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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상징의 주술사 이상남

무의미하기에 유의미한, 그리되 안 그린 듯한

기호와 상징의 주술사 이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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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상징의 주술사 이상남

이상남은 자신의 작품에서 환영(幻影)을 제거함으로써 관객의 환영이 개입할 여지를 던져준다.

조지프 러브는 3분의 1쯤 열린 창문 사진 작품을 통해 여백과 공간, 그리고 물성과 심연의 차이를 사진이라는 평면을 통해 보여주는 이상남의 한없는 깊이와 공간감에 매료돼 있었다. 더욱이 이상남은 그때 막 약관을 넘긴 나이였다. 이런 연유로 1977년 도쿄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 전에 참가하게 됐고, 타이베이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 전에도 대학시절 은사들과 함께 참여한다. 이어 1979년 일본 고마이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것을 비롯, 마키갤러리 등 여러 일본 화랑이 기획한 각종 그룹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그의 열망은 다 채워지지 않았다. 못 말리는 역마살을 달랠 기회는 또다시 왔다. 제15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선정된 것이다. 그는 지구 반대편의 상파울루를 거쳐 파리에 닿게 된다. 외국으로 나갈 기회가 원천 봉쇄되다시피 했던 시절 김환기나 김병기 등 선배작가들처럼 그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해외로 나가는 통로로 삼은 것이다.

파리는 이미 뜨거운 미술의 현장을 넘어 하나의 역사가 돼 있었다. 그는 파리 정착이 미술가로서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1년 만에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미국행을 노린다. 그러던 1980년 제2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무대미술상을 수상한다.

‘청년문화’라는 다소 치기 어린 사건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사실은 한겨울이나 다름없는 시절이었다. 여권을 소지하고 외국여행을 간다는 것은 특권층이나 누릴 호사이던 때 일본이나 브라질에 간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의 청년기는 아름답고 소담스러웠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취한 꽃들은 이내 땅바닥에 떨어져 추하게 뒹구는 법. 그는 화려했던 봄날을 접고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죽기 아니면 살아남기



1981년 뉴욕에 도착했다. 그에게 뉴욕은 희망의 도시인 동시에 절망의 땅이었다. 물 설고 낯선 그곳에서 인간과 작가로서의 삶을 동시에 이어가야 했다. 뉴욕에 왔을 때 그를 뼈저리게 한 것은 무엇보다 그가 한국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배운 현대미술이란 것이 단지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안젤름 키퍼 등 독일 신표현주의가 이미 소호를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줄리앙 슈나벨, 데이비드 살르, 에릭 피슬, 로버트 롱고 같은 미국 작가들의 새로운 구상이 각광받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주로 회화나 조각 등 전통적인 형식을 사용하는 절충적인 작품으로 미술계의 주류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고향을 잃어버린 듯, 조상을 잃어버린 듯했다”고 회고한다. 어떤 것도 그리거나 만들 수 없는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처음부터 그려보기로 마음먹지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3~4년간 화실에 틀어박혀 자신을 버리자 조금씩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머리로, 입으로 그리던 그림을 손으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린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화가로서의 뛰어난 기질이었다. 그는 신주류로 등장한 이탈리아, 독일, 미국의 새로운 구상회화류 작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려낼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이상남식’ 그림을 실험했지만 그게 어느 날 문득 득음(得音)하듯 이뤄지는 건 아니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쉬운 길을 골라 뉴욕이라는 미술인들의 정글에서 잠깐 반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만의 회화를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잡아간 가닥은 교조적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삶과 분리하지 않았다. 노동과 번민이라는 심적 육체적 고통을 자신이라는 개체에 동일화함으로써 자신의 내외부가 일체를 이룬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 기초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미술과 자신이 유리되지 않은, 대중과 자신의 작품이 일체화할 수 있는 장치들을 연구했다.

그는 미니멀리즘의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회화의 전통 중 수공예적인 기법에 주목했다. 그리고 언어가 갖는 문학적 다의성에 초점을 맞춰 하나의 기호, 상징으로서의 회화를 화두로 잡았다. 그 화두를 자신의 내외부와 싸우는 도구로 삼아 삶의 정글 속에서 살아남자고 다짐했다.

그린버그류의 자기만족적인 모더니즘은 사람들과 동떨어진 산꼭대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미술을 원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신구상회화다. 이들은 전통적 화법을 사용해 자유로운 주제를 구사하는 새로운 흐름으로 1980년대 세계 미술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이런 흐름을 거부하기로 작정한 이상남이지만, 쉽게 구상적인 소재를 선택하고 거기에 몰입할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서양 사람들도 알고 있는 보편적인 이야깃거리가 없다는 것 또한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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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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