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의 대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 1986) 선생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며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눈이 멀었다. 물론 시력이 나쁜 유전 체질을 가졌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눈이 멀고도 책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해 “천국은 도서관 모양일 것”이라 중얼거렸다고 한다.
한국에도 다치바나나 보르헤스 같은 분이 계실까? 아마 적지 않으리라. 조선시대의 학자 이덕무(1741~1793) 선생은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불렀다. ‘책만 읽는 바보’란 뜻이다. 그만큼 그는 독서를 즐겼고 많은 책을 모았다.
그럼 요즘은 어떨까.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책이 TV나 인터넷에 밀린다는 시점에…. 주위에 독서광(讀書狂) 지인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극소수다. 명문대학 나오고 지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조차 핵심 자리에 앉으면 회식, 각종 행사, 골프에 시간을 뺏겨 책을 들출 틈이 없다. 그러다보면 책과의 인연이 차츰 멀어진다. 그의 책상 위엔 증정받은 책들만 쌓인다.
아름답게 미친 사람들
오늘날 한국인의 독서 행태에 대해 걱정하던 차에 ‘한국의 책쟁이들’이란 책을 발견하곤 적이 안심이 된다.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서적을 읽고, 모으는 데 거의 온 영혼을 바치는 인물들을 찾아내 스물여덟 꼭지로 나눠 소개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대학교수, 학자여서 이런 일이 직업과 직접 관련되지만 대다수 다른 분들은 직업과 무관한 애호가다. 그저 자식처럼 책을 아끼고 돌보는 사람들이다.
현직 언론인인 저자는 전국 곳곳을 돌며 독서가들을 인터뷰하고 사진도 직접 찍었다. 저자는 이들에 대해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책을 펴 읽고, 서점이나 헌책방에서 주머닛돈을 뒤적이는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이라 말했다. 저자는 “조금 차이가 있다면 일상의 번다를 버리고 책으로써 취미를 압축했다는 점”이라면서 “이들이 있어 우리 사회가 이만큼 지탱된다고 본다”고 높이 평가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가히 ‘책에 미친 사람들’이라는 말이 과장되지 않음을 알겠다. 이들은 미쳐도 아름답게 미친 게 아닐까.
춘천시 석사동의 ‘피스오브마인드 베이커리 & 북카페’에 들어서면 100여 평의 널찍한 공간에 책들이 그득하고 향긋한 빵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북카페 김종헌 대표와 전통제과연구소 이형숙 소장이 함께 꾸려가는 이곳엔 이들 부부가 모은 책 1만권, 음반 3000점, 서화 300점이 소장돼 있다. 남영나이론 대표이사를 지낸 김 대표는 2000년 사임서를 내고 홀연히 회사를 떠났다. 사임서에는 ‘북카페를 차리기 위해서’라 적었다고 한다. 김 대표가 독일 뒤셀도르프 지사장으로 근무할 때 남편 따라간 부인은 독일 제빵 기술을 배웠다. 이들 부부의 책사랑 덕분에 춘천에는 명물 북카페가 생겼다.
동두천시에서 전통찻집 ‘한다원’을 경영하는 김경식·이주원 시인도 책과 시에 삶을 쏟는 부부다. 이들은 지역 문인 모임인 이담문학회 회원인데 두 달에 한 번씩 이 찻집에서 만남을 갖는다. 이곳은 영업장이기보다는 지역문화의 산실인 셈이다. 차값도 아주 싸다. 찻집 한쪽 벽 서가에는 시집이 꽉 찼다. 이들은 군부대·경찰서·교도소·동사무소 등 책이 궁한 곳에 책을 기증하는 일에도 앞장선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1910~1987) 회장의 탄생 100주년이 내년이다. 호암과 관련한 책은 지금까지 수십 종이 나왔다. 그러나 제대로 된 평전은 아직 없다. 호암의 생전에 출판된 ‘호암자전’은 자서전이어서 제3자가 쓰는 평전은 아니다. 호암평전 집필을 준비하는 박세록 선생은 책 내공이 범상치 않은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호암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삼성 비서실 출신이다. ‘삼성 비서실’이란 저서를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