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안보 라인 어디에도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과 대선 이전부터 호흡을 함께했던 참모들은 ‘야인(野人)’이 되어 떠돈다. 강력한 컨트롤타워가 아니라 외교부 파견 직원쯤으로 취급받는 청와대 안보 부서는 부처 간 정책 조율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낸다. 승승장구하던 참모그룹은 왜 ‘몰락’했을까. ‘초기는 참모, 후기는 관료’라는 외교안보 라인 운용의 공식을 깨고 외교통상부 인사들이 전면에 등용된 배경은 무엇일까. 최근 불거진 외교안보 정책 난맥상은 이러한 인사 흐름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과연 이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 출범 이후 6개월, 이명박 정부 외교안보 중심축을 해부했다.
6월19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쇠고기 협상 파문` 등에 대한 특별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김병국 외교안보수석, 류우익 대통령실장, 김중수 경제수석, 김인종 경호처장(오른쪽부터) 등이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일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다소 감정이 섞인 평이긴 해도, 2008년 9월 현재 대한민국 외교안보 라인은 외교부가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교부 관계자들조차 “우리도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고 토로할 정도다.
더욱이 갓 출범한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에 ‘대통령과 오랫동안 철학을 공유해온 인사’가 눈에 띄지 않는 경우는 그야말로 생경하다. 김영삼 정부 초대 외교안보수석 정종욱, 김대중 정부 초대 외교안보수석 임동원, 노무현 정부 초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이종석 등은 모두 대선 한참 전부터 대통령과 동고동락한 핵심 참모였다. 초반에는 이들 참모들이 중심을 맡아 ‘큰 그림’을 그린 뒤, 수성(守成)이 필요한 후반에는 관료 출신이 포스트를 잇는 것이 그간의 패턴이었다. 그러나 이 공식은 이명박 정부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돌이켜보면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안보분야의 핵심 참모로 불리는 전문가가 적지 않았다. 대선과정은 물론 정권인수 과정에서도 지근거리에 머물며 끊임없이 언론의 하마평에 올랐다. 현인택 고려대 교수, 김우상 연세대 교수, 남성욱 고려대 교수, 남주홍 경기대 교수, 홍규덕 숙명여대 교수,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가 대략 핵심 참모그룹으로 분류되던 인물들이다. 대선 직후, 이들의 연구실은 ‘줄을 대려는’ 안보부처 당국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이들 중 지금 대통령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이 유일하다. 참모그룹의 리더로 통했던 현인택 교수는 유력설(說)만 돌다 현재는 학교로 돌아간 상태다. 통일부 장관에 내정됐다가 재산 문제로 낙마한 남주홍 교수와 홍규덕 교수도 마찬가지다. 김우상 교수는 주(駐) 호주대사, 남성욱 교수는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을 맡으면서 정책 핵심과 멀어졌다.
승승장구하던 이들 참모그룹은 왜 ‘몰락’했을까. ‘초기는 참모, 후기는 관료’라는 외교안보 라인 운용의 공식을 깨고 외교부 인사들이 전면에 등용된 배경은 무엇일까. 최근 불거진 외교안보 정책 난맥상은 이러한 인사 흐름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과연 이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악연이라는 인연
2월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발표된 외교안보 라인 인사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현인택의 낙마와 김병국 고려대 교수의 외교안보수석 발탁이었다. 특히 김 수석의 경우 이전에 대선캠프 인사로 거명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반면 외교안보수석으로 유력시됐던 현 교수가 끝내 배제된 데에는 대선캠프에서부터 시작된 ‘악연’이 작용했다는 게 캠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인사들의 설명이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명박 대통령의 안보분야 참모로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이는 김우상 교수와 김태효 교수였다. 이들은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 중이던 2004년부터 안보분야 ‘과외교사’를 맡았고, 특히 김우상 교수는 2006년 대선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후보 싱크탱크인 바른정책연구원(BPI) 내 안보분야 좌장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 “김우상 교수에 대한 MB의 신임이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한 캠프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나라당 경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안보 이슈를 선점해나갔지만, 김우상 팀에서는 그에 대응할 뚜렷한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했다. 김 교수의 평소 지론인 ‘매력국가론’ 등이 후보의 눈에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비친 것 같았다. 캠프의 정치인 참모들도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그 해 연말 후보가 또 다른 싱크탱크였던 국제전략연구원(GSI) 원장 류우익 교수에게 새로운 참모진을 꾸려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현인택 팀이었다.”
