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면서도 틈틈이, 주로 ‘포장마차’에서 소설을 썼다. 총 3편을 써서 ‘한국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에 냈는데, 결국 ‘한국일보’에 당선된다. 번역과 창작을 병행한 1987년, 그리고 1988년의 결실은 그로 하여금 소설이 아닌 번역을 직업으로 선택하게 만든다.
“‘화산도’를 번역하면서 처음으로, 번역도 글쓰기의 일종이니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러는 차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화산도’도 출간되고 나니 번역과 소설 양쪽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어요. 소설가가 번역하면 좀 낫지 않겠나 싶었는지. 1987년에 그렇게 계기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까 싶어요. 그전의 10년은 제게 ‘잃어버린 10년’이지요.”
이후 한동안은 번역과 소설 쓰기를 ‘왔다갔다’했다. 창작집 ‘이상의 날개’, 장편소설 ‘섬에는 옹달샘’ 등을 발표했다. 그런데 점점 소설 쓰기가 싫어졌다. “소설쓰기가 힘들기도 했고, 1990년대 이후 후일담 소설, 신변잡기 소설이 만연하는 분위기가 실망스러웠다”고 털어놓는다.
섬사람의 배타성
▼ 수준 높은 외국 문학을 계속 접하다보니 아무래도 글쓰기가 더 힘들어진 것 아닐까요.
“좋은 책 번역하고 나면 두 가지 기분이 들어요. 난 왜 이만한 글을 못 쓸까 하는 자괴심과 이만한 책을 내가 번역해서 내놓는다 하는 자긍심. 번역을 하면서 대리만족하는 것도 있죠. 그만한 수준의 글을 번역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채운다고 해야 할까.”
▼ 불어, 일어, 영어를 넘나들며 번역했는데,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
“영어 50%, 일어 30%, 불어 20%쯤 되는 것 같아요. 불문과 나왔으니 영어는 기본이고, 일어는 국문과에 학사 편입해 다니면서 독학했어요. 대학원 다닐 때 현대시를 공부하려고 했는데, 현대시엔 일제 강점기도 포함되니까 일어를 알아야 했죠. 또 1970년대 후반, 대학에선 일어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투쟁 일변도의 학생운동이 이념적으로도 조직화하기 시작한 때라 학생들끼리 사회과학 서적을 번역해 팸플릿처럼 돌려 읽었는데, 원저를 번역하기가 힘드니까 일본어로 번역된 걸 중역(重譯)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마오쩌둥이며 마르크스에 관한 책들이 대부분 그렇죠. 물론 저는 개인적인 필요에서 일본어를 공부했지만.”
▼ 학생운동은 안 했나요.
“전혀요. 전 술 마시고 글만 썼어요. 학생운동과 일정부분 거리를 둔 게….”
그가 일어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책을 한 권 가지고 나왔다.
“여기에 내가 글을 썼는데, 학창시절 가졌던 생각이 담겨 있어요. 제주도에서 올라올 땐 공부하고 싶었는데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 않은 데 대한 불만, 그리고 섬사람 특유의 배타성도 작용했겠죠. 운동에 거리를 뒀어요.”
그가 내민 책은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모임 ‘마당’ 회원들이 입학 30주년을 맞아 2002년에 펴낸 에세이집, ‘새벽을 엿본 마로니에 나무’다. 목차에 황지우, 김정환, 정동영, 이해찬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은 ‘오기와 치기 사이’다. 흔히 ‘긴급조치 세대’ ‘유신학번’이라 불리는 72학번이지만, “제주도 촌놈이어서 서울 중심의 놀이판에는 별로 이해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써놓았다. 겉도는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것뿐이었고, 73년과 74년 연이어 대학문학상을 받자 우쭐해지기도 했으나 “그것은 재능의 소산이 아니라 오기의 치졸한 방사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