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성과 그의 작품 ‘ 한정’(위). ‘황소’의 작가 이중섭(아래).
한평생 고달픈 삶을 살았어도 예술가는 그가 남긴 작품으로 후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신록이 푸르른 지금, 그들의 무덤은 비석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곳에 가면 그들이 살던 집에서보다 더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고인의 묘지는 생가보다 더 소중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망우리공원 측은 1997~98년 공원화사업 당시,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나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지사 중심으로 연보비와 안내도를 만들었을 뿐, 화가와 문인 등은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인성과 방정환
동락천 약수터 오른쪽 위 좁은 길을 올라가면 독립지사 유상규의 묘가 나오고, 다시 오른쪽 위에 있는 도산 안창호의 묘터를 지나 능선 길을 올라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커다란 자연석의 ‘사설(私設)’ 연보비가 보인다. ‘근대 화단의 귀재 화가 이인성’이라 쓰인 연보비의 뒷면에는 그의 치적이 적혀 있다.
‘서양화가 이인성(李仁星)은 1912년 8월28일 대구시 북내정 16번지에서 태어나 17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이래 한국 근대미술 도입기와 성장기에 빼어난 창작활동을 펼쳤다. 일본 도쿄 태평양미술학교 재학시절 제국미술전람회, 문부성미술전람회, 광풍회 공모전 등에 입선, 일본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1935년 귀국한 뒤 대구와 서울에서 활약하면서 선전(鮮展)·제전(帝展) 등에 여러 차례 입선·특선했으며, 선전 추천작가, 국전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우리 화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한국 미술사에 길이 빛날 작품들을 남긴 그는 1950년 절정의 기량을 더 펼쳐보지도 못한 채 38세로 요절, 불꽃같은 예술적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50주기인 2000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대구광역시가 이인성미술상을 제정했으며, 2003년 11월에는 문화관광부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3년 10월 16일 이인성 기념사업회 세우다’
묘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검은 단비가 자리잡고 있는데 거기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쓰여 있다.
‘이인성(1912~1950). 1912 대구에서 출생. 1928 ‘촌락의 풍경’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1929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그늘(陰)’ 입선. 1944년까지 16회 연속 선전 출품. 1935 제22회 일본 수채화회전 ‘아리랑고개’ 일본 수채화협회상(최고상) 수상. 제14회 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수상. 1937 제16회 선전 서양화부 추천작가 선임. 1949 제1회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 6.25 당시 작고. 1998 월간미술 주관 ‘근대유화 베스트 10’에서 ‘경주의 산곡에서’ 1위 선정. 2000 호암갤러리에서 작고 50주기 회고전 개최 ‘이인성미술상’ 조례 지정. 2002 문화관광부 2003년 11월 이달의 문화인물 이인성 선정’
단비에 쓰인 내용 중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특선을 한 것은 맞지만 ‘세계아동미술전람회’가 아니라 ‘세계아동예술전람회’가 옳다. 이 전람회는 소파 방정환 등이 운영한 출판사 ‘개벽사’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해 경성에서 개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였다. 필자는 ‘신동아’ 2008년 5월호에 실은 ‘소파 방정환’의 글에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소년 이인성이 특선을 한 사실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근거로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