류 교수가 직접 접촉해 캠프에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진 현 교수는 학교 후배이던 홍규덕 교수를 합류시켰고, 김우상 교수와 가까웠던 김태효 교수도 GSI로 넘어와 이 팀에 합류했다. 남주홍 교수와 남성욱 교수도 GSI에 소속돼 있었지만, ‘현인택 팀’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 이들 GSI 안보분야 참모그룹은 이른바 ‘7대 독트린’과 ‘비핵·개방·3000’ 구상을 내놓으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사단은 여기서 벌어졌다. 또 다른 캠프 관계자의 말이다.
“2007년 2월경 류우익 교수가 경선 자문단장에 임명됐다. 류 교수는 현 교수 팀을 포함해 외교안보 그룹도 자신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간 준비한 정책자료 등을 제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현 교수 입장에서는 지리학자 출신인 류 교수가 안보정책 준비에 관여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고, 자료 제출을 거절하며 옥신각신했다. 여기에 TV토론 준비과정에서 두 사람이 의견 대립을 보이면서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대운하의 화신’이었던 류우익 교수는 곧 캠프의 실질적인 리더로 올라섰고, 일찌감치 대통령실장에 안착했다. 현인택 교수의 입각 혹은 청와대 입성에 류 교수가 반대했다는 것이 캠프에 관여했던 인사들의 분석이다. 최소한 현 교수 측 인사들의 시각은 그렇다. 훗날 사석에서 현 교수는 “내가 그 사람이 대통령실장 될 줄 알았나…”라고 말했다는 후문이다.
“‘제2의 이종석’이 나타났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대선 막바지에 현인택 교수팀이 몇 차례 사소한 실수를 저질러 당선자의 신임을 잃었다거나 현 교수의 깔끔한 학자형 캐릭터가 실무능력을 중시하는 MB의 인선 원칙과 잘 맞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대선이 한창이던 2007년 10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안보분야 자문그룹인 남성욱, 현인택, 김우상 교수(오른쪽부터)와 함께 남북정상회담과 북핵6자회담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당초 김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과 거의 인연이 없었다. 외교안보수석 임명을 전후해 김 교수가 동아시아연구원(EAI) 소장을 맡아왔다는 사실을 MB 대선준비 조직이었던 동아시아연구원과 혼동하는 보도가 나왔지만, 사실 두 연구소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관계가 없다. 이렇듯 생면부지였던 김 교수를 ‘미국통’을 기다리던 당선자에게 천거한 이는 홍석현 전 주미대사와 하영선 서울대 교수였다는 게 정설이다. 여기에 류우익 교수가 김 교수의 손을 들어주었고, 당선자가 직접 수차례 김 교수를 만나 ‘면접’을 봤다.
특히 당선자는 김 교수의 강한 캐릭터에 끌리는 눈치였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전의 다른 전문가 그룹 멤버들과는 달리 저돌적이고 때론 독하기까지 한 ‘완벽주의자’ 근성이 코드에 맞았다는 것이다. 한 캠프 관계자의 말이다.
