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위기의 한·러 관계

크렘린의 ‘반한(反韓) 감정’ 정상(頂上) 외교로 풀릴까

  • 윤성학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교수 yoonskh@chol.com

    입력2008-10-07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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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월 말 이명박 대통령은 4강 외교의 마지막 대상국인 러시아를 국빈 방문할 예정이다. 이 대통령은 이번엔 상당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방문 때의 외교적 실패 논란, 북한과의 관계악화를 만회할 기회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러시아 관계는 순탄치 못하다.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길에는 길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위기의 한·러 관계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7월9일 일본 도야코 윈저 호텔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의 역대 어떤 대통령보다 러시아를 잘 아는 것은 분명하다. 전임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이전 러시아를 여행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반면, 이 대통령은 현대건설 재직 당시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러시아로 출장을 자주 다녔다. 당시 현대는 시베리아 산림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사하 가스전 개발, 블라디보스토크 현대호텔 건설을 추진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현대호텔은 한국의 극동 투자의 랜드마크로 오늘날까지 자리 잡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에도 러시아를 찾은 적이 있다.

    “러시아만큼은…” 충만한 자신감

    이 대통령의 러시아 인맥도 만만치 않다. 그는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는 과정에서 현 칼미크 공화국의 키르산 일륨지노프 대통령을 사귀게 됐다. 일륨지노프 대통령은 러시아 정계와 교분이 깊다. 이 대통령은 또한 현대건설 회장 당시 연해주 개발과 관련해 극동의 실력자를 두루 만났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월15일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연해주를 한국의 식량기지로 만들겠다는 ‘연해주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국제곡물가가 치솟으면서 식량자원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는 상황에서 나온 이 구상은 사실 이 대통령의 러시아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 대통령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경제통일론’을 주장했는데, 이 구상의 출발점이 바로 연해주다. 연해주와 남북한을 포함한 동북아경제권의 활성화가 경제통일론의 핵심이다.

    대선 직후 이재오 대통령당선인 러시아 특사도 이 대통령의 극동 중시 정책에 영감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난 뒤 곧장 서울로 오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러 극동 지역에서의 남-북-러 경협 활성화를 러시아 측에 제안했다. 포스트 이명박을 꿈꾸는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도 연해주 지역에서 현대중공업의 대규모 농장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동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가 한국의 중심 정치권에서 지금처럼 집중적으로 조명받은 적은 없었다.



    ‘신동아’ 보도와 모스크바 분위기

    러시아 사정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많은 러시아 지인을 확보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對)러시아 외교에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2008년 들어 한·러 관계는 심상치 않다. 어떤 면에서 최근 러시아 정계의 반한(反韓)감정은 한·러 수교 이후 최악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지난 6월을 전후해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정보수집 활동을 해온 한국 국정원 직원(외교관 신분) 4명을 잇따라 추방했다. 국제관계에서 외교관 추방은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낳을 수 있는 사안이다. 미국과 러시아 간에, 유럽 국가와 러시아 간에 외교관 추방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국 언론은 사건의 의미와 향후 파장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집중적으로 사건을 조명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한국 언론이 흐지부지 흘려버려 국내에 그 심각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필자가 최근 모스크바를 방문해 러시아 측 주요 인사들과 접촉한 바에 따르면, 한국 외교관 추방사건은 ‘신동아’ 6월호에 보도된 바와 같이 한국의 국정원과 검찰이 물증도 없이 주한 러시아대사관 소속 참사관을 불법 학위 알선 혐의자로 연루시키고, 러시아 국립대학교 총장을 지명 수배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혐의 대상이 됐던 외교관은 지금 러시아의 대(對)한국정책 실무를 총괄하는 러시아 외교부의 한국 과장으로 재임 중이다.

