(喪葬儀禮)를 위한 작은 옷 ‘명의’의 형태와 기능 그리고 성격에 대하여 논했다.
일본 오사카대 교수 모리야스 다카오(森安孝夫)는 ‘당대(唐代) 불교적 세계지리와 호(胡)의 실태’에서, 일본에 전래되어 현존하는 범한사전(梵漢辭典)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번한대조동양지도(蕃漢對照東洋地圖)’에 나타난 지명 등을 비교분석했다. 그 결과 초당(初唐)부터 중당(中唐) 말엽에 이르기까지 한어(漢語) ‘호국(胡國)’이라는 표현은, 과거에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한 서아시아 세계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소그드국을 가리키는 것이며, ‘호(胡)’라고 함은 소그드인이나 소그드어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미술사 관련 논문인 서울대 이주형 교수의 ‘간다라 미술과 경전상의 자료’는 간다라 고행상(苦行像)을 중심으로 불교경전과 불교회화와의 상관관계를 주도면밀하게 풀어냈다. 일본 도쿄 농업대 교수 야마베 노부요시(山部能宜)의 ‘중앙아시아 불교의 관상(觀想) 수행’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등 여러 경전의 내용과 투르판 오아시스에 조영된 토육 석굴사원의 벽화를 비교분석해 한역 선경(禪經)과 회화가 지역 수행자들의 구전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한신대 이평래 교수는 ‘16세기 말 이후 몽골 불교의 확산과 전개’에서, 몽골의 불교사에 대한 전체적인 개관을 시도하고, 몽골에서 샤머니즘을 비롯한 전통신앙과 관습이 불교체계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불교가 몽골의 새로운 민족종교로 대두했음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