“대통령에게는 병이 하나 있다. ‘새 사람 병’이다. 다른 사람을 쓰면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끊임없이 사람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 좋게 보면 장점이지만, 끊임없이 측근을 갈아치우기 때문에 ‘충성파’를 만들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단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새 정부 첫 안보 컨트롤타워를 차지한 김 수석은, 예상처럼 강한 캐릭터를 보여주며 일부 청와대 직원들 사이에서 ‘악명’을 쌓았다. “행정관을 학생 다루듯 꾸짖는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제2의 이종석’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배경이나 경력이 극과 극인 두 사람이 너무나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이나 정권인수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김 수석은 ‘준비되지 않은 참모’였다. 대통령의 선거 당시 구상이나 정책 등에 대해 이해가 깊을 수 없었다. ‘어젠다의 단절’이었다. 실무에서도 한미정상회담 준비 등 미국 인맥을 활용하는 업무에서는 두각을 보였지만, 다른 주요 현안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장악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현안 보고서를 수석실에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은 안보분야 국책연구기관에서 “그 자리가 공부하는 자리가 아닐 텐데…”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 기회를 노린다?
김 전 수석의 깜짝 발탁으로 인선에서 밀려난 대선 참모들을 ‘위로’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구체화된 것이 이 무렵, 지난 3월경이었다. 현인택 교수 등을 각국 대사로 임명하자는 안이었다. 일견 ‘고생한 참모 챙겨주기’ 성격이 강했지만 일각에서는 ‘대선 참모들이 대통령 주변에 남아있는 게 반갑지 않은 안보 라인 인사들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마침 현직 대사의 교체 시기가 다가오는 자리가 물망에 올랐고, 현인택 교수가 영국, 김우상 교수가 호주, 홍규덕 교수가 태국 대사에 거론됐다.
그러나 3월 말부터 진행된 의사타진 과정에서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현 교수가 영국대사 제의를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외교관들끼리는 주미대사보다 낫다고도 하는 영국대사를 거절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현 교수 주변에서는 “외교안보수석 등 본인의 뜻을 정책 중심에 반영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새어나왔다.
한편 애초부터 하마평에서 반 발짝 떨어져 있던 김우상 교수는 호주대사직을 수락했지만, 홍규덕 교수의 태국대사 임명은 또 다른 암초에 부딪혔다. 외교부 관계자들의 강한 반대였다.
내부적으로 상당한 수위에 이르렀던 외교부 측의 반발에 대해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참모그룹에서는 직업 외교관들의 ‘밥그릇 지키기’로 보는 관점이 강하다. 30년 가까이 일해야 대사직을 생각할 수 있는 외교관들이, 정치권 인사는 물론 50대 초반의 젊은 대선 참모진까지 대사직을 차지하는 것에 반발했다는 시각이다. 반면 외교부 관계자들은 손사래를 친다. 북한의 대외활동 창구이자 탈북자 문제가 적잖게 발생하는 태국은 직업 외교관 가운데서도 경력이 많은 대사들이 주로 임명되는 민감한 자리라는 이야기다.
결국 청와대 안보 라인이 외교부 손을 들어주면서 홍규덕 교수의 태국행은 없던 일이 됐고, 5월 초 김우상 교수가 호주대사 임명장을 받으면서 외교안보 라인 인사나 참모그룹 정리 문제는 일단락된 듯했다. 청와대 안보부서 역시 본격적인 ‘현안 학습’에 착수하며 궤도에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고’가 터졌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이었다.
