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20세기 영화 연출자들에게 유용한 참고가 돼온 발자크 소설의 일단이다. 독자들은 스크린에서처럼 문장과 행간 사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발자크에서 출발한 이러한 스크린(scene) 기술 또는 전통은 플로베르(‘감정교육’의 파리)를 거쳐 제임스 조이스(‘율리시즈’의 더블린), 버지니아 울프(‘댈러웨이 부인’의 런던) 등 20세기 현대 작가들에 이른다. 그리고 1930년대 모던 보이 박태원(‘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경성)이 있고,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21세기 정한아(‘리틀 시카고’의 기지촌 골목)가 있는 것이다.
미군들이 지은 그 이름은 마피아와 갱단이 활약하던 범죄의 도시 시카고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노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 … 그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 꼭 무지개가 뜨는 것 같았다. 그 골목은 갖가지 색깔을 품고서 오십 년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골목 한가운데서 레스토랑을 했다. -정한아, ‘리틀 시카고’ 중에서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는 미군부대 기지촌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무대 삼아 3대에 걸쳐 골목 레스토랑 안팎에서 벌어진 골목담의 이모저모를 펼쳐 보이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화자가 12세 선희라는 것이다. 골목담이되, 열두 살 소녀의 눈에 비친 제한적인 풍경이다.
원체험 불모 세대의 소설적 탐구
골목 사람들의 얼굴은 항상 미군부대 쪽을 향하고 있었다. … 미군들이 골목을 떠날 때마다 샬롬하우스의 아이들이 늘어났다. … 토니 아저씨는 골목 안에서 제일 유쾌한 미국인이었다. 미군으로 이 골목에 들어온 아저씨는 부대 내 현지 직원이었던 한국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곧 그녀와 결혼해서 미카를 낳았다. 아저씨는 뉴올리언스 출신이었다. 나는 그 도시의 안개와 유령, 루이 암스트롱에 대해서 질리도록 들었다. -위의 책 중에서
소설은 이야기, 그것도 특별한 이야기를 토대로 짜인다.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기가 모두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는 어떤 의미에서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나 박완서의 ‘나목’의 고유한 장면을 환기시키며 동류항의 면모를 보인다.
해안촌(海岸村) 혹은 중국인 거리라고도 불려지는 우리 동네는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 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 길 양켠은 가건물인 상점들을 빼고는 거의 빈터였다. 드문드문 포격에 무너진 건물의 형해가 썩은 이빨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 오정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유년의 뜰’ 중 ‘중국인 거리’ 중에서
부옇게 흐린 날씨에 정전까지 겹쳐 네 명의 환쟁이들은 능률을 못 내고 있었다. … 환쟁이들이 밥벌이로 하고 있는 이 초상화 그리기가 이만치라도 바쁜 것은 고작해야 미군들 봉급날인 월말을 전후해서 일주일쯤이지 그 밖의 날은 그저 심심풀이나 면할 정도였다. … 갑자기 환한 조명 속에 건너편 미국 물품 매장 쪽을 나는 마치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보듯 설레는, 좀 황홀하기조차 하는 기분으로 바라봤다. - 박완서 지음, 세계사, ‘나목’ 중에서
전쟁 중 폐허가 된 수도 서울의 PX 초상화부를 무대로 예술과 사랑을 향한 스무 살 여성의 불안한 심리와 동경을 그린 ‘나목’(1970), 전후 인천 중국인 거리의 불안정하고 야릇한 이국 장면에 열세 살 초경 무렵 소녀의 흔들리는 심리를 제한시점으로 투영한 ‘중국인 거리’(1979). 그리고 전쟁은 끝났으나 50년째 이어져온 미군 기지촌 레스토랑을 무대로 전해지는 인생유전을 전쟁 체험 세대인 할아버지의 어린 손녀의 눈으로 관찰한 ‘리틀 시카고’(2012). 이들은 작가 개인의 유년 체험이지만, 역사의 특별한 시기, 특별한 공간과 맞물리면서 체험이 소설로 발전한 경우들이다. 이때 체험은 전쟁이나 가난, 불구 등 특수한 시기, 특수한 사건에 뿌리를 둔 창작의 동력으로 원체험이라고 부른다. 박완서, 오정희의 유년의 삽화가 전쟁 체험 세대의 원체험에서 기인한다면, 정한아의 경우 원체험 취약 또는 불모 세대의 소설적 탐구라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세상(소재)은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주제에 치중한 미성숙한(거창한) 주장도 소재에 함몰된 과잉(자의식) 묘사도 아닌, 서른한 살 작가 정한아가 선택한 골목담, 과도하지 않은 소소함과 리듬감이 돋보인다.
미군들이 이 골목을 떠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솟아오르기라도 할 것처럼 혼비백산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땅은 어둠과 고요 속에 빠져버렸다.
사람들은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 제대로 된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정한아, ‘리틀 시카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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