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김동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를 허물다

  • 정준모 미술비평가,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curatorjj@naver.com

    입력2008-10-06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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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홍콩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한국 생존 작가로는 최고가인 3억2000만원에 작품이 낙찰, 단숨에 화단의 기린아로 떠오른 김동유. 하지만 화제를 모은 ‘이중초상’은 그의 단면일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존재의 차이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김동유

    ◆ 1965년 충남 공주 출생<BR>◆ 목원대 회화과, 동 대학원 서양화 전공<BR>◆ 2007년 ‘The Face(사비나미술관)’ 등 개인전 10여 회<BR>◆ 2008년 11월 독일 뮌헨 브라운배랜스화랑 개인전

    지금은 주춤한 상태지만 3~4년 전부터 그림 재테크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한국 미술시장이 활황을 이뤘다. 정부의 부동산 억제책으로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헤매던 시중 유동자금이 미술시장에 밀려든 탓도 있지만, 경제성장이 중산층의 눈을 문화예술로 돌리게 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런 미술시장의 새로운 바람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 김동유(金東有·43)다. 그의 ‘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이 2006년 5월28일 홍콩에서 열린 크리스티(christies) 경매에서 추정가의 25배가 넘는 3억2000여만원에 낙찰되었다. 한국 생존 작가로는 최고가였다. 사람들은 김동유라는 낯선 이름에 흥분했다.

    해외 미술시장에서 그의 선전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2005년 11월27일 세계 굴지의 경매회사 크리스티의 홍콩 아시아 컨템퍼러리 경매에서 해외경매사상 가장 많은 23점의 한국 작가 작품이 낙찰됐는데, 김동유의 ‘반 고흐’가 이 중 최고가인 8800만원에 낙찰된 것이다. 이로부터 6개월 만에 다시 그 기록을 경신하면서 김동유는 ‘무명작가’ ‘지방작가’라는 딱지를 떼고 미술동네의 한복판에 당당하게 서게 됐다.

    이후 그는 화랑가에서 일약 인기작가로 자리 잡았다. 그가 어렵던 시절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포트폴리오를 들고 찾아간 그를 문전박대하던 대형 화랑에서도 구애의 손길을 뻗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고향인 공주 근교에 칩거한 채 작업에 몰두, 화상과 컬렉터들을 애태우고 있다.

    그런데 한국 생존 작가 중 작품이 가장 ‘비싼 값’에 해외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낙찰된 작가라는 허명에 가려 우리는 정작 김동유의 진가를 보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김동유와 그의 진정한 모습은 큰 차이가 있다. 마치 우리가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이 묘사하는 실재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처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김동유는 그림처럼 우리 인식 속에 자리 잡은 하나의 허구적 존재일 뿐이다.



    보이는 것의 허무함

    김동유

    김동유씨가 논산 폐교에 마련한 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김동유 작품에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사실을 그린 그림이 그 사실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그 사실의 외피만 재현했을 뿐인가’라는 전통적인 회화에 대한 집요한 질문이다. 그는 이런 미학적이면서 존재론적인 질문을 꾸준히 되물으면서 작업해온 작가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김동유의 ‘이중초상’, 즉 한 사람의 작은 얼굴들이 모여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만드는 작품은 그가 하는 작업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중초상이 그에게 세속적인 성공을 안겨주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존재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이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주변 사물을 볼 수 없다. 불이 켜지고 빛이 주변을 감싸면서 우리는 주위 사물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들은 빛이 밝혀짐으로써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사물에만 집중한다. 이를 ‘존재의 망각’이라고 한다. 이것은 존재가 없다면 존재자와 대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상파 화가 모네의 커다란 수련 그림을 더 자세히 살펴볼 생각으로 그림 앞에 바짝 다가가면 어느 순간부터 그림 속 수련은 보이지 않고 물감덩어리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림이란 전통적으로 현실의, 대상의 대체적 존재다. 요즘 들어서는 그림의 종류도 다양해져서 곳곳에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서 있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키치(Kitsch)가 원본을 대체하기도 한다. 복제가 복제를 낳는 원전 상실의 시대다. 재현되는 모든 것은 지난 시절의 회화보다 더 정교하게, 더 진짜처럼 만들어진다.

    복제란 ‘재현’이라는 단어로 대체되기도 한다. 재현은 그림과 같은 것이다. 실체 또는 대상을 그림으로 그리면 그 실체를 대신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재현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우리는 재현된 세계, 복제의 세계 즉 가상현실로서의 그림을 만나는 것이다.

    회화의 존재에 대한 회의는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문제다. 그 문제를 그림을 통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이는 르네 마그리트다. 그가 그린 ‘두 개의 수수께끼(Two Mysteries)’를 보면 파이프가 그려져 있고 다시 파이프가 그려진 캔버스(canvas)가 이젤 위에 놓여 있다. 이젤 위의 그림에도 파이프가 그려져 있는데 다른 점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그는 여기서 보이는 것은 실재하는 파이프가 아니라 단지 그림일 뿐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캔버스의 그림은 물감덩어리일 뿐이고 실제 파이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서 재현된 그림 속 파이프는 ‘실재’ 파이프가 아닐뿐더러, 그림 속 그림의 파이프가 아니라고 적힌 파이프도 파이프가 아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기존의 감각과 지식으로 부재하는 파이프의 외피를 보면서 실재하는 파이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마그리트 유의 미술에 대한 회의와 의문은 시각예술의 진화와 변화에 적잖이 반영됐다.