“I´ll be back”
김우상 교수가 호주대사 임명장을 받았던 5월2일, 광화문에서 첫 번째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어지는 시위정국은 청와대 전체를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로 몰아넣었다. 외교통상부를 담당하는 외교안보수석실의 책임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사실 쇠고기 파동의 책임을 김병국 전 수석에게 묻기는 어렵다는 게 청와대 내부의 시각이다. 협상이 완료된 4월18일이 정부 출범 두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음을 감안하면, 대선캠프나 인수위에 참여한 적 없는 김 전 수석이 사안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김 전 수석이 능력 있다 없다를 평가하기에도 짧은 시간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준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외교분야 책임을 맡긴 인사(人事) 자체를 탓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청와대 주변에서는 김 수석의 낙마를 류우익 실장의 사퇴와 연결해 해석한다. 그의 최종 낙점으로 자리에 오른 김 수석이 ‘류우익의 남자’로 분류되면서, 6월 초반 여권 내부에서 벌어진 이른바 ‘정두언 파동’의 타깃으로 거론됐다는 것이다. 후견자였던 류 전 실장의 사임이 확정되면서 김 전 수석이 자리에 남아 있기는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결국 쇠고기 파동과 임명 초기부터 논란이 됐던 재산문제를 ‘공식 사유’로 김병국 수석의 사퇴가 확정된 것이 6월 초순의 일이다. 김 수석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온 전문가 그룹의 행정관급 참모들도 줄줄이 사표를 썼다. 흥미로운 것은 김 전 수석이 작별인사를 하면서 청와대 직원들에게 했다는 말이다. “I´ll be back”,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6월 중순 수석비서관들의 사표가 정식으로 수리되기 전까지 청와대는 2기 보좌진을 구성하는 문제로 분주했다. 외교안보수석을 놓고도 많은 논의가 오갔다. 당연히 시선은 영국대사직을 거절하면서까지 서울에 남은 현인택 교수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재산이 문제가 됐던 김 전 수석의 후임으로 임명하기에는 현 교수의 재산도 만만치 않았고, ‘고소영 인사’라는 비난을 피하자니 고려대를 나와 현직 고려대 교수인 그의 이력도 걸림돌이 됐다.
7월31일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상희 국방부 장관, 조중표 국무총리실장,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김성호 국정원장, 김하중 통일부 장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다.
분명한 것은 2기 보좌진을 인선하던 당시 청와대 분위기가 매우 수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정권의 존망을 걱정하는 순간이다 보니 더 이상 ‘사고’가 터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둬야 했다는 것. 그 때문에 학계 전문가보다는 관료 그룹에 손이 먼저 갈 수밖에 없었다는 후문이다.
문제는 관료그룹의 인재풀이 생각처럼 넉넉지 않다는 점이었다. 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따져보면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국정원이 전부다. 그러나 안보수석에 군이나 정보기관 출신 인사를 발탁할 수 있겠나. 또 통일부는 당선 직후 존폐 논란이 있을 정도로 ‘맛이 간’ 상태였고, 중량급 인사는 모두 노무현 정부 대북 유화 정책의 최전선에서 뛰었다. 결국 남은 것은 외교부뿐 아닌가. 외교부 인사들의 개인적 능력이 뛰어나서 이처럼 대규모로 등용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김성환 당시 외교통상부 2차관은 이 무렵 청와대가 처한 조건에 두루 적합했다. 7억원 안팎의 적은 재산은 ‘보좌진 전체 평균’을 고려해야 하는 청와대가 가장 반긴 대목이었다. 북미국에서 경력을 쌓은 점도 미국 중심이라는 정책 기조와 맞아떨어졌다. 신사로 통하는 온화한 인품, 무리하지 않는 꼼꼼한 캐릭터 역시 관리형 보좌진으로서는 더없는 자격이었다.
관료의 한계, 컨트롤의 부재
그러나 ‘외교부는 물론 다른 부처에서도 적(敵)을 찾을 수 없다는’ 그의 성품은 이후 2기 안보 라인의 ‘컨트롤 부재’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대통령을 대리해 안보부처를 통할하고 필요에 따라 거침없이 칼을 휘둘러야 하는 자리의 특성과 맞지 않다는 것. 외무고시 10회인 김 수석이 선배인 유명환·김하중 장관(7회)을 ‘컨트롤’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최근 안보부처들이 보여주는 난맥상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관리에 능한 것이 관료의 강점이라고는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이 꼽는 대표적인 사례는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보고지연 사건이다. 당시 김성환 수석과 정정길 대통령실장이 위기정보상황팀으로부터 사건 발생을 보고받고도 두 시간 가까이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을 두고,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해외 인명사고를 자주 겪는 외교관 출신이다 보니 상황을 ‘일상사고’ 정도로 본 듯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북한이라는 민감성과 사망사고가 갖는 충격에 대한 ‘감각’이 오히려 무뎌진 때문 아니냐는 것이다.
