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이 식는다. 가을 햇볕은 유난히 뜨겁다. 선크림은 작열하는 여름 태양보다 영롱하고 총총하게 내리꽂히는 가을 한낮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법당 한켠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배롱나무라는 이름인데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수령이 무려 200년이나 된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나무 모양이 특이한 것은 일종의 하이브리드, 곧 변종이기 때문이다. 배나무의 한가운데를 뚫고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어떻게 저런 일이 생겨날 수 있을까. 200년 전 사람들은 저 모양새를 두고 길조라고 했을까, 아니면 흉조라고 했을까. 부처님이 계신 곳이니 그것이 좋은 징조든 그렇지 않든 자비가 베풀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공간의 역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구한 법이어서 200년 전 이곳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또 어떤 일들이 생겨났는지를 상상하면 현재의 내가 그렇게나 왜소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기행(紀行)은 일종의, 자신만의 기행(奇行)이다. 늘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만들고, 그리하여 자신의 많은 것, 특히 탐욕을 버리게 만든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신흥사 주변 양리마을은 고즈넉해서 좋다. 여느 시골 길이 그렇듯 아름드리나무가 길 한쪽을 차지하고 당신이 나그네이거든 잠깐 쉬었다 가라고 하늘하늘 자신의 가지를 흔들어댄다. 그 앞으로 냇물이 흐른다. 물이 참 맑다. 무엇보다 아무도 없다. 지금이라도 한참 흘린 땀을 닦아낼 요량으로 옷을 훌훌 벗고 물에 들어선들 아무도 탓할 사람을 찾지 못할 듯싶다.
그 길을 천천히, 마치 인생의 해가 지듯 뉘엿뉘엿 걸어가는 노파는 무슨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할 만큼 가는귀가 먹었다. 낯선 이를 경계하지 않는 것은 이곳의 치안이 그리 문제 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봄날은 간다’의 대숲을 찾기 위해 한참을 서성이며 길가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하게 된다. 간신히 만난 어느 노인의 대답에 황망함이 밀려왔다. “아 그 영환가 뭔가 찍었다던 데? 거기 다 베어버렸는 걸.”

영화 ‘봄날은 간다’는 사랑에 대한 남녀의 시각 차이를 잘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랑은 변한다, 매일처럼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는 결국 현실적인 관계를 찾아 자신의 길을 떠난다. 여자는 흔히들 사랑은 하더라도 동시에 상처받지 않고 박탈감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 사랑은 때로 그 둘을 역설적으로 양립시킨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와중에도 끝없이 소외감을 느낀다. 내가 과연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를 자꾸 되묻게 만든다. 그래서 여자의 사랑은 늘 변화가 무쌍하다. 하루하루 마음이 바뀌며,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와 진실로 인생을 편하게 할 남자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 만들어내는 파행과 파국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래서 상우는 떠나는 은수를 붙잡고 이렇게 일갈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바보 같은 남자의 바보 같은 항변일 뿐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지고지순한 사랑은 없다. 매일처럼 변하는 사랑을 매일처럼 변하지 않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랑하기’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 법이다.
허진호의 많은 영화, 혹은 많지 않은 영화는 늘 사랑에 대한 결핍을 얘기한다. 그의 또 다른 수작 ‘행복’에서 황정민은 거울을 앞에 두고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그는 그의 육신이 가장 아플 때, 자신처럼 병들고 죽어가는 여인 임수정에게서 보호를 받았다. 그녀는 그를 위해 밥을 하고, 약을 챙기고, 무엇보다 살아가는 기력과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몸이 많이 나아졌지만, 그렇게 건강이 회복된 직후 또다시 음탕한 현실로 돌아온다. 다시 술을 마시고 다시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며 다시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돌린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촬영지 삼척 양리마을 대나무숲과 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