    한국 검찰이 기소한 러시아 부정학위 발급사건의 경우 러시아 검찰은 ‘해당 학위는 러시아 관련법을 준수한 합법적 학위’라는 수사 결과를 한국 법원에 통보했으며, 이에 한국의 1,2심 법원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고인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한국 검찰이 러시아 검찰의 수사결과 및 자국 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항소하자 러시아 정부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에서 한국 외교관을 추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측으로서는 한국 검찰은 이명박 정부에 소속된 기관이며 이는 곧 이명박 정부가 러시아 정부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 편견을 갖고 있고 모함하고 있으며, 이를 개선할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외교가 일각에서는 “한·러 관계의 피로와 위기를 점증시키고 있다. 이는 러시아의 대 한국 정책에 ‘경직성’을 불러 직간접적으로 한국 측에 국익 손실을 안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치명적 국익 손실의 사례

    실제로 국익 손실 사례는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으로 선발됐던 고산씨가 지난 3월10일 러시아 연방우주청에 의해 이소연씨로 전격 교체되는 일이 발생했다. 고산씨의 ‘지나친’ 학습욕구가 러시아 정부를 자극한 것은 분명하지만, 한·러 관계가 제대로 가동되었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재오 특사와 푸틴 당시 대통령과의 면담 무산도 한·러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이명박 정부는 특히 정권교체기에 러시아 핵심과 교감할 수 있는 어떠한 채널도 가지고 있지 못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말았다.

    삐걱거리는 한·러 관계는 8월13일 한국의 러시아 서캄차카 해상광구 개발권이 러시아 측에 의해 전격 취소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서캄차카 광구는 외국인이 참여한 러시아 유전개발에서 최대 규모의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국의 해외 유전개발에서도 압도적 1위 규모를 기록하고 있었다.

    서캄차카 해상광구는 오호츠크해 수심 300m 이하에 위치해 있으며, 면적은 무려 6만2680㎢(남한 면적의 약 3분의 2)에 달하며 원유 잠재 매장량은 약 37억 배럴로 추정되는데, 서방의 탐사업체는 최대 110억 배럴까지 채굴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한국 처지에서 서캄차카 광구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개발에 성공할 경우 한국으로 직수입이 가능하며, 이에 따라 수송비 절감 등을 통해 원유수급 안정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됐었다. 개발권의 취소는 해외 자원 확보가 절실한 한국엔 치명적인 손실이다.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직전에 이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거대 유전개발을 위해 석유공사가 중심이 된 한국 컨소시엄과 러시아의 국영에너지 업체인 로스네프트는 4:6의 비율로 캄차카네프트가스(KNG)라는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다. 유전개발 라이선스를 총괄하는 러시아 천연자원부는 이 유전 개발을 위해 2008년 7월 말까지 3공 시추를 자격유지 조건으로 KNG에 부여했다. 그러나 KNG는 고유가에 따른 국제적인 탐사활동의 활성화로 시추선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2008년 6월에야 겨우 첫 시추를 마칠 수 있었다.

    이에 러시아 천연자원부는 애당초 유전개발에 필요한 복잡한 절차(환경요인, 개발 인허가) 등을 고려해 라이선스 연장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실제 러시아 유전개발이 당초 예정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할린 유전 개발은 당초 예정보다 10년이나 늦어지고 있으며, 러시아가 국가전략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시베리아 송유관(ESPO)도 벌써 2년이나 연기되고 있다.

    MB 부탁, 즉각 묵살당해

    위기의 한·러 관계
    한국컨소시엄과 한국 정부는 KNG 라이선스의 순조로운 연장을 위해 합작사인 로스네프트를 통해 사전에 러시아 천연자원부에 양해를 요청했으며, 러시아도 저간의 사정을 고려해 라이선스 연장에는 문제가 없다는 사인을 주었다. 심지어 이 대통령도 지난 7월 G8 정상회담에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라이선스 연장을 거부한 것이다. 외국인이 참여하는 에너지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러시아 천연자원부의 지나치게 자의적인 규제는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코빅타 가스전을 개발하려고 한 TNK-BP도 생산 규정시한을 지키지 못해 라이선스를 반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 TNK-BP의 최대 지주회사인 영국 BP사는 “생산에 필요한 인·허가를 내주지 않는데 어떻게 라이선스 규정을 지킬 수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묵살했다.

