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10-06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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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은 끝없이 생성되는 욕망에 의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계약이나 계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삶의 구멍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무덤 곁에
    • 나름의 출구를 만들고 싶어한다. 욕망이 숨 쉬고 드나들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애인’이라는 듯이 말이다.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애인’

    실패한 사랑은 대중가요 가사에 남고, 이뤄진 사랑은 결혼사진으로 남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사랑이 이뤄진다는 그때, 그러니까 결혼하는 순간 사랑은 생활이 된다. 그토록 가슴 뛰게 잡았던 손에 무감해지고, 마음 졸였던 첫 키스의 순간이 뇌리에서 사라진다. 집에 돌아가면 가구처럼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 연인이라기보다는 가족이나 혈연으로 느껴지는 사람,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처럼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 그렇게 ‘부부’는 서로에게 익숙해지면서 낯설어진다.

    ‘연애’라는 말이 유부남, 유부녀들 사이에서 ‘다른 이성’과의 만남으로 변질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부부 사이에는 연애가 주는 짜릿함이 없다. 서양에서는 부부 간의 정절을 두 사람만의 침실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긴다. ‘침실’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드는 것 자체가 바로 불륜이자 외도가 되는 셈이다.

    결혼하는 순간 싱싱했던 청춘남녀는 시스템의 일원이 되어 급속히 늙어간다. 적금 붓고, 아이를 키우며 나날의 삶에서 자신을 지워나간다. 결혼이 지루한 새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려 한다. 권태롭기도 하지만 이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제도, 결혼, 그리고 부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지긋지긋해하면서도 결혼하고 또 유지하는 것일까?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욕망을 어떻게 처분하고 사는 것일까? 인류의 오래된 습관, 결혼에 대한 영화적 시선을 따라가본다.

    영화 ‘애인’의 메인 카피는 ‘남모르게 갖고 싶은, 애인’이다. 영화를 보기 전 눈길을 끈 것은 바로 ‘남모르게’라는 수식어다. 애인이라는 말 앞에 붙은 비밀스러운 협약, ‘남모르게’라는 말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공모의 혐의를 제공하며 유혹의 손길을 건넨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애인을 그린 영화는 숱하게 많지 않았던가? ‘어깨 너머의 연인’ ‘연인’ 등을 비롯해 연애 혹은 애인을 그린 영화는 수도 없이 많다.

    결혼 앞둔 여자의 일탈



    영화 ‘애인’이 이런 영화들과 구분되는 점은 바로 주인공인 여자가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결혼을 앞둔 한 여자가 다음날이면 이 나라를 떠날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매력적이고 또 거침없다. 그는 여자에게 하루 정도의 일탈이라는 달콤한 제안을 해 온다. 여자는 그 단 하루를 욕망에 대한 충실한 응답으로 보낸다. 그들은 미술관이라는 개방된 장소에서 선 채로 섹스를 하고, 밀실에서조차 상상하기 힘든 대담한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은 채 말을 낮춘다. 충동적인 섹스는 하룻밤에 대한 계약으로 연장된다.

    여자를 흥분시키는 것은 약혼녀라는 제약 그 자체다. 그녀는 한 달 후면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법적으로 구속될 것이라는 것, 상식적으로 제한받을 것을 알기에 싱글로서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자 한다. 그러니까, 아직은 성적으로 방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껏 소모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격렬한 소모가 ‘결혼’이라는 제도가 지닌 구속을 강렬하게 대비해서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보내는 뜨거운 밤은 결혼 후에는 결코 없을,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어떤 열정으로 합의된다. 그녀의 머릿속에 결혼은 열정과 정반대의 단어로 정의돼 있다.

    ‘애인’은 ‘비포 선 라이즈’가 보여준 시한부 데이트에 대한 정반대의 극점이라고 할 수 있다. ‘비포 선 라이즈’의 연인들이 변치 않을 추억을 남기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것과 달리 그들은 곧 감금될 육체적 욕망을 조금이라도 더 소진하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싸우고 싸움은 강간과 같은 섹스로 끝맺음된다.

