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민
화냥년의 비극은 병자호란에서 유래됐다. 1638년 병자년 겨울에 조선 땅을 무단 침입한 청 태종은 이듬해 1월,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단군 이래 최대의 굴욕과 치욕의 역사였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를 비롯한 60여만명의 조선 백성을 심양으로 끌고 가 인질로 삼았다. 2년 후 조선의 집권세력은 청나라에 몸값을 치르고 인질 석방에 성공, 만백성의 박수를 받으며 수만여 명이 환국했다.
그러나 환호도 잠깐. 정조를 지켜내지 못한 귀향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는 이름으로 손가락질하며 멸시하기 시작했다. 사대부 가문 출신의 환향 여인들은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자진(自盡)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환향녀 문제로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우려한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발표한다.
“환향녀가 절개를 잃은 것은 음행(淫行) 때문이 아니라 전란 탓이다. 대동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등 전국 각지의 강(江)을 내 친히 지정하노니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환향녀들은 이 강물에 심신을 정결하게 씻어낼 것을 명하노라. 강물에 몸을 씻어낸 환향녀들은 잃어버린 정조를 다시 되찾은 회절(回節) 여인으로 간주할 것이다.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정부에서 지정한 이 강들이 ‘정조를 되찾는’ 회절강이 된 것이다.
그때의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변천해 오늘날까지 이어져 ‘부정한 여인’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정착됐다. 화냥년은 약소국가의 비극과 위정자의 무책임이 담긴 통한의 ‘이름씨’요 지도자를 잘못 둔 백성의 슬픔과 회한이 서린 단어이며 죄 없는 여인을 두 번 죽이는 옹졸하고 비겁한 어휘다. 이런 논리라면 좌익게릴라 조직인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에 납치돼 6년여를 인질로 붙잡혀 있다가 최근 극적으로 구출된 잉그리드 베탕쿠르(46) 전 콜롬비아 대통령후보도 화냥년이다.
남존여비를 불문율로 받아들이던 시대에는 순종(順從)이 여인의 커다란 덕목이었다. 지아비가 계집질로 황음(荒淫)을 전횡해도 물건 사용권 일부를 서방의 계집에게 양도한 채 실효적 지배만으로 안위해야만 했다. 하지만 달린 막대기에 반해 뚫린 구멍에는 엄격한 그물을 씌워 ‘한 구멍 한 막대기’를 강제했고 일부종사(一夫從事), 부창부수(夫唱婦隨), 여필종부(女必從夫)라는 관습화된 도덕규범은 남편과 사별한 후까지 지속됐다. 수절(守節)의 고통을 열녀문(烈女門)에 새겨 보상하고 칭송하던 수컷 전성 시절은 잡년들과 어우러져 온갖 잡탕질로 옹골진 호강을 마음껏 누리던 잡놈들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시차(視差)가 시차(時差)에 비해 너무 앞질러간 것이다. 구멍에 대한 물건의 방랑벽은 예나 지금이나 여일하지만 구멍의 행실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물리적 힘으로 구멍을 갈취하는 광포(狂暴)와 뒷배의 힘으로 구멍을 약탈하는 권세, 그리고 하루 세 끼 식사에도 허기져 연신 구멍을 기웃거리는 본능적 오입질은 여전하다.
하지만 바람 든 구멍의 주전부리가 이런 세태를 깡그리 바꾸고 있다. 법률, 관습, 언약으로 다짐한 전속 관계를 제멋대로 파기하고 난질로 육교(肉交)의 질서를 미란(迷亂)시키는 여인의 ‘몰래 서방질’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물건의 배신을 응징하는 보복 서방질, 지아비의 학대를 빙자한 홧김 서방질, 돈줄을 붙잡기 위한 생계형 서방질, 출세 야욕을 성취하기 위해 무형의 재물로 바친 상납형 서방질, 신분 상승을 도모하는 신데렐라 서방질, 육욕에 들떠 함부로 몸을 놀리는 색정 서방질 등 서방질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부부 간의 도리를 다한 열녀(烈女) 대신 열 받은 열녀(熱女)가 판치며 들쑤시는 별세계가 되고 말았다.
무식한 힘은 아직도 도처에서 날뛰며 여인의 소중한 강토(疆土)를 노리고 있다. 성폭행이라는 죄명하에 솜방망이로 곤장질한들 현대판 화냥년은 계속 생겨날 것이다. 무지막지한 막대기의 향락 때문에 실절(失節)한 화냥년의 고통과 아픔을 매만져주는 아량이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