    그러나 한국이 이번에 라이선스를 취소당한 것은 러시아 정부의 이 같은 전례에 비춰볼 때도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한국 대통령이 러시아 대통령에게 직접 부탁한 사항을 돌아서자마자 거부한 것은 외교 결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그동안 러시아가 경협차관 상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법적으로 보장된 페널티를 물리거나 국제적인 망신을 주지 않았다. 한국은 러시아 정부가 약속한 나호트카 한·러 공단 개발, 코빅타 가스관 사업에서도 러시아의 처지를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 번의 재심의도 갖지 않고 KNG 문제를 법대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서캄차카 라이선스 연장 건은 러시아 천연자원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 등 러시아 최고 권부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벌어진 일로 보인다. 일개 부처가 시추가 약간 늦어진 것을 빌미로 에너지 개발 라이선스를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다른 곳도 아닌 러시아 국영에너지업체인 로스네프트의 지분이 60%나 들어 있는 합작법인의 라이선스를 위의 눈치도 보지 않고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업체인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트의 주도권 분쟁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사할린 2 프로젝트에서도 환경영향평가 잣대를 들이대 세계적 메이저인 쉘을 제치고 가스프롬이 최대 주주로 들어앉았으며, 돈 될 만한 에너지 프로젝트는 가스프롬이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의 현실이다. 로스네프트는 최근 무리한 투자에 따른 경영 적자와 내부 알력으로 러시아 정부로부터 질책을 심하게 받은 바 있다. 메드베데프 등장 이후 부총리이자 로스네프트 이사회 의장인 이고르 세친이 견제받고 있다는 설도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전직 가스프롬 의장이었다. 가스프롬이 러시아 최대 유전이 될 가능성이 높은 서캄차카 광구를 차지하기 위해 로스네프트를 배제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희생당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자원외교’ ‘식량기지’ 구호 삼가야

    서캄차카 유전 개발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 이 과정에서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한국을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번 일로 분명히 드러났다.

    서캄차카 사태와 관련해 아쉬운 점이 있다. 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푸틴 대통령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러시아를 방문했더라면 사태가 이렇게 맥없이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2008년 들어 한·러 구도는 크게 바뀌고 있다. 러시아는 푸틴 체제를 이어가기 위해 메드베데프라는 새 대통령을 선출했고 한국에선 이 대통령이 집권했다. 러시아는 고유가에 힘입어 최근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러시아의 GDP 규모는 세계 10위 안에 들었으며 외환보유고는 중국, 일본 다음으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는 막강해진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교 무대에서도 단호하게 국익을 관철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에 굴복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주저하고 있다. 그루지야는 베이징올림픽을 전후해 러시아를 상대로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가 러시아의 강력한 무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러시아가 초강대국으로서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면, 한국은 지난 10년간 소원해진 한미관계를 복원하고 새로운 외교안보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 있다. 이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미국으로 달려가 전략적 동맹 수준으로 한미관계를 재편하는 일에 나섰으며, 일본과도 새로운 협력관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이명박 정부의 이 같은 외교 전략은 다른 한편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사고 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미국의 개입과 영향력 확대에 강력하게 반발해왔다. 러시아와 인접한 친미국가에 대해선 무력제재조차 불사하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던 그루지야는 결국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의 멍에를 썼다.

    위기의 한·러 관계

    시베리아 횡단철도.

    러시아는 만약 한국이 동북아에서 한·미·일 삼각동맹을 형성해 미국의 영향력 행사 창구로 전락할 경우 북한을 부추겨 한반도를 새로운 냉전지대로 만들려고 할 수도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 방러를 통해 한국이 미국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러시아를 배제하는 ‘동북아의 그루지야’가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납득시켜야 한다.

    이 대통령은 이번 방러 과정에서 러시아의 이런 의구심을 해소하는 한편, 한국에서 그가 흔히 사용해온 ‘자원외교’니 ‘식량기지’ 등의 용어는 자제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정말로 ‘언어 습관’을 고쳐야 하며 상대국의 감정과 처지를 고려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는 자원외교 분야에서 단기적 실적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2000년 이후 에너지 및 자원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러시아에는 지금 전세계로부터 자원개발 제안이 쇄도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단순한 자원공급자가 될 것을 거부하고 있다. 2006년 7월 푸틴 대통령은 유럽과의 에너지 협력을 언급하면서 “유럽 기업의 러시아 진출을 허용하는 반대급부로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구체적인 반대급부가 없는 한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음을 피력했다. 러시아는 또한 2005년 동시베리아 송유관 노선 결정과 관련, 일본이 제안한 100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지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에너지와 관련해 조건이 붙는 돈은 안 받겠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 영토가 다른 나라나 외국기업의 자원 기지화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러시아는 향후 에너지 개발에서도 원자재 수출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석유화학제품의 수출을 고려하고 있다.