    그런가 하면 갑작스레 입었던 옷을 벗어던지고 쇼핑을 한다. 쇼핑을 하고 나오니 소나기가 내린다. 흠뻑 젖은 옷을 입고 키스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남자와 여자, 그들이 나누는 일탈의 행로는 어디에서 본 듯한 장면과 너무도 닮아 있다. 남자와 여자는 말 그대로 부부가 아닌 애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탈을 감행한다. 결혼이 안정이라면 연애는 일탈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룻밤의 일탈을 마무리하고 산뜻하게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녀가 되돌아간 일상은 바로 예비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약혼녀로서의 삶이다. 하룻밤 안에 급하게 탕진하는 그녀의 욕망에는 결혼이 결코 허용하지 않는 어떤 욕망에 대한 간절함과 아쉬움이 있다.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에는 욕망이 아닌 생식과 안정의 요구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연애’를 꿈꾼 ‘전화방 주부’의 상처

    ‘연애’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그림자는 같은 시기에 개봉했던 ‘연애’라는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연애’의 주인공은 생활고 때문에 음란전화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부다. 빚꾸러기 남편에 빠듯한 살림살이, 그녀는 매일 음란전화를 받지만 사실상 그녀에게 이 전화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손을 바쁘게 놀리면서 입으로 내뱉는 신음에는 욕망 한 줄 실리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신음조차 일의 일부이고 생활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조금 다른 목소리가 전해 온다. 목소리는 그녀를 사람으로 대해주고 그녀의 마음을 들어주는 듯싶다. 어느덧 성큼 그는 여자의 삶 안에 주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드디어 가정주부인 그녀는 그를 만나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전환점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그녀에게도 욕망이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너무도 처참하다. 결혼의 답답함, 일상의 비루함을 벗어던질 화끈한 연애를 꿈꾸며 데이트에 나갔던 여자는 굴욕적인 스리-섬을 요구받는다. 그녀는 그 남자들에게 단지 음란전화로 만난 ‘탈 없는 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탈, 욕망, 자극… 이런 말들을 원했지만 그녀의 일상에서 이 언어들은 낯선 외국어에 불과하다. 일탈에 대한 욕망은 그녀의 일상에 지워지지 않을 뜨거운 상처를 남겨놓는다.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크래쉬’

    어쩌면 우리는 ‘애인’과 같은 일탈을 꿈꾸지만 일탈이 남긴 현실은 ‘연애’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수많은 ‘연애’가 치정극으로 끝나고 마는 것도 아마 현실의 비루함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주장하면서 남편과 애인을 모두 건사하려 하는 깜찍한 모반은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결혼은 열정의 무덤이며 욕망의 종착지다. 사람들은 욕망과 열정을 기반으로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과 계획으로 결정한다.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장미의 전쟁’

    하지만 사람은 끝없이 생성되는 욕망에 의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계약이나 계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삶의 구멍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무덤 곁에 나름의 출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욕망이 숨 쉬고 드나들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애인’이라는 듯이 말이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부부싸움

    그렇다면 결혼은 왜 이토록 지긋지긋한 것으로 환기되는 것일까? 간혹 우리는 왜 곁에 잠들어 있는 그 남자를 죽이고 싶어하고 내 아이를 낳아준 그녀를 혐오하는 것일까? 이혼 영화의 대명사가 된 ‘장미의 전쟁’은 다정했던 부부가 얼마나 서로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낭만적 열애 끝에 결혼한 올리버와 바바라는 남부럽지 않은 부부로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이들 사이에 아들 조쉬, 딸 콜로린도 생기고 호화로운 자동차와 집도 장만한다. 그런데 경제적 물질적 안정을 이루자 사소한 일에서 의견충돌이 잦아진다. 대화는 줄어들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둘 사이에 불신의 틈이 벌어진다. 그러던 중 드디어 바바라가 이혼을 요구하고 집 소유권을 놓고 양보 없는 싸움을 시작한다.