안보부처 간 조율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도 심각하다. 그중 가장 덜 알려진 것이 한·러 군사기술협력사업(이른바 ‘불곰사업’)과 관련한 국방부와 외교부의 마찰이다. 대(對)러 경협차관 미상환금을 군사장비로 돌려받는 이 사업과 관련해, 양국은 2007년 말 양해각서에 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올해 들어 국방부가 2006년 제시했던 목록을 변경해 러시아 측에 새로운 장비를 요구하고 나섬에 따라 한·러 외교당국 사이에는 격한 마찰이 불거졌다.
6월 이후 본격화된 내부 조율과정에서 외교부는 “외교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며 2006년 목록을 유지하자고 주장했지만, 국방부의 입장은 흔들림이 없다. 외교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국방부가 군사적 이유만을 들어 고집을 부리면 전체 국익 차원에서 이를 통제하는 몫은 당연히 청와대가 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외교부 출신이 안보 라인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국방부 수뇌부가 청와대 수석실을 외교부 파견직원쯤으로 생각해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떠도는 ‘국가안보전략’
조율의 부재는 보다 상위의 범주에서도 나타난다. 안보부처를 아우르는 큰 틀의 정책기조를 설정하는 작업, 이른바 ‘국가안보전략’을 구체화하는 일이 공중에 떠 있다.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등이 발표하는 안보전략 혹은 안보 독트린은 주변 안보상황을 둘러보고 정부가 어떤 비전과 방식으로 이를 헤쳐나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미국의 경우 1986년부터 새 정부가 들어서면 의회에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을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노무현 정부가 2004년 3월 ‘평화번영과 국가안보’라는 안보정책 책자를 발간한 적이 있다. 취임 첫해인 2003년 여름부터 시작된 작성작업은 청와대 NSC 사무처가 시종(始終)을 모두 책임졌다. 그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렸지만, 최소한 이 문서가 당시 청와대의 안보관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후 국방개혁2020이나 평화체제 구축 등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핵심 이슈가 모두 여기 기술된 기조에 따라 진행됐다.
최근 이명박 정부도 국가안보전략의 필요성을 인식해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는 이를 대통령과 안보정책을 공유하는 핵심참모가 책임지고 작성하는 게 아니라, 각 안보부처나 관련분야 파견 직원이 먼저 초안을 만들고 청와대가 검토하는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과연 ‘이명박 정부의 안보정책’을 담을 수 있을지 벌써부터 의구심이 제기된다. 한 캠프 관계자는 “결국 부처별로 기존에 밝혀온 자기 입장을 두루뭉술하게 쓸 것”이라고 평했다.
‘상위 전략의 모호함’은 주요 현안의 집중력 있는 추진에도 한계로 작용한다. 특히 각 부처의 이해관계와 맞서야 하는 현안에서는 청와대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필수적이다. 국방개혁이나 국가정보원 혁신 등 ‘밥그릇’이 걸려있는 문제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이래 외교안보수석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이 같은 이슈는 사실상 잠들어 있거나 도리어 청와대 다른 파트에서 먼저 제기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국방개혁 관련 논의를 기획조정비서관실에서 챙기기 시작했다는 최근 소식이 그 한 사례다.
대신 그간 청와대 안보 라인이 역량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온 부분은 말 그대로 ‘외교적 접근’에 해당한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5월 이명박 대통령의 중국 쓰촨성 방문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를 통해 한중 지도부 사이의 앙금이 일정부분 해소되는 성과는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안보 정책이 ‘미국 중심’으로 비치면서 생긴 근원적인 마찰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다. 국내의 한 손꼽히는 중국 전문가는 “전략의 문제를 행사나 의전 등 스킨십으로 풀어보려는 외교관 특유의 기질이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현재의 외교안보수석실 체제가 부처 간 조율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지적도 있다. 외교안보수석실에는 국방, 외교, 통일, 대외전략비서관실이 있다. 안보부처별로 비서관실을 두고 해당부처 인사를 비서관으로 임명하는 김대중 정부까지의 편제가 반영된 것이다.