    반전의 돌파구는 있다

    한국과 러시아의 기본적인 시각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사태를 반전시킬 만한 요인도 적지 않다. 이명박 정부는 이번 러시아 방문 등을 통해 이 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궁극적으로 러시아 에너지 자원을 공동 개발하고 연해주에 대규모 농업투자를 진행시키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선 우선 러시아가 한국에 협력을 요청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적극 대응해야 한다. 러시아를 존중하고 러시아의 국내 현안을 같이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구호성이 아닌, 실질적인 자원외교가 가능한 것이다.

    메드베데프 정부는 현재 극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해 한국이 협력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현안은 2012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다. 2007년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가 아시아-태평양 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2012년 APEC 회담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치했다.

    그러나 푸틴의 이 같은 야심 찬 구상은 러시아 관료주의의 병폐와 지방정부의 부패로 도전받고 있다. APEC 행사가 4년도 안 남은 2008년 9월 현재 러시아 정부가 당초 예상한 건설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 회의 개최지로 예정된 루스키섬, 그리고 인근 포포브 섬을 연결하는 연륙교 건설 사업이 착수조차 하지 못한 실정이다. 루스키 섬에 세워질 컨퍼런스홀, 프레스센터, 호텔은 누가 언제 건설하는지 예정돼 있지 않다. 푸틴 총리는 지지부진한 APEC 프로젝트의 책임을 물어 몇몇 관료를 해임하고 부패 혐의로 블라디보스토크 시장 블라지미르 니콜라예프를 구속하면서 이 프로젝트를 계획대로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메드베데프 정부는 APEC 행사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연방정부 예산 80억달러를 포함해 총 120억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자금이 있지만 사업 수행에 필요한 기술력과 인력이 문제로 남는다.

    한국은 이 블라디보스토크 개발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침체에 빠진 한국 건설업계의 해외진출 활로가 될 뿐 아니라 인근 북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남·북·러 삼각 경제협력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국내 업체를 우대하면서 필요할 경우 해외업체에 공개 입찰 참여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 중국도 베이징올림픽 이후 남아도는 건설인력과 장비를 활용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개발에 저가 응찰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한·러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이 블라디보스토크 개발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등 한·러 경제협력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남-북-러 철도연결 성과 내야

    러시아가 한국과의 협력을 희망하는 또 다른 분야는 남-북-러 철도연결사업이다. 러시아 정부는 낙후된 극동지역 물류사업을 활성화하고 러시아 철도의 허브 기능 강화를 위해 남-북-러 철도연결을 핵심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연해주 핫산과 북한 나진을 연결하는 철도 개보수 작업을 진행해왔다. 이에 따르는 비용은 7000만달러로 추정된다. 나진항 개보수 비용 8000만달러, 화차 및 장비 확보 비용은 7000만달러 등 총 2억2000만달러가 들지만 매년 5000만달러의 수익이 발생하며, 투자 금액은 5년 이내에 환수가 가능할 것으로 러시아 측은 추정하고 있다.

    러시아와 북한은 철도 연결 프로젝트를 위해 러시아 70%, 북한 30% 지분의 합작사를 올해 설립했다. 한국 컨소시엄은 러시아 몫의 지분을 러시아 측과 6:4로 나누어 간접 투자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한국기업은 우진글로벌, 코레일로지스, 범한판토스, 글로비스, 장금상선, 한루 등 6개 사다. ‘Ruco Logistics Co., Ltd.’를 러시아 현지법인으로 설립해 러시아 철도공사와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현재 한국의 러시아 철도를 이용한 물류 이동은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이나 보스토치니 항으로 보내고 여기에서 대륙횡단철도로 옮겨 실어 유럽 등지로 운반하는 방식이다. 통상 하역작업을 포함해 3일 이상 소요되며 운임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항로를 ‘부산-보스토치니’에서 ‘부산-나진’으로 변경할 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운임체계, 북-러 국경통관절차 간소화, 서비스 개선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는 한·러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러 철도연결사업에 한국 정부가 소극적이라는 그간의 불안을 씻겨주고 장기적으로 북한 나진에서 한국의 속초까지 철도로 연결하는 동해선을 추진할 것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