    집 소유권에서 시작된 바바라와 올리버의 싸움은 결국 육탄전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살육전으로 확대된다. 자존심을 건드리고 서로의 약점을 찌르던 말싸움은 결국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게 그저 서로를 죽이고 싶어 안달인 ‘전쟁’이 되고 만다. 자신들이 정성스럽게 고른 샹들리에에 깔려 죽는 결말은 웃기면서도 처참하다.

    한편 ‘미스터 앤 미시스 스미스’는 ‘장미의 전쟁’에서 보여주는 부부 간의 결렬을 훨씬 더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장미의 전쟁’이 블랙 코미디라면 ‘미스터 앤 미시스 스미스’는 부부관계를 비밀 스파이전에 비유한 밝은 코미디에 가깝다. 두 작품은 부부 사이엔 서로 말 못할 비밀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한번 돌아서면 부부 사이의 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안정’에 대한 권태

    실상 많은 부부가 사소한 이유를 시작으로 목숨 건 전쟁을 한다. 증오와 애증, 그런 점에서 여기 이 부부를 주목할 만하다. 서로의 파멸을 향해 천천히 목을 조여 오는 부부, 서로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파괴하고 싶어하는 자들. 들라크루아의 그림 ‘사르다나팔의 죽음’의 사르다나팔 왕처럼 부부는 죽음의 카니발을 주재하며 광기의 정점에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도착적 공생 관계다.

    장이머우의 작품 ‘황후화’는 금빛으로 물든 거대한 파멸의 드라마이자 파괴의 카니발이다. ‘황후화’에 등장하는 왕국은 한창 절정의 시기를 달리고 있다. 태평성대이기에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궁녀와 신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왕국의 하루는 지나간다. 이러한 모습은 셀 수 없이 많은 장신구를 머리에 꽂은 황후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태평성대일수록, 그러니까 바깥이 잠잠할수록 안에 대한 불만은 커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왕과 왕비는 이 태평성대 속에서 서로를 어떻게 없애고 부숴버릴 것인지에 열중한다. 그것도 교묘히 모든 것을 서로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리고 속는 척 연기를 한다.

    남편은 아내, 황후에게 매일 독이 든 약을 조금씩 먹인다. 황후는 독약에 중독돼 조금씩 사지가 마비되며 죽어간다. 한편 황후는 남편인 왕을 없애기 위해 아들을 앞세워 반란을 꾀한다. 황제와 황후의 불편한 관계는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민이던 황제는 황족인 아내를 얻어 지금의 지위를 갖게 된다. 황제와 황후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황제는 버릴 수밖에 없었던 첫 여자에 대한 갈망을 간직한 채 아내를 멸시하면서도 정치적 위험인 옛 여인을 없애려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서로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데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왜’라는 설명 없이 서로에게 살의를 드러내는 황제와 황후, 아니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왕위를 물려줄 나이가 된 그들은 늙은 여우들처럼 서로를 괴롭힌다. 서로의 앞에서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던 증오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폭발한다. 황후는 반란군을 조직했다가 실패한다.

