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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하게 젖은 꽃잎’ 닮은 시인 김선우

“詩心 차올라 온몸 간질거리는 거, 꾹 참는 즐거움을 아세요?”

‘촉촉하게 젖은 꽃잎’ 닮은 시인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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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선우의 시는 여린 듯 강렬하고 수줍은 듯 관능적이다. 그녀의 시에서 절로 배어나오는 물기는 어둡고 따뜻한 자궁 속에서 출렁거리는 양수에 가깝다. 그녀의 여성성이 발산하는 새로운 빛은 이 양수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다.
‘촉촉하게 젖은 꽃잎’ 닮은 시인 김선우
시인 김선우(金宣佑·38)를 만날 날짜를 미리 잡아놓고, 중국으로 일주일간 답사여행을 떠났다. 중국 여행을 함께 할 일행 둘은 큰 여행가방을 들고 공항에 나타났다. 나는 여행가방은 따로 준비하지 않았고, 평소 메고 다니던 베낭에 옷 한 벌과 수건 한 장, 그리고 김선우 시집 한 권과 노트, 연필을 담았다. 작은 가방을 어깨에 메니 짐이라기보다 가벼운 날개 같았다. 일행 중 하나가 내 가방을 보더니 자기는 잠시 외출을 할 때에도 그것보다는 큰 가방을 든다며 웃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광화문으로 잠시 외출하는 듯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어디 가는 게 싫다. 사실은 방에 쇠창살을 박아놓고 스스로를 감금하고 싶은 심정이다.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자꾸만 나가서 놀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안중근 의사의 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여행이기에 일에 가깝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급한 일들이 밀려 있는데도 용기를 냈다.

마음에 맺힌 시들

막상 하얼빈행 비행기를 타자 마음은 무거웠지만,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가보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더라도 짐을 들기 싫어하는 내가 김선우 시집을 넣은 것은 그녀의 시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시를 섬세하게 읽은 지가 오래됐구나 싶었다. 특히 후배 시인들의 시는 어느 사이엔가 내 관심에서 멀어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 마음에 김선우의 시가 몇 편 쏙쏙 들어왔다.

토담 아래 비석치기 할라치면



악아, 놀던 돌은 제자리에 두거라

남새밭 매던 할머니

원추리 꽃 노랗게 고왔더랬습니다.

뜨건 개숫물 함부로 버리면

땅속 미물들이 죽는단다

뒤안길 돌던 하얀 가르마

햇귀 곱게 남실거렸구요.

-시 ‘할머니의 뜰’ 중에서

처음엔 시를 눈으로만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맺힌 시들을 조용히 소리 내어 읽었다. 그녀의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기분이 좋아져 흥얼거리기도 한다. 나는 답사를 하는 동안에 혹시 지루한 시간이 생긴다면 그녀의 첫 시집을 소리 내어 읽어볼 생각이었다.

하얼빈에 도착해서는 그녀의 시집을 읽지 못했다. 하루 이틀이 바쁘고 고단했다. 하얼빈 일정을 끝내고 다롄으로 가는 밤 열차 안에서야 나는 그녀의 시집을 꺼내들었다. 밤 9시에 기차를 타서 잠이 들었고, 새벽 2시쯤 깨어 열차 침대머리 맡에 있는 작은 등을 밝혔다.

차창으로 보이는 밖은 어두웠다. 차창은 거울이 되어 내 모습을 비춰줬다. 잠시 내 모습을 보았다. 지금 우리는 만주 벌판을 지나고 있다. 내 옆에서 잠자던 일행이 말했다. 만주 벌판, 저기 어디쯤에서 ‘개장수’들이 말을 타고 달렸을 것이다. 이 기찻길로 안중근 의사가 뤼순으로 압송됐다. 그는 창밖을 조금 보다가 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겠다면서 나갔다. 나는 잠시 안중근 의사 생각을 하다가 김선우의 시집을 아무 생각 없이 펼쳐들었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했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 시 ‘얼레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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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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