    동해선 건설로 부산에서 모스크바까지 남-북-러 철도가 비로소 완전히 연결될 경우 이는 남북관계 진전에도 큰 구실을 할 수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과거 한국 측의 서울-평양 간 경의선 우선 연결에 대해선 소극적이었지만 정치적 민감성이 상대적으로 덜한 동해선을 통한 남북한 철도 연결에 대해선 그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었다. 북한, 연해주, 시베리아, 유럽을 철도로 잇는 인프라가 구축되는 것은 부산, 울산, 포항, 속초 등 동해안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러시아 방문을 통해 연해주, 시베리아 등 극동지역에서의 한·러 경제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러시아는 고유가를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지만 영토의 41%를 차지하는 극동지역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다. 극동지역의 경제 침체에 따라 이 지역 주민 중 상당수는 모스크바 등 서부지역으로 이주하고 있다. 대신 중국인이 빠르게 유입되면서 영토 보존 등 러시아의 위기감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극동 개발을 전략적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극동지역 개발의 핵심은 에너지자원 개발 및 에너지 연결통로(Energy Corridor)의 구축이다. 동시베리아와 극동에는 러시아 전체 원유매장량의 16%인 21억t, 가스매장량의 20%인 10조4000억m3가 매장돼 있다. 이는 한국이 원유는 15년, 가스는 22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추정 매장량은 확인 매장량의 10배 이상으로 예상된다. 러시아 정부는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대규모 광구 개발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수송 인프라 구축을 핵심적인 사업으로 삼고 있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대상은 가스자원이다. 러시아는 2007년 사할린 1가스전에서 타타르해협을 건너 하바로프스크로 연결되는 502km에 달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완성해 이 지역의 난방 및 에너지 문제를 해결했다. 러시아는 향후 사할린 3프로젝트의 키린스키 가스전, 서캄차카 광구, 그리고 사하가스전 등 극동의 풍부한 가스의 최종적 소비자를 중국과 한국으로 예상하면서 효과적인 가스 공급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극동에 인접한 중국 동북 3성은 석탄중심 전력체계로 러시아 가스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반면 한국은 부족한 가스를 극동에서 공급받아야 할 처지다.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가스 공급을 크게 두 가지 방안으로 접근하고 있다. 북한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 설치안, 북한을 우회하는 동해 해저 파이프라인 설치안이 그것이다.

    러시아, 주변국 개입으로 전환

    한국의 기술력, 북한의 노동력, 러시아의 기반시설이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연해주 농업투자다. 연해주의 총 농지면적은 770만ha(논: 18만ha, 밭: 80만ha, 초지: 160만ha, 방목지: 520만ha)이며, 한국 민간기업과 NGO는
    위기의 한·러 관계
    윤성학

    1963년 부산 출생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졸업, 연세대 박사(정치학)

    대우경제연구소 근무, 러시아 IMEMO연구소 코리아 연구센터 연구위원

    CIS(독립국가연합)컨설팅 대표

    저서 및 논문 : ‘러시아 에너지가 대한민국을 바꾼다’(푸쉬킨하우스), ‘러시아 비즈니스’(아라크네), ‘러시아 석유산업의 구조조정 연구’ 외 다수
    2007년 현재 12만ha를 확보하고 있다. 연해주는 기후적으로 쌀, 콩, 밀, 감자 재배에 유리하며 생산물이 한국시장으로 곧장 수송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외 농업투자의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화가 필수적인 대농장 경영 방식이어서 초기 투자비용이 크다. 러시아 정부의 관료주의적 태도, 복잡한 토지 소유 및 임대차 관계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위기의 한·러 관계 및 크렘린의 ‘반한감정’이라는 현실을 극복하는 지혜를 발휘해 이번 러시아 방문에서 외교적 성과를 내기를 기대해본다. 이 대통령은 러시아가 더 이상 외부 투자나 원조를 기대하는 국가가 아니며 이제는 주변국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정책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러시아군 탱크들이 지난 8월19일 그루지야 중부 전략요충지인 고리시를 빠져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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