    가장 강력한 내부의 적, 부부

    그런데 황제는 자신을 죽이려 한 황후의 목을 당장 베지 않는다. 그는 다만 늘 그랬듯 하루하루 독약을 받아먹으라고 명령을 내린다. 황제의 목적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후화’에 묘사된 황제는 아들을 죽이고 아내를 독살하는 존재다. 이 비극은 서로를 미워하는 부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메디아가 불륜을 저지른 남편을 징벌하기 위해 아이들을 살해하듯, 황제는 황후를 괴롭히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직접 죽인다. 이 두 부부는 서로를 괴롭히기 위해 서로가 가장 아끼는 자식까지 죽이고 만다. 도대체 부부 간에 쌓인 어떤 비밀이 자식마저 제물로 만드는 것일까? 애증과 분노, 어쩌면 부부야말로 내부의 적일지도 모른다.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황후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쉬’는 자동차 충돌과 같은 격렬한 체험을 통해서만 쾌락을 느낄 수 있는 도착증 환자를 그려내고 있다. 이 이상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짜릿함을 사고나 상처를 통해서만 감각한다. 말하자면 감각의 역치가 너무 높아져 어딘가가 고장 난 셈이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멤버들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더 강한 자극, 더 위험한 사고를 찾아 헤맨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말하는 이 위험 중독에는 우리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행위와 유사한 심리가 있다. 사람들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번지점프를 한다. 안전 바가 있고, 발목에 보호대를 착용했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가 아무리 위협적으로 달려도 그것이 진짜로 목숨을 뺏을 리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안전한 위험을 즐긴다. 번지점프 역시 마찬가지다. 추락의 체험이 주는 공포는 실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마찬가지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우리 몸에 엄청난 충격이 오기 때문에 몸의 메커니즘은 추락에 대한 공포를 주입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은 삶이 안정적일수록 유사 모험, 유사 죽음 체험에 더 열광한다는 사실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안전한 죽음과 같은 문제는 말할 수가 없다. ‘크래쉬’에 등장하는 부부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너무나 안전하고 안정적인 자신들의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 그래서 두 부부는 이 위험천만한 그룹에 끼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부부는 점점 더 위험에 중독돼간다. 처음에는 위험해서 짜릿했던 사고들마저 익숙해진다.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안정이자 안전이다. 안정적 결혼생활, 가정생활에는 변수가 거의 없다. 일상이라는 말이 매일매일의 반복을 포함하고 있다면 안정적 결혼생활의 핵심이야말로 바로 ‘반복’일 테니 말이다. ‘클럽 버터플라이’나 ‘인티머시’ 역시 그 안정을 깨려는 파격적 시도를 보여준다.

    ‘거래’로 다가가는 섹스

    ‘클럽 버터플라이’는 스와핑이라는 극단적 시도로, 그리고 ‘인티머시’는 혼외정사로 자신에게 일탈을 허용한다. ‘인티머시’의 주인공 제이는 어떤 점에서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방을 만드는지 짐작케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 제이는 허름한 아파트를 얻어 수요일마다 정부를 만난다. 말이 정부지, 제이는 그녀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다만 섹스를 할 뿐이다.

    남자들은 결혼한 후 가정, 그러니까 집 안에 자신만의 공간을 두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만의 공간이란 남자들의 욕망이 발효되는 공간일 것이다. 아내도 아이도 없는 그곳, 그곳은 집 안에 있을 수 없다. 무시로 출입이 가능한 방은 이미 ‘그만의 방’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신만의 공간을 집 밖에 따로 만들곤 한다. 남자들만이 출입 가능한 곳, 책임이나 의무 없이 마음껏 방종해도 좋을 곳, 그곳에 욕망을 남겨두는 셈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 중 하나는 일탈이나 자기만의 공간이라는 개념이 사실상 경제적 충만함과 안정 위에서 가능하다는 점이다. ‘크래쉬’나 ‘클럽 버터플라이’나 모두 안정적 생활에 권태를 느끼는 부부에게서 출발했다. 반면 ‘은밀한 유혹’이나 ‘베사메 무초’와 같은 영화 속 상황은 다르다. 경제적 위기가 닥칠 때 섹스는 욕망의 발현이 아니라 거래의 형태로 가정을 침범한다. ‘크래쉬’의 부부들처럼 그들도 공모해서 잠깐의 일탈을 허용하지만, 출발이 다르기에 결론도 확연히 다르다.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姜由楨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종합예술대 강사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3자를 가정에 끌어들이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3자의 욕망에 걸려든다. 영화 ‘은밀한 유혹’의 젊은 부부처럼 거래는 공모된 일탈처럼 시작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신이다. 영화는 공모된 일탈과 합의된 거래를 종종 보여준다.

    그런데 과연 공모된 일탈이라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서로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의 욕망이 교차하는 욕망의 교집합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 알 것 같지만 영원히 알 수 없는 동반관계, 그게 바로 부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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