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중반 최고의 청춘스타였던 임예진, 전영록.
내가 냄새나는 사내들이 싸움질하는 영화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에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이미 서너 편이나 개봉된 상태였다. 하지만 곧장 극장으로 달려가지는 못했다. 그때는 좋아하는 여자 배우가 있어도 그녀의 얼굴이 담긴 브로마이드 혹은 사진을 갖고 다니거나 방에 붙여 놓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때였다. 친구들에게 걸리면 “사내새끼가 여자 사진이나 보고, 쪽 팔리게” 하며 비웃음을 샀기 때문이다.
그랬다. 사내가 어떻게 여고생이 나오는 영화를 본단 말인가? 그것은 말도 안 됐다. 그러나 나는 임예진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서울역 뒤편의 봉래극장이었다. 집과 학교에서 먼 곳이었기에 아는 사람의 눈에 걸릴 위험이 없어 선택한 장소였다. 그러나 문제가 좀 있었다. 봉래극장은 극장 안 깡패들이 무섭기로 소문난 곳이었고, 근처에 고등학교가 많아 지도부 선생들이 심심찮게 출몰하는 요주의 장소이기도 했다.
극장 매표구 앞에 섰다. 여직원이 표를 주는데 그 눈이 “사내새끼가 여고생이 나오는 영화나 보고, 너도 참 한심한 놈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표를 받는 아저씨 역시 “한심하군. 넌 사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극장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니, 남자가 거의 없었다. 여중생·여고생뿐이었다. “아! 제기랄.”
영화가 시작됐다. 임예진 주연의 ‘정말 꿈이 있다구’(문여송 감독, 1976)라는 영화였다. 임예진이 소매치기로 나와 마지막에는 착한 소녀가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사실 스크린으로 임예진을 처음 본 감동 같은 것은 전혀 기억에 없다. 오로지 여학생 영화를 보러 왔다는 부끄러움밖에는 없었다.
그 뒤로 제법 뻔뻔해져 임예진 주연의 영화를 보러 다녔고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최고의 문제아이며 ‘짱’이었던 학생이 다가와 쭈뼛거리며 임예진을 좋아한다고,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결국 같이 ‘푸른 교실’(김응천 감독, 1976)이란 영화를 보러 갔는데 녀석은 중학교 1학년밖에 안 된 주제에 영화를 보면서 담배를 피우려 해 그것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더랬다.
또래 여배우
1970년대에 나와 또래들이 사모하던 여배우는 많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썸머타임 킬러’ 두 편의 영화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올리비아 허시. ‘정무문’과 ‘맹룡과강’의 노라 마오, ‘사랑의 스잔나’의 진추하. 그녀들은 아름다웠지만, 나와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 저 먼 나라의 여자들이었다. 판타지 세계 속의 여성이었다. 물론 한국 여배우들도 아름다웠지만 보통 이모나 고모뻘이었다. 그런 우리 앞에 같은 학생복을 입은 또래의 여자 배우가 등장한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 영화에서 청소년 연기자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청소년 대상 영화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고교 얄개’의 원작 ‘얄개전’을 각색해 중학생 안성기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있었지만, 청소년 영화 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1970년대 중반. 극장가를 휩쓸던 문희·남정임이 결혼과 함께 사라졌다. 대신 투박하고 사나운 남성들이 등장하는 깡패 영화가 주류를 차지했다. 홍콩에서 날아온 이소룡 영화도 돌풍을 일으켰다. 사나운 남성들의 찡그린 얼굴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즐비할 때. 소리 소문 없이 개봉한 영화가 있었다. 제목은 ‘여고 졸업반’(김응천 감독, 1975). 여고생 임예진이 남자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소설 ‘불타는 신록’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본격적인 여고생 영화는 아니었다.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이른바 문예영화였다. 이 영화로 주연 임예진은 대종상 특별상을 받았고, 영화 주제곡으로 사용된 김인순의 노래 ‘여고 졸업반’은 중년 여성들에게까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사랑받는 히트곡이 됐다.
물론 여고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강대선 감독이 만든 세 편의 여고생 영화, ‘여고생의 첫사랑’(1971)과 ‘여고시절’(1972), ‘지나간 여고시절’(1973)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청소년 영화라기보다는 여고생이 등장하는 멜로 영화 쪽에 가까웠다.
그 시기 일본 대중문화에 밝았던 문여송 감독이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본 청소년의 사랑과 애환이 담긴 영화를 기억해내고 임예진을 주연으로 기용해 청소년들의 사랑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이른바 하이틴 영화 ‘진짜 진짜 잊지 마’(1976)였다. 주연은 임예진과 이덕화. 영화가 시작되면 고등학생으로 가득 찬 통학 열차에 학생모를 단정하게 쓴 모범생 이덕화가 등장한다. 이덕화는 언제나 같은 칸 같은 자리에 혼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친구들이 놀리고 비웃어도 그의 눈엔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창가의 소녀, 임예진이다.
진짜 진짜 잊지 마
그때 그들 사이에 운명적이고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떠나는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려온 임예진이 공교롭게도 이덕화가 매달린 출입구 쪽으로 달려와 이덕화에게 손을 내민다. 임예진의 손을 마주 잡는 이덕화. 이덕화는 임예진을 기차로 끌어올린다. 기차는 속력을 내서 달리고 이덕화와 임예진은 학생들로 가득한 출입구에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 매달린 꼴이 된다. 임예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하얀 목덜미와 복숭아 같은 뺨이 드러난다. 그녀의 냄새에 취한 이덕화는 임예진의 포로가 됐고, 임예진 역시 이덕화의 포로가 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놀라운 기적이 이뤄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