반면 각 비서관실 행정관의 경우 원래 소속부처와 관계없이 각 비서관실에 흩어져 배속돼 있다. 이를테면 국방부 파견 행정관이 외교비서관실에서 일하는 식이다. 이러한 행정관 배치는 노무현 정부의 NSC 혹은 안보실의 인사 패턴이다. 편제와 행정관 배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교비서관실에서 일하는 국방부 출신 행정관은 외교부 파견직원에 비해 업무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비효율이 나타난다.
편제가 이렇다 보니 각 비서관실은 해당부처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한 안보부처 정책담당자는 “청와대 비서관이 출신부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육사33기인 이홍기 국방비서관이 까마득한 선배인 이상희 국방장관(육사26기)을 압박하는 모양새는 상상하기 어렵다.
외교안보수석의 직급이 이전 정부와 달리 차관급이라는 점도 문제다. 중요 현안이 발생해도 외교안보수석은 대통령실장을 거쳐야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다. 지리학자였던 류우익 전 실장이나 행정학자 출신인 정정길 현 실장 모두 현안의 긴급성을 파악하고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청와대 안보 라인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금강산 피격사건 보고지연의 한 원인으로 지적하는 대목이다.
리베로 비서관
결국 ‘조율 미비, 컨트롤 부재’로 압축되는 문제점은 안보부처 각각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청와대 관련부서의 구조와 인선이 중첩되면서 발생한 결과로 요약된다. 대통령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핵심 참모들이 상황을 틀어쥐는 대신 외교부 출신의 전문 관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 인사(人事)가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반론의 여지는 있다. 이 대통령의 캠프 참모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태효 대외전략비서관이 그 근거다. 대외전략비서관실의 경우 다른 비서관실과 달리 담당부처가 따로 없는 ‘리베로’다. 부처를 아우르는 전략 제시가 공식적으로 그에게 맡겨진 임무다.
그러나 김 비서관이 안보부처를 통할하고 적극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1967년생으로 갓 마흔을 넘긴 나이나 ‘외교안보의 전략적 큰 틀’을 논하기에는 짧아 보이는 경력도 한계로 볼 수 있다. 1급 행정관에 불과한 그의 신분도 문제다. 외교안보 라인이 대부분 ‘노장’에 가까운 인물로 채워진 것 역시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현인택 팀’의 막내이던 그가 유일하게 청와대에 남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말이 떠돈다. 대표적인 게 “MB와의 ‘사적인 인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시각이다. 김 비서관 부친과 이 대통령이 예전부터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거나, 김 비서관의 장인인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과 이 대통령의 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등의 뒷이야기다.
그러나 김 비서관과 가까운 인사들은 이러한 ‘설(說)’에 고개를 가로 젓는다. 김 비서관이 안보분야 대선참모 가운데 대통령과의 인연이 가장 오래됐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나오는 억측이라는 것이다. ‘누가 먼저 VIP와 인연을 맺었는가’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권력지형의 생리를 감안하면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다만 김 비서관과 이 대통령의 ‘첫 만남’에 이러저러한 개인적인 인연이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정작 김 비서관이 이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선 과정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참모그룹 논의 내용을 취합해 보고서로 작성했던 그의 정리 능력에 후보가 만족감을 표시하면서 ‘복심(腹心)’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생존법에 대한 정치적 감각도 한몫한 듯하다. 캠프에 관여했던 한 인사의 설명이다.
“원래 선거캠프의 분위기가 그렇지만, 이명박 캠프는 특히 후보의 눈에 드는 게 중요했다. 누군가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다른 사람이 후보에게 자기 생각인 것처럼 보고하는 일이 심심찮았다. 김태효 교수는 쓸 만한 아이디어가 있으면 꼭 후보가 있는 자리에서만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아이디어 도용을 경계한 셈이다. 그걸 보고 ‘젊은 사람이 만만치 않구나’ 생각했다.”