    김동유의 회화도 마그리트처럼 그림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했다. 그의 초기 작업은 매우 사실적인 눈속임 회화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의 초기 작업은 이미지를 채집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일상적인 레코드 재킷이나 통속적인 성냥갑 등 조악한 도안과 원색의 컬러로 빛나는 디자인(?)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제작해왔다.

    진짜와 가짜

    유치하고 알록달록한 색채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을 선택한 것은 미술이 갖는 사전적 의미의 숭고함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사람 냄새 나는 일상적인 물건들을 통해 미술의 영역을 고상하고 숭고한 곳으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시도였다.

    김동유

    대나무숲. 53×45.5cm, silkscreen on canvas, 2004

    그의 초기 작업은 회화의 재현적 의미를 부정하고 제거하는 것이었다. 1989년 첫 개인전에서 그는 회화적 이미지를 사진적 이미지로 대체하면서 그 이미지를 부정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대상과의 관계에서 유사성과 닮음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독특한 시각 현상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는 사진 콜라주된 얼굴 이미지와 비교적 단순하게 그려졌지만 착시현상에 의해 대상의 특징을 잘 살린 그려진 얼굴들을 병치시켰다. 허상으로서의 그림을 보여주고자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얼굴은 이중초상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의 이런 회화에 대한 반어법적 태도는 방법을 달리하면서도 지속된다. 1990년대 초 대학원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전에 ‘3개의 팔레트’를 제작한다. 팔레트를 찍어서 퍼즐처럼 하나의 팔레트로 만든 이미지와 실재 팔레트, 그리고 그려진 팔레트 등 3개의 이미지를 병치시켜 어느 것을 팔레트라고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실 그의 사진 이미지 조합과 기법의 차용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몰두했던 사진작업과 연관이 있다. 그는 사진을 매개로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 ‘보는 방식’에 대한 실험을 했고, 그것들을 사진·회화·디자인에 적용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태도는 현대미술의 불모지인 대전의 한 청년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동유의 회화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의 해답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핍진성(逼眞性·Verisimilitude)에서 찾을 수 있다. 버려진 이발소 그림을 주어다가 그 위에 나비를 그려 넣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등 ‘재생’ 또는 ‘환생’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에게 이미지 또는 그림은 현실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근거가 없는 것이란 회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에게 그림이라는 일루전(illusion)의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회화의 허구성을 사실적인 경향의 작품을 통해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에게 이런 그림에 대한 인식이 생긴 것은 당시 대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홍명섭, 김홍주, 엄태홍 등의 영향이 컸다.

    공주에서 태어나 전파상을 하던 아버지의 손재주를 물려받은 김동유는 어릴 적부터 남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 있는 시간에 공책에 교과서의 삽화를 따라 끼적이던 시골소년은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술대학에 진학한다. 그는 미술대학에 가려거든 손 내밀지 말라는 부모님의 호령에 서울 유학을 접고 장학금을 준다는 고향의 대학에 진학했다.

    망점의 구성물

    대학을 다니면서는 여느 미술대학생과 마찬가지로 입시생을 지도하는 홍명섭의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기서 그는 학교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현대예술사조들을 접할 수 있었다. 라캉, 퐁티, 현상학, 언어학, 기표와 같은 단어들을 입시생을 지도하면서 들었다. 이렇게 귀동냥을 통해 얻은 현대미술에 대한 지식은 전통적이고 고루한 상태에 머물러 있던, 그의 미술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작품은 당시 대전에서는 매우 독특한 편이었다. 현대미술에서 먹히는 ‘독특하다’는 덕목이 고루한 지역사회에서는 이상한, 괴상한, 삐딱한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일루전을 바탕으로 한 회화에 대한 회의는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이즈음 그에게 나비는 대상을 살려내는 주체이자 허구적 사실인 그림에 아름다움이라는 존재감을 더해주는 장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새로운 실험을 하기 시작한다. 로이 리히텐스타인이 주목한 회화적 수단인 망점이다. 그는 인쇄된 만화의 이미지 한 부분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인쇄물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망점을 크게 확대해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인식하는 그림 속 대상은 사물이 아닌 망점의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주었다. 하지만 김동유는 망점 그 자체에 주목한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망점이 어떤 시지각의 작용을 통해 환영을 만들어내는지에 주목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안중근 의사가 일경에게 취조받는 역사적인 보도사진을 2.4×3.9m에 이르는 대형화폭에 그대로 망점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위에 사진관에서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처럼 만들던 기법을 차용해서 더욱 사진같이 보이도록 장치를 한다. 거기에 예의 나비를 그려 넣음으로써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현실과 실재, 허구와 현실이 혼재된 일루전의 세계가 갖는 모순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김동유

    사비나미술관에서 2007년 열린 개인전 ‘The Face’ 전시 광경.

    그의 이런 작업은 군 제대 후 일정기간 지속된다. 1999년에 이르면서 고(故) 박정희 대통령 얼굴이 망점이 되어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이루고, 반대로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이 되는 이중초상 작업을 완성한다.

    그와 함께 여전히 병행하는 작업은 나비 시리즈다. 나비들이 뜬금없이 등장하던 1990년대 작품들과는 달리 2003년경의 작업은 나비들이 날아들어 불상을 이루기도 하고 반가사유상이 되기도 한다. 이미지의 허구성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나비들이 이룬 형상은 나비들이 날아가고 나면 부질없는 허상만 남는다는 생각이다. 보이는 것에 대한 존재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회화의 본질

    마치 장자(莊子)의 꿈처럼 부질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향의 작품들은 그의 사유와 근성 그리고 동아시아적인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초상보다 오히려 더 높이 평가할 만하다.

    결국 그의 예술은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처럼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이 정말 그려진 풍경인지 창을 통해 본 풍경인지 모를 만큼 경계가 모호한 그림 같은 것이다. 어느 것이 실제 바깥이고 어느 것이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그림처럼 그의 그림은 어느 것이 그려진 것이고 어느 것이 바탕인지 모를 경계선상에 그림을 놓아둠으로써 혼란스럽게 한다. 그림을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기보다는 생각하기를 강요하거나 잘못 보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는 기세다.

    이런 경향은 그가 2004년경 부지런히 그린 대나무 그림에서 나타난다. 사실 여기서도 대나무와 바탕 중 어느 것이 그려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얀 것은 종이이고 검은 것은 글씨라는 썰렁한 크리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의 대나무 그림은 어느 것이 그려진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바탕을 칠하다 보니 남은 것이 대나무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대나무를 그린 것이 아닌데 대나무가 그려진 셈이다. 그려진 것과 바탕 사이에는 혼돈만이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는 이중초상을 제작했다. 이중초상은 그를 대표하는 브랜드이지만 그의 전부는 아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그는 회화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게 인물은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자 작품을 이루는 기본 단위다. 그리고 그려진 얼굴의 이미지는 어느 존재를 대신해 그를 상징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언어는 단독으로 사용되는 데 반해 기호는 단독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서로 관계 지어지면서 하나의 구조를 만든다. 그런 점에서 기호화됐다는 것은 실체 세계와 떨어져서 새로운 존재로서 재현되고 복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구조로 존재한다.

    시뮬라크르 된 것들은 복제된 것이며 이렇게 복제된 것들이 또 다른 기호로서 시뮬라크르 한다는 점에서 김동유 작품은 매혹적이다. 복제가 거듭되면서 원본인 마릴린 먼로나 고흐, 그리고 케네디나 마오쩌둥은 역사상 위인이나 인기스타가 아니라 의미 없는 하나의 기호, 그림을 구성하는 단위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장자의 나비의 꿈과도 닿아 있다.

    근원의 부재

    우리는 섹시스타 이효리를 만나본 적이 없음에도 TV에서 재현된 그의 이미지만을 근거로 그녀를 단정 짓는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이미 고정된 이미지 속에 들어 있는 정치가나 종교인, 영화배우 등은 만들어진 가상의 이미지일 뿐이다. 내가 사는 세상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사전적 의미의 절대적인 상징체로 받아들이는 일은 허구이자 허상이다. 나와 나의 의지나 판단과는 상관없는 절대적인 기호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은 언제나 있는 존재를 표상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단지 그림만을 통해서 본다면 그 실체를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에게 진실은 너무나 멀리 있고 또 다가갈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그는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현실, 즉 그림의 허구성을 응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함으로써 그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바탕을 칠함으로써 대나무가 화면에 드러나듯 말이다.

    그는 부재하는 근원을 탐구하기보다는 표면에 넘쳐나는 이미지를 구성하는 대상을 중시한다. 외곽을 때림으로써 중심을 흔드는 전술을 구사한다. 게다가
    김동유
    丁俊模

    1957년 서울 출생 중앙대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 석사 (미술학)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 국립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덕수궁 미술관장 現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중앙대·고려대 강사 논문 : ‘미술품은 땅인가’ ‘제3의 미학, 새로운 출구’ ‘한국의 모던이즘, 모더니즘’ 등
    그의 외곽을 때리는 수단인 망점 또는 픽셀이 디지털적인 속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작업을 통해 마티에르(matiere)가 넘쳐나는 단위 단위로 아날로그화하고 있는 점은 다소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회화에 인간의 살 냄새를 보탬으로써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다.

    멀리서 보면 하나이고 가까이서 보면 다른 각각의 존재들은 개개의 속성보다는 큰 덩어리, 명분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가까이 가서 보고 멀리 가서 보게 하는 노동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라는 경계에 서서 김동유의 일면만을 보면서 그의 전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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