외교안보 라인 내 유일한 대선 참모인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정작 김 비서관은 부담스럽다고 주변에 하소연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인이 엄청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시각은 오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낮은 자세는 곳곳에서 보이는 흔적에 비추어보면 사실과 다르다. 대표적인 경우가 최근 언론에 공개된 작전계획5029 관련 준비다. 2005년 중단된 북한급변 대비 작전계획 추진이 오는 10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전략지침의 형태로 재논의된다는 것이 그 골자. 바로 이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김 비서관이라는 전언이다.
곽승준이 돌아오듯?
여기까지 놓고 정리해보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6개월간 외교안보 라인이 드러낸 문제점의 상당 부분은 그 원인의 뿌리가 대선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게 명확해진다. 핵심 참모진 사이에 주도권을 둘러싸고 형성된 불편한 관계가 인선의 걸림돌로 작용했고, 이 때문에 컨트롤타워의 힘이 빠지면서 부처 간 정책조율이 난관에 봉착하는 결과가 나타났다는 분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안보 라인 분위기에 모두 정통한 인사들은 “공동체 의식의 수준이 다르다”고 말한다. 노무현 청와대가 위기의식으로 똘똘 뭉친 일종의 ‘동아리’였다면 이명박 청와대는 대통령을 대신해 총을 맞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모들의 배제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강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동고동락하며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이들 대신 관료와 새로 영입된 외부인사들로 외교안보 진영이 꾸려지면서 공동체 의식은 더욱 엷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문제는 안보분야뿐 아니라 청와대 전체에 걸쳐 마찬가지다. 어디에도 대통령의 참모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7월 인사에서 물러났던 참모그룹이 속속 복귀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 대통령직속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돼 있다는 곽승준 전 국정기획수석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일각에서는 외교안보 진영에서도 같은 그림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전망한다. 안보 관련 위원회를 신설해 전략적 비전 등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담당하고, 현재의 안보 라인은 상황관리에 주력하게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외교안보 분야의 난맥상도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지 않겠느냐는 것. 이 경우 당연히 위원회는 이 대통령의 대선 참모나 1기 청와대 안보 라인 인사가 맡게 되리라는 것이다. 주로 대선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인사들 사이에서 나오는 일종의 ‘기대 섞인 전망’이다. 청와대를 떠나며 김병국 전 수석이 남겼다는 “I´ll be back”이라는 인사말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MB는 관심이 없다”
반면 외부 전문가들의 평가는 비관적이다. 경제는 대통령 본인의 중점 사안이므로 ‘옥상옥’이라도 필요하겠지만, 안보 분야에 조예가 없는 대통령이 그런 무리수를 두겠느냐는 것. 오히려 임기 말까지 지금처럼 상황 관리와 사고방지 정도로 외교안보 라인의 활동 폭을 묶어두려 할 공산이 크다는 목소리가 더 높다.
특히 몇몇 외부 전문가는 변화가 있다면 현재 구도에서 권력 지형도가 조금씩 달라질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태효 비서관이 대통령의 신임을 배경으로 좀 더 적극적인 역할, 이를테면 ‘제대로 된 리베로’를 맡는 그림이 오히려 현실성 있다는 것. 노무현 정부 외교안보 라인에 깊이 관여했던 한 인사는 “이종석 전 장관 같은 역할은 어렵다 해도, 임기 말까지 대통령 곁에 남아 안보정책의 ‘색깔’을 지켰던 박선원 전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위원회 신설을 통한 옥상옥 컨트롤이든, 새로운 외교안보 라인 인선이든, 관건은 대통령의 지지도라는 데 청와대 안팎의 관계자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대통령이 더욱 공격적인 방식으로 외교안보 정책에 변화를 주기로 결심하려면, 가을 이후 연말까지 지지율이 충분히 반등해 자신감을 회복하는 게 선결조건이라는 것이다.
특히 청와대 관계자들은 “지나치게 수세적이었던 7월 인사를 털고 흐름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데 한 목소리를 냈다. 마침 9월8일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현 내각은 누더기”라며 “연말까지 내각, 청와대, 정부 등 여권 전체의 인재를 재배치해야 한다”고 공개 발언했다. 공교로운 일이다.